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
- 2009년 3월 31일 -
오늘은 아버님 30주기 기일이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되었으니 빠른 것이 세월인가보다.
고향을 지키시는 정신적인 지주(支柱).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주재(主宰)하시고 형제들 간의 갈등(葛藤)을 봉합하는 만능의 전도사(傳道師)이시다. 그러니 형님의 말씀 한마디에 순종하는 미덕으로 집안에 평화와 질서가 유지된다. 지금이야 마을에 저수지가 완공(完工)된 후로 문전옥답(門前沃畓)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홍수가 나고 삼일만 지나면 건천으로 변하여 돌 자갈이 앙상하게 드러나는 황무지(荒蕪地)나 다름없는 척박(瘠薄)한 땅이었다.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는 가난이 대물림되는 땅.
마을의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살길을 찾아 떠나도 형님만은 꿋꿋하고 우직하게 고향을 지키셨다.
十二代祖께서 이곳에 정착(定着)을 하신후로 대대로 뼈를 묻고 살아온 고향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으로, 고향(故鄕)의 지킴이가 되어 지극정성으로 조상님의 묘를 돌보고, 황무지를 일구어 옥토로 만드는 부지런함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를 이루셨으니 공덕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객지(客地)로 떠난 우리는 든든한 형님의 우산아래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을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이날만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형제간의우애를 다지는 것도 형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211번지가 내가 태어난 곳
병풍산의 맥이 이어진 아담한 야산의 기슭에 터를 잡은 마을에는 삼십 여 호의 집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요도 천을 중심으로 곡창지대가 펼쳐지고, 2- 300m의 산줄기들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곳에 700m 가 넘는 산은 가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어린 동심에도 숭배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랑문을 열고 뜰에 나서면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거대하고 웅장한 산. 한여름 배부르게 풀을 뜯은 황소가 편안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다.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이 아늑하고 포근함 속에서 꿈을 키웠다. 가엽산 자락에 구름이 얹히면 비가 내리고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면 맑은 날이 계속되는 영험한 산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곳.
나이가 들어 전국의 유명한 산을 찾아 700여 산을 오르면서도 동경의 대상인 가엽산을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가슴앓이도 많이 하였지. 지척(咫尺)에서 바라보는 가엽산의 정상에는 뾰족한 철탑들이 진을 치고 있는 금단의 땅이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이곳 가엽산은 삼국시대부터 국경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한양으로 전달하는 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전국의 유명한 산의 정수리에 무수히 많은 구조물들이 우리의 눈과 귀가되어 지구촌의 소식을 한눈에 전달하는 첨단시설의 중계지로 현대판 봉수대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얼었던 동토에도 새싹이 돋아나고, 얼음장 밑에서도 꽃이 핀다고 하지 않던가? 금단의 땅에도 일반인들의 접근을 묵인하게 되니 이 얼마나 즐거운 비명인가. 몽매에도 그리던 가엽산을 찾아가는 발걸음에 설래 임이 가득하다. 형님 댁에서 밤잠을 설치며 행장을 꾸리고, 소풍가는 들뜬 마음으로 음성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어렵게 찾아온 길이기에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며 진입로를 찾는다. 동쪽으로 우뚝 솟은 정수리에는 첨탑들이 아침햇살에 눈이 부시고, 비포장의 농로를 따라 걸어가는 발걸음에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귀 볼이 얼얼하다.
너덜지대의 바위들이 쏟아져 내린 척박한 땅에 2-30m 높이의 아름드리 적송들이 빼 곡이 들어찬 모습은 가히 선경이 따로 없다. 소나무는 늘 푸른 상록수로, 진한 녹색의 잎과 붉은 줄기가 인상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강한 자생력으로, 힘차고 우람한 모습에서 뿜어내는 강직성은 곧은 선비의 정신을 기린다. 또 한 가지 자유스럽고 부드러운 곡선에서 보여주는 유연성은 소나무가 지닌 두 가지 대표적인 외형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임도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따로 없다. 부지런히 걸어도 1시간이 족히 걸리는 연도에는 소나무가 하늘 숲을 이루고 키 작은 진달래가 장관이다.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 나옹화상(羅甕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고찰 가섭사(迦葉寺)가 정상 가까운 부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를 뒤로하고 오르는 정상은 녹녹하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다.
산새들도 숨을 죽이는 적막한 정수리에는 새한 마리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육중한 대문이 잠겨있고, 송신소의 첨탑들이 무언의 중압감으로 가슴을 조여 온다. M.B.C 충주문화방송 로고가 새겨진 바위 옆으로 봉수대의 안내간판이 서있고, 철도 침목으로 만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언덕위로 올라서면 분지위에 봉수대의 모형과 삼각점(음성22, 1982년 복구)이 있다.
수 천 평의 너른 정수리에는 송신소의 시설물이 자리 잡고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곳은 10여 평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나마 배려해준 것에 감지덕지하며 흥분된 마음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이 무슨 심술인가? 높은 산이 별로 없는 음성에서 진산으로 모시는 이곳은 수 백리까지 조망이 터지는 전망대인데 짙은 연무로 주위를 분간하기 어려우니, 요도천도 고향의 집도 안개 속에 잠들고 만다.
부용산(644m)에서 시작하여, 선지봉(570m), 수리봉(578m)을 거쳐 가엽산(709m)까지 충주와 음성의 경계를 이루며 음성천과 신니천(요도천)으로 갈라놓은 분수령이 남한강의 수계인 달천 강에서 다시 만나는 신비로움 속에 남쪽의 유서 깊은 미타사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금동불이 있는 영험한 산.
내가 가장 존경하는 형님을 찾아뵙고, 어린 시절 꿈을 키워 오던 가엽산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마음의 짐을 벗어 놓은 듯, 훨훨 날아오르듯, 65세의 나이로 음성읍에서 금왕 버스터미널까지 18km를 6시간에 완주하였으니 이 모두 고향을 지키는 수호신의 은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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