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중재(640m) - 여원재(477m) /34km
남쪽으로 월경산(990m) 오름 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비알 길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는 산 사태지역. 벼랑을 휘돌아 월경산(988m) 분기점에 올라선다. 장거리 대간 길에서 시간과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 그대로 지나치려는 눈치들이다. 하지만 다시 오기 어려운 월경산을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수북이 쌓인 낙엽위로 잔설을 헤치며 올라선 월경산 정상은 아무런 표시도 없이 찬바람만 몰아친다.
오늘의 구간에서 가장 높은 월경산(988m). 주위를 압도하는 조망으로 전망이 시원하다. 하지만 산 이름이 여인의 달거리와 인연이 있어서 부정을 탄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찾는 이도 별로 없이 홀대를 받고 있어 서운한 마음이 든다.
건너편의 장안산과 지나온 백운산, 진행 할 봉화산을 두루 살펴보고 갈림길로 내려와 20 여분간 지체된 시간을 보충하기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잠시 후 육중한 철조망(특수작물 재배단지)을 따라 된 비알을 내려와 광대치에 도착한다.
억새가 무성한 광대치는 대간 꾼들의 리본이 홍수를 이루고 왼쪽으로 대상동 마을의 계곡을 따라 올라오던 비포장도로가 터널공사 중인 광대치 밑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쇠 음달 북사면을 치고 오르는 무명봉은 유리알처럼 빙판을 이루고, 나무 등걸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일단 정수리에 올라서면 고진감래라는 말이 실감나게 전망 또한 끝내준다.
앙증맞은 암릉을 넘나들며 40여 분간 주능선을 따르면 944봉에 오르고,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무명봉 정상에는 명당자리 찾아 모신 무덤이 후손들의 보살핌 속에 긴긴 세월 복록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세월 따라 명당자리도 변하고 말았으니, 지금은 자가용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로 옆이 명당자리라고 하지 않던가?
이제 봉화산(919m)도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서고, 내친김에 870봉에 오르면 그동안 정들었던 경상남도와 작별하고 남원시 아영면으로 들어선다. 억새가 천국을 이루는 산등성이. 수백만평의 분지에 자생하고 있는 억새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억새의 춤사위가 시작되면 억새의 품속에서 행복감에 흠뻑 빠져든다.
이 무슨 뜬금없는 광경인가? 드넓은 광야의 억새밭에 조림이 한창이라, 황금같은 억새밭이 울창한 수림속으로 사라지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도 답답한 산 길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덩치 큰 정 상석에 919m” 그 뒷면에는 한반도지도와 백두대간이 백두산까지 뻗어있다. 우리의 힘찬 기상과 불굴의 정신으로 백두의 천지까지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련만 언제나 그날이 오려는지. 남쪽으로 웅장한 지리의 영봉들과 북으로 백운산과 장안산을 넘어 덕유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봉화산의 명당자리. 남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한양으로 전달하는 봉화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 겨울. 키를 넘는 폭설에도 자연에 순응하며 용케 살아남은 억새밭의 대평원과 철쭉동산. 영남 알프스와 강원도 민둥산 억새와 견줄만한 장관이 아닌가? 남진하는 대간 길이야 널널하게 내려서는 비단길이지만, 북진하는 이들이 겪는 고초는 굳센 의지가 아니면 넘기 어려운 난관이다.
꼬부랑 재에서 치재까지는 봉화산이 자랑하는 철쭉단지가 너른 분지에 펼쳐진다. 한 겨울 매서운 추위를 이기고 신록의 계절 5월이 오면, 봉화산 자락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상춘객을 불러 모은다. 바래봉의 철쭉제와 함께 절정을 이룰 꽃망울이 입춘추위 속에서도 탱탱하게 여물고 치재의 움푹 패 인 네거리 갈림길은 철쭉나무로 터널을 이룬다. 왼쪽 치재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고개 아래까지 파고들고,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목장과 건너편의 산마루에 하얀 색 돔의 천문대가 동화의 나라에온 듯 신비하다.
바람도 잔잔한 고개 마루에는 철쭉나무와 산딸기, 산초나무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다소 가파른 비알 길을 뛰어넘어 울창한 소나무 숲을 빠져 나오면 흥부마을이 있는 아영면 성리와 번암면 노단리를 넘나드는 복성이재(550m)에 도착한다. 춘보의 설화로 유명한 흥부마을을 답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 사연이나 들어보자.
남원시 아영면 성리마을은 판소리 다섯 마당중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다.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로 밝혀졌다. 흥부가와 춘보 설화는 가난 끝에 부자가 된 인생역정, 선덕의 베품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유사하다.
실제로 성리마을에는 박춘보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고 매년 정 월 보름, 망제 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 망제를 지내오고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어 흥미롭다. 허기 재, 고둔 터, 새금 모퉁이, 흰 묵배미 등의 지명은 고전에도 등장했던 지명이다. '허기 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이고.
'고둔 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준 발복 집터다. 이곳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짓재 고개 마루에 높다랗게 자리를 잡고 마을의 산자락과 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금 모퉁이'는 사금 꾼들이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금을 주워 부자가 된 것이 아닌 가 추측된다.
한편 '흰죽배미'란 장소는 흥부가 부농이 된 후 은인들에게 보답으로 주었다는 논으로 전해진다. 흥부아내가 이웃들에게 흰죽을 먹이고 살아나서 흰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디막 거리'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는 개울로 추정된다. 형제간의 우애, 부(富)와 빈(貧), 성공한 이후에도 어려웠을 시절 함께 했던 이웃을 잊지 않은 겸손과 나눔의 정신을 되돌아 봄 직하다. - 남원시청 문화관광과 제공 -
사치재 7.2km 중치 12.1km의 이정표를 뒤로하고 남진하는 대간 길은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601봉에 오른 뒤 소나무의 향기 속에 아막성터에 이른다. 돌로 쌓은 이 산성은 아영고원 줄기에 자리한 산봉우리를 에워싼 것으로 둘레가 633m가량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영토쟁탈전이 벌어진 곳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이라고 불렀다. 산성은 세월의 무상함속에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고, 정성들여 쌓은 돌탑들이 백두대간의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넘게 해달라는 소박한 꿈으로 승화되고 있다.
철쭉나무가 앙살맞게 곁가지로 훌쳐대는 비알 길을 올라선 정수리는 고진감래가 무색하다. 통안재까지 15km 종주 길에서 가장 높은 칠백 팔십 일봉이지만 이름 하나 얻지 못한 무명 봉. 힘들여 올라온 정수리에 표지석은 고사하고 삼각점하나 없으니, 무수하게 달려있는 표지기를 위로삼아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촛대바위처럼 잘생긴 바위를 지나 헬기장에 도착하면 왼쪽으로 빗겨있는 시리봉(776m)이 손짓한다. 모두들 그냥 지나치는데 나 홀로 다녀오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미련을 버리고 일행들을 따르기에 여념이 없다. 이곳부터는 가파른 벼랑이지만 수월하게 내려설 수가 있고, 새맥이재를 지나 소나무 사이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철쭉나무 숲을 헤치며 637봉에 올라선다.
무성한 억새들의 꽃바람 속에 벼랑 길을 내려설 때, 억센 싸리나무가 종아리를 후려치고 앙살 맞은 가시덤불이 사정없이 할퀴어댄다. 억새의 비수로 살점을 그어대는 고행의 대간 길. 심술 굳은 꽃비까지 가세를 하지만 88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이 영호남의 갈등을 씻어준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볍다. 지난겨울 산불이 났는지 수 십 년 된 나무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런 재앙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편치를 않다.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압권이다. 발치로 88고속도로가 질주하고 지리산 휴게소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꿈에 그리던 지리산의 천왕봉과 반야봉이 가슴속으로 다가오고 절 개지와 같이 경사가 급한 벼랑길을 내려서면 88고속도로가 지나는 사치재다. 우리국토가 바둑판처럼 뻗어가는 고속도로 덕분에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좁혀지고 풍요로운 내일을 기약한다.
하지만 정다운 이웃들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단절되는 아픔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종주 길에 나선 우리들도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간의 힘찬 맥박이 도로건설로 단절되어 뛰어 넘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다행이 왼쪽으로 50여 m 떨어진 굴다리(일명 토끼굴)를 이용하여 안전하게 통과를 한다. 사치재를 건너서면 곧바로 지리산 자락이다.
유치 삼거리 2.5km 복성이재 7.2km의 이정표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향로봉에서 시작하여 600 여km를 밟아온 보람으로 지리산의 품에 안겼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苦盡甘來의 의미를 되새기며 20여 분간 소나무 숲속을 진행하면 돌탑이 반겨주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618봉에 오른다.
소나무 갈피들이 수북이 쌓인 비단 위를 달려가는 이 길은 백두대간 중에서도 가장 편안하고 수월한 구간이다. 다리에 힘이 부칠만하면 평지가 나오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피톤치드의 짙은 향기를 온몸으로 받는다. 지리산의 험준한 고산준령을 넘어야 할 건각들에게 체력을 보충하라는 배려가 아닌지. 산행하기 좋은 가을이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속 4km가 넘는 속도로 마루 금을 넘는다.
울창한 솔밭을 벗어나 제재소 뒤편으로 돌아서면 유치 삼거리다. 유치 삼거리는 남원시 운봉읍과 장수군 번암면을 왕래하는 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 지른다. 이곳에서 2km 거리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판소리 동편재의 본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시조인 송흥록 선생의 생가와 인간문화재 박초월 선생의 생가가 있어 예향의 도시 남원의 뿌리가 이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번지에는 황산 대첩비가 있으니. 백제의 계백장군이 아니고 1,380년 이성계(李成桂), 이두란(李豆蘭) 장군이 황산(697m)에서 왜적 아지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1577년에 구상수립 식으로 건립했으며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해발 460m인 유치 삼거리에는 고남산 4.8km 사치재 2.8km의 이정표가 있다. 매요마을로 넘어가는 농로주변으로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는 김장용 무가 수북히 쌓여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지만 운성초등학교 뒷담을 빠져나오면 매요 교회를 만나고, 돌담길 사이를 돌아 매요마을에 도착한다. 백두대간 마루 금에서 유일하게 만나는 마을에는 대간꾼들이 즐겨 찾는 매요휴게소 할머니가 건네주는 막걸리 또한 잊지 못할 명물이다.
마을을 벗어나 완만한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유치재가 기다린다. 수월하게 올라선 무명 봉에는 98년에 개설된 운봉 403번의 삼각점이 있지만, 더 높은 703봉의 정수리가 기다리고 있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송림 속에서 피톤치드에 취해 매요마을을 떠난 지 1시간 만에 통안재에 도착한다. 통안재는 권포리에서 올라오는 길목으로 당일 종주 팀들이 구간을 이어주는 들머리로, 고남산(846m)을 오르는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백두대간에 미처 한창 돌아 갈 때 미투리 산악회의 최 효범 대장이 하는 말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종주를 무리하게 도전하다, 몸이라도 상하면 평생후회를 하게 되니 이쯤에서 접어두라는" 간절한 호소에 중단을 하고 말았다.
그 후 한북정맥과 한강기맥을 종주하며 아직까지 녹슬지 않은 체력에 자신감을 갖고 삼년 만에 밟아보는 마루금은 고향을 찾아가는 철새들처럼 감회가 새롭다. 새로운 도전 앞에 의지를 불태우며 회갑을 넘은 나이지만 신발 끈을 다시 한 번 졸라맨다. (권포리에서 복성이재까지 종주하며)
통안재에서 올려다보는 고남산은 철옹성과도 같이 험준한 암 봉이다. 잡목을 헤치며 숲길을 오르면 정상으로 향하는 군 비상도로를 만난다. 비상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중계 탑이 있는 철조망을 따라 올라서면 산불감시 초소가 있는 정상이다. 스텐 기둥으로 만든 정상 표지 석 옆으로 삼각점도 있고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너무도 좋아 운봉의 너른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북쪽으로 광주와 대구를 이어주는 88고속도로위로 차량들이 홍수를 이루고 지나온 봉화산이 선명하다. 동쪽의 너른 들녘을 배경으로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줄기차게 뻗어 내린 태극능선의 끝자락에 조용히 졸고 있는 황산이 정겹기만 하다.
황산대첩이라면 우리는 먼저 백제의 계백장군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곳과는 전혀 다른 전투가 있었다. 일본(왜구)은 삼국시대 이전 부터 우리나라 남쪽의 해안가로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는데, 이곳 바래봉 기슭의 인월리와 인풍리를 점령한 아지발도를 상대로 고려의 토벌대장 이성계 장군이 격전을 벌이게 된다.
꿈속에 나타난 여원재 주모의 가르침에 따라 고남산에 올라 적의 동태를 살피며 작전을 구상 한 뒤 소년장수 아지발도를 사살하므로 왜구의 난을 평정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조정에서 신망을 얻어 조선을 건국하고 다시 찾아와 고남산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부르게 되었으니 이곳에는 이성계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바래봉 북서쪽 기슭에는 광활한 분지에 조성된 푸른 초원위로 수 백 마리의 소와 면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국립종축장이 있다. 오뉴월이면 붉게 타오르는 철쭉과 어우러진 그림 같은 정경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 낙농산업의 효시를 이루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운봉목장이 바로 이곳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막힘없이 터지는 조망으로 고산준령의 지리영봉들과 지나온 대간의 줄기들이 힘차게 맥을 이어간다. 정수리에 세워진 통신 안테나. 높은 철탑에서 발신되는 핸드폰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가야산계곡에서 무등산 골짜기까지, 지구촌 곳곳으로 울려 퍼지고 남극에서 유럽까지 시시각각 전달되는 우리의 불침번이다. 그 옛날 봉화를 올리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내려서는 암릉에는 로프도 걸려있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라 오랜만에 억새의 춤사위에 신바람이 난다. 권포리와 장교리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철쭉의 무리를 지나면 이곳 또한 산불로 수십 년 된 소나무들이 수난을 당하여 앙상한 숯 검뎅이로 변하고 말았으니 가슴이 아려온다.
장동마을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야산을 휘돌아 오르면 묘지가 있는 561봉(장봉)에 오른다. 여원재에서 올라올 경우 알바하기 쉬운 곳으로 주위가 필요하다. 가선대부 김해김씨, 정부인 경주김씨의 묘 잔등에서 왼쪽으로 90도를 꺾어서 내려서는 길은 수 백년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대간 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물을 건너지 말라는 교과서를 그대로 답습하듯,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마루 금을 이어갈 때, 마려운 소피줄기가 왼쪽은 낙동강으로 오른쪽은 섬진강으로 갈라지는 분수령을 이룬다. 장동마을을 안고 돌며 완만한 솔밭을 한없이 지나면 노치샘 6.7km, 유치 삼거리 10.5km의 이정표가 반겨주는 여원재(477m)에 도착한다.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운봉으로 가다보면 해발 477m의 여원재에 이른다. 눈이 부리부리한 운성대장군이 길목을 지키고, 고개 마루에는 장동마을의 봉송 황토마을 입간판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그 옛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나들이 길에 지친 길손들의 여독을 풀어주는 주점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물자가 부족한 왜구들이 남해안을 수시로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중, 고려 우왕 6년에는 부산에 상륙한 왜구들이 진주, 함양을 거쳐 남원군 인월면 일대를 점령하고 살인, 방화, 약탈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른다. 한양을 향해 북상하던 중, 이곳에 도착한 선봉대장 아지발도(당시 15세)가 미모와 자색을 겸비한 주모를 희롱한다. 왜구의 손이 닿았던 왼쪽 젖가슴을 예리한 비수로 도려내고 자결을 하니, 그 고귀한 정조를 기려 비석을 세우고, 사당도 짓고, 고개 이름을 여원재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삼한시대 이래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맞대고 수많은 전투를 벌인 곳이다. 근세에는 동학군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진격을 하자 박봉양이 운봉의 만보군과 함양등지에서 보내온 지원군과 합세하여 방아치, 관음치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운봉을 지키게 되고, 참패를 당한 동학군이 영남으로 진출하는데 실패를 하게 된다.
28. 여원재(477m) - 성삼재(1,000m) / 20km
여원재에서 숨 한번 들이쉬고 달려가는 대간 길은 곧 바로 숲속으로 들어선다. 오른쪽으로 능선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암봉 하나, 전망대 바위에 올라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달려가지만, 무심한 대간 길은 왼쪽사면을 가로 질러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보는 남원분지의 너른 들판과 지리산의 장쾌한 산맥을 두루 조망하는 여원 낙조는 운봉팔경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하는데
제1경 : 할미재의 아침 햇살 제2경 : 팔양치의 저녁 놀 제3경 : 황산의 밝은 달
제4경 : 베틀위의 맑은 바람 제5경 : 봉화산의 풀 피리소리 제6경 : 개논들의 농부가
제7경 : 방장산의 돌아가는 구름 제8경 : 덕두봉의 저녁놀이라 전해온다.
헬기장과 무명 봉을 넘어 완만한 능선을 20여 분간 진행하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진땀을 흘리며 올라선 곳이 입망봉(705m)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 가려 주위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 흠이다. 하지만 펑퍼짐한 정수리에는 피로에 지친 산 꾼들의 휴식처로 안성맞춤이다. 일명 갓 바래재라 부르는 입망치로 내려서는 비알 길은 급경사를 이룬다. 운봉읍과 이백면을 오가는 고개 마루에는 운치 좋은 소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루어 쉬어가기에 알맞은 곳이다.
수정봉 오름길은 헬기장을 지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득히 올려다 보이는 정수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진하게 토해내는 향기에 취해 정신이 몽롱하다. 수정봉(804m)정상에만 오르면 남원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일 것으로 상상을 했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가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원 쪽으로는 천야만야한 벼랑이 수직단애를 이루고 있는 반면, 고기리에서 바라보는 수정봉은 800m 가 넘는 고봉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펑퍼짐한 야산으로 보인다.
운봉과 주천일대가 해발 500m가 넘는 고원지대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오는 착각으로, 덕치 샘이 해발 550m인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소나무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주능선을 이어가는 마루금 뿐이다. 빼 꼼이 터진 오솔길 따라 시원한 그늘 속으로 진행하면, 잠시 후 급경사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친다. 왼쪽으로 급선회하여 내려서면 노치마을이 내려다보이고, 5그루의 노송이 있는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다.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비는 제단이 있어, 백두대간에 오르는 산 꾼들이 제단에 머리를 조아리며 무사 산행을 기원한다. 당산나무를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서면 노치 샘이 있다. 샘 옆에는 여원재 6.7km, 정령치 6.0km의 이정표가 반겨주고 백두대간을 소개하는 표지 석과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노치마을의 유래가 돌비석에 새겨져있다.
조선조 초에 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형성되었다는 이 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마을이다. 지리산의 관문인 고리봉과 만복대에 억새가 많아 갈재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노치라 부른다. 한국 전쟁 때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마을이 완전히 불타는 비운도 맞게 된다.
마을의 동쪽은 운봉읍에, 서쪽은 주천읍에 속하는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하는 마을의 뒷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성한 노치 산성이 있어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 아영면 아막산성에서 정령치와 고리봉산성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한다.
마을 앞 삼거리에 나서면 동쪽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고 있는 형상의 바래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70년대 초 바래봉(1,185m) 일대는 호주에서 들여온 면양을 방목했는데, 식성이 좋은 양들이 능선의 나무와 풀을 모두 먹으면서도 유독 독성이 있는 철쭉만 남겨 놓았다고 한다. 이런 자연환경에 따라 수백만평의 구릉지에 남아있는 철쭉이 동산을 이루어, 매년 오뉴월이 되면 화려하게 피어나는 철쭉을 찾아 상춘객들이 모여들고, 전국 제일의 철쭉 군락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가재마을에서 고기리까지 1.5km 구간은 운봉읍에서 주촌 읍을 오가는 60번 지방도로를 따르게 된다. 지리산의 험준한 산행을 앞두고 워밍업을 하라는 신의 계시에 따라 모처럼 고향을 찾아온 듯 담소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고기리의 당산나무에는 대간꾼들의 의지가 담겨있는 표지기 들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지리산으로 향하는 종주꾼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다. 남원과 정령치(1,172m)를 넘어가는 삼거리에서 출발한 대간 길은 왼쪽으로 목장의 철조망을 끼고 노송이 군락을 이루는 완만한 오솔길로 들어선다.
솔 갈비로 포근하게 단장한 비단길이 펼쳐지는 오솔길에는 청솔무가 제 세상을 만난 듯, 분주하게 나무 등걸을 타고 오른다. 주천리 1.5km 이정표를 지나며 코가 땅에 닿도록 가파른 비알 길에서 쉰 목소리를 토해낸다. 고단한 육신에 채찍질을 하는 것은 백두대간이라는 커다란 목표가 있고,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발산하며 큰 고리봉(1,304m) 정상에 올라선다.
남원일대의 산천초목이 모두 발아래 조아린다. 북녘으로 세걸산(1,207m), 부운치, 팔랑치(1,005m)로 이어지는 태극능선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바래봉(1,165m)이 손짓하고 남쪽으로 달려가는 대간 길은 정령치(1,172m)와 만복대(1,433m), 노고단(1,507m)과 반야봉(1,732m)이 그동안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위로 하려는 듯 가슴을 활짝 열고 달려온다.
정령치(1,172m)로 내려서는 전망대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 또한 환상적이다. 푸른 숲 사이로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오르는 차량들. 부지런한 개미들의 행렬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만복대를 보라. 수 십 만평의 평원위에 물결치는 억새들의 춤사위로 짓눌렸던 가슴이 활짝 열린다. 가파른 비알 길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로 패어나가는 토사의 유실을 막기 위해 나무계단을 설치하였다.
남원시에서 주천 읍을 거쳐 성삼재로 이어지는 730번 지방도로가 관통하는 정령치(1,172m)에 도착한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의하면 기원전 84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다는 전설과, 신라 때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유래가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 교통량도 많은 곳이지만, 2-3십년 전만해도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첩첩산중이었다. 그래서 심원마을 사람들이 남원 장을 다녀오려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자연의 품으로 들어서면 오기와 욕심도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속에 온갖 시름을 잊게 되니, 순진무구한 동심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림 같은 정령치를 뒤로하고 만복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죽장망혜 단표자로 천리강산을 들어서는 여유로운 발걸음에, 김삿갓을 떠 올리며 詩心이 피어오르고 주절대는 재담 속에 詩香이 묻어난다.
산불감시 초소가 있는 무명봉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심메마니 능선위로 반야봉(1,732m)이 우뚝 솟아 첨봉을 이루고 노고단으로, 종석대로, 서부능선 줄기 따라 하늘 금을 이룬다. 정상을 300여m 남겨두고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능선이 다름재와 숙성치를 지나 견두산(774m), 천마산(656m), 깃대봉(691m)까지 지리산온천지구가 있는 산내면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힘들게 올라온 정상(1,433m)은 전라남북도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반야봉을 지나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서부능선 제일의 정수리다. 정상에는 그 흔한 돌비석 하나 없이 초라한 모습이지만, 오가는 산 꾼들의 정성으로 쌓아올린 돌탑을 위안 삼아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름만큼이나 복스러운 만복대(1,433m). 산 전체가 부드러운 분지를 이루고, 지리산 10승지지 중의 한곳으로 전해오는 명당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여름에는 야생화, 가을에는 억새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무한한 행복을 안겨주는 묘봉치(1,130m). 올라가는 길이야 고되지만, 내려서는 길은 꿈같이 달콤한 환상의 길이다.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아래 휜 머리 풀어헤친 억새들의 춤사위로 어깨춤이 들썩이고, 고리봉과 반야봉이 반겨주는 툭 터진 시야로 가슴속이 후련하다. 심원마을에서 위안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은 휴식년제로 출입금지 경고판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헬기장의 너른 공터에서 잠시휴식을 하고 서둘러 고리봉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키를 넘는 조릿대와 철쭉나무의 날카로운 가지들이 반팔차림의 팔다리를 훌쳐댄다. 아려오는 고통이야 참을 수 있지만, 천근만근 짓누르는 발걸음을 어이할거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는 비알길이 멀어만 보인다. 20km 구간 중에 마지막 남은 고리봉(1,248m). 고진감래의 달콤한 열매를 되 뇌이며 힘겹게 올라선다. 앙증맞은 정상석이 반겨주는 정상은 거침없이 터지는 조망으로 만단시름이 사라진다.
고리봉의 이름은 소금 배를 묶어두었던‘고리(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는 소금배가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蓼川) 물줄기를 타고 남원성 동쪽 오수정(五樹亭·참나무정)까지 올라, 중간 정박지로 금지평원에 머물기 위해 배 끈을 묶어두었던 쇠고리가 바로 고리봉 동쪽 절벽에 있었다고 전해온다.
지척에 보이는 성삼재(1,000m)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완만하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뱀사골에서 올라오는 861번 도로를 왼쪽허리에 끼고 한껏 멋을 부리는 팔자걸음에 하늘아래 첫 동네 심원마을과 노고단, 종석대가 반겨준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성삼재가 북한산보다도 높은 1,000m라는 사실이 실감나게 지리산 온천관광지구와 구례읍의 너른 평야가 시원하게 파노라마를 이룬다.
29. 성삼재(1,070m) - 천왕봉(1915m) / 29km
그 옛날 변한과 진한에게 쫓기던 마한의 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성을 쌓고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고 한다.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수가 지키던 이곳을 성 삼재라고 부른다.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멀고먼 대간 길. 긴 여정을 마감하는 엄숙한 일정이 시작된다. 지리산 종주의 출발점인 성삼재는 사시사철 등산객으로 만원을 이루고, 교교한 달빛아래 중산리까지 35km를 12시간 30분에 무박으로 종주하던 때(2,000년 11월 11일)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개가 무량하다.
1967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면적이 440.485㎢로 우리나라 국립공원 중에서 가장 크고 북한산 국립공원의 5배나 된다. 전북: 남원시, 전남: 구레군, 경남: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등 3개도 5개시군 16개면에 걸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의 천왕봉을 중심으로 서쪽의 반야봉까지 장대한 산맥을 이루며 1500m이상의 고봉이 16개나 되는 웅장한 산새를 자랑한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29km에 접속지점인 중산리까지 34.5km에 달하는 장거리코스. 산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종주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선망의 대상이다.
1988년 지리산 관광객유치와 지역 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개설된 성삼재 관통도로는 구레군 광의면 방광리 천은사지구에서 남원시 산내면 내령리 뱀사골 지구까지 24km구간이 관통되었다. 편리해진 교통으로 탐방객수도 하루에 1,200명에서 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순환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9km를 거슬러 올라야하는 힘겨운 코스를 이용했지만, 이제는 천 미터가 넘는 성삼재에서 종주길이 열리며, 무박 종주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풍철을 맞아 성삼재를 찾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룬다. 정면의 노고단(1507m)과 오른쪽으로 영험한 기도처가 있는 종석대(1,356m)를 바라보며 힘찬 행군이 시작된다. 우리를 뛰쳐나온 맹수들처럼 날렵하게 코재의 구비 길을 돌아 노고단 대피소에 이른다. 예로부터 지리산에는 기도의 효험을 얻고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었는데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등 대사찰을 중심으로 기도의 효험이 뛰어난 10대 기도처가 있었으니.
1.노고단에서 질매재로 넘어가는 문수대 2.종석대 아래 우번대
3.반야봉 중봉 아래 묘향대 4.피아골 산장 위쪽의 서산대.
5.불무장등에서 직전마을로 이어지는 무착대. 6.두류능선 사면의 향운대.
7.법계사 위쪽의 문창대. 8.영신봉 아래 영신대.
9.장터목산장 샘터 옆의 향적대. 10.뱀사골에 있다는 금강대.
노고단에서 임걸령으로 가는 길목에는 남쪽으로 질매재와 문바우등, 왕시리봉(1,214m)으로 연결되는 주능선이 피아골과 화엄사계곡을 아우르고 있다. 이곳은 반달곰 방사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또한 피아골에서 올라오는 갈림길(1,336m)에서 바라보는 운해는 지리산의 십경 중에 으뜸으로, 피아골에서 피어오르는 황홀한 모습에 넋을 잃고 만다.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지리산. 빨치산의 숨결이 남아 있는 이곳은 유난히도 짙게 물든 단풍잎들이 계곡을 붉게 물들인다.
임걸령 샘터에서 목을 축인 발걸음이 노루목(1,498m)에 도착하며 반야봉의 턱밑에 이른다. 너덜의 경사면에 주목이 자리 잡고 죽어서도 천년의 세월을 지켜오는 그 기상이 우리민족의 얼과 맥을 같이하는 산 증인이다. 서부지리 제일봉인 반야봉 정상에 올라서면, 주위를 압도하는 조망으로 가슴속이 후련하게 터진다.
불도를 닦고 있던 반야가 지리산의 여신인 마고할미와 결혼하여 천왕봉(1915m)에서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반야봉(1732m). 지리산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서부의 맹주로 지리4경인 낙조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서산마루에 해 떨어지면,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 붉게 물들이다 모닥불처럼 어둠속으로 사그라지는 모습은 평생에 한번만 보아도 원이 없는 장관이다. 산삼을 비롯해서 약초가 많은 심마니능선이 북쪽으로 뱀사골 입구까지 뻗어 있다. 정성이 가득한 돌무더기를 뒤로하고 동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30여 분만에 삼도봉(1,499m) 정상에 이른다.
경남 하동, 전남 구례, 전북 남원의 3도가 경계를 이루는 삼도봉(1.499m)에서 남쪽으로 섬진강변 까지 힘차게 뻗어 내린 능선을 불무장등(1,446m)이라한다. 서쪽으로는 그 유명한 <피아골>을 , 동쪽으로는 목통골, 일명 연동골을 끼고 이어지는 불무장등은 남쪽으로 내려서면서 그 기세를 낮추어 통곡봉(904.7m)이 후 <당재>에서 그 기세를 완전히 낮추었다가 다시 황장산(942.1m) 촛대봉으로 이어진다. 불무장등에서 서쪽 피아골의 지 능선을 따르면 숨겨진 비경 무착대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없이 내려딛는 600여개의 계단. 이곳을 거슬러 오른다면 얼마나 힘이 들까? 예전에 화개장터가 열리던 곳이라 화개재로 부르는 이곳은 전라도 남원 산내지방에서 삼베와 산나물을, 경상도 하동군 화개 사람들이 소금과 해산물을 물물교환 하던 곳이다. 남원 쪽으로는 그 유명한 뱀사골 계곡의 상류지점이고 남쪽으로는 칠불사 지구인 목통 골이 시작되는 상류지점이기도하다.
화개 재에서 1.2km에 불과한 토끼봉(1,533m)오르는 길은 지리산 구간에서도 가장 힘이 드는 곳이다. 무박으로 종주하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윙윙 소리 내며 새벽하늘에 정적을 깨트리는 구상나무의 울음소리, 강풍에 힘없이 쓰러지는 고사목의 굉음소리가 토끼봉을 오르며 거칠게 토해내는 숨소리와 하모니를 이루어 아름다운 멜로디로 울려 퍼질 때. 정상의 억새들도 세찬 바람에 머리를 조아리며 한 숨소리를 토해내고, 서산마루에 걸려있는 새벽달과 별빛까지 은은한 조명으로 신비로움을 연출한다.
30여명이나 되는 일행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앞을 봐도 뒤를 봐도 그들의 모습은 간곳이 없다. 어차피 인생의 길도 나 홀로 가는 것이고 보면 외로움 속에서도 묵묵히 자연의 소리를 벗 삼아 달님이 만들어주는 그림자와 단짝이 되어 연 하천 산장을 찾아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한다. 세찬바람 속에, 새벽이 올수록 기온이 점점 내려가 허리춤에 찔러둔 오이를 입에 무니 얼음 박힌 캔디가 되어 서걱거리고, 박카스 뚜껑을 열어보니 물 반 얼음 반으로 빙수가 되어 오이도 얼고 물도 얼고 내 몸도 얼고 만다.
갱엿같이 딱딱한 초콜릿 그래도 믿을 건 너 하나뿐.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달콤하고 향긋한 맛이 온몸으로 퍼지며 지친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털모자를 깊이 눌러 썼지만 양 볼이 얼얼하고, 면장갑을 낀 손이 마비되어 오그라든다. 오늘의 산행은 중량과의 싸움이니 불필요한 물건을 차에 두고 내리라는 대장의 지시대로 이것저것 챙기며, 방한 장갑이 무슨 큰 짐이라도 된다고 차에 두고 내린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높고 높은 명선봉(1,586m)이 달빛 속에 희미한 형체를 드러낸다. 반가운 마음에 쉴 틈도 없이 정상을 향해 달려간다. 돌부리에 걷어차인 발가락이 심한 통증으로 길섶에 주저 안고 만다. 산을 오르다보면 흔히 있는 일이지만, 등허리에서 진땀이 나도록 찐하게 당하고보니 종주의 사명감도, 의욕도 상실한 채, 골절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절뚝절뚝 발걸음을 옮긴다. 정상에 올라서니 먼동이 터오고 첫 번째 관문인 연 하천 산장(1,440m)이 발밑에서 조용히 손짓한다.
고립무원의 깊은 산중에서 방황하다 찾아온 안식처에서 발가락의 통증도 사라지고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16.5km를 4시간 만에 주파하고 보니 자신감도 생기고 컨디션도 아주 좋아 오늘의 종주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초코렛과 더운물로 갈증을 풀고, 붉게 물들어 오는 동쪽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산장을 빠져나온다. 삼각고지 사이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 이 감격, 이 환희. "지리산 당일종주" 라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걸고 달려가는 장도를 축원 하는 듯, 온 누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삼각봉에서 북쪽으로 분기하는 산줄기는 영원재를 지나 지리산의 전망대로 유명한 삼정산(1,182m)과 실상사까지 이어지는 능선으로 와운골과 광대골을 품에 안고 있다. 남쪽은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의신계곡과 빗점마을로 연결된다.
형제봉(1,442m)을 휘돌아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와 어우러진 소나무 한 그루. 황산의 영객송이 환생을 했는가. 장도에 오른 산 꾼들에게 환영의 손을 내미는 아름다운 자태.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사진 속에 추억을 만들고 아기자기한 바위를 넘나들면 야생화의 꽃바람이 시원한 그늘 속에 반겨오고 어느덧 벽소령 산장(1,392m)에 도착한다.
2층 목조건물로 지은 벽소령 산장은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지리산을 찾는 이들에게 포근한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산장에서 벽소령까지는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널찍하고 평평하여 피로에 지친 몸을 쉬어가기에 안상맞춤이고 고지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 벽소령은 남쪽의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서 북쪽의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로 비포장 임도가 연결된다. 이 길도 성삼재와 같이 자동차가 넘나드는 포장길이 된다고 하니 자연을 파괴하는 원흉이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벽소명월”이라 푸른 하늘에 떠있는 달빛도 푸르고 내 마음도 푸르니 선경이 예아니던가?
지리 십 경
1. 천왕 일출 2. 직전 단풍 3. 노고 운해 4. 반야 낙조 5. 벽소 명월
6. 세석 철쭉 7. 불일 폭포 8. 연하 선경 9. 칠선 계곡 10. 섬진 청류
대피소를 뒤로하고 옛 벽소령을 찾아갈 때, 남쪽의 대성 골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힘차게 뻗어 내린 능선과 계곡들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우리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의 대성동 골짜기를 기억하는가? 1952년 겨울. 국군토벌대의 맹렬한 추격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공비들이 각 비트에서 최후의 결전을 위해 가장 험준하고 인적이 드믄 대성 골로 모여든다. 결사항전으로 최후를 맞이한 우리민족의 비극도 흐르는 세월 따라 상처가 아물었지만, 불어오는 바람결에 묻어나는 흔적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계곡을 파고드는 임도가 산마루에 올라서고, 머지않아 포장을 한다는 계획이 있지만 환경단체들의 반대로 설왕설래하고 있는 중이다. 높고 높은 덕평봉(1,522m)을 바라보며 의기가 소침해진다. 다행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없는지, 산허리를 한 바퀴 돌아서면 길옆의 선비 샘(1,456m)이 목마른 길손을 반겨준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물과 불이라고 한다면 대간을 오르는 산객들에게는 물이 가장 소중하지 않겠는가?
1500여m의 높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갈증을 씻어주는 생명수요 감로수다. 감사한 마음에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더욱 소중히 음미하며 선비 샘의 유래를 들춰본다. 옛날 선비 샘 아래 덕평 마을에서 평생 천대를 받고 살아온 가난한 노인이 죽어서라도 사람대접을 한번 받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아들들이 이 샘터위에 묘지를 안장하니 사람들이 샘물을 긷기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결과적으로 노인에게 절하는 모습이 되어 노인의 한을 풀어주었다는 전설이다.
지난번 무박종주 시에는 이곳에서 근육통이 시작되어 산행 내내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곳이다. 칠선봉(1,558m)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에 안개가 자주 끼고 주위에 펼쳐지는 바위들이 7명의 신선들이 노니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루한 여정 길에 심심파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피로도 잊은 채 체력을 축적하는 구간이다. 아기자기한 암 봉과 야생화의 향기에 취해 영신봉(1,651m)에 올라서면 그 유명한 세석산장이 내려다보인다.
세석평전을 품에 안고 있는 영신봉(1,652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낙남정맥의 분기점이다. 낙남정맥은 음양수와 석문을 지나 삼신봉(1,284m)에 이르면 하늘아래 첫 동네 청학동 마을이 있다. 외 삼신봉을 지나 묵계치 고운재를 넘어 옥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는 서쪽으로 섬진강을 품고, 가화강을 지나 백운산(391m), 대곡산(543m), 여항산(770m), 광려산(720m), 무학산(761m), 천주산(638m), 대암산(669m), 용제봉(723m), 김해의 신어산(630m)을 지나 낙동강하구인 김해시 매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 줄기를 낙동강에 담그는 221km의 산줄기를 이루고 있다.
수 십 만평의 넓고 넓은 평원위에 펼쳐지는 철쭉나무 군락지.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지만 신록이 우거지는 6월이면 평원 전체가 붉게 타오르며, 한 여름 야생화로 뭍 시선을 유혹한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밤하늘의 별을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무용담을 풀어가는 낭만은, 산 꾼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매력이 아닌가? 세석평전(1,600m)의 북쪽으로 백무동 지구에서 올라오는 한신계곡은 지리산 제일의 폭포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한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천하제일의 절경이다. 남쪽에는 세석산장을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거림 지구와 대성동 마을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연결된다.
나무계단을 딛고 올라선 촛대봉(1,703m)은 주목과 암봉이 절경을 이루고 삼신봉과 연하봉(1,730m)을 지나면 천왕봉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볼수록 장엄하고 당당한 청왕봉 가는 길에 지리산의 기상을 대변하는 구상나무사이로 그 유명한 장터목산장(1,650m)이 반겨준다. 사시사철 활기가 넘치는 장터목은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숙박을 해야 하는 베이스캠프라고 할 수 있다.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주민과 북쪽의 마천주민들이 봄가을이면 이곳에 모여 장을 열고, 특산품을 교환하던 곳으로 2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산장과 야영을 할 수 있는 너른 공터와 샘물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장터목에서 천왕봉(1915m)까지는 3km가 남았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 바빠지는 것이 마음이다. 가파른 비알 길을 치고 오르며 마음은 어느새 정상에 있는데 발걸음이 마냥 느려진다.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에 따르면 동쪽에 중봉(1875m)과 서쪽에 제석봉(1,806m)을 거느리고 있는 천왕봉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과 샘터가 있어 예로부터 신성한 산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제석봉 일대를 뒤덮고 있는 고사목군락지다. 십여만 평의 산기슭에 수만 그루의 고사목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모습은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자유당 말기 농림부장관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 놓고 전나무, 구상나무를 닥치는 대로 벌목하다 여론 시끄러워지자 증거를 인멸하려고 불을 놓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사목 자체가 귀중한 자연경관이 되어 이곳에서는 야영과 취사행위를 금하고 등산로 이외 지역의 출입도 금하고 있다. 제석봉 일대는 지리산의 철쭉 군락지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곳으로 고사목과 어우러진 철쭉이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까지 절정을 이룬다.
또한 이곳은 희귀한 동식물의 보고로 알려지고 있다. 고사목 사이로 피어나는 야생화 그 중에서도 동자 꽃, 도라지 모싯대를 비롯하여 늦여름이면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구절초와 쑥부쟁이, 군락을 이룬 술패랭이꽃, 그리고 산 오이 풀꽃이 황량하던 제석봉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변모시켜 주고 있다. 철쭉군락과 고사목이 어우러진 산정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과 반야봉의 장중한 모습이 감동적이다.
제석봉 정상에서 천왕봉까지는 30분쯤 소요된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며 통천문을 지나면 곧바로 천왕봉이다. 오매불망 그리던 백두대간, 나약한 두 다리로 험준한 산맥을 넘고 넘어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 인산인해를 이룬 천왕봉.
저마다 가슴속에 포부를 안고 험한 길 마다안고 달려온 그들이기에 자아실현의 성취감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진부령의 고개 마루에서 시작한 긴 여정도 662km의 산굽이를 헤치며 남한의 최고봉인 지리의 영봉에 오름으로, 무거운 임무를 완수하고 홀가분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천왕봉은 행정구역상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경계를 이룬다. 천왕봉은 함양 방면으로 칠선 계곡을 빚어내고, 산청 쪽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상봉골)을 이뤄 중산리 계곡으로 이어진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세 갈래로 헤어졌다가 진양호에서 다시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경남의 젖줄이 된다.
천왕봉 정상에는 82년 여름 경상남도에서 세운 높이1.5m의 표지석이 있다. 전면에는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귀와 뒷면에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문구가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감흥 시킨다.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으로 해발 1,915m의 거봉이다.
천왕봉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봐도 거칠 것이 없고,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이 시야에 가득하다. 특히 천왕봉의 해돋이는 지리산 10경중의 하나로 유명하지만 구름과 비 오는 날이 많아 3대에 걸쳐 德을 쌓아야 천왕봉 日出을 볼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 오고 있다.
30. 천왕봉(1915m) - 산청의 경호강 / 29km
일각에서는 천왕봉에서 산청의 웅석봉을 지나 경호 강에 지맥이 가라앉는 지점까지를 백두대간의 연장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 길을 따라 종주를 이어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참고적으로 서술을 하고자 한다.
대원사 11.7km, 중산리 5.4km 장터목 대피소 1.7km의 이정표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망망대해의 전망대위에 올라앉은 듯 막힘이 없다. 서부경남과 전라도의 산과 강물이 이곳을 중심으로 뻗어나가고, 천왕봉 남쪽에서 솟아나는 천왕 샘은 서부 경남의 식수원인 남강댐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솟아나온 물이 덕천강으로 유입되고, 남덕유산 참샘에서 발원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흐르고 이 강을 따라가는 주능선을 낙남정맥이라 한다.
중봉(1,875m)은 천왕봉(1,915m)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65계단을 내려와 안부에서 가파른 급사면을 치고 오르면 널찍한 정수리에 천왕봉 900m, 대원사 10.8km, 치밭목 산장 3.1km의 이정표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왕봉을 바라보노라면 한 없이 높아만 보이고, 변화무쌍한 운해가 천왕봉을 품었다 풀었다 휘감아 돌며 신비감을 연출한다. 대원사와 치밭목 산장은 동쪽으로 내려서고 대간 길의 하봉(1,781m)은 북쪽으로 직진한다.
중봉에서 하봉으로 향하는 주능선에는 널 부러진 고사목이 즐비하다. 껍질도 없이 앙상한 밑둥치위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푸른 잎을 내민 곁가지가 신비롭기만 하다. 완만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외로운 이정표가 나그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치밭목 1.8km, 천왕봉 1.7km의 이정표를 바라보며 치밭목으로 탈출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중봉의 갈림길을 날머리로 이용하는 관계로 치밭목 산장 쪽으로는 사람의 발자취도 없이 억새와 가시덤불만이 무성하다.
하봉으로 오르는 길은 또 한 번 고통을 감수해야할 구간이다. 피할 수 없는 길이기에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날카로운 암 봉을 거슬러 오르는 인내가 절실히 요구된다. 올라선 정수리는 대청봉보다도 높은 1,781m다. 멋진 표지 석을 상상했지만, 정작 어느 곳이 정상인지 확인조차 막연하다. 서운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구상나무와 어우러진 초암능선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막걸리 한잔으로 갈증을 풀고 초암능선으로 내려선다.
구상나무와 철쭉나무를 비집고 올라선 전망대는 초암능선이 자랑하는 절경이다. 푸른 숲속에 속살을 가린 벽송 능선과 허공 달골, 두류능선과 국골, 초암능선과 칠선계곡, 창암 능선이 힘차게 날개를 펼친다. 건너편으로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라 일컫는 금대산(847m)과 백운산(902m) 그 너머로 삼봉산(1,187m)이 마루금을 이룬다. 또 한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깊고 깊은 계곡 속에 터를 잡은 치밭목 산장과 무재치기 폭포는 어떠하고.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 대원사계곡이 지리산 자락을 보듬어 안는다.
무상무념의 세계를 넘나들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안부에 올라서면 국 골로 내려가는 등산로 갈림길을 만난다. 국골 쪽으로 등산로가 폐쇄되어 위반 시에는 백만 원의 벌금을 물게 된다는 경고문이 있지만 대간 길과는 빗겨있으니 상관할 일이 아니다. 전망 좋은 암릉을 휘돌아 앙칼진 구상나무 잔가지를 헤치며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면, 조 갯골 위로 피어오르는 운해가 신비롭고, 양지바른 분지위에 자리 잡은 쑥 밭재(1,268m)의 쉼터가 반겨준다. 천왕봉에서 중봉과 하봉 초암능선을 헤치며 지친피로를 풀기위해서는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15분간의 식사와 꿈같은 휴식시간을 보내고 서둘러 길을 나서면 키를 넘는 조릿대가 앞을 가린다. 펑퍼짐한 새봉(1,323m)에 올라서면 세 갈래 갈림길이 나타난다. 북쪽은 상내봉(1,200m)을 지나 벽송 능선으로 연결되는 길이고, 동쪽은 웅석봉에서 시작한 대간길이 밤머리재, 왕등재(936m)를 지나 이곳에 이른다. 서쪽은 방금 지나온 천왕봉으로 향하는 코스인데, 요즈음은 지리산도 태극능선이라 하여 서쪽의 바래봉(1,165m)에서 시작하여 웅석봉(1,099m)까지 3구간으로 나누어 종주하는 팀이 늘고 있다.
왕등재가 있는 동쪽으로 진행하면 완만하던 사면길이 갑자기 가파른 벼랑길로 변하고, 긴장감 속에 조심스러운 행보가 이어진다. 반대편에서 올라온다면 진땀께나 흘려야하는 구간이다. 억새가 많아 새재(967m)라 하는 양지바른 산자락에는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밤 머리재를 지나 웅석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새재마을과 조개 골 산장을 지나 유평리로 내려서는 대원사계곡의 상류지점이다. 왼쪽은 인적이 드믄 오봉리로 내려서는 길이지만 등산로가 유실되어 애를 먹는다.
키를 넘는 억새가 군락을 이루는 외 고개. 오른쪽으로 수 만평의 고산습지가 분지를 이루고, 골짜기 아래로 새재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숲 사이로 나타나는 습지대와 아름다운 다리. 이곳이 바로 지리산이 자랑하는 왕 등재 고산습지다. 자연보호를 위해 무단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아니라도, 우리 모두 지켜야할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조심스럽고 풀 한포기 스치는 것도 조심스러워 서둘러 자리를 뜨면 전면으로 우뚝 솟은 왕등재(936m)가 손짓을 한다.
왕등재와 늪지대를 지나며 순조롭게 진행하는 종주 길에 발걸음이 가볍다. 무성한 철쭉나무와 키를 넘는 조릿대가 가는 길을 막아도, 어려운 고비 길을 다 지나왔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비알 길을 내려서면 동왕등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때마침 불어오는 골바람을 맞으며 왕등재 오르막이 시작되고, 20여분 후에는 왕등재 돌길구간을 지난다. 전망대 바위(969m)를 지난 다음에 나타나는 정상을 일명 깃대 봉이라 부른다. 동 왕등재(935.8m)정상은 특별한 표시가 없고, 좁은 공터 갈참나무 가지에 매달린 표지판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가파른 비알 길. 250여m의 표고차를 줄여가는 대간 길에는 전망 좋은 바위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서부경남의 산하를 시원하게 조망하며 모처럼 망중한을 즐긴다. 종주를 고집하는 산 꾼이 아니면 찾아드는 사람도 별로 없는 적막강산에 목적지인 웅석봉이 아련히 모습을 드러낸다. 동 왕등재를 내려선 안부에서 오르락내리락 철쭉나무와 조릿대가 군락을 이루는 능선을 한동안 지나노라면 도토리 봉(890m) 오르는 비알길이 시작된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에는 특별한 표시가 없다. 하지만 산청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59번 도로가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밤 머리재(620m)로 오르는 모습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밤 머리재로 내려서는 절개지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반달가슴곰 등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으로 공원자원의 보호를 위해 지정된 등산로이외의 출입을 통제하며 위반 시에는 50만원의 벌금이 부과 된다"는 경고문이 서있다. 왕재 3.3km, 웅석봉 5.3km 의 이정표가 덩그러니 서있는 고개 마루에는 오가는 차량도 별로 없이 통신 안테나와 커피 파는 포장마차 하나가 자리지킴을 하고 있다.
밤머리재를 뒤로하고 웅석봉 가는 길은 정상으로 향하는 마음하나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한 5km의 거리를 지나면, 그렇게도 멀어만 보이던 웅석봉이 기다린다는 설레 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1시간 거리에 있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의 자태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중봉과 하봉, 초암능선을 지나 새봉과 왕등재를 따라 활등같이 굽은 대간길이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가락국의 구형왕이 넘어 온데서 유래된 왕재(925m)는 주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밤머리재 3.3.Km, 웅석봉 2.0Km, 선녀탕 2.0Km의 이정표가 있는 쉼터에서 왼쪽은 지곡사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평상처럼 널찍한 바위들이 있어, 정상을 목전에 두고 힘을 비축하기위한 휴식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웅석봉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만고풍상의 혹독한 시련 속에, 온전한 나무하나 없이 갖가지 형태로 비틀어진 고목들이 먼 이국땅에서나 봄직한 정취를 물씬 풍긴다.
정상을 300여m 앞둔 2번째 헬기장을 지나면 전망대가 반겨준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지리산의 뒷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산이기에 숨겨진 부분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20 여km의 거리를 두고 천왕봉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땀 흘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동쪽에는 산청군을 살찌우는 경호강이 유유히 흐르고, 대진 고속도로와 산청의 산과 계곡이 한 폭의 그림처럼 산수화를 그린다.
정상에 올라서면 삼각점과 검은 표지 석에 곰이 새겨진 정상석이 반겨준다. 곰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 곰 바위산(1099.3m) 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엄밀히 말하면 지리산 국립공원이 아니라 산청군의 군립공원이다. 넓게 보아 지리산의 일부라는 개념아래 태극종주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삼는 곳이다. 진부령에서 시작한 대간도 이곳 웅석봉까지 연결되고, 삼천리금수강산 내조국의 아름다움과 나라사랑의 싹이 트는 국토 대행진도 대미를 장식한다.
밤 머리 재에서 완만하던 주능선이 경호강 쪽으로 내려서는 동쪽은 급사면을 이루고 있다.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될 위험한 지역이다. 하지만 조망이 뛰어난 곳이라 눈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다. 깊은 산중에 터를 잡은 지곡사를 내려서면 산죽과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내리저수지가 반겨준다. 봄볕이 따사로운 양지 녘에는 진달래와 노란 산수유가 만발한다. 파란 물이 가득한 저수지에 마음을 풀고 백두대간을 지나오며 五慾(다섯 가지 욕심)을 잊은 지 오래된 우리가 바로 신선이 아닌가. 내 자신에게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