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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삼남길

서호천길

 

                                                 제4길: 서호천길 (7.1km)

일 시 : 2014년 6월 4일

구 간 :  지지대 쉼터 - 해우재 - 이목2교 - 여기산앞 - 서호공원 (7.1km)

 

정조대왕이 부왕인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가는 여정에서 가장 돋보이는 구간이 지지대 고개이다. 남태령을 넘어온 이후 가장 험준한 지지대고개는 헌릉원을 바라볼 수 있다는 기쁨과 돌아오는 길에서는 더 이상 어버이의 묘를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서려있는 곳이다. 해서 수원에서 하룻밤을 묵어 갈수 있는 행궁을 짓고, 수원화성을 쌓아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꽃피우게 된다.

 

 

정조는 조선시대 어느 임금보다도 궁궐 밖 나들이가 많았던 임금이다. 재위24년 간 66회에 걸쳐 행차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縣隆圓)참배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1795년(정조19년)이 을묘년(乙卯年)이므로 흔히 "을묘원행"으로 불리는 이 행차는 어머니의 회갑과 아버지의 사갑을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참배를, 살아있는 어머니에게는 효도를 할 수 있는 길이었다.

 

 

조선개국 이래 최대의 국가적인 행사로 평가받는 정조대왕화성행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는 당대의 궁중화원인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 등이 정조의 어명에 의하여 2년여에 걸쳐 완성한 가로 15m 세로 18m에 이르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청계천에 도자기 벽화로 되살아나 그 당시의 장엄한 행렬을 엿볼 수가 있다.

 

 

지지대비각에서 울창한 숲속을 빠져나오면 지지대 쉼터에 이른다. 1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효행공원에 있는 정조대왕의 동상을 참배하려고 했지만, 도로 중앙으로 육중한 펜스가 있어서 포기를 하고 만다. 삼남길 4구간이 시작되는 쉼터에는 아침 산책 나온 시민들로 주차장이 만원이다.

 

 

각종 오염물질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자연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틈만 나면 산을 찾아 시원한 그늘 속에서 심신을 단련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지지대 쉼터에서 시작하는 삼남길은 돌담을 휘 감고 있는 담쟁이 넝쿨을 지나면서 싱그러운 주말농장이 펼쳐진다. 상추에 옥수수, 고추까지 농부들의 정성으로 알알이 영글어가고 있다.

 

화선봉 입구를 빠져나오면 영동고속도로가 신나게 질주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거대한 장벽이 되어 단절의 아픔을 겪는다. 숨통 트이는 토끼 굴을 빠져나오면 이색적인 박물관을 만난다. 해우재(解愚齋). 근심을 푸는 거푸집이라는 뜻으로, 사찰에서 화장실을 말하는 해우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원 민선1. 2기 시장을 지내고,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고 심재덕선생의 피와 땀이 서린 결정체이다. 고인은 화장실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한국화장실협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1999년에는 어릴 적 자라온 고향집을 화장실 문화관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하는 열정을 보였다.

 

 

화장실은 양옥과 아파트 문화가 만들어낸 이름이고, 뒷간, 측간, 정랑, 통시, 변소, 매화간, 해우소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는 옛말과 같이 우리의 생리현상을 해결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장소가 아닌가. 하지만 고약한 냄새로 멀리하다가 화장실 문화가 시작되면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우재에 도착하면 가장먼저 반겨주는 것이 변기모양의 기념관이다. 순백색의 변기안으로 들어가면 정갈하게 꾸며진 전시물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한 순간이라도 건너뛸 수없는 생리를 해결하는 장소임에도 무심코 지나친 우리에게 화장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곳이다.

 

 

정원으로 나오면 각종 화장실의 변천사들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의 통시변소를 비롯하여 남자들이 사용하던 호자, 귀족여인들이 사용하던 노둣돌, 궁중에서 사용하던 매화틀,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던 뒷간과 투막화장실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최초의 공중변소인 왕궁리 화장실은 백제무왕시대에 만들어져 고려시대까지 사용했다는 설명이다.

 

 

시원하게 뒤를 보고난 후련함으로 해우재를 나와 이목사거리를 지나면 서호천을 만난다. 지지대고개에서 출발한 삼남길이 화성행궁으로 이어지는 것이 정설이겠지만, 도심의 복잡함과 해우재라는 이색적인 박물관을 참관하고 서호천의 물길을 따라 가는 코스로 변경한 것이다.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수원은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강을 끼고 있지 않은 도시다. 그러하기에 드넓은 수원평야를 살찌우기위해 많은 저수지를 막아 신대저수지와 원천저수지에서 발원한 원천리천, 광교저수지에서 발원한 수원천, 왕송저수지에서 발원한 황구지천과 지금 걷고 있는 파장저수지에서 발원한 서호천이 도심지의 각종오물을 걸러내는 허파 구실을 하고 있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서호천은 길이가 10여km에 이르는 작은 하천이지만, 하천 되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붉은 아스콘의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시원하게 소통하고, 수초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아닌가. 샛노란 야생화에 고사리 손이 모여들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세상이 신기하기만한 아가들의 손길에 우리의 미래가 피어난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수량도 많아지고, 25개나 되는 다리가 서호천에 걸려있어 수원의 중심부라는 사실을 실감 한다. 1호선지하철이 지나는 풍림아파트를 지나면, 울창한 숲속의 여기산이 나타난다. 수원이 자랑하는 백로 서식지이다. 백로란 신비스런 동물이어서 아무 곳에나 함부로 둥지를 틀지 않는다.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수 백 년 된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깨끗한 2급수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로 새끼를 키워내는 영물이 아닌가.

 

울산대숲의 백로와 수원 소나무 숲의 백로는 주변의 환경이 되살아나면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온 반가운 손님이다. 서호에 도착하며 4구간 서호천길을 마감하고 5구간 중복들길이 시작된다.

 

 

 

 

 

 

 

 

 

 

 

 

 

 

 

 

 

 

 

 

 

 

 

 

 

 

 

 

 

 

 

 

 

 

 

 

 

 

 

 

 

 

 

 

 

 

 

 

 

 

 

 

 

 

 

 

 

 

 

 

 

 

 

 

 

 

 

 

 

 

 

                                                                      제5길: 중복들길(7km)

일 시: 2014년 6월 4일

구 간: 서호고원 -  향미정 - 서둔동 무민센터 - 중보교 - 옛 수인선 철도 - 평리교 - 배양교

 

화서역 서쪽으로 서호공원이 펼쳐진다. 서호는 18세기 정조가 수원축성과 함께 가뭄극복을 위해 축성한 인공호수라고 한다. 2km에 이르는 둘레 길을 조성하여 벚나무와 개나리, 연산홍으로 치장하여 수원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제5구간 중복들길도 호수 둘레 길을 따라 이어진다.

 

호수가운데 있는 섬 하나가 시선을 끈다. 서호낙조(西湖落潮)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에 꽃과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수림 속에 새들이 천국을 이루고 있다. 제방으로 올라서면 “꼬리명주나비보존지역”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호랑나비과에 속하는 꼬리명주나비는 먹이식물인 쥐방울덩굴(멸종위기식물)이 자라는 진위천을 중심으로 서식하고 있지만, 하천변 개발과 함께 제초제의 남용으로 쥐방울덩굴이 멸종위기에 있어 꼬리명주나비를 보존하기위해 영복여자고등학교에서 복원관리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 축만제(祝萬堤)라는 표지석이 반겨준다. 축만제는 화성의 동서남북에 설치하였던 4개의 인공호수중에 하나로 정조23년에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제방아래는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하여 조선후기 농업생산기반의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 받으며 지금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시험 답으로 사용하고 있다.

 

호수남쪽으로 돌아서면 항미정이 반겨준다. 중국 항주의 이름난 정자를 본받아 세운 항미정(杭眉亭)은 1831년 당시 화성 유수였던 박기수가 건립한 정자로, 송나라의 소식이 항주의 태수를 지낼 적에 서호가 서시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칭송한 것에서 본받아 화성의 서호 남쪽에 정자를 짓고 항미정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호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천변으로 자전거도로가 조성되고 제방 길에는 노란 금계국이 천국을 이루고 있다. 수원의 서쪽을 지나는 하천을 따르면, SK그룹의 고향을 지나게 된다. 우리나라 5대재벌로 성장한 SK는 1953년에 창업주인 최종건회장이 선경직물을 인수하여 직기20여대로 시작한 것이 오늘날 수백조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수원의 근원은 파장동과 대야미동에서 구석기 유물인 곧은 날 긁개와 주먹 도끼 등이 발견되면서 수원 지역에서 구석기(8,000년 전) 인류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다수의 고인돌과 서둔동 여기산에 집자리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3,000-5,000년 전)에서 철기시대(2,000 -3,000년 전)에 집단으로 거주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수원은 백제영토였으나,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따라 한강유역과 그 주변인 수원지역을 확보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수원의 이름을 ‘매홀(買忽)’이라 하였다. 이후 수원지역은 백제와 신라가 번갈아 점령하면서, 신라가 통일한 뒤로 경덕왕16년에 수원을 ‘수성군(水城郡)’으로, 고려1271년(원종12)에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변경하면서 수원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 제일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수원역에서 굴다리를 빠져나와 화성으로 연결되는 43번 국도가 지나는 중보교를 지나면 그 옛날 수인선이 지나던 철교가 남아 있다. 높이가 10m남짓한 철교 위를 지나는 동안 아슬아슬한 스릴을 맛본다. 수인선은 선로의 폭(762mm)이 좁은 협궤 열차였다.

 

화성의 소금과 이천의 쌀을 수송하기위해 총연장 52km에 이르는 수인선을 1937년 개통하여 운행하다가 산업화와 교통의 발달로 1955년 폐선 되어 안산시 중앙역에서 고잔역까지 2km에 걸쳐 아련한 추억을 간직 한 채 남아있다.

수원비행장이 시작되며 기름진 중복들길이 시작된다. 삼남길을 답습하는 아가씨들이 말을 걸어온다. 심심하던 차에 말동무삼아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삼남길에 관심을 갖고 다음 달부터 땅 끝 마을 해남에서 시작하여 완주를 목표로 걷고 있다는 야심찬 포부를 전해준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백만대군(百萬大軍)이 따로 없다. 강과 산, 해안을 따라 옛길을 답사하는 나에게 새로운 동지가 나타난 셈이다. 그동안 경험담을 들려주며 가상한 용기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같은 직장에 다닌다는 김희승과 송길현이 그 주인공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끝없이 펼쳐지는 곡창지대,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도시의 팽창으로 수원산업단지가 야금야금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오늘의 목적지가 배양교지만, 교통편을 감안하여 수원시위생처리장이 있는 기안교에서 산업단지로 돌아와 중복들길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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