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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낙동강 천리 길 . 4

 

일   시: 2012년 4월 24일

경유지: 상주터미널( 택시로 이동 20,000원) - 낙단교( 낙정마을) - 월림제방 - 연산진 - 도방나루 - 월곡진나루 -

          신풍진 나루 - 도개제방 - 일선교 -  용산진 나루 - 낙산제 -  구미보 - 송암교 - 금호제 - 숭선대교 -

          해평면 소재지   ( 구간 거리 30km)

 

                                                                           4. 구미 보

새벽안개가 고속도로위로 내려앉으며 차량들이 거북이운행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지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안개까지 한몫을 거들고 나서니 오늘의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노련한 기사덕분에 정시에 도착해 다행이다 싶었는데, 28km나 떨어진 낙동면으로 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이 또한 고민거리다. 서울에서 상주 오는 요금보다도 비싼 교통비를 지불하며 낙단대교를 건넌다.

 

낙단대교를 뒤로하고 月林堤防(길이3645m)으로 올라서면 구미시 지경으로 들어선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옥성면이요, 동쪽은 도계면이라. 구미시에서 북쪽으로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이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것이 마을이요 마을이 모여 도시를 형성하니,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촌락이 형성되어, 해평면 낙산리와 황상동의 고분유적을 살펴보면 가야시대에 이미 크게 번창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시대부터 일선군으로 부르다가 조선 태종13년 처음으로 선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1978년 전자산업단지가 개발되며 구미시로 승격되어, 1995년 선산군과 통합하여 구미시로 개칭되었다. 구미시는 대한민국 최대의 내륙 산업단지(740만평)를 보유하고 있는 공업도시로 서울에서 277km, 부산에서 167km거리에 인구42만 명이 살고 있는 서울보다 조금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의성지구 가산제 고수부지 공원을 지나면, 낙동강 하구둑 282km, 안동댐 103km 이정표가 반겨준다. 도로 바닥에는 구미보 인증센터 19km가 선명하여 오늘의 일정이 만만치 않음을 암시한다. 잠시 후 용산리와 가산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반듯반듯하게 구획정리가 된 전답이 열병하는 군인들처럼 질서정연하고, 우리 몸의 혈관처럼 수로가 연결되어 필요할 때 마다 낙동강 물을 이용할 수 있으니 문전옥답이 따로 없다.

 

강 건너 농소리에는 천연기념물225호로 지정된 농소야 은행나무가 있다.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높이가 30m에 밑 둥에 나무줄기처럼 자란 싹이 많아 둘레를 측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골골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고 있는 당산나무들이 있어 마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가 있고, 마을의 무사안녕을 비는 당산제로 마을의 축제가 열리는 구심점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이 많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용문사 은행나무로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67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벼슬을 하사받은 나무로는 천연기념물103호로 지정된 속리산의 정이품소나무가 있다.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에 가슴높이 둘레가 4.77m에 이른다. 이밖에 재산을 가지고 있는 나무로는 예천지방의 석송령(石松靈)을 들 수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洪水)가 났을 때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주민들이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1927년 8월경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란 사람이 영험(靈驗)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 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 토지 5,259㎡를 상속(相續)해 주어, 수목(樹木)으로서 토지를 가진 부자(富者)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재산을 가지고 세금(稅金)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5년에는 새마을사업을 잘한다고 하여 대통령(大統領)이 준 500만원으로 이 나무의 이름으로 장학회를 만들어 고향의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는 미담이 있다.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시인묵객들의 풍류가 어우러진 도개면 월골에 있는 월암정은 사육신의 하위지(河緯地), 생육신의 이맹전(李孟專), 명종 때의 문신 김주(金澍)의 위패를 모셨던 월암서원이다. 1694년(숙종 20)에 사액서원이 되었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월암정만 남아 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을 비석의 뒷면에 새긴 月巖書院 標識石을 뒤로하고 도개제로 향한다. 산수가 수려한 궁기리. 문암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잔잔한 물결 속에 흐름도 멈추어버린 육지속의 호수를 빗어낸다. 아름다운 강변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초곡리를 왕래하는 신풍진 나루가 생겨나고 지금은 도개면 소재지로 면면을 이어오고 있다.

 

선산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도개면 신림리와 선산읍 생곡리를 이어주는 신용진 나루가 있던자리에 건설된 일선교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1964년 6월 착공하여 1967년 3월 준공을 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다리 준공식에 직접 참석하여 일선교라 명명(命名)하고, “一善橋 竣工記念 朴正熙” 라는 친필(親筆) 휘호를 남겼다고 한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일선교가 선산지방에서 가장먼저 놓인 탓에, 중량초과의 화물들을 지탱하기에 무리가 있어, 2001년 7월 착공하여 8년 5개월 만에 완공된 선산대교가 아름다운 몸매로 낙동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인간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개만도 못하다고 하지 않던가? 속된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실화가 전해오는 칠장마을에 의구총(義狗冢)이라는 무덤이 있다. 일선교를 지나며 마주치는 칠장마을은 노송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다. 노성원이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들불이 나서 주인이 타죽을 위험에 처하자 개가 꼬리에 물을 적셔와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기진하여 죽었다.

 

그 뒤 깨어난 노성원이 감동하여 장사를 지내주고, 후세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칭송하여 그곳을 구분방(狗墳坊)이라 부르고, 1994년 의구총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하였다. 4대강 살리기의 숨은 공로자인 준설선이 임무를 완수하고 느긋하게 정박하고 있는 낙산제를 따라가면 구미보가 시야에 들어온다. 조명산 자락이 물가로 내려앉는 월곡리 협곡에 건설된 구미보는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천880억 원이 투입된 구미보는 길이 374m에 수문 2개를 갖추어 홍수 조절이 가능하고 천5백 kw급 소 수력발전소 2기를 갖춘 친환경 다목적 보로 건설됐다. 장수와 복의 상징인 거북이, 수호의 상징인 용을 형상화한 중앙 권양대는 360도 모든 방향으로 아름다운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설치하여, 구미보를 중심으로 조성된 낙동강 생태관광 지구와 수변공원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구미보에서 조금 내려가면 낙동강과 합류하는 감천을 만난다. 김천시 대덕면 태리에 있는 수도산(修道山:1,318m)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김천시와 선산읍을 관통하고 낙동강 서쪽으로 흘러드는 길이 74km의 큰 하천이다. 김천시 관내에서 여러 지천이 모여드는 구성면과 조마면 경계를 지나오며 굴곡심한 사행천을 이루다가 중·하류 유역에서 개령들을 비롯한 비교적 넓은 평야를 이루고, 선산읍과 고아읍을 지나며 포평들, 중들을 비롯한 관심리, 예강리의 너른 들판이 선산 분지를 형성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감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서원마을에는 금오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말 三隱(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중의 한사람인 冶隱 길재의 충절을 기리고저 1570년(선조 3)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곧바로 복원되어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그 뒤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의 위폐가 모셔진 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남아,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25번 국도가 지나는 송암교 아래서 자전거 도로는 주평마을까지 돌아 나오는 700여 m의 여정이 기다린다. 50m의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제방을 돌아오는 길은 지친 몸에 맥이 풀리고 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신라 최초의 불교 도래지인 도리사 진입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15년 전 베틀산 등산 후에 찾아간 곳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도리사는 고구려승려인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며 진기승지(眞奇勝地)를 찾아다니던 중, 냉산 기슭에 이르러 눈(雪) 속에 오색의 도화(桃花)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지은 다음 도리사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불교 초전성지(初轉聖地)인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는 1977년 4월18일 서울 승가사 주지 상륜스님에 의해 오색영롱한 진신사리가 발견되며,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적멸보궁으로 확인되었다.

 

국보 제208호로 지정된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김천의 직지사는 신라시대인 418년(눌지마립간 2)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하며,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강 건너 관심리와 예강리의 문전옥답을 바라보며, 금호제를 따라가면 숭선대교에 이른다. 해평면과 고아읍을 연결하는 숭선대교는 옛날 강정나루가 있던 곳이다. 이곳이 해평 습지의 중심지를 이루어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철새들의 군무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계절 탓도 있겠지만 끝을 모르는 넓은 호수에는 정적감만 감돈다.

습지의 왕 버들도, 석양녘에 머리 풀어 휘날리던 갈대숲도 자취를 감추고,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철새들이 떠난 자리엔 모래톱이 완전히 사라지고 깊고 깊은 강물이 출렁일 뿐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당위성이 시험을 받고 있는 현장에서, 자연정화에 꼭 필요한 생태계의 복원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구미보와 칠곡보사이에 있는 해평습지는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 흑두루미(제203호)와 큰고니(제201호) 등이 월동하는 곳이다. 맑은 강물에 깨끗한 모래톱, 안락한 습지와 강 양쪽으로 약 1,500ha에 달하는 농경지가 있어 먹이공급원이 풍부하여 철새들이 천국을 이루던 곳이다.

 

생물이 살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자연 다큐멘타리에서 수없이 보아오고 공감하고 있다. 강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한다면, 해평습지도 그 모습을 되찾을 것이고, 철새들도 다시 날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강은 흘러야 하고, 낙동강은 복원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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