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1년 9월 15일
구간: 국민대학교 정문 - 북한산 둘레길(명상길) - 여래사 - 하늘마루 - 하늘전망대 - 호경암 - 김신조 격전장 - 서마루 - 성북천 발원지 -
삼청각 - 숙정문 - 쇠말뚝 바위 - 곡장 - 청운대 - 백악산 - 창의문 - 인왕산 - 무악재 (13km)
제2구간 : 국민대학교 - 무악재(약 10km)
중국태산 트레킹을 보름 앞두고 워밍업을 할 겸, 몸 풀기로 북한산 종주 2구간에 나선다. 국민대학교 가는 버스가 길음동에서 수시로 있어 편안하게 진입할 수가 있고, 터널 쪽으로 100 여m 진행하면 북악공원안내소가 반겨준다. 널찍한 진입로를 따라 300 여m 진행하면 북한산 둘레 길과 만나 평창동쪽으로 계단을 올라 북악산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진입한다.
북악하늘 길로 命名된 이 길은 김신조 사건 이후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다. 북악터널이 지나는 주능선은 생태 복원을 위해 철조망으로 가로막아 우회로를 따라야 한다. 국민대에서 올라오는 층층계단600 여m를 내려서는 동안 주능선은 점점 높아만 가고 공중화장실까지 내려온 다음에야 곤두박질치던 비알 길도 멈추고 만다.
이곳에서 오른쪽 사면 길을 따라가면 三角山如來寺 일주문이 나온다. 지루하던 장마가 물러가고 나니 炎天地下에 鎔鑛爐(용광로)같이 뜨거운 열기가 대지를 달군다. 가파른 비알 길에서 비지땀을 한 줄금 흘리고 나면 고운빛깔로 단장한 대웅전 뒤로 정갈하게 모셔진 순국선열 봉안소가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하신 대한민국장 21분을 포함하여 순국선열 373분의 위폐를 모신 호국사찰이다.
여래사 경내를 빠져 나가면 철조망 사이로 오솔길이 열린다. 여러 갈래 갈림길이 나타나지만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면 북악마루정자가 반겨준다. 성북구에서 정성들여 조성한 둘레 길은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우고 곳곳에 쉼터와 운동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의 신체단련과 건강유지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간 곳이 하늘 전망대다.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는 전망대는 북한산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돈암동일대의 시가지가 그림같이 아름답다. 산불감시를 위해 상주하고 있는 북악산 지킴이 아저씨에게서 조언을 들으며 식물의 천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遷移(천이)란 무엇인가? 일정한 지역의 生物群集(생물군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不可逆的(불가역적)으로 변하여 가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황무지의 나대지에 초본류가 형성된 뒤로 관목군락으로 양수림이 된 뒤로는 그 토지와 기후에 알맞은 음수림이 형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드디어 호경암에 올라선다. 투박한 대리석의 호경암은 유난히도 뾰족한 암봉에 세워진 표석이다. 남산타워가 정면으로 보이는 조망이 뛰어난 이 바위가 1.21사태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으니,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의 치열했던 흔적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하였다. 그러나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 당한 사건이다.
군경은 즉시 출동하여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는 과정에서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총경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고,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여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전 안보관광으로 김신조가 넘어온 고랑포 철 책선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68년 1월 17일 23시 북한군 제124군 소속 김신조등 31명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에서 남방한계선을 뚫고 넘어올 당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2사단 경계부대에서 설치한 경계 철책과 철조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인물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김신조 사건과 나 또한 무관할 수가 없다. 그 당시 26사단 75연대에 근무하던 나는 26사단의 경계를 자나갔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상근무와 엄격한 군 생활이 빌미가 되어 월남에 自願하여 1년6개월간 월남에서 파병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40여 년 전의 쓰라린 역사를 되돌아보며 군부대에서 할애하여준 비상통로를 따라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길이 이어진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며 관할 주민들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산책로를 만들고 둘레 길을 조성하는 붐이 일어난다. 성북구에서도 숙정문이 있는 곳까지 험한 산길을 갈고 다듬어 층층 계단으로 그림 같은 공원길을 조성하였다. 전망 좋은 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한옥의 대청마루에서 건너편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원함을 연상하는 하늘마루, 북악마루, 동마루, 숲속마루로 이름 지어 정겨움을 더한다.
삼림욕과 피톤치드의 효과는 현대인이 살아가며 꼭 필요한 생활의 활력소라 할 수 있다. 피톤치드란 식물을 의미하는 피톤과 살균을 의미하는 치드의 합성어로 테르펜이라는 주성분을 말하며 활엽수보다는 편백나무 등 침엽수에서 많이 발생한다. 피톤치드는 공기를 정화하고 살균하는 효능이 있어 각종감염질환과 아토피성 치료에 좋을 뿐만 아니라 혈압을 낮추고 콜레스테롤 합성을 막아준다.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를 떨어트려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 효과가 있다.
성북천 발원지를 지난다. 서울성곽의 북쪽을 흐르는 곳이라 성북천으로 부르며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보문동과 신설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7.7km의 한강지류 2급 하천이다. 백년이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계단 길을 내려서면 숙정문 탐방신고소에서 신원확인을 한 뒤 산길로 오른다.
드디어 숙정문에 안착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 명하여 1395년(태조4년)부터 시작하여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으로 이어지는 18.5km의 성곽을 축조하였다. 서울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어 4대문을 유교의 덕목인 仁, 義, 禮, 智에 따라 동대문을 흥仁지문, 서대문을 돈義문, 남대문을 숭禮문, 북대문을 숙정(智)문으로 정했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 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서울성곽 18.5km중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좋은 숙정문. 2층 누각의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삼복더위에도 등줄기가 시원하도록 별천지를 이룬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드리워진 성벽을 따라 가면 오백년의 세월을 거꾸로 돌려놓은 기분이다. 땀을 흠뻑 흘린 뒤에야 전망 좋은 곡장에 올라선다.
곡장이란 적을 살피고 성벽을 오르는 것을 좀 더 쉽게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성곽 중 일부를 돌출시켜 만든 시설물이다. 평탄한 지형에는 치성을, 산세가 험한 곳에는 곡장을 설치했다. 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치(雉)라고도 하며, 굽어진 성이라는 의미에서 곡성(曲城)이라고도 부른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시설인 만큼 지리적으로 입지가 좋기 때문에 주변 전망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북쪽으로 북한산이 서쪽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이 그림처럼 펼쳐진 자연경관은 한양천도를 결심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게 큰 감동을 안겨 줬을 것이다. 새로 복원한 성벽이 북악산 줄기를 따라 이어지고 우리의 발걸음도 청운대로 올라선다. 정면으로 보이는 남산을 중심으로 빌딩숲을 이루는 도심지, 곧게 뻗은 세종로와 경복궁의 근정전까지 수도 서울의 심장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총탄 맞은 소나무를 지나 백악산에 올라서면 오늘 걸어온 북악마루가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우리시민들의 품안으로 들어 왔으니 감회가 새롭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내려와 서울성곽 탐방로 신고소에서 탐방로 확인증을 반납하고 창의문(자하문)으로 올라선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이어주는 천혜의 요새지인 이곳은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으로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다. 창의문을 뒤로하고 청운동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최규식 총경의 동상이 있고 인왕산 길을 따르면 청운공원이 펼쳐진다.
인왕산 둘레 길을 걷는 주민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10여 분간 진행하면 오른쪽으로 등산 안내표지와 군 초소가 있어 이곳이 인왕산 들머리가 된다. 인왕산 호랑이라면 울던 아기도 멈추었다는 전설이 내려올 만큼 숲이 무성했다지만, 무악산과 함께 험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옹골찬 바위산이다.
높이 338m의 인왕산은 수도서울의 진산(鎭山) 중의 하나이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北岳)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명산이다.
인왕산은 수십 갈래의 등산로가 있어 어느 곳으로 올라도 도심지를 굽어볼 수 있는 경관이 좋다. 특히 청와대를 비롯한 경복궁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이라 사진촬영이 금지되며 1968년 1월 21일 이후 군사적인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부터 개방되었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鄭歚)의 《인왕제색도》가 유명하다. 조선개국초기에는 서산(西山)이라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정상에 올라서면 커다란 화강암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지만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사직공원 쪽의 남릉을 타고 내려오다 모자바위와 범 바위 못 미친 지점에서 무악재가 내려다보이는 오른쪽 소나무 숲속으로 오솔 길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건너편으로 안산을 바라보며 내려선 곳이 3호선 무악재역이고 이곳에서 2구간을 마감한다.
인왕산 오르는 등산로 입구


인왕산의 기차바위 봉


인왕산 정상의 바위

군 부대가 있는 인왕산 주 능선 성우측으로 희미한 길이 무악재로 가는길


건너다 보이는 안산
'수도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산 종주길. 3 (0) | 2011.09.24 |
---|---|
북한산 종주 길 .1 (0) | 2011.09.09 |
조조봉과 꼭지봉 (0) | 2011.04.11 |
관악산 - 6봉, 8봉 종주 (0) | 2010.10.26 |
유명산 시산제를 다녀오다 (0) | 2010.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