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갈령(443 m) - 신의터재(320 m) / 23.5km
갈령은 상주시 화서면에서 화북면을 거쳐 괴산으로 넘어가는 977번 지방도로의 고개 마루다. 갈령 삼거리까지는 백두대간 중에서 유일하게 자동차가 오르지 못하는 곳이라 30여 분간 진입로를 따라 걸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갈령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는 충북알프스의 구병산 줄기가 흐르고, 왼쪽은 갈령에서 분기한 청계산(877m)과 대궐터산(746m)이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로 맥을 이어간다. 대궐터산은 경북 상주군 화서면 하송리에 있는 산으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장군이 이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고 하여 대궐 터 산이라 부르고 있다.
완만한 대간 길에 무명봉을 넘어 안부에 도착하면 생태계의 보고인 습지대가 있다. 비만 오면 물이 고여 천지라 일컬으니 655m 분지위에 펼쳐지는 못제여! 늪지여! 신비한 그대를 영원히 보호 하리. 백두대간에는 지리산의 왕등재 늪지대와 함께 유일한 못인데, 약 오륙백 평 정도의 넓이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이 주변 지방을 장악해 나간다. 이때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 장군과 견훤이 세력 다툼을 하며 싸움을 벌인 족족 황충이 패하고 만다.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부하를 시켜 미행한 끝에 견훤이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낸다.
황충은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임을 알고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푼다. 그러자 견훤의 힘이 사라지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를 했다고 한다. 이 못제에 얽힌 전설은 대간 마루금 동쪽에 있는 대궐터 산의 성산산성, 속리산 자락인 화북면 북암리 견훤산성과 함께 천하를 호령하고 싶었던 견훤의 야망을 대변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무명봉을 넘어서면 척박한 왕 사토에 등이 굽은 소나무들이 뒤틀리고 휘어지고, 만고풍상 설한풍에 모진 고초 다 겪으며 모진생명 이어가는 모습이 우리네 민초들의 삶과 흡사하지 않은가? 암릉을 넘나들며 헬기장에 도착한다.
답답한 수림 속에 간간이 나타나는 암봉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구병산과 봉황산, 대궐터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510봉 오르는 길이 고단한 몸에 무리인지 내딛는 발걸음이 무뎌지고 거친 숨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정상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원기를 되찾는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이 정한 이치라. 곤두박질치며 내려앉는 비알 길에 오금이 저려오고 철 계단 딛고 내려선 2차선 포장도로에 말끔하게 단장된 비재(320m)가 반겨준다. 450m 무명봉이 양 옆으로 솟아오르니 깊고 깊은 협곡이 전략적 요충지라. 백만 대군이 몰려온들 두려울 것이 없겠다.
비재는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동관 마을과 장자동을 오가는 고개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비알 길에서 다리 힘이 쭉 빠지도록 안간힘을 다하지만, 한낮의 열기 속에 물먹은 솜뭉치처럼 천근만근 무너지는 몸을 추 수리기에 여념이 없다.
앙증맞은 암 능 구간을 넘나들며 화남면과 화서면의 경계선을 타고 동쪽으로 흐르는 대간 길. 활등같이 구부러진 주능선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편안하고 여유롭다. 하지만 전면에 보이는 봉화산(740m) 오르는 발걸음이 예사롭지가 않다.
산정을 오르는 비알 길에서 온갖 삭신 녹아나며, 심장의 고동소리에 애간장이 다 녹는다. 고진감래라 하였던가? 고생했던 만큼의 보상도 없이 시원치 않은 조망에 실망하며 앙증맞은 표지석에 판독하기 어려운 삼각점을 바라보며 물 한 모금으로 하산 길을 서두른다.
오르는 고통도 내려서는 즐거움이 있기에 참아내는 것이 아닌가. 암릉을 넘나드는 경쾌한 발걸음에 피로도 풀리고 주위를 조망하는 기쁨 속에 30여 분후 안부에 내려서면 울창한 수 림 속에 속절없이 포로가 되어 피톤치드의 향기 속에 취하고 만다.
주위의 지형지물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힘겨운 보행 끝에 정수리에 오른다. 우뚝 솟은 감시 초소에 올라 바라보는 상주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가을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들녘의 끝자락에 윤지미산이 손짓하고 뒤돌아보면 지나온 봉화산이 하늘높이 걸려있다.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비알 길을 내려서면 편안한 길로 이어지고 450봉을 넘고나면 소나무 어우러진 잡목 속으로 빠져든다. 유순한 산등성이에 실바람 산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피곤한 몸에도 생기가 돈다. 잠시 후 25번 국도와 49번 도로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하면 효자마을 표방하는 상곡리 표지석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봉화산 4.6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25번 국도를 따라 화령재(320m)에 도착하여 화령정(1990년 6월 건립)에 올라서면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 표지판이 반겨준다. 한줄기 소낙비에 금강과 낙동강으로 운명이 갈리고, 지나는 골골마다 시세풍습 달라지며 말소리와 행동거지 딴판이라. 오대산의 물줄기는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갈렸어도 양수리의 두 물 머리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으니 어찌 부럽지 않으리.
경북 상주시와 충북의 보은군을 연결하는 국도 25번인 화령재에서 추풍령까지 55km를 중화지구대라 일컫는다. 250m에서 500m의 고도를 유지하는 중화지구대는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과수농사가 잘 되는 비교적 높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자연재해가 적은 편이다.
화령재를 출발한 대간 길은 상주-당진을 이어주는 고속도로(2008년 12월 완공예정) 터널 위를 지나 삼백(누에, 쌀, 곶감)의 고장, 상주의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유순한 산길을 따른다. 405봉을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완만한 등로가 이어지고 짤막한 안부를 지나며 시작된 급경사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정상에 올라서면 돌무더기위에 세워진 초라한 윤지미산(538m)이 반겨준다. 이산의 원래 이름은 소머리 산이라고 하지만, 언제부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윤지미산으로 부르고 있다.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급경사를 이루고 판곡 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405봉에서 윤지미산을 경유하는 대간 길은 판곡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는 형상으로 대간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지만 큰 기복 없이 동남쪽으로 선회하여 무지개산(441m)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간다. 과수원을 지나 서쪽으로 30여분 진행하면 329봉에 이르고,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선회하여 팔음산 포도 홍보 판이 있는 신의터재(280m)에 도착한다.
20. 신의터재(280m) - 큰재( 320m ) / 24.5km
신의터재의 원래 지명은 임진왜란 전까지 신은현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어산재로 개명되었으나. 1995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준신이 의병을 모아 상주성에서 왜적을 도륙하고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을 기리고자 "신의터재"라고 지명을 바꾸게 되었다는 내용이 표지석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신의터재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내서면 낙서리와 화동면 이소리를 오가는 지방도로인데 2차선으로 포장이 되어있고, 이곳에도 어김없이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 이정표가 서있다. 대간은 동남쪽으로 진행되며 큰 기복이 없는 마루금은 포도밭과 숲속을 드나들며 1시간동안 걷노라면, 슬 랩 지대에 도착하고 남쪽으로 백학산(615m)의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안쑥밭 골에서 남쪽으로 달려가던 대간 길은 화동면과 모서면의 경계지점을 지나며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며 남쪽으로 진행을 하다 지기재에 이른다. 그 옛날 도적의 소굴이었다고 해서 적기재라 부르던 지기재는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이다. 양지바른 언덕의 비알에는 이곳의 명물인 포도밭이 즐비하며 농로에는 시멘트 포장길이 산뜻하고, 금강과 낙동강 분수령의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기재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묵정밭과 과수원을 지나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400고지에 오른 이후 평탄한 숲길로 연결되고 임도를 만나 포도밭 사이를 빠져 나오면 개머리 재(295m)에 이른다. 지기재 와 개머리 재는 모서면의 마을을 연결하는 지방도로로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있다. 이제는 산간오지의 두메산골도 포장된 도로를 따라 왕래를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우리의 삶이 펼쳐진다.
햇볕이 따사로운 가을 들녘, 과수원 주위를 둘러보면 까치와 산비둘기로부터 탐스러운 과일들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처 놓은 그물망을 보게 된다. 자연보호도 좋지만 농민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된다. 개머리 재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마루 금을 따라 과수원과 숲길을 따르면 모서면과 모동면의 경계지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면의 경계선을 따라 동쪽으로 대간길이 이어지고 20여 분후 모서면 대곡리와 공성면 효곡리를 이어주는 임도를 만나 백학산(615m)오름길이 시작된다. 모처럼 만나는 오름길에서 땀을 쏟으며 올라선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석이 반겨준다. 무성한 잡목으로 조망이 신통치 않지만, 모서면 대포리와 모동면 덕곡리. 공성면 효곡리가 경계를 이루는 3개 면의 꼭 지점이 된다.
백학산 정상에서 면 경계선을 따라 남쪽으로 분기한 줄기에는 성봉산(572m)이 있고 상판 저수지로 연결된다. 하지만 대간 길은 북쪽으로 10여 분간 진행하다 동남쪽으로 구부러지며 477봉까지 이어지고 지그재그로 남진하여 동물 이동통로가 있는 윗 왕실재(400m)에 도착하면 백학산 2.9km 개터재 3.7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왕실임도는 공성면 효곡리에서 외남면 소상으로 연결되는 소로다. 시멘트포장길 중간 중간에 길이 패어 승용차가 다니기에 불편한 곳이다.「국토가 숨 쉬는 곳! -여기는 백두대간」 윗 왕실임도를 가로지르는 육교에 걸린 표어의 글귀다. 동물들은 각기 그 먹이를 취하는 자신의 행동반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로나 임도를 내면서 산줄기가 동강이 나고, 절개지가 생기면서 자신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들고 먹이사슬과 개체수가 줄어들어 서서히 멸종이 된다고 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육교를 만들어 끊어진 산줄기를 이어주는 방법으로, 우리의 자연을 지키려는 노력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중화지구대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큰 기복이 없는 개활지대로 광활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리기다소나무가 무성한 숲속에는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오고, 463봉을 지나며 남쪽으로 대간길이 구부러진다. 지루하리만치 평탄한 길을 따라 505봉에서 서쪽으로 진행을 하면 개터재(350m)에 이른다.
개터재는 효곡리 사람들이 인근의 개터골에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공성면 효곡리와 봉산리를 이어주는 개터재 밑으로는 상판저수지 물을 상주 삼남(청리, 공성, 외남)평야의 농업용수로 돌리기 위해 뚫은 지하수로가 지나고 있다. 개터재에서 마루금은 서남쪽으로 이어지고, 460봉 오름길에서 왼쪽으로 우회로를 따라 산허리를 감아 돌아 남쪽으로 30여 분간 진행하면, 공성면 봉산2리 회룡 마을에서 봉산1리 골가실을 넘나드는 회룡재(340m)에 도착한다.
개터재 1.7km 큰재 3.9km의 이정표가 반겨주는 쉼터는 대간 길에 지친 몸을 쉬어가기에 좋은 곳이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30여분을 진행화면 목장지대가 나타난다. 회룡 목장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이어지는 대간 길을 따라 한 동안 진행하다 숲을 빠져나오면 회룡 목장의 이정표가 자리 잡고 있다. 30여 분후에는 우하재로 불리는 큰재(320m)에 도착하며 또 한 구간을 마감한다.
21.큰재( 320m) - 추풍령(221m ) / 17.7km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평한 곳이 공성면 옥산리와 모동면을 오가는 68번 국도와 920번 지방도를 겸하고 있는 표고 320m의 고개 마루다. 하지만 상주 읍내에서 바라보면 제법 높아 보이는 고개라 하여 큰 재로 부른다고 한다.
정상에는 폐교된 인성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인성초등학교는 백두대간 선상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 1947. 7. 1 설립 되었으나, 최근 도시화와 산업화에 밀려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노인들만 고향을 지키다보니,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어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나마도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어 5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7년3월1일 폐교가 되어 지금은 부산녹색환경연합에서 임대하여 생태학교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변화무쌍한 세월 따라 격세지감을 느끼며, 언젠가는 학생들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대하면서 쓸쓸히 대간을 지키고 있다.
국수봉 3km, 회룡재 3.9km, 공성면 5.3km, 모동면 12.5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대간 길은 박례분 할머니의 집 뒤로 이어진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가면 이곳의 지대가 상당히 높은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오른쪽으로 남실마을과 중남마을의 전답이 펼쳐지고 왼쪽으로 능선과 골짜기가 길게 뻗어 내린 경치를 감상하면서 475봉을 지나 완만한 분지에 도착하면 자작나무 군락지가 펼쳐지고, 잠시 후 전망바위에 오른다.
가파른 경사면을 20여 분간 치고 오르면 국수봉(790m) 정상이다.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615m). 서산(509m). 기양산(469m). 갑장산(806m). 묘함산(733m). 황악산(1.111m).민주지산(1.241m)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백두대간 줄기인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이 된다고 한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정상은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어 국수(菊水)라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정상을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충북 영동군 웅북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청화산에서부터 손잡고 달려온 상주시와도 아쉬운 작별을 한다. 김천시와 접경을 이루는 전위 봉에 오르면 남쪽의 발치 아래로 그 유명한 용문산 기도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1950년 나운몽 목사가 건립한 한국 최초의 기도원으로 50여 만 평의 너른 분지 안에는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실버타운을 조성하고 있다고 하니, 몸과 마음이 병든 환자들의 안식처라고 할 수 있겠다.
용문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암릉 구간이 앞길을 가로막고 가파른 경사면을 치고 오르면 앙증맞은 정상석이 반겨준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은 오늘의 구간 중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687봉에 이르면, 특징 없는 정수리에 잡목만이 무성하다. 왼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분지에는 면소재지보다도 화려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니 용문산 기도원이다.
남쪽으로 구부러진 대간 길은 경사심한 비알 길로 이어지고 바람결에 휘날리는 억새의 춤사위를 뒤로하고 전망 좋은 헬기장에 오른다. 이름 모를 도사의 기도처인 움막을 지나 갈현고개(360m)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무좌골산이 높아 보이지만 큰 어려움 없이 정수리에 올라선다. 이곳의 전망 또한 일품으로 정면으로 묘함산과 오른쪽으로 눌의산이 아스라이 바라보이고, 이어지는 대간 길이 추풍령 저수지를 품에 안고 돌아간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걸리적거릴 것이 없고 2차선으로 포장된 작점고개(350m)에 도착하면 아담한 정자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영동의 추풍령면에서 김천시의 어모면으로 넘나드는 이 고개는 충청도 사람들이 고개 너머 경상도 땅에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기에 여덟 마지기 고개로 부르다가 백두대간 종주 팀들에 의해 작점고개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남쪽의 절 개지를 치고 오르면 가족묘지가 나타나고, 10여분 후에는 묘함산 중계소를 오르는 비상도로(콘크리트 포장)를 따른다. 왼쪽으로 신애원 농장과 김천노인 병원을 바라보며 숲속으로 들어선다. 묘함산으로 이어지는 정상은 대간 길에서 빗겨 나있고 오른쪽으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조금 전의 비상도로와 만난다. 10여 분간 비상도로(500m)를 따라 오르면 군부대와 송신소가 있는 정상이다. 김천시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1급의 조망 터가 전개된다.
대간 길은 비상도로에서 서쪽의 숲속으로 진입하여 사기점고개(390m)로 내려선다. 왼쪽의 너른 분지에는 상금농장이 자리를 잡고, 농장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분뇨냄새는 고향의 향수를 일깨운다. 무명봉에서 서북쪽으로 선회하여 435봉을 지나 502봉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지나온 백두대간(작점고개)이 손금 들여다보듯이 선명하게 보인다.
백두대간을 찾아가는 건각 중에 홀대모의 어느 산객이 지리산의 천왕봉에서 199.79km 되는 지점에 세운200km 표지 목을 만난다. 대간 길을 열어가는 산 꾼들의 지친 몸에 용기를 불어넣고, 종주의 꿈을 실현하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부적이 아닌가 싶다. 무성한 숲속을 달려가는 산객들의 행보가 빨라지고 가파른 비알 길을 치고 오르면 수 십 길 단애를 이룬 금산(384m)의 정상에 올라선다.
마루금의 반쪽을 칼로 도려낸 듯 무참하게 파헤친 모습이 볼 성 사납다. 살점 뜯긴 자병산이 무색하게 통째로 사라질 판국이다. 고속철도 공사구간에 필요한 골재를 채취하는 현장이다. 비운을 맞고 있는 금산은 정상까지 100여m가 넘는 수직벼랑으로 절개되어 가슴이 서늘하고, 아슬아슬하게 마루 금을 따라 철조망을 내려서면 포도밭의 둔덕이 나온다.
오순도순 살아가는 시골마을이 둘로 갈리어 경상도의 김천시와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뉘고, 고개 마루 작은 배나무 밭이 끝나는 자리에 청풍명월의 표지석이 우리를 반긴다. 구름도 쉬어 넘는 추풍령고개는 묘함산(卯含山:733m), 눌의산(訥誼山:743m), 학무산(鶴舞山:678m)의 높은 산에 둘러싸인 221m의 낮은 언덕에 불과한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괴산군의 조령, 영동군의 추풍령, 단양군의 죽령 등을 통하여 소백산맥을 넘었고, 이 가운데 대표적 관문이 조령이었다. 그러나 1905년 추풍령에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한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이 일대는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이 조령까지는 높고 험한 장년기 산맥으로 이어지고, 조령에서 추풍령까지는 낮고 평탄해지다가 다시 높아지는 지형적 특색 때문에 교통의 요지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정기룡장군이 용맹을 떨치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금강의 지류인 추풍령천이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황간면으로 이어지고,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이 남쪽 사면에서 발원한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대전-김천을 잇는 국도가 이 계곡을 통과하며, 남쪽에는 추풍령역과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이 휴게소에는 식당을 비롯한 각종 부대시설이 있으며, 이곳에서 서울 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서울-부산 간의 절반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다.
22. 추풍령(221m) - 궤방령(300m) - 우두령(720m) / 23.5km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
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어 울고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거칠은 두 뺨 위에 눈물이 어려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
남상규의 추풍령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이어지는 대간 길. 서쪽으로 경부선 철도를 가로질러 고속도로 지하통로를 빠져나오면 포도밭의 둔덕이 보이고, 곧바로 눌의산 오름길이 시작된다. 추풍령의 고도가 221m이고 눌의산 고도가 743m이고 보니 500m가 넘는 고도차를 극복해야한다. 내 노라 하는 건각들도 지레 겁을 먹게 되고, 7-8월 삼복더위라도 만나면 기가 질리고 만다.
1시간 이상 갖은 고초를 겪으며 올라선 눌의산(743m). 추풍령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막힘없이 펼쳐지는 조망으로 답답하던 가슴속이 시원하게 열린다. 지나온 중화지구대의 끝자락에 속리산의 천왕봉이 가물거리고 서쪽으로 황악산이 자태를 뽐낸다. 아래위로 두 개의 헬기장이 있는 정상에는 아담한 표지석과 1981년 개설된 영동 22번 삼각점이 있다. 그 옛날 나라에 긴급한 일이 있거나 외적이 침범했을 때 봉화를 피워 올리던 군사적인 요충지이기도 하다.
올라 올 때 탈진한 체력을 보충이라도 하라는 배려인지, 정상에서 663봉까지는 완만한 능선에 잡목이 무성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거칠 것이 없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장군봉(606m)에 올라 비알 길로 내려서는 왼쪽으로 가지런히 조성된 금릉공원묘지가 보기에 좋다. 높고 높은 가성산(716m)을 향해 가파른 사면 길을 치고 오를 때, 음달편의 앙상한 굴참나무는 겨울잠이 한창이고 잔설이 분분한 낙엽 속을 헤집고 쑥부쟁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갈참나무 숲속에 가려진 정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오금이 저려오는 산 비알에서 죄 없는 나무 등걸 부여잡고 혼신의 힘을 쏟아낸다. 오가는 산 꾼들에게 시달림 당하는 물푸레나무는 길옆에 뿌리내린 죄로 뿌리까지 드러낸 채, 손찌검에 시달린 마디마다 상처투성이다. 가성산의 비알 길을 내려서면 샛노란 생강 꽃이 봄을 재촉하고, 양지바른 뫼잔 등에 진홍빛 할미꽃이 머리 풀어 실바람 속으로 시집을 보낸다.
오래 골 소류지를 지나는 능선에서 동남쪽으로 구부러진 대간 길은 418봉에서 서남쪽으로 선회하여 궤방령으로 내려선다.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이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를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管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科擧)길이고, 한양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눈길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이기도하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박이룡(朴以龍)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이기도하다.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덕을 기린 황의사(黃衣祠)라는 사당이 있다. 민족의 정기를 받은 백두대간이 300m로 몸을 낮추는 괘방령. 추풍령을 넘어 과거를 보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할 것이요, 과거 급재를 알리는 방이 붙는 괘방령 넘어서 과거를 보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속설에 따라 선비들이 즐겨 넘었다는 곳이다.
괘방령은 영동군 매곡면에서 길을 잡아 넘자면 이곳이 진정 고개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평탄하기만 하다. 고갯마루는 906번 지방도만 지나는 것이 아니라, 대간의 마루금도 함께 지나므로 괘방령 사거리인 셈이다.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악인의 길이요. 영동군 매곡면과 김천시 대항면을 이어주는 906번 지방도는 향리사람들의 정을 잇는 삶의 통로인 셈이다.
궤방령에서 서남쪽으로 진행하면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의 경계를 지나게 된다. 한국가스공사와 매일유업 영동공장을 좌우에 거느리고 활처럼 휘어진 대간의 끝자락에 황학산(1.111m)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급경사를 치고 오르면 오른쪽으로 여우굴이 나타나고 잠시 후 어촌소류지가 내려다보이는 평평한 봉우리가 여시골산이다.
옛날 노모를 모시고 사는 영복이라는 순진한 시골 노총각이 있었다. 가난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영복은 편찮으신 노모가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얼음 띄운 콩국이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총각들이 영복을 놀려줄 요량으로 여시골산에 가면 얼음을 구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순진한 영복은 동네 총각들의 말만 믿고 여시 골을 찾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여 폐 암자에 쓰러지는데, 때마침 구미호가 사람의 간을 빼먹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영복의 효심에 감탄한 구미호는 자신을 보았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영복을 살려준다.
얼마 후 영복이네 집에는 묘령의 여인이 찾아들고 영복이와 혼례까지 치르게 된다. 세월이 흘러 딸아이까지 낳게 되지만 미역국조차 제대로 끓여 먹이지 못하는 형편에 영복은 가슴을 아파한다. 이즈음 부인은 밤마다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가 값진 구슬을 가지고 돌아온다.
영복은 여시골산에 가서 구미호를 보았던 이야기를 무심코 꺼낸다. 이때 부인이 갑자기 백발 구미호로 변한다. 사실 영복이 십년간만 비밀을 지켜주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구미호였으나 내일이 바로 그 10년을 채우는 날이다. 영복이 하루만 더 참았더라면 영원히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구미호는 언약을 이행하지 않는 인간의 간사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두 아이를 데리고 홀연히 떠난다는 전설이다.
여시골산에서 운수산(680m)까지는 완만한 오름길이다. 황악산의 정수리를 표적으로 소잔등에 올라탄 기분으로 직지사의 갈림길에 이른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는 신라의 눌지왕(418년)때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개창하며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645년(선덕여왕14년) 자장율사가 중창한 이래 930년(경순왕4년), 936년(고려 태조19년)에 천묵대사와 능여대사가 각각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사명대사가 출가하여 득도한 절로도 유명하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1735년 중건)을 비롯하여 천불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1661년 창건), 약사전,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사명각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동6각 사리함(국보 제208호), 석조약사 불 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3층 석탑 2기(보물 제606호), 등이 있다.
직지사 갈림길에서 휴식을 한 뒤, 황악산을 오르는 길은 속리산의 천황봉(1.058m)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1.000m가 넘는 봉우리이다. 500여m의 고도를 극복해야하는 어려운 코스지만, 직지사와 같이 유서 깊은 사찰을 품에 안고 오르는 길이라 큰 어려움 없이 정상에 올라선다. 자연석에 새겨진 표지석하며 엉성한 돌무더기에 실망감이 들기도 한다.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의 경계를 이루는 황악산은, 옛날 학이 많이 찾아와서 일명 황학산 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3개의 능선이 분기하는 정상에서, 북서방향의 지릉은 곤천산을 빚어 놓은 후 영동군 상촌면으로 내려가 평지로 변하고, 북동방면은 대간의 궤방령으로 정남쪽은 우두령으로 이어진다.
표지석이 없는 형제봉에 이르면 바람재 1.3km 황악산 0.9km 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잠시 후 직지사로 내려가는 신선봉(944m)갈림길을 지나 넓은 헬기장이 있는 바람재(810m)에 도착한다. 바람재는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의 경계지점이다.
왼쪽으로 목장의 초지가 펼쳐지고 바람이 많이 불어 바람재라는 이름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골바람이 여간 아니다. 표지석의 좌․우에는 우두령 4.45km, 궤방령 8.4km라고 쓰여 있고 공터의 나무 아래는 쉬어갈수 있는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바람재 목장의 임도와 동행을 하다 서쪽으로 구부러지는 대간 길은 송신탑을 지나 여정봉(1.030m)을 오른 후, 남쪽으로 선회하여 잡목이 무성한 숲속을 오르내리며 삼성산(985m)까지 이어진다. 삼성산 에서도 큰 기복 없이 이어지다 870봉에 이르러 서쪽으로 선회하여 하산 지점인 우두령에 도착한다.
23.우두령(720m) - 부항령 (680m) / 18.5km
720m의 우두령은 화주봉과 황악산의 고산준령을 쉽게 넘기 위함인지, 소의 잔등처럼 허리를 낮추어서 질 매 재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야생동물의 이동통로로 관문을 열었으니 보기에도 장관이다.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자연을 보호하자는 발상에는 가상한 일이 아닌가?
경북 김천시 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을 넘나드는 579번 지방도로를 넘어서면 계곡에서 피어나는 운해가 신비롭기 그지없다. 야생동물 통로를 따라 대간 길이 열리고, 지난밤에 내린 비로 진흙탕 비알 길에는 얼음 깔린 복병으로 엉덩방아 찧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가쁜 숨 몰아쉬며 정상으로 향할 적에 안개 속에 묻혀있는 삼각점(영동 461)을 확인하며 814봉을 지나간다. 앙상한 다래 숲이 온몸을 할퀴고 산초가시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사방천지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면서 순식간에 헬기장을 지나고도 1,162봉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앞 사람의 거친 숨소리 따라 암흑 속을 달린다.
완만한 오르막에 거침이 없지만, 五里霧中으로 답답한 공간 속에 포로가 되어 개념도를 본다고 알 수 가 있나. 수많은 리본들이 홍수를 이루지만 이정표하나 없는 야박한 인심 속에 1시간 만에 화주봉 정상에 오른다. 하지만 이곳이 화주봉 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며 정상을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30여m의 벼랑길에 로프를 잡고 미끄러운 바위와 씨름하며 올라선 곳이 1,175봉이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최고의 전망대도 안개 속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그 보다 더 큰 실망은 30분전에 화주봉 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뒤 늦게야 알았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앞서가는 사람. 뒤쳐지는 사람.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안개 속을 헤치며 마음을 비운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안개속의 솔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통통하게 물오른 진달래의 천국이 가관이다. 약산의 진달래로 시작되는 우리나라에는 대구의 비슬산, 창녕의 화왕산, 마산의 무학산, 장흥의 천관산, 여수의 영취산까지 방방곡곡 야산마다 붉게 타오르는 봄을 찬미하여 금수강산이라 하지 않던가? 오호라 좋을 씨고.
헬기장(1,089봉) 하나 훌쩍 넘어 내리막길에서 단독 종주하는 대간 꾼과 얼굴을 마주친다. 반가운 인사로 작별하고 한 없이 내려딛는 발걸음은, 급경사가 아니라도 밀 목재가 가깝다는 것을 예고한다.
세찬 바람 속에서도 고개 마루에 당도하니, 좌우로 오간 흔적이 낙엽 속에 묻혀지고 사방을 둘러봐도 물먹은 늪지대라. 앉을 자리 편치 않아 엉거주춤 선 자세로 안개 속에 밥 말아먹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이산저산 오르며 “산 행기에 사진까지”인터넷에 올리면 고맙게도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어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산을 찾는데, 최❍❍여사와 조우하여 인사를 나누고 보니 진실한 팬인지라 이 아니 반가운가?
오르고 또 오르며 거친 숨소리가 하늘에 다다르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길이 빙판 길에 미끄러져도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지친 몸을 달랜다. 삼각점(영동 459)이 뚜렷한 1,123봉에 올라서니,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이정표가 선명하고 오늘의 고행도 이곳에서 끝이 난다. 쉬엄쉬엄 너른 분지 삼 미 골재에 도착하니 이정표와 리본들이 홍수를 이룬다.
삼도봉 오르는 나무계단이 하늘로 오르는 징검다리인가? 안개 속에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물 한리와 해인 마을이 삼미골재를 사이에 두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오순도순 살아가는 정다운 이웃이다. 대간 길이 끝나도록 보지 못하던 조릿대, 한겨울 눈 속에서도 독야청청 곧은 절개로 지조를 지키니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세상인심이지만 너희들이 있으니 외롭지 않다.
미니미골 내려서면 우렁찬 무지소에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내리고, 민주지산 오르는 갈림길을 지나면 정다운 물 한리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밭두렁 논두렁 동구 밖에도 감나무 고목들이 마을을 살찌우며 자식들 뒷바라지에 톡톡히 한 몫을 한다네.
물 한리 주차장에 도착하며 확인한 만보기는 18,523보. 대 간길 치고는 짧은 여정에 진입로 까지 합해도 12,7km에 불과 하지만 5시간 동안 안개 속을 헤치며 진흙탕 길을 빠져나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늘로 향하는 나무계단이 지친 몸에 무거운 족쇄가 되어 애를 태운다. 남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삼도의 화합을 이루는 희망의 탑이 솟아있다. 세마리 거북의 받침대에 지구모양의 둥그런 조형물을 떠 받들고, 매년 10월 10일이면 三道 民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조아린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화전봉 이었으나 조형물을 세우면서 이름까지 三道 峰이라 부르고 있다.
충북 영동군 용화면과 전북 무주군 설천면. 그리고 경북 김천시 부황면에 걸쳐있는 삼도봉이 일반에게는 영동의 민주지산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동군 상촌면에 위치한 물 한계곡이 워낙 유명하고, 산행들머리로 이곳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삼도봉에 오르면 남쪽으로 대덕산(1.290m)과 덕유삼봉(1,254m)이 조망되고, 서쪽으로 석기봉(1,205m)과 민주지산(1,241m) 각호산(1,176m)으로 이어지는 각호지맥이 분기된다.
동쪽을 바라보면 금오산(976m)과 가야산(1,430m), 북쪽으로 지나온 황악산(1,111m) 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라와 백제가 접경을 이루었던 이곳은 진달래 군락지로도 유명하고, 민주지산과 연계되는 물한리 계곡은 용소와 의용골 폭포, 음주골 폭포 등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여름이면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겹겹이 포개진 산 자락 사이로 아늑한 해인리 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인상적이다.
소백산에서 시작된 충북의 지경을 벗어나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잠시 후 해인산장 갈림길에 이르면 삼도봉 0.5km 해인리 0.5km 삼도광장 3km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목장지대 초원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설치한 나무계단을 따르면 삼도봉을 떠나 온지 1시간 만에 1,170봉에 도착한다.
전망이 신통치 않은 정상을 뒤로하고 남진하는 중에 대간 길이 동남쪽으로 구부러진다. 1시간이 넘도록 지루하게 세미 암릉 구간을 지나 올라선 곳이 백수리산(1,034m) 이다. 정수리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970봉에 올라서면 대간은 또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주능선을 따른다. 남쪽으로 내려서면 무풍면 금평리 쑥병이 마을과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가목마을을 잇는 1,089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부항령(680m)에 이르고 삼도봉 터널이 관통한다.
24.부항령(680m) - 신풍령(930m) / 20km
삼도봉 터널의 절개지를 치고 오르면 부항령이다. 다소 완만하게 이어지는 대간 길은 흐드러진 야생화와 멧돼지의 천국이라 머리가 곤두서는 긴장감으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삼각점이 있는 853봉을 지나 1시간동안 지루하게 걸어가면, 녹지사업이 한창인 폐광 터가 나오고 833봉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덕산재(640m)로 내려선다.
30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 마루는 무주의 나제통문과 관기를 오가는 길목이다. 쌍방울에서 운영하던 주유소는 폐허가 된지 오래 이고, 산 삼 파는 전시장도 돌보는 이 없이 쓸쓸이 덕산재를 지키고 있으니 대간을 넘는 산 꾼 들이 어찌 반갑지 않으리.
망덕산 아래 펼쳐지는 무풍 땅은 격암 남사고(조선 명종 때 철학자로 위대한 예언가)가 덕유산 근처에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는 양반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들어와 그들이 남겨둔 유적이 지금도 백산서원, 죽림서원, 춘향서원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성벽으로 이루어진 나제통문(일제시대에 뚫렸다고 함)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자 영토다툼으로 인하여 수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무풍은 원래 신라 땅이었고, 현재는 전북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습, 생활이 김천과 거창에 가까운 곳이다.
640m의 덕산 재에서 1,290m의 대덕산을 오르자면 웬만한 산 하나를 포개 놓은 듯 처다만 봐도 아찔하게 현기증이 난다. 숨이 턱에 차도록 가파른 비알 길에서 안간힘을 쓰는 중에, 벼랑길 한 모퉁이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다.
멀고먼 대간 길에 샘터를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해발 1,000m 가 넘는 곳에서 솟아나는 샘터는 지나는 산짐승까지도 목을 축이는 곳. 하늘이 내려주신 용천수에 감사하며 다리쉼을 하는 곳에 詩 한 구절 걸렸으니 ❉얼음골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는 길손이시여, 사랑하나 풀어 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용천수 한 사발에 용기를 내어 1,290m의 정수리에 올라서면, 검은 오석으로 단장한 대덕산 표지석이 반겨준다. 백두대간을 알리는 스텐 표지판을 중심으로 1988년 재설된 무풍 22호 삼각점과, 모든 측량의 기준점이되는 삼각점이 있다.
봉황을 닮은 산세는 대덕산을 몸통으로 하여 백두대간이 힘찬 날갯짓을 한다. 꼬리의 깃털에 해당하는 수도지맥과 가야지맥, 금오지맥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망덕산으로 향하는 부리는 알(풍수지리에서는 망덕산이 봉황의 알을 닮았다고 한다)을 보호하려는 어미의 날카로움과 온화한 눈매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뉘 라서 자연의 섭리를 거역할 것인가! 거대한 봉황이 날고 있는 형태가 너무도 생생하여 요즘도 대덕산이 품어내는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덕산(1,290m)과 삼도봉(1,248m)사이 수백만평의 평원위에 펼쳐지는 억새들의 천국.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탓으로 자연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작은 키에 줄기도 가늘지만 풀어헤친 백발이 세찬바람의 시련에도 꺾일 줄 모르니, 질경이와 함께 우리 민초들의 뿌리가 아닐 런지.
지리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을 지나노라면 경남 하동과 전남 구례, 전북 남원이 분수령을 이루는 반야봉 아래 삼도봉(1550m)이 있고, 민주지산으로 유명한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 경북 김천을 아우르는 삼도봉(1,172m)을 만나게 된다. 위의 두 곳은 유명세로 스타의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지만 초점산(1,248m)으로 부르는 이곳은 동강난 표지 석에 돌보는 이 없이 억새들의 울음소리만이 석양노을에 메아리친다.
거창과 무주, 김천을 아우르는 삼도봉 정상은 사방팔방 거침없이 백리 길을 열어준다. 건너편의 삼봉산(1,254m)이 하늘높이 걸려있고 고랭지 채소밭이 내려다보이는 부흥동 마을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은 것이 자연의 이치이니, 덕산 재에서 대덕산을 오르며 당했던 고통도 소사재 내려가는 행복으로 즐거움을 만끽한다.
가파른 비알 길을 내려오며 맞는 골바람은 그동안 쌓인 피로도 싹 가시고, 억새들의 춤사위에 어깨춤이 절로난다. 채소밭이 시작되는 둔덕에는 사랑이란 커다란 표지석이 반겨준다. 고랭지 채소밭을 일구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길을 바라보며 단풍나무 묘목단지를 지나면, 수확이 끝난 들녘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1089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소사고개에 도착한다.
해발 670m인 소사고개를 축으로 하여 북쪽에 있는 대덕산이 1.290m이고, 남쪽에 있는 덕유 삼봉이 1,254m로 양쪽 산의 정상에서 소사 고개를 바라보면 높낮이가 600여 m에 이르는 포물선을 그리는 협곡을 이루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서 물줄기 또 한 나누어지니 무풍(십승지지 중 한 곳인 무풍은 연풍. 현풍과 더 불어 삼풍이라 하였다)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금강을 따라 서해바다로 흘러들고 거창쪽 물줄기는 황강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낙엽송이 숲을 이루는 계곡으로 들어서면 하늘도 보이지 않는 수림 속에서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잠시 후 철조망을 지나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급경사 깔딱 고개는 잠시도 쉴만한 휴식공간도 없이 갈지자로 고도를 높이고 싸리나무와 산딸기, 억새밭에 철쭉나무의 키 작은 관목들이 대간 길을 가로막는다.
맞바람도 힘에 겨운 지친 몸으로, 가는 길이 고단해도 종주라는 사명감으로 멈출 수 없어 천근같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천신만고 끝에 덕유삼봉(1,254m)에 오르면 수도, 가야지맥의 산군들인 금오산, 수도, 비계산, 별유산, 기백산과 남덕유산은 물론이요 향적봉(1614m)과 투구봉(932m)까지 조망된다.
지나온 대덕산과 초점산(삼도봉)을 바라보며 고진감래의 희열을 맛본다. 3개의 암봉이 솟아있는 삼봉산은 세 번 째 봉우리에 표지석이 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첫 번째가 가장 높아 보인다. 눈짐작으로 만족하고 오늘의 산행 구간 중에서 가장 스릴 있는 2봉에서 로프도 잡아보고 아슬아슬한 구간을 통과한다.
삼복더위에는 애를 먹을 급경사 구간이지만, 시원한 바람결에 수월하게 정상에 올라서니 아담한 돌탑과 정상석이 반겨준다. 북쪽으로 대간을 종주할 때 덕유산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고 하여 덕유 삼봉이라 하지만 산경표에는 덕유 삼봉에서 시작하여 백운산까지를 덕유 100리길이라 하였으니, 소사고개에서 시작하는 산줄기를 덕유산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삼봉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급경사를 내려서면 호리골재가 기다린다. 빼재 3km 삼봉산 1km 금봉암 0.5km의 이정표가 반겨주는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면 답답하던 마음이 활짝 열린다. 된 새미기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수정봉(1,050m)에 올라서면 별 특징이나 이정표도 없이 바람결에 스치기 십상이다. 완만한 비알 길을 내려서면 굽이굽이 돌아가는 신풍령 고개 길이 내려다보이고, 급경사 절 개지를 내려선다.
고개 마루 절개지에 번듯하게 세워진 수령(秀嶺)이라는 표지 석이 눈길을 끈다. 원래 이곳은 도적들의 소굴이 있던 곳으로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버려진 뼈가 산을 이루었다하여 뼈재라 부르다가 경상도의 억센 발음으로 빼 재, 빼 재 하다가 빼어나다라는 말을 빌려 수령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표지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고개아래 마을 이름을 빌려 상오정 고개라고도 하고, 추풍령을 본떠 신풍령으로 부르기도 한다. 무주구천동과 거창을 잇는 37번국도가 많은 이름으로 유명세를 달리하고 있으니 대간꾼들에게는 흥미로운 곳이다.
25. 신풍령(930m) - 육십령(734m) / 29km
이번구간은 덕유산 국립공원을 지난다. 덕유산은 1975년 오대산과 더불어 국내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태백산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소백산, 속리산을 솟구치며 다시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 그 중심부에 빚어 놓은 또 하나의 명산이 바로 덕유산이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와 장수, 경상남도 거창과 함양군 등 2개도 4개 군에 걸쳐 솟아 있고, 주봉인 향적봉(1,614m)을 중심으로 1,300m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장장 30여km를 달리며 동쪽은 고산준령이, 서쪽은 우리나라 제일의 곡창인 호남 벌을 품고 있다.
산뜻하게 단장한 팔각정을 뒤로하고 서쪽의 빼봉(1,039m)을 향하여 대간길이 시작된다. 워밍업을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봉우리 3개를 넘은 뒤 1시간 20분간 진땀을 빼고 나면 갈미봉(1,210m)에 올라선다. 덕유산의 고산준령들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전망대에서 서남쪽으로 남덕유산(1507m)이 아련히 마루 금을 이루고, 20여km가 넘는 그곳에는 산 꾼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거창군에서 세운 앙증맞은 표지석에 입맞춤하고 지나온 삼봉산을 돌아본다. 거창군 북상면과 고재면이 경계를 이루는 호음산(929.8m)줄기가 뚜렷하게 능선을 이루며 남쪽으로 달려간다. 대간 길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1km 거리에 있는 대봉(1,263m)까지 완만하게 진행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장관을 이루어 서쪽으로 달려가는 대간길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주봉인 향적봉(1,614m)과 칠봉(1,305m)을 품에 안은 무주구천동 3십리계곡의 푸른 숲이 비단결같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투구봉(1,274m)으로 향하는 능선을 따라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이 경계를 이룬다. 신풍령 3.6km 횡경재 4.2km 송계삼거리 7.4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200여m의 급경사를 내려서는 비알 길은 팔뚝보다 굵은 싸리나무와 잡목이 무성하다. 반대로 올라올 경우, 한 여름에는 더위와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하고, 한겨울에는 눈 속을 헤치는 고통이 따른다.
달음령(월음령1,078m)에 도착하면 북쪽으로 무주구천동과 남쪽의 송계사 지구 소정리와 연결되지만 횡경재보다 지리적으로 불편한 곳이라 탈출로가 여의치 않아 보인다. 국립공원 구간답게 촘촘히 세워진 이정표를 따라 지봉(1,342m)으로 오르는 길은 종주에 지친 산 꾼들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복병이앞길을 가로 막는다. 1.4km의 거리가 한없이 멀어만 보이고, 270m의 고도를 극복해야하는 마의 구간이다.
신풍령에서 백암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저마다 시원한 조망으로 지봉(1342m)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덕유 평전과 무룡산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지봉은 우리말로 못 봉인데 옛날에 이 근처에 큰 연못이 있었다는 유래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거창군에서 세운 앙증맞은 돌비석이 눈길을 끈다. 이정표에는 송계삼거리 4,9km 신풍령 6,1km가 가리키듯 어느 쪽을 보아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설상가상으로 급경사 내리막길에는 겨우내 쌓인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 따라 허들 경기하듯 장애물을 넘다보면 허벅지가 뻣뻣하게 굳어온다. 헬기장에 내려서면 몰아치는 칼바람이 온 몸을 정신없이 흔들어대고, 바람피해 내려선 눈구덩이도 쉬어갈만한 장소로는 마땅치가 않다.
횡경재(1,350m)에 도착하면 만고풍상 설한풍에 고개를 내민 산죽의 고고한 자태에 그저 머리가 숙여진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분지를 찾아 잠시 휴식을 하고 백련사와 송계사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이르면 송계삼거리 3.2km, 빼재 7.8km의 이정표와 안내판이 있어, 종주 길에 지친 산객들이 탈출할 수 있는 하산 로가 열린다.
횡경재에서 1.1km를 진행하면 싸리등재(1,300m)가 나오고, 이곳에서 완만하게 800여m를 오르면 귀봉(1,370m)이다. 이곳 또한 전망이 좋아 눈 속을 헤치며 지나온 지봉과 대봉, 갈미봉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끝없는 설원 속에서 갈 길을 잊은채 망부석이 돠고 만다. 귀 봉을 지나는 동안 겨우내 내린 눈이 앞 길을 가로막는다.
철쭉이 만발하던 오뉴월엔 까치발로도 닿지 않던 나무들이 수북하게 쌓인 눈 속으로 물구나무서며 엉거주춤 내딛는 발걸음에 몽둥이 찜질을 퍼붓는다. 이마에 불거진 혹을 어루만지며 몽둥이찜질 피하려다 눈 속으로 나뒹굴고 마니, 이래저래 겨울산행은 불청객의 수난이다.
상여덤(1,430m)을 지나 도착하는 송계 삼거리(백암봉 1,503m)는 향적봉(1,614m)과 동업령(1,260m)이 분기하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신풍령에서 악전고투하며 걸어온 11km의 대간 길도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업령 쪽으로 진행한다. 덕유산을 찾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등산로라 고속도로보다도 편안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저자거리를 방불케 한다.
북쪽의 완만한 덕유평전 설원위로 시선을 돌리면 중봉(1,594m)을 지나 향적봉에 이르는 분지에는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나뭇가지마다 만발한 상고대가 겨울 산의 백미를 이룬다. 겨울이 가고 따듯한 봄이 찾아오면, 앙상하던 철쭉도 분홍 옷으로 갈아입고 샛노란 원추리가 만발하는 오뉴월에는 전국에서 찾아드는 상춘객으로 또다시 사랑을 받게 된다.
자그마한 표지석이 눈 속에서 빼 꼼이 고개를 내미는 백암봉에서 남쪽으로 본격적인 대간 길이 이어진다.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부드러운 능선이 내려서는 길이라 편하지만, 반대로 올라온다면 또 한 번 애를 먹는다. 무릅까지 빠지는 눈구덩이를 헤치며 2.2km거리를 진행하면 안성면의 칠연 폭포 쪽에서 올라오는 동업령(1,320m) 삼거리와 만난다.
덕유산의 거센 바람을 피해 털벙거지에 중무장을 하고도 추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큰 기복이 없는 능선 길을 900여 m 진행하면 동업령(1,260m)이다. 안성면 칠연폭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만나는 덕유 종주의 중간기착지로 이곳에서 지친몸에 숨 고르기를 한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1,350고지를 올랐다가 또 한 봉을 넘어서면 돌탑이 있는 무명 봉이다. 동업령 2km, 삿갓재 대피소 4.2km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거칠 것이 없다.
돌탑에서 40여분을 진행하면 무룡산(1,491m)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일품이어서 남덕유산(1,507m)과 서봉(1,510m)이 낙타 등처럼 쌍봉을 이룬다. 동쪽으로 수도산(1,316m)과 가야산(1,430m)이 남쪽으로 금원산(1,353m)과 월봉산(1,279m)을 비롯하여 거창의 고산준령이 한눈에 조망된다.
원추리를 비롯한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희귀식물들을 보호하기위해 나무계단에 폐타이어로 깔아놓은 길을 따라 2km를 내려서면 삿갓재(1,280m) 대피소에 도착한다. 덕유산을 종주하는 팀들이 하룻밤을 묵게 되는 삿갓재 대피소는 정원이 45명에 4명까지 예약이 가능하다.
2층 목조건물로 1층은 남자, 2층은 여자전용이고, 부부인 경우 2층사용이 가능하다. 보일러 가동으로 잠자리가 편안하여 추위에 지친 산 꾼들이 찾아드는 명소로 소문이 자자하다. 하루저녁 쉬어가는 데는 8,000원이면 족하고, 담요 1장에 1,000원으로 2장이면 충분하다. 약간의 먹거리도 있어 햇반 3,000원, 사발면, 참치 캔, 깻잎 2,000원, 꽁치 캔이 4,000원이다. 술과 샤워시설은 없고, 150m 떨어진 샘을 이용하여 간단하게 조리도 할 수 있다.
삿갓재 대피소에서 700여m거리에 있는 1,340봉은 가파른 오르막길이고, 이곳에서 삿갓봉(1,380m)은 조금 비껴서있다. 갈림길에서 월성재(1,240m)로 내려서는 길이 편안하지만, 반대로 올라오려면 삭신이 녹아나는 고통의 구간이다. 남덕유산 1.4km, 삿갓재 2.9km, 월성통제소가 있는 황점 마을 3.6km의 이정표가 지친 몸을 달래주고, 당일 산행 팀들이 황점 마을로 내려서는 분기점이다.
남덕유산(1,507m). 가파른 비알 길을 치고 오르는 고통 속에 십여 분간 수고하면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멋지고 환상적이다. 동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능선이 남령을 지나 월봉산(1,279m)에 이르고, 거망산(1,184m)과 황석산(1,190m), 금원산(1,353m)과 기백산(1,331m)에 이르는 거창의 고산준령들이 발돋음을 하는 기백산 군립공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비알 길을 내려서면, 월성 재에서 사면 길을 돌아오는 길과 다시 만나는 갈림길(1,398m)이다. 이곳에서 한동안 너덜지대를 지나 산죽이 무성한 야생화단지를 지나면, 철 계단이 가로막고 곧이어 서봉(장수덕유(1,510m)정상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육십령까지는 6.5km가 남았지만 어려운 고 빗길을 모두 넘겼으니 지척이나 진배없이 마음이 홀가분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남덕유산과 함께 덕유산 남쪽지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다. 육십령 너머로 이어지는 대간의 주능선이 끝없이 펼쳐지고, 장수군 장계면의 넓은 들과 계곡이 손금 들여다보듯이 선명하다. 남쪽의 하늘 금에는 백운산(1,278m)과 장안산(1,237m)의 정수리가 아련히 모습을 드러낸다.
빗돌처럼 날카로운 바위틈을 비집고 내려서면 갈증을 풀어주는 샘터가 반겨준다. 곧이어 헬기장을 지나 경남교육청 덕유 교육원으로 내려서는 삼거리에 도착하며 덕유산 국립공원도 끝이 난다. 할미봉까지 2.8km. 평지나 다름없는 오솔길에서 숨고르기를 하며 전망 좋은 할미봉(1,026m)에 올라선다. 대진고속도로가 터널 속으로 시원스럽게 빨려 들어가고, 육십령 오르는 26번 국도가 힘겨워 보인다.
할미봉아래 성터는 옛날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할미성이라 했고, 산봉우리를 할미봉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대포바위(일명 좃대바위)또한 그냥 지나칠 수없는 명물이다. 이제 남은 것은 2.2km, 지루하고 고된 구간도 대미를 장식하며 915봉을 넘어 육십령(734m)에 도착하면 싱그러운 바람이 온 몸을 감싼다.
육십령에는 세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첫째는 장수 감영에서 육십령까지 육 십리 길이고, 안의감영( 현재의 함양군 서상면)에서도 육 십리여서 육십령이라 하고, 둘째는 크고 작은 60개의 굽이를 돌아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육십령이 높고 험해서 도둑들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아 이 고개를 넘으려면 고개아래 주막거리에서 60명 이상의 장정이 모인 뒤에 함께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60령이라고 한다.
26.육십령 (734m) - 중재(640m) / 21km
육십령은 소백산맥이 남진하면서 동쪽의 남강 상류와 서쪽으로 금강 상류인 장계천이 침식작용에 의해 낮아진 부분으로, 남덕유산(1,507m)과 백운산(1,279m)의 안부에 해당한다. 소백산맥이 활처럼 둘러싸고 있어 다른 지방과의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영남지방의 주요교통로로 조령(643m), 죽령(689m), 팔랑치(513m) 등과 함께 영남지방 4대령으로 꼽아왔다.
특히 육십령은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였으며, 현재는 26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사용하던 이 고개는 신라와 백제간에 영토분쟁의 격전지로 함양 사근산성(사적 제152호). 황석산성(사적 제322호) 등 삼국시대의 성곽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깃대봉(1,015m) 밑으로 대진고속도로가 개통된 뒤로 육십령을 오르는 차량이 별로 없다. 고개 마루의 팔각정에 올라 장수군의 너른 들을 굽어보고 남진하는 대간 길은 보무도 당당하다. 큰 기복이 없는 주능선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전망대 바위에 올라선다.
지나온 남덕유산과 서봉 그 아래 할미봉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바쁜 걸음에도 돌아보는 회수가 많아진다.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지압등산로 표지판을 지나 마사토에 나무계단까지 정갈하게 보존하고 있는 깃대봉 샘터에 도착한다.
대장정을 이어가는 산 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이 샘물이다. 600여km가 넘는 종주 길에 반가운 샘터가 몇 곳이나 되던가? 억새능선아래 안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가 종주에 지친 산 꾼에게 갈증을 풀어준다. 감로수로 새로운 활력을 찾아 깃대봉(1015m)을 오르면, 정상에는 조망 안내판과 깃발을 계양할 수 있는 깃봉이 세 개가 있다. 이곳에서의 조망 또한 일품으로 할미봉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 진행하는 주능선에는 백운산(1,278m)과 영취산(1,075m), 장안산(1,237m)과 괘관산(1,251m)의 정수리들이 겹겹이 주름을 잡아 서부경남의 거창과 함양의 산과 계곡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광활한 구릉지에 펼쳐지는 억새들이 푸른 하늘아래 황금물결로 출렁이고, 시원하게 뻗어 내린 대진고속도로가 땅속으로 달려가는 주능선을 지나, 가시덤불 속에 흔적만 남아있는 민령(서상면 금당리에서 오동제 논개 생가로 넘어가는 길)에 이른다.
완만한 능선에는 무성한 억새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산딸기와 산초나무, 청미래덩굴이 앞 길을 가로막아 고통스런 행진이 계속 된다. 하지만 전망 좋은 능선에 올라서면 가슴속이 시원하게 툭 터지고, 미풍이 불어오는 쾌적한 날씨에 4km의 속도로 달려간다.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듬성듬성 나타나는 암봉 들이 억새밭사이로 전망대를 만들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질러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기암절벽 북 바위에 올라서면, 푸른 물결 넘실대는 오동제가 장관을 이루고 깃 대봉 뒤편으로 남덕유산의 자태가 완연하다.
북 바위에서 20여 분을 진행하면 논개생가 갈림길에 이른다. 전북 장수 출신으로 성은 주씨(朱氏)요, 이름은 논개라. 1593년(선조 26년)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593년 6월 김천일(金千鎰), 최경회, 황진, 고종후(高從厚)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된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는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이는 주연에 기녀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고 1721년(경종 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으며, 1739년(영조 15)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1868년(고종 5)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에 의해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지내오다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고 한다.
오르락내리락 지루한 종주길이 푸른 숲에 가려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따금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면 장계면 대곡리와 서상면 옥산리가 그림같이 펼쳐지고, 시원하게 달려가는 고속도로가 지친 몸을 달래준다. 옥산리로 내려서는 조망바위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먼발치에서 손짓하는 영취산과 백운산의 마력에 이끌려 발걸음이 빨라진다.
서덕운봉 전망대에서(덕운봉(983m)은 동쪽으로 200m 빗겨나 있다) 서쪽으로 이어가는 암능을 지나 엇비슷한 봉우리 3개를 넘어 질펀하게 군락을 이루는 산죽 밭을 지나 영취산(1,075m) 정상에 올라선다.
신령 "靈자"에 독수리 "鷲"자를 쓰는 영취산은 결코 평범한 산이 아니다. 우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동쪽은 낙동강으로, 서쪽은 금강으로 흐르는 3강의 발원지도 이곳이다. 또한 서쪽으로 무령고개를 넘어서면 금남호남정맥이 이어진다. 경도 127도 37분 81초에, 위도 35도 38분 23초의 정상에는 검은 오석의 정상석이 기품있게 자리 잡고, 2002년에 복구된 함양 309번의 삼각점이 산 꾼들의 의지를 불태운다.
호남지방의 산과 들을 두루 섭렵하는 금남호남정맥은 장수군 장계면에서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무령고개를 가로질러 장안산(1,237m) 정상에서 서쪽으로 시루봉(1,014m), 신무산(896m), 팔공산(1,151m), 삿갓봉, 성수산(1,059m), 마이산(686m), 부귀산(806m), 주화산으로 이어지는 64km의 산맥이다.
9정맥 중에서 가장 짧은 산줄기지만 1,000m의 산들이 자못 웅장한 산세를 형성하고, 진안의 명산인 마이산을 지나 주화산에서 구드례 나루까지 이어지는 금남정맥과 광양만의 외망포구까지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
중치 8.2km 육십령 11.8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백운산으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하면 억새와 싸리나무가 장관을 이루는 분지에 도착한다. 잠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금남 호남정맥의 선바위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선바위의 빼어난 경관을 멋진 추억으로 간직한다.
오르락내리락 완만한 능선 길에는 조망도 좋고 무성한 산죽의 숲을 헤치며 빠른 속도로 진행을 하다 1,066봉의 양지바른 언덕아래 헬기장에 도착한다. 冬節期에는 山上의 높은 고지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식으로 보온밥통에 담아온 국에 밥을 말아먹는 간편하면서도 신속한 동작으로 배낭의 부피도 줄이고, 소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하는 나만의 행동식으로 10분간의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전망 좋은 암 봉에 올라서면 직경이 30cm에 높이가 10여m나 되는 거대한 철쭉나무가 눈길을 끌고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본격적인 백운산 오름길이 시작된다. 키를 넘는 산죽과 눈(雪)의 만남은 환상적인 슬로프가 되어, 올려 딛는 발걸음이 인정사정없이 미끄러지며 온몸의 체력이 급격히 고갈되고 만다. 걷는 시간보다 멈추는 시간이 더 많은 비알 길에서 천신만고 끝에 정상(1,278m)에 올라서면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듯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으로 가슴속이 후련하다.
정상에는 아담한 돌비석이 자리를 잡고 “同名異山으로 많고 많은 白雲山”그 중에서도 명성은 광양의 동생(1,218m)만 못하지만, 키만은 가장 큰 맏형(1,278m)으로 사방팔방 둘러봐도 거침없이 터지는 조망이 단연 으뜸이다. 남쪽의 하늘가를 바라보라! 지리산의 천왕봉이 웅지를 틀고, 대간의 마루 금이 북으로 달려오며 덕유 평전까지 아련하지 않은가?
경남의 고산준령이 겹겹이 주름을 잡고, 이정표의 기둥에는 "수고하셨습니다." 苦行을 자처하는 산 꾼들에게 정감어린 인사를 건넨다. 또한 서쪽은 어떠한가? 우뚝 솟은 장안산이 호남 벌을 향해 힘차게 飛翔(비상)을 한다. 동쪽으로 서래봉(1,078m)을 거쳐 빼빼재, 괘관산(1,251m), 천황봉(1,228m), 백암산(621m)까지 함양의 기상이 발원하는 산줄기가 힘차게 요동친다.
중치로 내려서는 대간 길엔 월경산(990m)과 봉화산(919m)이 손짓하고 중재까지 2.9km에 내려서는 길이라 편안하기 그지없다. 듬성듬성 솟아오른 전망대에 올라서면 森羅萬象이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빼어난 경관이 펼쳐지는 백운산 자락에서 풍운아도 모처럼 아름다운 정취에 흠뻑 빠져든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내려서는 길은 잠시 후 묘지가 있는 갈림길을 지난다. 함양이 자랑하는 상연대의 물맛을 보고 싶지만, 다음으로 기약하고 묵계암에 관한 문헌을 살펴본다. 전통사찰 제85호(등록 1986. 1. 18)인 이 사찰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신라 말 경애왕 1년(924)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건립하여 관음 기도를 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는 이름을 불러 상연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라 말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을 이곳에 옮겨와 선문(禪門)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역대 고승, 대덕스님들이 수도 정진해 오던 곳으로 천여 년의 영험(靈驗)이 어리고 신령한 수도 도량이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란(戰亂)에 소실된 것을 1953년경에 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이 사찰의 뒤편에는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백운산(1279m)이 우뚝 솟아 있다.
표고 870m인 중고개재에서 뒤돌아보는 백운산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고봉이다. 구름이 끼는 날이 많아 백운산이라 하였던가? 산허리를 감아 도는 운해 저편에 솟아오른 정수리는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토착민들의 숭배의 대상이다. 이제 중치까지는 1.7km의 여정이 남아있지만 완만하게 내려서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백두대간을 밟아가는 산 꾼들에게는 성지순례와도 같이 백운산을 오르는 길목이다.
일 년 내내 외지인들 구경 한번 못하는 중기마을. 산수유 흐드러진 개천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1.5km 거슬러 오르면 함양군 백전면 중기마을에서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로 넘어가는 중치에 도착하며 또 한 구간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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