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16년 11월 14일
장 소; 고창군 무장면
무장 관아읍성
사적 제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茂長縣)을 설치하고 축조한 건물이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만이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취백당(翠白堂)의 동헌과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가 있다.
진무루에서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가 4만4천여 평에 이른다.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4개월 만에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
무장읍성은 무장현의 설치와 함께 무장진(茂長鎭)의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하고, 무장진은 1417년 왜구 방어를 위해서 전라병영을 광산현(光山縣)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옮기면서 방어 지역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흥덕진(興德鎭)을 부안진(扶安鎭)으로, 목포진(木浦鎭)을 무장진으로 옮겨 설치하게 되었다. 『무장현읍지』 인용
무장읍성은 버스정류장에서 오른쪽으로 내려다보인다. 하필이면 성벽보수공사 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하여 찾는 이도 별로 없이 을씨년스럽다. 공사현장을 피해 산 밑을 돌아가면 읍취루(揖翠樓) 건물을 만나게 된다. 지형을 살펴볼 때 읍취루(揖翠樓)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아름다워 관리들의 유흥장소로 사용하던 객사의 부속 건물로 짐작된다.
무장읍성의 정문인 진무루(鎭茂樓)는 성문위에 2층 누각으로 지어졌고,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 용이하게 옹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문에서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곳이 관아의 객사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객사의 이름이 송사지관(松沙之館)인 것은, 고려 때 고창의 지명인 “무송과 장사”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은 때문이라고 한다.
객사에서 왼쪽에는 읍취루가 있고, 오른쪽으로 수백 년 된 버드나무아래 고을원님들의 송덕비가 일렬로 정비되어 있다. 무장현을 거쳐 간 원님이 34명인데 현재 11기만 남아 있다고 한다. 동헌으로 들어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연지와 정자가 배치되어 있고, 깊숙한 곳에 동헌이 자리 잡고 있다.
새로 두른 담장으로 품위를 갖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취백당(翠白堂)의 간판이 걸린 동헌(東軒)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옛날 동헌에 무릅 꿀린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로 치솟고, 추상같은 불호령에 산천초목도 치를 떨었다고 하지 않던가. 조선 영조때 현감인 최집이 고을이름인 송사(松沙)에 깊은 뜻이 없다하여 취백(翠白)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무장동헌에서 동학농민들의 야기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동학의 3대 접주중의 한사람인 손화중이 선운사 도솔암의 마애불상 배꼽에 숨겨진 비기를 탈취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무장현감이 동학교도들을 잡아 들였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손화중이 교도들을 동원하여 무장읍성으로 습격하자 현감은 도망가고 무장읍성이 동학농민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농민들의 아지트였지만,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동헌 뛰 뜰의 노송(老松)이 무장현의 역사를 말해주듯이 독야청청(獨也靑靑)한 모습으로 오늘도 동헌을 굽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