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15년 10월 30일
구 간: 서산시 해미면 - 읍성 - 해미천주교 성지
6. 해미읍성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어찌 인간에게만 해당되겠는가. 무쇠강철도 무상한 세월 앞에서 녹이 슬고, 무성하던 나무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삭정이로 변하는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지난 7월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 위(胃)에 관상선종이라는 혹이 발견되었다. 큰 병원에 가서 재심을 받아보라는 담당의사의 소견을 듣고서도, 아들 재형이의 초청으로 추석에 베트남 여행을 다녀오느라 차일피일 미루다, 둘째사위(서연아빠)의 주선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건강만큼은 자신하며 전국을 주름잡던 나였는데, 내 몸속에도 심상치 않은 病이 자리를 잡고 말았다. 10월23일 호흡기내과(이용찬 박사)에서 조직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지루하고 초조하여 머리도 식힐 겸, 서해안 답사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서산을 대표하는 해미읍성과 천주교성지를 시작으로 뻘 낙지로 유명한 중왕리 해변을 답사할 계획이다. 남부터미널에서 6시 30분에 출발하는 직행버스가 한서대학교를 경유하여 해미터미널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곳이 해미면사무소 건물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식의 구조물위에 한국전통의 기와지붕을 얹어 고풍스런 모습이다.
조선시대 1407년(태종7)에 정해현과 여미현 등 두개의 현을 합하여 정해에서 “해”자를 따고 여미에서 “미”자를 따서 해미 현이라 칭한 것이 해미면의 효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그 유명한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은 왜구의 출몰을 막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된 수성(守成)이다.
1414년(태종 14)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이설되면서, 충청도지역의 군사중심지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조12년(1578)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10개월간 근무하였고, 효종 때 병마절도사를 청주로 이전한 뒤로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을 두어 호서지방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해미읍성은 길이가 1,800m에 높이가 5m이고, 성안의 넓이가 5만 9천 평에 이르고, 성 밖으로 2m 깊이의 해자를 파서 외부의 적을 방어하는 철옹성이었다.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모양성과 함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역사・문화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해미읍성의 관아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모진고문과 처형을 감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순교성지(殉敎聖地)로 추앙을 받고 있는 곳이다. 해미순교성지는 최근 교황이 다녀가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서산의 시골동네에 교황이 방문한다는 것이 이례적이었는데, 천주교인들의 박해와 순교에 대한 탐방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
일명 여숫골로 알려진 조산리 생매장 터는 1935년 범바로 신부가 주도한 유해 발굴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80여 년간, 천주교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처형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내포지방의 천주교신자들을 잡아들여 모진고문을 감행 하였다.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에 이어,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고, 여러 명을 눕혀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다는데, 너무도 가혹했던 참상을 지울 수가 없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등, 해미순교자 3명이 시복되었고, 다음 날 17일에는 이 곳 성지를 방문하여 시복기념비를 제막하였다.
조선시대 방어용 무기
야외 공연장
무명 순교탑
순교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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