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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삼남길

용주사와 독산성

 

                                       제6길:화성효행길(6.8km)

일시: 2014년 6월 28일

구간 :배양교 - 용주사- 화산지 - 미지엔드 아파트- 세마교

 

수도권에서는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한 대중교통이다. 수원역에서 마을버스(6-1)로 환승하여 가안동 입구에서 내리면 6구간이 시작되는 배양교는 그리 멀지가 않다. 우선 황구지천을 찾아간다. 잠시 후 서호천과 합류하여 더욱 큰 물줄기를 이루는 황구지천에 배양교가 걸려있다.

 

 

황구지천은 도심을 가로지르며 수원의 허파구실을 하는 하천이다. 하지만 상류지역의 대단위 택지지구에서 쏟아지는 생활하수로 인해, 농업용수로도 사용하기 어려운 시궁창으로 변하고 말았다. 의왕시 왕송저수지에서 시작하여 평택시 서탄동에서 진위천(振威川)과 합류하는 길이가 32.5km에 이르는 하천이다.

 

 

배양교를 삼남길 6.7구간 경계지점으로 선정한 것은 수원지경을 벗어나 화성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원시 평리동과 화성시 봉담면이 경계를 이루는 배양교는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교량이지만, 새로운 도로가 확장되고 대규모 교량이 건설되면서 뒷방늙은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배양마을 돌담길에는 봉숭아와 채송화, 백일홍까지 우리 할머니들의 사랑을 받아온 화초들이 삼남길의 정서와 어쩌면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마음이 흡족하다.

 

 

 

화성효행길은 정조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지나는 구간이다. 정조의 효심이 꽃을 피우는 융건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렀으며, 정조 또한 죽은 후 아버지의 곁에 묻혔다.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니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격해진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낭자하게 피가 흘러내린다. 살려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단호하게 명을 내리고 만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강등하여 뒤주에 가두어라.”

 

 

어려서부터 서예와 무예에 뛰어난 세자는 영조를 대신하여 정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였고, 나경연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영조는 자식을 죽인 비정한 아비로서, 간장을 끊어내는 슬픔 속에서도 사도(思道)라는 시호를 내린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899년(광무3)장조로 추존하였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된 뒤, 사도세자가 비운을 맞은 후 혜빈으로 부르다가, 정조가 즉위한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린다. 혜경궁 홍씨는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문무를 겸비한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에 힘썼으며 장용영을 설치하여 수원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를 타파하다가 뜻을 펴지도 못하고 49세의 나이로 비운을 맞고 만다. 효의왕후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빈에 책봉된 뒤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건릉은 조선 제22대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하였다. 21년 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김조순의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정조의 능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건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융건릉은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왕릉이다. 효종 이후 사라졌던 병풍석, 봉분의 인석에 만개하지 않은 연꽃봉우리는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한을 달래주는 모습을 연상하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의 곤신지(연못)는 아버지를 사모했던 정조의 마음이라고 한다.

 

 

경내를 빠져나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용주사다. 경기문화재자료 제35호인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년(854)에 세운 갈양사(葛陽寺)였다.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된 것을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서 시주8만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난 뒤,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화산 저수지를 지나며 정조와의 인연도 끝이 나고,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를 거치는 삼남길이 열린다. 이 길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귀양 가는 옛 선조들의 애환이 묻어나는 길이요, 삭탈관직을 당한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을 위해 남하 하던 길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을 찾아오던 백면서생들이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수 백리를 걸어왔던 바로 이 길이다.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세마교에서 화성효행길도 끝이 나고 독산성길이 시작된다.

 

 

 

 

                                                                서호천(우)과  황구지천(좌) 합수머리

 

 

 

 

 

 

 

 

 

 

 

 

 

 

 

 

 

 

 

 

 

 

 

 

 

 

 

 

 

 

 

 

 

 

 

 

                                융릉(隆陵) -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건릉(健陵) - 제 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용주사

 

 

 

 

 

 

 

 

 

 

 

 

 

 

 

 

 

 

 

 

 

 

 

 

효행 문화원

 

 

 

 

 

 

 

 

                                                              화산저수지

 

 

 

 

 

 

 

 

 

 

 

 

                                                                        권률장군의 기상( 폐타이어 )

 

 

 

 

 

 

 

 

 

 

 

 

 

 

 

 

                                                                 

                                                                     제7길:독산성길(7.2km)

일시: 2014년 6월 28일 

구간: 세마교 - 독산성 - 동탄 어린이천문대 - 고인돌공원 - 오산대역

 

독산성길은 세마교를 건너 오산화성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서오산 요금소를 지나게 된다.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화성이야말로 고속도로천국이다. 오산화성고속도로 또한 서오산 분기점에서 평택화성고속도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봉당동탄고속도로와 교차한다. 황구지천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봉우리가 독산성이다. 2백여m 남짓한 높이지만, 광활한 오산평야를 굽어보는 독산성은 사방 어디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평지돌출 형이다.

 

 

고속도로 밑을 지나서 독산성길을 따라 진행하면 화성과 오산의 경계 표지판이 보이고, 왼쪽의 솔밭 길로 접어든다. 하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속으로 삼림욕장이 이어진다. 걷기와 건강이 함수관계라면 숲속에서 쏟아지는 피톤치드는 우리혈관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청소도구라 할 수 있다. 울창한 숲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걸어보면 심폐기능이 강화되어 오장육부가 튼튼해진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완만한 숲길에 깔끔하게 조성한 산책길, 휴일을 맞이하여 인근 주민들이 삼삼오오 짝을 찾아 웃음꽃을 피워낸다. 이름도 아름다운 보적사는 담쟁이 넝쿨이 늘어진 암문을 들어서면서 경내가 펼쳐진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면면이 이어오는 보적사는 규모가 작은 아담한 사찰 이다.

 

 

보적사(寶積寺)는 백제의 아신왕이 독산성을 축성할 때 전승(戰勝)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보적사(寶積寺)란 이름은, 보릿고개로 끼니를 연명하기 어려운 노부부가 남아있는 한 줌의 쌀을 바라보며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곡간에 쌀이 가득이 쌓여있는지라, 공양으로 보화가 쌓인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寶積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년고찰을 자랑하는 보적사가 고풍스러움보다는 화려함이 돋보이는 사찰이다. 대웅전에 있는 삼존불을 2006년에 개금불사(改金佛事)하면서 새로 단청을 하였다고한다. 개금이란 불상에 금칠을 하는 것을 말하며, 개금이 끝난 뒤에는 엄숙하고 장엄한 법회를 거행하게 되는데, 수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부처님의 은덕을 찬양하고 소원을 비는 것을 개금불사(改金佛事)라 한다.

 

 

보적사를 뒤로하고 산등성이로 올라서면 세마대 정자가 반겨준다. 때마침 이곳을 찾은 중학생들을 상대로 역사탐방 해설사의 진지한 설명이 이어진다. 왜군 수 만 명이 독산성을 지나다가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물 한 지개를 성안으로 올려 보내 조롱을 하였다. 이에 권율장군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위로 끌고 올라가 하얀 쌀을 말에 끼얹으며 목욕시키는 시늉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말에 목욕을 시킬 정도로 물이 풍부한 것으로 착각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곳을 세마대(洗馬臺)라 부른다는 것이다.

 

 

세마대를 뒤로하고 독산성에 올라선다. 가슴이 탁 트이는 독산성. 사방 백리길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전망대라. 북쪽으로 동탄신도시가 사막의 신기루처럼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시가지의 조형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방향을 바꾸어보면 질주하는 고속도로와 오산 신시가지, 그 너머로 송탄, 평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수도권지역의 팽창이 천안까지 이어진다.

 

 

독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도성을 지키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각광을 받게 된다. 1593년 7월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장군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독산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치면서 기선을 제압하고, 이듬해 9월11일 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 만에 군. 관. 민이 합심하여 성을 새롭게 수축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독산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정에서는 선조35년(1602년)에 보강하고, 정조20년(1796년)에 수원성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마로 인해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30년이 지난 후 풍수지리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한다는 논란이 일어났지만, 효심이 깊은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성(城)을 더욱 튼튼하게 개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산문(山門)에는 禿山城洗馬臺山門(독산성세마대산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산문(山門)이란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출입문을 말하며,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들어서기 위해 통과하는 문의 순서를 일컫는다.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文), 해탈문(解脫門)등 모두를 일컬어 산문(山門)이라 한다.

 

 

산문을 뒤로하고 세마동 마을길로 접어들면, “동탄어린이천문대”를 만난다. 어린이에게 우주의 무한한 꿈을 심어주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는 천문대는 우리에게 생소한 세계이면서도, 무한의 잠재력을 지닌 신비의 대상이다. 봉당동탄고속도로를 건너기 위해 토끼 굴을 찾아 활등처럼 휘어진 마을길을 돌아가야 한다.

 

 

여계산자락을 파고들면 또다시 울창한 숲속이다. 3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태양을 피해 그늘 속으로 들어서면 숲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솔바람 속에서도 등줄기에서 땀이 흥건히 흐르도록 가쁜 숨을 몰아쉬면 여계산(150m) 정상이다.

 

 

정상에는 산불 감시초소가 있고 각종운동시설과 벤치가 놓여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살기 좋은 우리나라다. 한일월드컵을 개최하고 10여년, 우리는 놀랄만한 성장을 하였다. 선진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화장실문화에서부터 강변의 둔치를 이어주는 자전거도로, 전국의 산야마다 둘레 길을 조성하고 도시는 물론이요, 농촌의 야산과 계곡마다 삼림욕장을 개설하여 심신을 달래주는 수련장이 펼쳐지는 꿈의 동산이 아닌가.

 

 

여계산을 내려서면 숲속의 궁전이 펼쳐진다. 오산시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세교신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금암휴먼시아 동산이다. 10단지까지 조성된 아파트 숲속에는 이색적인 고인돌공원이 반겨준다. 우리조상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 고인돌문화는 움막 속에서 생활하던 선사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강화도와 고창의 지석묘가 유명하지만, 이렇게 현대와 과거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하다. 우리나라는 한 장소에서 수십기의 고인돌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되는 집단생활을 했던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라 한다. 혈연으로 형성된 집단은 조상을 숭배하고, 이는 생명력과 불멸의 의미를 지닌 고인돌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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