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0년 8월 19일
장소: 전북 고창군 고창읍
판소리와 고창읍성
예향(禮鄕)의 고장 고창(高敞)에서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신재효(申在孝) 선생의 생가(生家)와 판소리박물관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18C) 근대의식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창조와 정서를 독창적으로 형상화하여 끊임없이 성장, 발전하여온 향토적인 민족공연 예술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설화, 무가, 광대놀음, 판놀음, 민요,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녹아들어간 우리전통 문화유산의 전통 집합체이다.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여온 판소리의 주 무대가 고창으로 정착된 것은 김수영(金壽永), 김창록(金昌祿), 김찬업(金贊業), 진채선(陳彩仙), 김여란(金如蘭), 김소희(金素姬) 등 유수한 명창들과, 동리 신재효 선생을 배출한데서 기인한다.
고택은 신재효(1812 -1884) 선생이 생활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판소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생은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도깨비타령, 박타령, 변강쇠타령 등 판소리 여섯마당의 체계를 세웠으며, 판소리의 창극화와 사설을 집대성하여 우리나라 판소리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선생의 명성을 전해들은 당대의 명창인 박만순(朴萬順, 동편), 이날치(李捺致, 서편), 김세종(金世宗, 동편), 정창업(丁昌業, 서편)등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았다. 허금파(許錦波)등이 문하에서 활동했고, 판소리 최초여류명창인 진채선(陳彩仙)도 신재효 판소리 전문교육을 받은 수제자 이다.
선생의 출현은 판소리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판소리의 발전방향을 가름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판소리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는데,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등이 서편제의 명창이고, 그 밖의 창자들이 동편제의 명창이었다는 사실은 유파에 관계없이 판소리 창단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이다.
당대의 명창들을 중국의 역대 시인들에 비유함으로서, 시의 이미지를 판소리 스타일과 결부시켜 명창들의 음악행위를 시인들의 문학행위와 같은 등급으로 상승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직관력과 천재적 예술관으로 당대의 미학적 표준에 우리의 예술 혼을 삽입하여, 그의 이론과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고창군 홈페이지 인용』
고창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창, 무장, 흥덕 세 고을이 병합되어 생긴 명칭이다. 고창은 본래 백제의 모량부리 현이었는데, 신라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16년 고창현으로 고쳐 이웃 무령군(지금의 영광)의 영현이 되었다.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13면의 체제로, 인구 5만9천명이 농어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고장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조선 세종 32년 전라도 19개 군 현 주민 3만여 명이 참여하여 3년만인 단종 원년(1453)에 완공하였다.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총화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으로 부르는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 졌다.
1965년 4월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갖추고 있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 하였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하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행사(踏城行事)가 계속되고 있다. 성 밟기는 저승 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하며,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저승문이 열리는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행렬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돌때는 반드시 손바닥 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 번 돌아야 하고,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아두도록 하였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은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 밟아 굳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어 나르게 한 것은, 유사시 석전(石戰)에 대비하기위한 유비무환의 예지라 생각된다.
고창 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