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13년 3월 8일
경유지: 승촌보 - 나주대교 - 나주역 - 영산포 - 진부마을 - 죽산교 - 죽산보 - 회진리 - 나주역 ( 22.5km + 진입로 11km = 34km)
3. 영산 포구
Q모텔에서 승촌보 관찰데크가 있는 자전거도로까지는 3km나 되는 먼 거리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장님 문고리 잡는 식으로 물어물어 제방위로 올라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주72번 무안까지 40.5km 이정표가 반겨준다.
안개 속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강 건너 신기리와 동섬사이로 흘러드는 지석천이 있다. 상류에 나주호가 있는 지석천은 옛날 홍수피해가 잦아 둑을 쌓고 보를 만들었으나, 계속 둑이 터지자 “드들”이란 처녀를 제물로 바쳐 둑 속에 묻고 보를 만들었다고 하여 이 강을“'드들강”이라고도 한다.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580m) 남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나주시 도곡면에서 화순천(和順川)과 합류하는 길이가 55㎞에 이른다.
지석천의 지류인 대초천에는 영산강 유역 농업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축조한 나주댐이 있다. 댐의 높이 31m, 길이 496m, 총저수량 9,120만t에 이르며, 주변 112㎢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나주호는 나주시 다도면과 화순군 도암면 등 2개면에 걸쳐 있으며 영산강 지류에 있는 담양댐, 장성댐, 광주댐과 함께 이지역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우천 시에 홍수조절을 하는 다목적 댐이다.
가시거리가 1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안개 속에서 영산강 전망대가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주대교와는 200여 m 떨어진 거리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지만 아직 완공전이라 그러한지 문이 굳게 잠겨있다. 안개만 아니라도 주위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련만, 지척에 있는 나주대교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나주시를 관통하는 자전거도로가 너무도 아름답다.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오가는 자전거 길을 구분하고, 그 옆으로 시원하게 질주하는 강변로와 영산강을 형상화한 가로등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하구둑 70km, 담양댐60km 이정표를 지나며, 태양의 위세에 눌린 안개도 서서히 벗어지고 있다.
나주역과 빛가람도시 間 도로를 개설하는 제2나주대교 건설현장을 지나게 된다. 우리의 토목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이라, 넓은 강이나 연륙교를 가설할 때 흔히 사용하는 사장교를 많이 볼 수가 있다. 수심이 깊은 곳에 교각의 거리를 멀리세우고, 상판을 와이어 줄로 지탱하는 교량은 큰 배도 쉽게 통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풍과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기능과 외관이 수려하여 미적인 감각이 뛰어나다.
활등처럼 휘어진 제방을 따라가면 나주 저류지와 만난다. 죽산보와 승촌보 중간지점에 조성된 영산강 저류지는, 홍수시에 영산강이 범람하여 농경지가 침수되는 것을 방지하기위하여 물이 빠져나갈 때 까지 물을 담아두는 물그릇과 같이 평상시에는 비워두게 된다. 남한강의 여주 저류지와 함께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조성하였다.
설명에 따르면 영산강 살리기 사업으로 조성된 강변 저류지 52만여 평에 스포츠마케팅을 통한 지역관광 활성화와, 친환경 뽕나무단지 2만1000여 평을 조성해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뽕나무 열매인 '오디' 따기 체험행사 등 이색적인 상품을 개발하고, 17만여 평에 20메가와트(MW)급 태양광 발전단지를 조성하여 신재생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전망이다.
영산강교에서 종주 길이 강을 건넌다. 영산강 절반이 되는 65km지점이다. 영산강 지명의 유래는 나주의 영산창(지금의 영산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부터 이곳에 조창이 생겨 인근 전라도 등의 전세를 여기에 모았다가 해상을 통해 서울로 운반했다고 한다. 또한 흑산도 앞 영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서 살면서 영산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영산교를 건너면서 가장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홍어집이다. 바다도 아닌 육지인 영산포에 홍어집이 많은 것에 의아심이 든다. 연유는 고려 공민왕으로 거슬러간다.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조정에서는 흑산도에 사는 어민들을 영산포로 강제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두게 되었다. 이때 이주해온 흑산도 주민들과 함께 홍어도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냉장시설이 별로 없던 시절. 애써 잡은 생선들을 며칠씩 걸려 배로 운반해오면, 상하기 십상인데, 유독 홍어만은 배탈이 나지 않는 사실을 알고부터 삭혀먹기 시작하여 막걸리와 곁들여 먹는 발효식품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홍어를 특히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다. 많은 점포들 중에 호감이 가는 홍어사랑 집으로 들어섰다. 80여세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홍어손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배짱 좋게 1인분을 싸달라고 주문한다. 하도 어이가 없는지, 며느리에게 미루고 만다. 인상 좋은 며느리의 후한인심으로 홍어를 사들고 덤으로 맛까지 보았으니, 이런 맛에 힘든 종주 길도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죽산보의 잔디밭에서 홍어 맛을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싱글벙글 발걸음이 가볍다.
제방으로 올라서면 그 유명한 영산포 등대와 만난다. 일제강점기 영산강의 가항종점인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등대로 수위 측정과 등대의 기능을 겸했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 내륙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것으로 1989년까지 수위 관측시설로 사용되었다.
영산포 선창은 드넓은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고, 소금을 비롯하여 해산물을 싣고 온 배가 닻을 내리면, 나주와 광주 담양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 영산포가 사시사철 성시를 이루었으나, 영산강 하구에 둑을 막으며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침체기를 맞고 말았다.
영산강 제5경이 “錦城祥雲”이란다. 커다란 돌비석에 새긴 문구를 해독하며 뒷면을 보니, 나해철 시인의 영산포가 적혀있다. 60년대 보릿고개의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서울로 떠나간 누님의 애절한 사연이 아련히 향수 속에서 피어오른다. 역사를 품고 생명을 담아 미래로 가는 영산강!!! 우리 모두의 바램이었다.
“春來 不以春”이라. 중부지방은 꽃샘추위로 움츠러드는데, 남녘땅은 어느새 봄볕이 완연하여 영산강 둔치에 꽃씨를 뿌리는 아주머니들의 손놀림이 분주하고, 강 언덕의 산수화가 꽃망울을 터트린다. 어느새 봄은 왔는가. 목덜미로 열기가 치솟으며, 온몸이 나른하여 삼남길 따라 만봉천이 합류하는 양곡교를 찾아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정량마을 돌아서면, 가야산 자락이 강기슭으로 뻗어 나온 벼랑위로 정자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영산강의 물살이 돌아가는 수십 길 절벽이라. 愛國志士 “羅月煥 將軍”의 기념비가 있는 소공원에서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서면,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정자에서 바라보는 남도의 정취가 한 폭의 산수화로 그려진다. 영산강을 보듬어 안고 살아가는 영산포와 나주평야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진부마을로 내려선다.
활등처럼 굽어진 제방으로 달려가는 종주길이 죽산보까지 8km.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죽산보가 꿈속의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고, 2시간동안의 고통 속에 죽산교를 지나며 나타나는 죽산보가 구세주처럼 보인다. 고통의 보상으로 주어진 홍어회를 생각하면 피로가 싹 가시지만, 죽산 보에서 고통의 끝이 아니다.
교통의 사각지대에 있는 죽산 보는 사방을 둘러봐도 탈출구가 만만치를 않다. 4시 27분 나주역에서 출발하는 ktx 시간표를 생각하면 마음이 초조하다. 경비서는 아저씨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1시에 버스가 들어오니 승강장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1시가 넘어 10여분이 지나도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고,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친절하던 아저씨도 말끝을 흐리며 자리를 뜨는 바람에 고마움이 원망으로 변하고 만다. 하지만 좋든 싫든 내 일이니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택시를 대절하면 2만원이라는 말에, 나주역까지 걷기로 했다. 다시면 쪽의 교통편을 알 수는 없지만, 나주시내와 연결되는 교통편이 있을 것으로 희망을 걸고 죽산 보를 건넌다. 제방과 농로를 가로질러 1시간 반 만에 다시면 회진리에 도착하며 희망이 생긴다.
나주로 가는 버스들이 수시로 있으니 말이다. 그제 서야 배낭에 담아두었던 홍어 생각이 난다. 나무그늘 정자에서 맛보는 홍어는 씹을 겨를이 없다. “마파람에 게눈 감 추 듯”, 시식을 하고보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물집 잡힌 발바닥이 후끈 거리기 시작한다. 그 도 그럴 것이 어제 32km, 오늘 30 여km를 걸어오며 마음고생과 함께 강행군을 하였으니, 강철인들 견디어 내겠는가.
시간이 남는 덕분에 절뚝이는 걸음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나주시천연염색공방” 앞을 지난다. 이곳이 염색 공방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예로부터 영산강 주변으로 쪽을 많이 심어왔다고 한다. 맑고 푸른 하늘을 쪽빛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주지방이 쪽 염색의 본고장이라 한다. 쪽빛의 전통을 지켜오는 천염염색 박물관주변으로 8개의 공방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정관채, 윤대중 장인들의 노력으로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풍호나루” 유래비가 있는 강기슭을 따라가면, 詩人 “임제문학관”과 영모정을 만난다. 조선시대인 1520년(중종 15)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이 창건하였고, 이 지방 출신의 명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고 불렀으나,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고 하였다. 주위에 400여 년 된 팽나무가 많이 있어 주변 환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목조건축의 규범을 잘 갖추고 있다.
전주와 나주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전라도 지명에서 보듯이, 전주시와 함께 호남 지방의 중심도시인 나주에는 나주읍성을 비롯하여 나주의 궁궐로 일컬어지는 금성관이 있으니, 유서 깊은 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금성시를 나주시로 고쳐 부르며, 1995년 나주시와 군이 통합하여 인구 9만 여명이 상주하는 중소도시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나주배가 으뜸이고, 나주 쌀은 면화, 소금과 함께 호남의 3백으로 불리어 왔다.
영모정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만에 나주역에 내려서면 오늘의 고초도 끝이 나고 만단시름이 사라진다. 일박2일간의 강행군으로 파김치가 되었어도, 영산강 답사를 위해 천리 길을 마다않고 찾아가는 열정. 그 보람으로 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ktx에 몸을 싣고 꿈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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