일 시: 2012년 4월 27일
경유지: 안동댐 - 영가대교 - 안동대교 - 옥수교 - 배고개 - 검암1리 노인정 - 풍산대교(중앙고속도로) - 단호교 -
마애석불 - 자전거쉼터(하회마을 입구) - 광덕교 - 구담교 (35.2km)
1 . 정신문화의 요람
지난 10월 팔당댐에서 시작한 국토대행진이 문경새재를 넘어 한강과 새재 길을 완주하고 낙동강이 시작되는 안동댐을 찾아오니 감회가 새롭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실감나게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더니 구간을 거듭하면서, 의지와 보람으로 ⌜백두대간 종주⌟이후 또 하나의 목표가 현실화되면서 삶의 의욕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낙동강은 태백시를 둘러싼 태백산, 함백산, 백병산, 매봉산의 줄기를 타고 땅 속으로 스며들었던 물이 태백시 황지연못에서 발원하여 부산 을숙도에서 남해로 유입되는 525km의 강이다. 수자원공사에서 국토대행진 코스를 강 상류의 댐으로 설정한 관계로 낙동강은 안동댐 월영교가 있는 물 문화관 앞에서 시작된다.
정신문화의 요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옛 전통을 지키고 있는 안동에는 명소가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안동댐상류에 있는 陶山書院을 지나칠 수가 없다. 해동주자로 일컬어지는 한국최고의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당을 지어 유생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정진하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뒤,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다.
또한 개인적인 일이지만, 안동시 녹전면 죽산리 선영에는 중 시조이신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님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고려의 명장이신 할아버님은 16세에 散員(산원)으로 출사하시어 監察御使를 거쳐 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시고, 刑部尙書, 樞密院副使,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대원수로, 여원 연합군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이 되셨고, 문무를 겸비한 재상으로 萬人之上 一人地下의 上洛郡開國公으로 壁上三韓三重大匡에 이르셨다.
안동댐은 경북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중가구리(中佳邱里)에 있는 다목적댐으로 높이 83m, 길이 612m이며 총저수량이 약 12억 5천만 톤이고 유역면적이 1,584㎢에 이르는 낙동강 본류를 가로막은 사력(砂礫)댐이다. 낙동강 수계에 처음 등장한 이 댐은 하류지역의 연례적인 홍수 피해를 줄이고 농, 공업용수 및 생활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1971년 4월 착공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특히 댐 주변으로 민속마을과 민속박물관, 공예문화전시관, 월영교, 안동문화 관광단지, KBS드라마 촬영장등을 조성하고 있어, 개발이 완료되면 안동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 40분 만에 도착한 시외버스터미널은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있어 이용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택시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경북도청이 이전해올 것을 대비하여 외곽지역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만 삼천 원을 지불하고 도착한 안동댐은 지난 2월 아내와 다녀간 곳이라 낯설지가 않다. 물 문화회관에서 국토종주 인증수첩을 구입하여 부산의 을숙도를 향해 387km의 대장정에 오른다.
보조댐과 법흥교를 지나면 곧바로 안동 시내로 들어선다. 인구17만의 안동시는 양반의 도시, 정신문화의 도시로 알려진 곳이라, 특별히 생산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전이라는 말부터 거리가 먼, 관광의 고장, 선비의 고장이다. 고수부지에 펼쳐지는 강변공원은 쾌적한 안동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4대강 살리기의 수혜지구라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도로는 안동댐과 임하댐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강어귀의 앉은뱅이 다리를 건너 귀래정과 영호루를 지나도록 인도하고 있다. 하지만 시내 쪽 고수부지로 진행해도 별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북 문화재17호인 귀래정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둘째아들 이굉이 지은 정자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동의 정자 가운데 귀래정과 임청각, 군자정, 옥연정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한다. 영호대교가 끝나는 강기슭에 있는 영호루는 영남3대 누각의 하나로 현판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졌다.
또한 안동지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태사묘는 안동시 북문동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 3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930년 태조가 안동에서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세운 공로로, 권행과 장정필은 대상(大相)이란 벼슬을, 김선평은 대광(大匡)이란 벼슬을 받으며 3태사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세 사람은 피로 맺은 형제로서 후손들에게 이르기를, 서로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낙동철교를 지나 안동대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안동병원이 있는 곳으로 다리를 건너는 것이 정석이지만, 초행길에다 깔끔하게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따라 옥수교까지 내려서는 바람에 많은 시간이 지체된다. 옥수교를 건너면 안동시시설관리공단을 비롯하여 건축자재공장들이 밀집되어 진행하기에 어려운 곳이다. 안동병원 쪽으로 1km쯤 역주행하면, 배 고개를 넘는 자전거우회도로와 만난다.
지체된 시간을 보충하기위해 서두르다보니, 가파른 경사는 아니라도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검암1리 노인정과 개곡 보건진료소를 지나 강변 쪽으로 방향을 잡아 검암교를 건너 옥수교에서 ∩자 형태로 흘러온 강물과 다시 만난다. 중앙고속도로가 지나는 풍산대교 밑을 지나 삼거리에서 풍산읍과 단호면 쪽으로 단호재 오르는 5번 국도를 따르면 낙암정이 있는 전망대에 올라선다.
경상북도 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落巖亭은 조선전기의 문신인 배환이 지은 정자이다. 건지산을 배경으로 낙동강변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낙암정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옥수교를 지나온 낙동강이 벼랑 밑을 휘돌아 풍산쪽으로 빠져 나가며 넓은 평야를 펼쳐낸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배상지의 차남으로 태어나 1401년(태종1)중광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사, 병조좌랑을 거쳐 정랑에 오른 인물이다.
낙동강 생태학습관을 지나 단호리 상단지마을에서 활등처럼 휘어진 제방위로 자전거길이 연결된다.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 오미봉 표지석이 있다. 설명에 의하면, 건지산의 한 자락이 하단지 강변으로 내려와 둥실한 봉우리를 만들었으니, 그 모습이 강에서 땅으로 기어오르는 자라와 같다고 하여 오미봉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자라(鼇)와 꼬리(尾)를 합하여 오미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단호대교를 건너면, 정면으로 수 백 년 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17호 마애동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진 곳이다. 이 불상은 오랫동안 외부에 노출되어 얼굴 부분의 훼손이 심한 것이 흠이다. 통일신라 말에 유행한 석조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마애유원지가 시작되는 강 언덕에 노송이 어우러진 그늘 속으로 山水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산수정은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낸 호봉(壺峰) 이돈(李燉:1568∼1624)이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610년(광해군 2) 경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나지막한 평지에 자리 잡은 산수정은 마을 앞 낙동강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강 건너 적벽삼봉(赤壁三峰)을 마주하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선사유적지전시관이 있는 매요리는 山水를 겸비한 地勢에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 앞으로 門前沃畓이 펼쳐지니, 저절로 마음이 끌리는 살아보고 싶은 고장이다. 풍산평야를 보듬어 안고 있는 길이 3.7km의 중리제방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풍요로운 풍산평야와 평산 뜰이 있기에 도청까지 이전하는 장밋빛 청사진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안동이 자랑하는 문화유산 하회마을이 지척으로 다가온다. 낙동강이 화산의 벼랑을 만나 병산서원 쪽으로 돌아가고, 자전거 길은 우회로를 따라 하회마을 입구에서 삼거리를 지나 풍천면 소재지로 들어선다.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된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집성촌을 이루는 마을로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며 ‘S‚형으로 흐르고 있어 하회(河回)라는 지명을 얻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3개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기암절벽의 부용대, 백사장과 만송정소나무 숲길이 장관을 이룬다. 조선전기의 전통가옥과 하회별신굿을 보존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인근에 있는 병산서원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 5)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鄭經世)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폐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이 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는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30여 km를 걸어오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서산너머로 내려앉고, 하루저녁 숙식할 자리를 찾아보지만 변변한 음식점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하회마을 입구나 풍천면소재지에서 미련을 가져보지만 모두들 고개를 흔들며, 6km거리에 있는 구담리까지 가야한다는 대답이다. 그렇게도 흔하던 서울근교의 모텔들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곳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기대를 한 것이 큰 화근을 만나고 말았다.
땅거미가 지는 풍천 땅에서 급해지는 것은 마음이요 따라주지 않는 것이 몸이다. 국토대행진 12번째 구간을 지나오는 동안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물집 잡힌 발바닥의 통증보다도 숙소정하는 것이 급선무라. 산 모랑이 돌아가며 갖는 희망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구담리. 어둠속으로 불빛이 아른거리는 구담리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다. 살았다는 희망으로 달려간 구담리는 한집건너 다방이 진을 치고, 노래방과 단란주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환락의 시골마을이다.
구세주처럼 반겨주는 모텔을 들어서니 빈방 없다는 표지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주인을 찾아 통사정을 해보지만 막무가내다. 일망의 희망을 안고 다음 집을 찾아가지만 역시나 마찬 가지라. 사정을 들어보니 티켓 다방에서 빈 방을 매점하여 긴 잠자는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개뿐인 모텔에서 퇴짜를 맞고 보니 눈앞이 캄캄하다. 15km가 넘는 풍산으로 나가야 한다는 대답인데, 그렇다고 버스나 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풍산에 있는 대절 택시를 불러와야한다니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딱한 사정이 안쓰럽던지, 지금은 휴업중이라는 경북장 여인숙을 알려준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불을 가리겠는가? 물어물어 찾아간 여인숙은 불도 켜지 않고, 어둠속에 잠겨있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통 사정을 한 끝에 들어선 빈방은 냉천한골이라, 사람의 덕을 보자고 덤벼든다.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짐부터 풀어놓고, 식당으로 달려가 주린 배를 채우고 보니 백리 길을 걸어온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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