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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독립기념관이 있는 흑성산

           

            독립기념관을 품고 있는 흑 성 산 (519m)

                                   2009년 1월 2일 - 신년 산행

 

 


충남 천안시 목천읍

또 한해가 시작된다. 어려워진 경제 사정으로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신년 산행으로 선조들의 얼이 담겨있는 천안의 흑성산으로 향한다. 서울의 지하철이 거미줄처럼 수도권으로 이어지며, 천안을 지나 신창까지 개통이 되어 편리해진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하고, 청량리역에서 환승을 한다. 하지만 수도 없이 많은 역마다 정차를 하며 달리는 전철은 비둘기호가 환생을 한 듯 2시간이 넘는 지루함속에 천안에 도착하여, 독립기념관까지 400번 버스로 30여 분을 이동해야한다.

 

 

 

 


맑은 날씨 덕분에 독립기념관으로 가는 연도에서도 흑성산(519m)이 뚜렷하고 지난해 금북정맥의 성거산(579m)과 태조산(421m), 솔봉(321m), 취암산(319m)까지 종주하던 주능선들이 더욱 정겹게 보인다. 독립기념관의 주차장에 도착하면 하늘로 승천하는 겨레의 탑이 중앙에 자리 잡고, 너른 광장 가운데 겨레의 집 뒤로 흑성산의 정상이 일직선상으로 배치가 되어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어록

                                               -  백련지 -


해방 이후 독립기념관의 건립을 논의 하던 중, 1982년 8월 일본의 교과서왜곡사건을 계기로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건립 부지를 매입하여 제공했고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에 소요된 자금을 충당했다. 1987년 8월 15일 개관된 독립기념관은 총 대지면적 99만 3,914㎡, 37개동의 각종 건물에 국난극복사와 독립운동 관계자료 1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관인 민족전통관은 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제2전시관인 근대민족운동관은 제국주의 침략 및 의병 전쟁·계몽운동을, 제3전시관인 일제침략관은 일제의 시기별 식민통치를, 제4전시관인 3·1운동관은 3·1운동의 전개과정 및 1910년대의 독립운동을, 제5전시관인 독립전쟁관은 해외 독립군의 활동 및 국내 각계각층의 독립운동을, 제6전시관인 임시정부관은 임시정부와 광복군 및 해외 교포들의 생활상을, 제7전시관인 대한민국관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변천사를 각각 전시하고 있다.

 

 

 


이밖에 겨레의 집 내부에는 불굴의 한국인 상, 시비·추모비 및 조상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105m 길이의 부채꼴 모양 조각이 있다. 원형극장에는 360°의 스크린이 부착되어 있어 각종 내용을 상영하고, 야외정원에는 51m 높이의 겨레의 탑이 세워져 있다. 한편 독립운동의 관계자료 수집·보존·전시 및 학술연구를 담당하기 위해 부설로 한국독립운동연구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 독립기념관 자료제공 -

 

 


민족의 성지인 이곳은 어사 박문수와의 일화가 전해오는데

조선 영조 때 이름난 어사 박문수가 죽자(영조32년, 1756) 지관을 풀어 이곳 흑성산 남쪽 아래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묘 자리를 정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곳은 2, 3백년 후에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라 그 때 이장해야 될 것이니 이곳에서 십여 리 동쪽에 묘를 쓰라’고 권하여 그 말 대로 흑성산 정동 6Km 지점의 은석산(455m) 남쪽 기슭으로 옮겨 썼다고 한다. (지금도 실제 박문수의 묘가 은석산 서남 기슭에 있다) 박문수가 죽은 지 235년이 지나 흑성산 동남쪽에 민족독립의 역사관, 독립기념관이 1991년에 준공되어 구국선열들의 행적을 전시해 놓고 있으니 과연 박문수의 묘를 떠나게 했던 지관은 이미 200년 후를 내다 본 명 지관이었던 모양이다.

 

 

 


겨레의 탑에서 옷깃을 여미는 경건함속에 다리를 건너면 백련지에 이르고 태극기마당에서 더욱 숙연해진다. 우측으로 모조품이지만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보며 우리선조들이 북벌정책으로 만주벌판을 호령하고 웅지를 불태웠던 그 시절을 되새겨본다.

 

 

 


중앙의 겨레의집은 국내최대의 한옥으로 지붕을 이은 수 십 만개의 기와는 우리 모두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값진 유산으로, 숱한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켜온 선조들의 얼이 담겨있는 성전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천안시 전경


 

겨레의 집을 중심으로 제1 전시관부터 7전시관까지 방사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입체영상관까지 우리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독립기념관의 관람을 마치고, 단풍나무 길의 순환 로를 따라가면 흑성산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해돋이 행사를 위해 정비된 등산로는 완만한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고, 잠시 후 계곡으로 들어서며 경사도 가파르고 지난번에 내린 잔설이 빙판으로 변하여 미끄럼에 조심을 해야 한다. 느린 걸음으로 1시간 만에 정상에 오르는 임도와 만나고, 독립기념관이 내려다보이는  정상에 도착한다.

 

 

 


안성 땅 칠장산9492m)에서 한남정맥과 결별하고, 서남으로 내려오던 금북정맥이 서운산(547m)에서 남쪽으로 내 달으며 성거산(579m), 태조봉(422m)을 솟구치고, 솔봉9321m)을 지나 아홉사리 고개에 이르면 건너편에 금계포란(金鷄包卵: 금닭이 알은 품은 형상)의 길지에 흑성산(519m)이 자리잡고 있다.

 

 

 


산의 본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산정에는 둘레 739보(步)인 흑성 산성 터가 있으며 성 안에는 지지(地址)가 있다. 6·25전쟁 때 6개 면의 주민을 동원하여 목천면 서리에서 산정까지 군용도로를 개설한 이래 산정에는 공군 항로보안단의 지대(地隊)와 미극동공군의 통신대를 비롯한 군사시설과 방송시설, 텔레비전 중계소 등이 들어서 있다.

 

 

 


흑성산의 정기를 받은 이곳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진주목사로 선무공신 2등공신인 김시민(金時敏)장군,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양무공신(揚武功臣)2등에 병조판서에 추증된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 어사,   일제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 의정원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기미년(1919년)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궐기하여 삼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게 불을 붙인 유관순(柳寬順) 열사,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요,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장군,    해방 후 미군정 때 경무 부장, 초대, 4대 민의원, 민주당대표최고위원, 민주당 공천 대통령 후보로 신병 차 도미하여 치료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한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  등 많은 구국열사가 배출된 곳이다.

 

 

 


정상의 표지석이 있는 광장의 북쪽에는 고려 때 우리나라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한 김사혁 상원사의 전적비가 있다.

김사혁(金斯革: ? - 우왕11년,1385): 국사대사전에 의하면 고려 때의 무신으로 시호는 충절(忠節)이며, 공민왕11년(1362)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공으로 2등 공신에 오르고 우왕 7년(1381) 양광도도순무사(楊廣道都巡問使), 양광도상원수(楊廣道上元帥), (양광도는 고려 때 10도의 하나, (경기도 일부와 충청북도 일부) 우왕11년(1385)에는 관직이 지문하사(知門下事)에 올랐다.

 

 

 


천안의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에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수 백리 산하를 굽어 볼 수 있고, 북쪽에는 행그라이더의 활공장까지 갖추고 있어 천안시민들의 휴식처로, 성지순례지로, 2009년 기축 년의 새 아침에 우리민족의 성지에 올라 새해를 설계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