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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세계/강진원 문학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으로 얼룩진 피(血)의 역사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으로 얼룩진 피()의 역사

에필로그

 

역사는 순환한다. 부끄러운 역사의 교훈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고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투쟁과 반목의 갈등구조 속에서 잉태되어 온 부정과 거부와 피해의식의 역기능과 저해 요인을 떨치고 개성(個性)에 바탕을 두고 자유(自由), 평등(平等) 창의(創意)가 존중되는 순기능과 발전 요인으로 이행되는 새로운 패러다임 정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적 사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먼드 H, (Edward H. Karr)역사는 역사가와 사실(fact) 사이의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對話)”라고 정의 한다.

 

또한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문명사관(文明史觀)에 의하면 역사는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상호작용으로서, 그 생멸(生滅)이 하나의 역사이며 그 생멸이 일정한 규칙성, 발생-성장-쇠퇴-해체의 순환과정을 거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정통성은 인본주의 사상에 그 근거를 둔다. 유교문명(儒敎文明)과 성리학(性理學)에 바탕을 두고 태어난 조선조 500년의 역사는 유교적 이념아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적 유산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합리적 이성(理性)을 전승해 온 그 문화유산의 맥()은 쇠퇴 해체의 과정을 거치기 이전의 소중한 성장 과제로 삼아야 한다.

 

조선 사회 문화의 뒤안길을 되돌아보면 인간의 개성보다는 집단화된 조직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전통적 윤리 도덕의 가본 질서의식으로 형성되어 온 가치체계가 대의명분(大義名分)과 명예(名譽)를 지키는 데 혈안이 되었고, 충성심()과 복종()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인간 본연의 개성과 창의는 제한되고, 자유(自有) 평등(平等) 보다는 지배계층에 의해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民衆)의 투쟁과 저항의식이 뿌리 깊게 싹터 왔다.

 

그것이 이른바 유교적 전통의 핵심 이념(理念)인 성리학의 비타협적 배타적 당파성(黨派性)을 조장함으로써 피()로 얼룩진 사화(史禍)와 당쟁(黨爭)의 역사를 노정시켰다.

 

조선 초기 왕권 강화를 둘러 싼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갈등과 반목,

조선 중기의 사색당쟁과 붕당의 갈등 구조, 조선 후기의 서양문물의 수용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박해 등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발전 성장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복잡다단한 정치 사회적 병리현상(病理現像)을 진단할 때 발전과 성장보다는 쇠퇴의 역사로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직도 소모적 이데올로기의 논쟁과 야욕의 틀 속에 갇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도처에 부정과 무질서가 팽배하고 정의(正義)가 무너져 끝없는 추락과 도덕적 결핍을 의식하지 못한 채 미래 비전은 실종 상태에 이르렀다.

말로는 백성과 민의(民意)의 이름을 떠들고 팔면서도 진정한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는 역사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물려주는 데 인색하고 무관심하다.

 

{당쟁과 사화의 역사} 시리즈에 올리는 44건의 테마 사건 조명(照明)

 

: 조선 초기 왕권 강화 과정에 이바지 한 훈구파(勳舊派)와 신진 사류(士類)들 사이의 갈등 구조를, 9건의 테마 사건으로 조명하고,

 

: 조선 중기 사림(士林)의 등장과 몰락을 거듭하는 사화(史禍)의 어두운 그림자를, 10건의 테마 사건으로 조명하고,

: 조선 중기 본격적인 붕당(朋黨)과 사색당파(四色黨派) 형성되어 벌어지는 권력 다툼과 숙청을, 14건의 테마 사건을 통하여 조명하고,

: 조선 후기 왜란()의 와중에 사색당파(四色黨派) 사이의 투쟁과 탕평(蕩平)의 기치아래 벌어진 5개의 테마 사건을 조명하고,

 

: 조선 후기 호란()의 와중에 실학(實學)과 서학(西學, 천주교) 등 외세 문물의 수용과정에서 천주교 등을 탄압한 6개의 테마 사건을 통하여 반성과 거울로 삼고자 이를 연재 한다.

2016년 삼복염천(三伏炎天)에 청람(晴嵐) 정리()

 

 

. 1400~ 1500년대(100) 太祖 朝 ~ 燕山君 朝

 

{피해자 수혜자(가해자)}

 

1398년 무인정사(戊寅定社) ....... 1차 왕자의 난, 방석의 난,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

 

1398(태조 7) 825일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그 중에서도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가장 첨예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들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1393(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설립을 계기로 정도전을 주축으로 추진된 병권집중운동과 중앙집권화정책은 권력구조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개국공신 중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지만, 여타의 훈신(勳臣)과 왕실세력 및 무장 세력은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398년 이후 이른바 진법훈련(陣法訓鍊)이 강화되자 왕자·종친, 기타 훈신 및 무장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私兵)에 대한 통수권이 해체될 단계에 이르러 양파의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태조에게는 전 왕비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아들과 계비 강씨(康氏)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다. 방원은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개국에 가장 공이 크고 야심과 재질이 큰 인물이었던 만큼 유신(儒臣)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방원은 개국공신에도 책봉되지 못했다(태조 712월에 추록됨). 또한 세자 책봉 경쟁에서도 탈락했다. 태조 즉위 초의 세자 책봉에서 태조는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芳蕃)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공신 배극렴(裵克廉조준(趙俊) 등은 그 위인(爲人)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다며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밀모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며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단번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트집을 잡아,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해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그는 이숙번(李叔蕃) 등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박위(朴葳), 유만수(柳蔓殊), 장지화(張至和), 이근(李懃)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세자 방석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 방석의 동복형(同腹兄) 방번함께 죽였다. 이렇게 방원의 정적은 거의 제거되었고, 정치 정세도 크게 바뀌었다.

 

왕자 종친과 조준 등 일부 개국공신 및 방원의 심복인 하륜(河崙), 이거이(李居易), 이무(李茂) 등이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 자신이 사양해 둘째 방과(芳果)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방원 일당이 장악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방원 일당은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서훈되었다. 방원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하면서 세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1차 왕자의 난은 국가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에서 빚어진 것이다. 방원은 다시 제2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어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1398926일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서훈된 공신은 다음과 같다.

 

1(一等)8.

태종(太宗), 이화(李和), 이방의(李芳毅), 이방간(李芳幹), 이저(李佇),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조박(趙璞), 하륜(河崙), 이거이(李居易), 조영무(趙英茂)

- 삭제(4): 회안대군 이방간, 이무, 조박, 이거이.

- 기타(1): 이저.(삭탈 후 추가 책봉)

 

2(二等)10

이양우(李良祐), 심종(沈悰), 이복근(李福根), 이지란(李之蘭), 장사길(張思吉), 조온(趙溫)

김로(金輅), 박포(朴苞), 정탁(鄭擢), 이천우(李天祐), 장사정(張思靖), 장담(張湛), 장철(張哲)

이숙번(李叔蕃), 신극례(辛克禮),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 삭제(7): 심종, 박포, 장사정, 장담,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1400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방간의 난

 

1400(정종 2) 이방원(李芳遠)과 이방간(李芳幹) 사이의 일어난 왕권 투쟁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으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竹州: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로 귀양 갔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방간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이방간의 거병을 선동했다.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이방간은 유배되었고, 박포는 사형 당했다.

 

이로써 이방원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이방원의 심복 신하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2월 이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이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1401128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서훈된 공신은 다음과 같다.

 

1(一等)4.

이저(李佇), 이거이(李居易), 하륜(河崙), 이무(李茂), 조영무(趙英茂), 이숙번(李叔蕃), 민무구(閔無咎), 신극례(辛克禮), 민무질(閔無疾)

- 삭제(5): 이거이, 이무,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2(二等)3.

이래(李來), 이화(李和), 이천우(李天祐)

 

3(三等)9.

성석린(成石璘), 이숙(李淑), 이지란(李之蘭), 황거정(黃居正), 윤저(尹抵), 김영렬(金英烈), 윤곤(尹坤), 박은(朴訔), 박석명(朴錫命), 마천목(馬天牧), 조희민(趙希閔), 유기(柳沂)

- 삭제(3): 황거정, 조희민, 유기.

 

4(四等)22.

조박(趙璞), 조온(趙溫), 권근(權近), 이원(李原), 이직(李稷), 유량(柳亮), 조연(趙涓)

김승주(金承霔), 서익(徐益), 홍서(洪恕), 윤자당(尹子當), 이승상(李升商), 김정경(金定卿), 서유(徐愈), 이종무(李從茂), 이응(李膺), 심구령(沈龜齡), 연사종(延嗣宗), 한규(韓珪), 김우(金宇), 문빈(文彬), 윤목(尹穆), (추가) 송거신(宋居信), 김덕생(金德生)

- 삭제(2): 조박, 윤목.

 

 

1453년 계유정란(癸酉靖難) .............................. 수양대군 정권 장악

 

1453(단종 1) 1010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수양대군은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권람, 홍윤성(洪允成), 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만들었다.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그가 1453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의 심복 무사를 양성해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같은 해 1010일 밤, 마침내 유숙(柳淑), 양정, 어을운(於乙)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황보 인,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密召)하여 궁문에서 퇴살(推殺)하였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정분, 조수량(趙遂良), 안완경(安完慶) 등은 귀양 보냈다가 곧 교살하였다. 이와 같이, 김종서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무참하게 죽인 것은 수양대군 일파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함길도 절도사로 있던 이징옥(李澄玉)도 김종서의 일당이라고 하여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門)을 임명하였다. 이에 이징옥이 분개하여 박호문을 죽인 다음, 휘하 군사를 이끌고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저항하였다. 그는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종성부사 정종(鄭種)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잡혀 죽었다.

 

1453癸酉 1015.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숙청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기여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록된 공신은 다음과 같다. 인원: 37(정난 후에는 43이었으나, 6명 삭탈, 37명으로 확정.)

 

1(一等)12.

세조(世祖),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이사철(李思哲), 박종우(朴從愚), 김효성(金孝誠)

이계전(李季甸), 박중손(朴仲孫),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한명회(韓明澮)

2(二等)8.

신숙주(申叔舟), 권준(權蹲), 유수(柳洙), 홍윤성(洪允成), 양정(楊汀), 전균(田畇), 유하(柳河), 윤사윤(尹士昀), 봉석주(奉石柱), 곽연성(郭連成), 엄자치(嚴自治)

- 삭제(3): 양정, 봉석주, 엄자치.

 

3(三等)17.

이흥상(李興商), 이예장(李禮長), 성삼문(成三問), 강곤(康袞), 김처의(金處義), 유서(柳溆), 권언(權躽), 유사(柳泗), 홍순로(洪純老), 임자번(林自蕃), 안경손(安慶孫), 유자환(柳子煥), 설계조(薛繼祖), 권경(權擎), 홍순손(洪順孫), 송익손(宋益孫), 최윤(崔潤), 한명진(韓明溍), 한서구(韓瑞龜), 이몽가(李蒙哥)

- 삭제(3): 성삼문, 김처의, 최윤.

 

1455년 제1차 단종 복위운동(端宗 復位運動) ..... 死六臣 숙청

 

1455년 윤6(세조 1)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과 신하들을 귀양 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집현전 학사 출신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시도했던 거사.

 

집현전학사 출신 문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무관인 유응부(兪應孚), 성승(成勝), 박쟁(朴崝) 등이 모의, 상왕(上王 :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고변으로 사육신과 그 밖의 연루자가 모두 처참(處斬)되고 단종 복위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수양대군의 추종 세력인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 등은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자 과거에 세종·문종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집현전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 문관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 성승(成勝), 박쟁(朴崝) 등과 모의, 상왕(上王 : 단종)을 복위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455(세조 1) 10월경 집현전학사 출신 문관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거사를 모의하고, 14566월 초하루 창덕궁의 책명사(冊命使)인 명나라 사신 초대연의 자리에서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別雲劍 : 임금의 신변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무신)이 갑자기 제외되어 거사 계획은 실행 일보 전에 일단 실패하게 되었다. 이에 거사 주동자들은 거사 계획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있었는데,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고변으로 사육신과 그 밖의 연루자가 모두 처참(處斬)되고 단종 복위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死六臣)

성삼문: 승지(3), 수양대군에 의해 정난공신, 좌익공신이 됐으나 단종 복위를 기도, 145668일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

박팽년: 형조참판(2), 단종 복위 기도가 드러나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 끝에 145667일 옥사(자결했다는 설도 있음)

하위지: 예조참판(2), 수양의 소싯적 친구였으나 단종 복위운동 가담, 145668일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

이개: 집현전학사, 직제학, 145668일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

유성원: 집현전학사, 145662일 단종 복위운동이 드러나고 성삼문, 박팽년이 추포되자 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유응부: 동지중추원사(2), 무인 출신으로 국문과정에서 성삼문의 우유부단함을 비난, 145668일 거열형

김문기: 공조판서(2), 145668일 거열형,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사육신에 추가됨

 

(핵심가담자)

권자신: 단종의 외삼촌, 계유정난 이후 정난공신에 책록되어 동부승지, 호조참판, 예조판서, 145668일 거열형

박쟁: 성승, 유응부와 함께 별운검으로서 수양대군을 베려했으나 실패, 거열형

박중림: 박팽년의 부친, 대사헌, 형조판서 역임, 수양대군으로부터 이조판서 제수받았으나 거부, 145668일 거열형

성승: 무인 출신의 성삼문의 부친, 별운검으로서 수양대군을 베려했으나 실패, 145668일 거열형

송석동: 의정부사인, 첨지중추원사(2), 145668일 거열형

윤영손: 병조정랑, 단종복위운동에서 신숙주 제거임무를 맡음, 145668일 거열형

이휘: 참의, 수양대군의 정난공신이었으나 한직으로 내쳐진 후 단종복위운동 가담, 145668일 거열형

허조: 거사 발각되자 집에서 자결

 

사육신 및 핵심가담자, 그밖의 그의 가족 등 70여 명이 유배, 피살 되는 화를 당했다.

 

 

1457년 제2차 단종 복위 운동 .................... 금성대군 역모사건

 

순흥으로 귀양 보내진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은 그 후 14579월에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한 사건 영남 일대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런데 관노가 그 격문을 갖다 바치며 밀고해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부사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되었다.

 

밀고자의 경우 김질은 승승장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이보흠은 유배후 죽임을 당한다.

금성대군의 격문에 서명을 한 죄를 물었기 때문이겠으나 또한 그 때문에 숙종, 영조때 단종과 금성대군이 복위되고, 정조 때 장릉 배식단에 모셔질 때 이보흠도 함께 모셔져 이제는 충신으로 배향되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성대군 이유: 14579월 단종복위 음모가 드러나 10월 하순 사사

화의군 이영: 세종과 영빈 강씨의 아들, 금성대군과 친하여 1460년 사사

한남군 이어: 세종의 서자, 혜빈양 씨의 장남

영풍군 이선: 혜빈 양씨의 차남, 박팽년의 사위

곽조: 해미현감

손서륜: 집현전학사, 단종 양위 후 낙향하였다가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됨

현수: 단종의 장인, 수양대군과 친하여 즉위 후에도 돈령부판사 역임, 사육신 거사에도 무 사했으나 1457년 교수형

이보흠: 순흥부사, 금성대군과 함께 음모를 꾸미다 추포되어 교형

정종: 문종의 사위, 1461년 처형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혜빈양씨(惠嬪楊氏)” 등을 숙청하고 세조(世祖) 즉위에 기여한 공으로 서훈된 좌익공신(佐翼功臣)은 다음과 같다.

 

인원: 41(세조 1년에는 44명이었으나, 사육신 사건 이후에 5명 삭탈, 2명 추가로 41명으로 확정)

 

1(一等)7.

이증(李璔), 이곤(李璭), 한확(韓確), 윤사로(尹師路), 신숙주(申叔舟),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2(二等)12.

정인지(鄭麟趾), 이사철(李思哲), 정창손(鄭昌孫), 윤형(尹炯), 윤암(尹巖), 이계린(李季疄), 이계전(李季甸), 강맹경(姜孟卿),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최항(崔恒), 전균(田畇), 권반(權攀)

- 삭제(1): 양정.

- 승격(1): 정창손(3등에서 2등으로 승격)

 

3(三等)22.

이징석(李澄石), 권공(權恭), 황수신(黃守身), 박강(朴薑), 권자신(權自愼), 박원형(朴元亨), 윤사윤(尹士昀). 성삼문(成三問), 구치관(具致寬), 홍윤성(洪允成), 원효연(元孝然), 최유(崔濡), 조석문(曺錫文), 이예장(李禮長), 황효원(黃孝源), 한종손(韓終孫), 이휘(李徽), 윤자운(尹子雲), 한계미(韓繼美), 조효문(曺孝文), 김질(金礩), 이극배(李克培), 권개(權愷), 이극감(李克堪), 정수충(鄭守忠), 조득림(趙得琳)

- 삭제(4): 권자신, 성삼문, 이휘, 최유. - 추가(2): 홍윤성, 김질.

- 승격(1): 정창손(3등에서 2등으로 승격)

 

 

1467년 이시애 난(李施愛-)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土班)으로, 14675월초에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절도사 강효문을 베고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

 

왕권을 장악한 세조는 중앙집권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집권책은 북도인의 불만을 샀다.

강효문(康孝文)을 살해한 그는 길주목사 설정신(薛丁新, 澄新), 부령부사 김익수(金益壽) 등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모두 살해하는 동시에,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의 중신과 결탁해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고 주장하였다.

세조는 구성군 준(龜城君 浚)을 함길·강원·평안·황해의 4도병마도총사에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로, 허종(許琮)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을 대장으로 삼아 6도군사 3만 명으로 절도사의 근거지인 함흥을 점령해 관찰사 신면(申㴐)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이와 같이 반군의 기세가 거세자 구성군 준의 관군은 철원까지 나아갔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세조는 다시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鎭北大將)으로 삼아 평안도병 3,000명을 주어 영흥으로 나아가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朴仲善)을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삼아 황해도병 500명을 주어 문천(文川)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소에게는 경병(京兵) 1,000명을 주어 구성군을 돕게 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鐘介산개(山介)의 양령(兩嶺)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강순은 이에 따라 박중선·허종·어유소 등과 더불어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平浦)에 진을 쳤다.

 

이시애는 619일 북청을 비워 후퇴하고, 이시합은 2만여 명의 군졸을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주둔시키는 한편, 자신은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鎭軍)과 야인(野人)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高沙里浦)에서 북청 어소(於所)로 나아가 관군을 협격하려 하였다.

 

관군은 산개·종개령의 적을 격파하고 북청으로 쇄도해 들어가 이시애가 임명한 가짜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의 군을 격퇴시키니 당시 관군의 수는 약 5만명이었다. 이시애는 북청 패퇴의 소식을 듣고 1만여 명의 군병을 이끌고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천험의 만령(蔓嶺 : 訖嶺)으로 나아갔다.

 

관군은 812일 이시애군을 쫓아 단천을 탈환하고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에 이르렀다. , 허유례는 그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서 길주권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 거짓 항복하는 체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수하인 이주(李珠), 이운로(李雲露), 황생(晃生) 등을 설득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세조는 난을 계기로 북도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반란의 근거지가 되었던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시켰다.

 

1467920일 이시애(李施愛)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서훈된 적개공신(敵愾功)은 다음과 같다.

 

인원: 41(난 진압 후에는 45, 4명 삭탈 후 41명으로 확정)

 

1(一等)7.

이준(李浚), 조석문(曺錫文),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박중선(朴仲善), 허종(許琮), 김교(金嶠), 남이(南怡), 이숙기(李淑琦), 윤필상(尹弼商)

- 삭제(3): 구성군 이준, 강순, 남이.

- 기타(1): 김여석(金礪石).

 

2(二等)22.

김국광(金國光), 허유례(許惟禮), 이운로(李雲露), 이덕량(李德良), 배맹달(裵孟達), 구겸(具謙)

이형손(李亨孫), 이서장(李恕長), 김순명(金順命), 김관(金瓘), 이종생(李從生), 손소(孫昭)

김백겸(金伯謙), 박식(朴埴), 오자치(吳自治), 장말손(張末孫), 어세공(魚世恭), 심응(沈膺),

윤말손(尹末孫), 오순손(吳順孫), 김면(金沔), 맹석흠(孟碩欽)

- 기타(1): 정숭로(鄭崇魯). [: “조선의 공신들에는 정숭로가 오자치 다음에 기록되어 2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에 의하면 정숭로는 3등이었다.]

 

3(三等)12.

이보(李溥), 한계미(韓繼美), 이종(李徖), 선형(宣炯), 민발(閔發), 오자경(吳子慶), 우공(禹貢)

최유림(崔有臨), 정종(鄭種), 정준(鄭俊), 이양생(李陽生), 차운혁(車云革), 정숭로(鄭崇魯)

- 삭제(1): 정숭로.

 

1468년 남이(南怡) 역모 사건 .........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

 

재위 기간이 14개월 밖에 안 된 예종 대에 대대적인 숙정작업, 즉 한명회, 신숙주 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사건

 

이 사건으로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 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촌수로 당숙뻘인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 직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유자광은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별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조경치의 장인인 김개가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근 30여 명도 함께 죽였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있다.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伸冤)되었다.

 

 

14691028일 예종(睿宗) 남이(南怡) 장군의 역모 평정에 기여한 공로로 서훈된 익대공신(翊戴功臣)은 다음과 같다.

인원: 38.(39명이었으나 삭탈 1, 38명으로 확정.)

 

1(一等)4.

유자광(柳子光),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신운(申雲), 한계순(韓繼純)

- 삭제(1): 유자광.

 

2(二等)10.

 

이침(李琛), 이서(李曙), 이보(李溥), 이준(李浚), 심회(沈澮), 박원형(朴元亨), 이복(李復), 정현조(鄭顯祖), 이극증(李克增), 박지번(朴之蕃)

- 기타(1): 이준.(성종 1년에 유배 가면서 삭탈 되었다가 신원, 복관 됨.)

 

3(三等)24.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 조석문(曺錫文), 한백륜(韓伯倫), 노사신(盧思愼), 강곤(康袞), 박중선(朴仲善), 홍응(洪應), 조득림(趙得琳), 신승선(愼承善) 권감(權瑊), 어세겸(魚世謙), 윤계겸(尹繼謙), 정효상(鄭孝常), 권찬(權攢), 조익정(趙益貞), 안중경(安仲敬), 서경생(徐敬生), 김효강(金孝江), 이수명(李守命), 유한(柳漢), 한계희(韓繼禧), 강희맹(姜希孟), 이존(李存)

 

1470년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결탁 ................. 성종(成宗) 즉위

 

1470( 성종1) 예종이 재위 12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비(尹妃)와 자을산군(者乙山君)의 장인 한명회(韓明澮)의 정치적 결탁으로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성종(成宗)으로 옹립한 사건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비(尹妃)는 예종(睿宗)의 모후로서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이 결탁 과정에서 그 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희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구성군 이준(龜城君 李浚,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아들) 유배 배경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구성군을 지목하게 되었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원로대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 성종1)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10년 후 구성군이준(龜城君 李浚)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은 성종초의 왕권이 불안정하였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 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성종(成宗)의 성장 과정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로 추존)의 둘째아들 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못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에 세조에 의해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자을산군으로 개봉되었으며, 열한 살이 되던 1467년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146911월 숙부인 예종이 죽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1471327일 성종(成宗) 즉위에 기여한 공로로 서훈된 좌리공신(佐理功臣)은 다음과 같다. ............ 인원: 75

 

1(一等)9.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최항(崔恒), 홍윤성(洪允成), 조석문(曺錫文), 권감(權瑊)

정현조(鄭顯祖), 윤자운(尹子雲), 김국광(金國光)

 

2(二等)12.

이정(李婷), 이침(李琛),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심회(沈澮), 구치관(具致寬), 김질(金礩), 한백륜(韓伯倫), 윤사흔(尹士昕), 한계미(韓繼美), 한계희(韓繼禧), 송문림(宋文琳)

 

3(三等)18.

성봉조(成奉祖),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임원준(任元濬), 박중선(朴仲善), 강곤(康袞), 이극배(李克培), 홍응(洪應), 서거정(徐居正), 양성지(梁誠之), 김겸광(金謙光), 신승선(愼承善), 이극증(李克增), 한계순(韓繼純), 정효상(鄭孝常), 윤계겸(尹繼謙) 한치형(韓致亨), 이숭원(李崇元)

 

4(四等)36.

김수온(金守溫), 이석형(李石亨), 윤필상(尹弼商), 허종(許琮), 황효원(黃孝源), 유수(柳洙), 어유소(魚有沼), 함우치(咸禹治), 이훈(李塤), 김길통(金吉通), 선형(宣炯), 우공(禹貢), 김교(金嶠), 오백창(吳伯昌), 박거겸(朴居謙), 이철견(李鐵堅), 한치인(韓致仁), 구문신(具文信), 이숙기(李淑琦), 정난종(鄭蘭宗), 정숭조(鄭崇祖), 이승소(李承召), 한치의(韓致義), 한보(韓堡), 김수녕(金壽寧), 한치례(韓致禮), 한의(韓㠖), 이영은(李永垠), 이극돈(李克墩, 이수남(李壽男), 이현(李鉉), 신정(申瀞), 김순명(金順命), 유지(柳輊), 심한(沈瀚), 신준(申浚)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 .......... 훈구파와 신진사류 간 권력다툼

 

1498년 김종직 김일손 등 신진사류들이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찬탈과, 남이를 무고한 훈구파 유자광, 이극돈 등과 대립하였다.

 

무오사화는 1498성종실록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나라 때 項羽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는 한편,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

 

앞서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리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그의 시가 현판 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어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극돈유자광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 때는 김종직이 신임을 받고 있어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이 즉위해 1498성종실록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극돈은 이때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문제 삼고자 그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 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고변하였다.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 했던 연산군은 유자광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 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같은 죄에 걸린 강겸(姜謙)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곤장 100대에 3,000리 밖으로 귀양을 갔다.

 

이종준(李宗準), 최보(崔潽),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모두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어 봉수(烽燧)와 노간(爐干: 관청의 횃불을 관리하는 일)의 역을 지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柳珣), 윤효손(尹孝孫), 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침(許琛), 안침(安琛)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옥사로 많은 신진사류가 희생되고 주모자인 이극돈까지도 파면되었다. 그 이후로도 큰 사화를 여러 차례 더 겪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선조 대에는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 1500~ 1600년대(100) 燕山君 朝 ~ 先祖 朝

 

{피해자 수혜자(가해자)}

 

15043월 갑자사화(甲子士禍) ........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 사사 사건으로 빚어진 연산군의 폭정

 

1479(성종 10) 성종비 숙의 윤씨(연산군 生母)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 한 사건을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어 일으킨 참혹한 옥사 사건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 항(安陽君 㤚)과 봉안군 봉(鳳安君 熢)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 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 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이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 갔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다. 그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 이주(李胄) 10여 인이 사형되었다.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홍귀달(洪貴達), 이심원(李深源), 이유녕(李幼寧), 변형량(卞亨良), 이수공(李守恭), 곽종번(郭宗藩), 박한주(朴漢柱), 강백진(康伯珍), 최부(崔溥), 성중엄(成重淹), 이원(李黿), 신징(申澄), 심순문(沈順門), 강형(姜詗), 김천령(金千齡), 정인인(鄭麟仁), 조지서(趙之瑞), 정성근(鄭誠謹), 성경온(成景溫), 박은(朴誾), 조위(曺偉), 강겸(姜謙), 홍식(洪湜), 홍상(洪常), 김처선(金處善) 등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부중(府中)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 배격

 

이러한 처사는 신하들의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것이어서 평소 왕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신하들은 왕의 처사에 더욱 반발하였고, 한편에서는 연산군의 방종을 충동질하며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 한 신하들의 이러한 대립 상황 속에서 임사홍궁중·부중 양파의 대립 관계와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무오사화 때의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자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愼守勤)과 손을 잡고 부중의 훈구 세력과 무오사화 때 남은 신진사류까지도 일소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 연산군 폐위 중종 등극

 

150692(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임사홍(任士洪) · 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 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

 

연산군은 당시 특권 관료층인 훈구세력과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98년 훈구세력과 결탁해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거세하였다.

 

이로써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한 훈구세력은 그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권귀화(權貴化)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연산군은 궁금 계열 중심의 측근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이번에는 훈구세력의 경제 기반을 탈취하고자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으며, 이때 사림 계열의 희생도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 연산군의 학정은 더욱 심해졌다. , 자신의 실정에 대한 직간을 멀리하고, 경연(經筵)과 대제학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락(宴樂)의 장소로 만들었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여기(女妓)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채청·채홍사(採靑採紅使)를 보내 미녀를 선발하였는데 이를 운평(運平)’이라 하고, 그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興淸)’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하게 하였다.

또한,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해 민원을 샀으며, 이러한 학정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 등이 있자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불태우는 등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다.

 

더욱이 사치와 연락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내연(內宴)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황음(荒淫)이 자행되는 가운데 정치는 거의 방기 되어 내시 김자원(金子猿)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1506년 왕의 기휘(忌諱)로 파직되어 한거 중이던 전 이조참판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이 연산군의 폐출을 밀약하는 한편,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의 호응을 얻었다.

 

또 연산군의 사랑을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전수원부사 장정(張珽) 등의 호응을 얻어 그 해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石壁)으로 유람하는 기회를 노려 거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행차가 중지되는 바람에 거사가 중지될 형세였다.

 

이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柳濱), 이과(李顆) 등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 세를 막을 수 없어 예정대로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으게 되었다.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 수영(守英) 형제임사홍 등을 불러내어 격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변이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繼妃)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윤대비(尹大妃)를 경복궁에서 만나 허락을 얻어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 교동에 안치하는 동시에, 이튿날인 9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곧 중종이며,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 한다.

 

이로써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 계열로 돌아갔다. 따라서, 중종 이전부터 문제 되어온 정치 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시정은 이후에도 기대하기 어려워, 이후 훈구·사림 두 계열 간의 대립이 재현되었다.

 

150698.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기여한 공로로 서훈된 정국공신(靖國功臣)은 다음과 같다.

 

인원: 106.(책봉 초에는 117명이었으나 삭탈 11, 106명으로 확정.)

 

1(一等)5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자광(柳子光), 유순정(柳順汀),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 장정(張珽), 홍경주(洪景舟)

- 삭제(3): 유자광, 신윤무, 박영문.

 

2(二等)13.

이효성(李孝誠), 심순경(沈順徑), 변수(邊脩), 최한홍(崔漢洪), 윤형로(尹衡老), 조계상(曺繼商),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김감(金勘), 이계(李誡), 이계남(李季男), 구수영(具壽永), 이활(李?)

 

3(三等)31.

고수겸(高守謙), 심형(沈亨), 황탄(黃坦), 유세웅(柳世雄), 유계종(柳繼宗), 윤사정(尹士貞), 이심(李?), 이식(李軾), 민회발(閔懷發), 민회창(閔懷昌), 허상(許磉), 구현휘(具賢輝), 백수장(白壽長), 이극정(李克正), 이석번(李碩蕃), 김우증(金友曾), 장온(張溫), 이손(李蓀), 신준(申浚), 정미수(鄭眉壽), 박건(朴楗), 송질(宋軼), 강혼(姜渾), 한순(韓恂), 유경(柳涇), 김수경(金壽卿), 정윤겸(鄭允謙), 김경의(金敬義), 이함(李菡), 심정(沈貞), 윤탕로(尹湯老)

4(四等)57.

변준(卞儁), 변사겸(邊士謙), 한숙창(韓叔昌), 박이검(朴而儉), 유영(柳濚), 성희옹(成希雍), 윤형(尹衡), 신윤문(辛允文), 홍경림(洪景霖), 강지(姜漬), 윤금손(尹金孫), 유응룡(柳應龍), 윤탄(尹坦), 신수린(申壽麟), 조세훈(趙世勛), 한세창(韓世昌), 이맹우(李孟友), 허광(許礦), 윤여필(尹汝弼), 손동(孫仝), 유승건(柳承乾), 이성동(李盛同), 이종의(李宗義), 유홍(柳泓), 이한원(李翰元), 이기(李夔), 조원륜(趙元倫), 김선(金瑄), 조계형(曺繼衡), 김극성(金克成), 이우(李堣), 윤장(尹璋), 황맹헌(黃孟獻), 성몽정(成夢井), 이세응(李世應), 한사문(韓斯文), 김임(金任), 박영창(朴永昌), 박영분(朴永蕡), 조계은(曺繼殷), 이당(李?), 박이온(朴而溫), 이희옹(李希雍), 이성언(李誠彦), 신은윤(辛殷尹), 윤희평(尹熙平), 강윤희(康允禧), 이창(李敞), 최유정(崔有井), 채수(蔡壽), 문치(文致), 서경생(徐敬生), 김계공(金繼恭), 김숙손(金叔孫), 김은(金銀), 임원산(任元山), 권균(權鈞), 김준손(金俊孫), 반우형(潘佑亨), 김무(金碔), 이곤(李坤), 우정(禹鼎)

- 삭제(8): 신윤문, 손동, 유승건, 윤장, 조계형, 이우, 박영창, 박영분.

 

 

1507년 이과(李顆)의 난(逆謀) .................. 중종 폐위 역모 사건

 

1507(중종 2)에 이과(李顆)는 중종반정 후 전산군에 봉해졌으나 관직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고 이찬, 윤귀수, 김잠 등과 함께 모의하여 일으킨 난

 

이과는 이창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과지, 본관은 전의이다. 그는 1491(성종 22)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의 길로 들어선 후, 저작, 부교리, 시독관, 수찬 등 을 역임하였다.

 

1495(연산군1)에는 기주관이 되어(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1504(연산군 10)에는 호조참의,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전에 홍문관에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 관사에 대해 논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은 옳지 않으니 자제해 달라고 충언한 적이 있었는데, 이게 화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갑자사화(1504)때 전라도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1507(중종 2)에 그는 정국원종공신으로 전산군으로 봉해졌으나, 관직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전 대사성 이과는 그 해 6월에 정국공신 4등에 책록 되었으나, 곧 대간에서 반대하여 원종 1등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크게 분개하였다. 그는 15078월에 이찬, 윤귀수, 김잠, 손유 등과 모의하여 견성군 이돈(성종의 아들, 숙의 홍씨의 소생)을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고, 박원종, 유순정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1507826일 밤 중종이 선능에 친히 제사를 올리러 가는 틈을 타서 거사하기로 날짜까지 잡아 놓았다. 그런데 왕이 제사를 지내러 막 떠나려는 날 밤(거사 전) 우림위 노영손의 고변으로, 중종은 선릉으로 행차를 중단하고 즉시 죄인들을 잡아들이게 하여, 엄히 문추했다.

 

그 이튿날 아침에야 자신이 역적모의에 관련된 것을 알게 된 진성군은 궁궐 뜰로 나가 무릎을 꿇고 처벌을 받을 것을 자청했다. 이날 다시 심문이 이뤄졌지만, 김잠과 손유는 이찬에게 이과의 음모를 전해 듣긴 하였으나 그 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다가 28일에 이찬은 마침내 죄를 고백하면서 공모자가 더 있다고 발설해 버렸다.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신희철, 유흥조, 유영, 윤철령 등은 유배당했으며, 그 나머지는 방면되었다. 그리고 91일에 견성군 이돈은 강원도의 간성으로 유배당한 후 사사 당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그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신원(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줌)되었다. 한편, 중종은 정승 등의 반대를 무릅써 가며 노영손 등 이과의 난을 미리 막게 하는데 공을 세운 자 21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했다.

 

1507 92. 중종은 이과(李顆)의 역모 평정에 기여한 공로자를 정난공신(定難功臣)에 서훈되고 일부는 승진시켰다.

 

인원: 책봉 초기에는 22명이었으나 노영손(盧永孫) 이외에는 전원 삭탈, 1명으로 확정

 

1(一等)1.

노영손(盧永孫), 유순(柳洵),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윤탕로(尹湯老)

- 삭제(4): 유순, 박원종, 유순정, 윤탕로.

 

2(二等)0.

민효증(閔孝曾), 이계남(李季男), 홍경주(洪景舟), 이유청(李惟淸), 박인손(朴仁孫)

- 삭제(5): 전원 삭제

3(三等)0.

설맹손(薛孟孫), 홍숙(洪淑), 안당(安瑭), 이계복(李繼福), 황맹헌(黃孟獻), 신영홍(申永洪), 김양언(金良彦), 강홍(姜洪), 권희맹(權希孟), 김은(金銀), 성윤(成胤), 김세준(金世準)

- 삭제(12): 전원 삭제

 

1519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 ........... 신진사림(新進士林) 숙청

 

중종의 조광조 중용으로 이상주의적 왕도정치를 구현코자 하였으나, 반정공신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기성 훈구세력과의 갈등을 빚게 되고,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破字)’ 사건으로 왕의 미움을 사게 된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조광조는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그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 학자였다.

 

1515년 성균관 유생 200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주 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과거제 폐단을 혁신하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해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해 미신 타파에 힘쓰고, 향약(鄕約)을 실시해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 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二倫行實)언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그의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이상주의적 왕도정치는 구현 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많아 도리어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으며, ,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 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와 대립하게 되었고, 청렴결백과 원리 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세력을 소인시해 훈구 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 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불만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즉 이 사건은 중종반정 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 호가 삭탈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한 조처였다.

 

이러한 조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훈구 대신에 대한 도전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勳籍: 공훈을 기록한 명부)에서 삭제 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이들은 희빈 홍씨를 이용해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라고 왕에게 밤낮으로 말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破字)’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주, ·김전(金銓), 남곤,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밀의를 거듭한 끝에, 151911월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며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하는 계를 올렸다.

 

이때는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 조광조 일파가 투옥되자 홍경주·남곤·심정 등은 이들을 당장에 처벌하게 하려 했으나, 이장곤(李長坤안당(安瑭정광필 등이 반대하였다. , 성균관 유생 1,000여 인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치죄 후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서 곧 사사되고, 김정, 기준(奇遵), 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 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 밖에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홍언필(洪彦弼), 이자(李耔), 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가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 이 옥사 이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朴維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일명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하며, 김정국(金正國)이 편찬한 <<기묘당적 己卯黨籍>>94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김정(金淨)의 후손 김육(金堉)이 편찬한 기묘제현전 己卯諸賢傳에는 218명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중종대의 개혁 정치를 주도한 조광조, 김정국, 김안국(金安國) 등 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가장 혹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1518(중종 13) 현량과를 통해 등용되었던 김식(金湜안처근(安處謹박훈(朴薰김정·박상(朴祥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 등과 조광조 등 주로 30대의 소장파였다.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 ....... 안치근, 문근, 유인숙 등 제거

 

심정·남곤 등의 훈구파 세력들이 사림계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고 사건

 

1519년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이 몰락한 기묘사화의 여파로 일어났다. 심정·남곤 등이 기묘사화를 기화로 사림파를 제거한 다음 정권을 잡자, 조광조 일파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안처겸, 문근(文瑾), 유인숙(柳仁淑) 등을 파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안처함(安處諴)은 그의 친구인 송사련으로부터 형 처겸이 친지들과 함께 현 집권자들을 비방했다는 말을 듣고 부친이며 조광조 일파와 가까웠던 안당(安瑭)에게 고하여 자기 집의 농장이 있던 용인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얼마 후 처겸이 다시 그의 장인의 집에서 이정숙(李正淑)과 권전(權磌) 등을 만나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심정·남곤 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니 이 무리를 제거해야 국가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자리에 있었던 송사련남곤, 심정에게 아부하여 출세하기 위해 그의 처남인 정상과 짜고, 안처겸의 모친상 조객록(弔客錄)과 발인할 때의 역군부(役軍簿)를 가지고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반란을 꾀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그 결과 안당, 안처겸, 안처근(安處謹)을 비롯하여 권전, 이경숙, 이충건(李忠楗), 이약수(李若水), 조광좌(趙光佐) 등 많은 사림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다음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송사련은 고발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 죄인들로부터 몰수한 전답·가옥·노비를 받고 30여 년 간 세력을 누렸다. 그 뒤 심정·남곤의 일파가 몰락하고 사림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1566(명종 21)에 안당의 손자 윤()의 상소로 앞서 희생되었던 안처겸 등의 인물들이 신원되고 직첩을 돌려받았으며, 1575(선조 8)에는 국가로부터 시호까지 받았다. 이 사건은 심정·남곤 등의 훈구파 세력들이 사림계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고사건이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대윤 윤임, 소윤 윤형원 간의 대립, 반목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꾀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 : 장경왕후의 아우)과 본격적인 대립·알력 시작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辛卯三奸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沈貞, 李沆, 金克愊을 말함.)과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만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 중 정신(廷臣)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 중인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제2계비 윤씨)를 폐출하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윤안임(尹安任 : 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귀양 간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항, 무택도 처형되었는데, 이들을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한다.

 

김안로가 실각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외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종 비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 : 윤여필의 딸)는 세자 호(: 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의 일대 논란이 벌어졌으나, 1517(중종 12)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립되어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명종)을 출산하였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형제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는데, 이로써 조신·사림은 서로 갈리게 되고 외척을 중심으로 궁·정 내부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정계가 양분되었다. 그러던 중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인종은 유관(柳灌),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고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자파의 사림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 결과 사림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사림들은 소윤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인종은 원래 중종의 반목·갈등 속에서 성장한 유약한 군주로 문정왕후의 뜻을 얻지 못함을 항상 상심하던 중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 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소윤파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윤원형의 형인 윤원로를 탄핵해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 대윤파의 반격이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윤원형은 윤임 및 그 일파인 영의정 유관, 유인숙 등과 그 배경을 이루는 사림을 배제하기 위해 평소 이들에게 원한을 가진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삼아 계책을 꾸미는 한편, 자신의 첩 난정(蘭貞)으로 하여금 문정대비에게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윤 일파는 역모죄로 몰려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비롯해 계림군(桂林君), 김명윤(金明胤), 이덕응(李德應), 이휘(李輝), 나숙(羅淑), 나식(羅湜), 정희등(鄭希登), 박광우(朴光佑), 곽순(郭珣), 이중열(李中悅)·, 이문건(李文楗) 등이 처형 및 유배되어 하루아침에 몰락하였다. 이 무고사건으로 빚어진 옥사를 을사사화라 한다.

 

윤원형은 이러한 음모 수법으로 사림과 그의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비명에 죽은 명사만도 을사사화 이래 5, 6년간 1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윤원형의 세도와 수렴 정치의 폐단은 심화되어갔으며, 1553(명종 8) 친정 이후도 그 폐단은 가시지 아니하였다.

 

다시 말하면, 조선 전기의 사화들은 그것이 훈구세력에 의해서든 궁중 또는 외척에 의해서든 간에 화를 당한 쪽이 거의 신진사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정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세의 당쟁과 연결된다. 다만, 사화에서는 학통과 정치 이념상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당쟁은 순전히 정권을 잡기 위한 정치투쟁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당파성이 강하였다.

 

사화의 영향으로 사림들이 고향에 은둔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은둔한 사림들에 의해 서원(書院)이 일어나 사림의 학문적 도장으로, 정론(政論)의 광장으로 후세 당론의 진원지가 되어 붕당 세력의 온상이 되었다.

 

이러한 서원의 발달과 성격은 조선왕조의 정치 문화적 특성과 정치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545915일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소윤 윤형원이 승리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서훈 되었다.

 

책봉 시에는 27명이었으나 이이(李珥)의 삭제 주장으로 1577(선조 10)에 위훈삭탈(僞勳削奪) 되었다,

 

1(一等)4.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 승급(1): 임백령.[3등에서 승급]

 

2(二等)7.

윤원형(尹元衡), 홍언필(洪彦弼), 윤인경(尹仁鏡), 민제인(閔齊仁), 최보한(崔輔漢), 김광준(金光準), 한경록(韓景祿)

- 승급(2): 윤원형, 한경록.[3등에서 승급] - 추가(1): 최보한.

 

3(三等)16.

이언적(李彦廸), 정옥형(丁玉亨), 신광한(申光漢), 윤개(尹漑), 송인수(宋麟壽), 최연(崔演), 송세형(宋世珩), 이윤경(李潤慶), 윤돈인(尹敦仁), 이만년(李萬年), 최언호(崔彦浩), 정현(鄭礥), 신수경(申秀涇), 조박(趙璞), 박한종(朴漢宗), 윤삼(尹參)

- 강등(3): 이언적, 정옥형, 신광한.[2등에서 강등] - 추가(1): 신수경.

- 삭제(1): 이언적.(윤임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삭탈.)

- 기타(1): 정현.[삭제되었다가 복관

15479월 양재역 벽서사건 ....... 정미사화(丁未士禍)

 

1547(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

 

을사사화의 여파는 더욱 확대되어 윤원로는 동생 윤원형에 의해 처형되고, 또 대윤의 잔당으로서 지목된 봉성군(鳳城君) 송인수(宋麟壽), 이약빙(李若氷) 등이 죽고, 권벌(權橃), 이언적, 정자(鄭滋),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백인걸(白仁傑), 김만상(金彎祥), 권응정(權應挺), 권응창(權應昌), 이천계(李天啓) 20여 명이 유배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옥사를 정미사화라고도 한다.

 

윤원형·윤인경(尹仁鏡이기·정순명(鄭順明허자(許磁)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중에는 사림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鳳城君岏)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이 많았다.

 

1565년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 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신원과 포장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으로 쓰인 것을 문제 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1589년 종계변무(宗系辨誣) ...... 태조 이성계의 세계 시정 주청()하여 200여 년간 미해결되어 온 외교문제 완절 해결

 

1394(태조 3) 6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

 

고려 말 1390(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태조 3) 4월이었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宗系誤記)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지만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 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의 문제가 해결되고, 이어 10월에 면복(冕服) 등을 받아 와 명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었다. 그러자 조선은 11월에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했는데, 그 때에 종계변무의 임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주청문(奏請文)에는 그 동안 명나라와의 사이에 내왕한 문서와 태조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는 명태조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만력회전 萬曆會典중수본에서 변명 사실을 부기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여 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중종 때 반정의 합법성을 강조할 때에도 다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 1518(중종 13) 주청사(奏請使)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에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 이성계의 이름)이 홍무 6년부터 28년까지 무릇 네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곧 남곤(南袞), 이자(李耔) 등을 보내어 태조의 세계가 이인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선세(先世)에 시역(殺逆)한 일이 없다.”고 밝히고 그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武宗)은 이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개정하지 않았다.

 

그 뒤 1529년에 가절사 유보(柳溥)가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이 중찬되리라는 것을 듣고, 곧 예부에 주청해 이 기회에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 1539년에도 주청사 권벌(權橃), 1557(명종 12)에는 호조판서 조사수(趙士秀), 1563년에는 주청사 김주(金澍), 1573(선조 6)에는 주청사 이후백(李後白윤근수(尹根壽), 1575년에는 사은사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내어 기회 있을 때마다 개정의 주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대명회전은 반포되지 않았고, 또한 중찬의 내용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대명회전을 중찬할 때 조선 측의 주장을 부록하겠다고 언약하는데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어 대사간 이이(李珥)는 국군(國君)이 수무(受誣 : 무고로 인한 모욕을 당함)를 한 지 20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를 고치지 못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여 인재를 주청사로 보내어 강력하게 주장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581(선조 14)에는 김계휘(金繼輝)를 주청사로 보내고, 다시 1584년에는 황정욱(黃廷彧)을 보냈다. 그리고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 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종계변무의 목적이 달성되게 되었다.

 

이어 1587년에는 주청사 유홍(兪泓)을 명나라에 보내어 이번에는 대명회전의 반사(頒賜)를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예부에서는 황제의 친람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예부상서 심리(沈鯉)의 상주에 의해 명제의 칙서와 함께 중수된 대명회전중에서 조선 관계 부분 한 질을 보냈다.

 

선조는 이것을 종묘·사직·문묘에 친히 고하였다. 그 뒤 1589년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전부를 받아 옴으로써 200년간의 종계변무의 외교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게 되었다.

15891122.(선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기여한 공로로 서훈된 19명의 광국공신(光國功臣)은 다음과 같다.

 

1(一等)3.

윤근수(尹根壽), 황정욱(黃廷彧), 유홍(兪泓)

2(二等)7.

홍성민(洪聖民), 이후백(李後白), 윤두수(尹斗壽), 한응인(韓應寅), 윤섬(尹暹), 윤형(尹泂), 홍순언(洪純彦)

 

3(三等)9.

김주(金澍), 이양원(李陽元), 황림(黃琳), 윤탁연(尹卓然), 정철(鄭澈), 이산해(李山海), 기대승(奇大升), 유성룡(柳成龍), 최황(崔滉)

 

 

1589년 정여립의 난(鄭汝立-) =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황해 관찰사 한준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진격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이에 선조는 군대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하도록 지시했고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쳤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했다...라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일련의 의문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은 조작된 모반 사건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른 정황적 증거들도 의구심을 더 부채질한다. 김장생(金長生)송강행록(정철의 행적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공은 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는 정여립이 반드시 도망을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입궐을 서둘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만 놓고 본다면 정철은 정여립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로 인해서 서인 세력들이 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실제로 동소만록과 같은 야사에서는 "정여립이 죽도로 놀러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정여립을 습격하여 살해한 후 자결로 위장했다"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정여립은 시대를 앞선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 ,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훗날 부각되어 반체제적인 인사로 낙인찍혔다. 그의 천하 공물론은 라틴어에서 공화국을 가리키는 용어 "res publica"와 그 의미에 있어서 놀랍도록 일치한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공중의 것이란 의미이다. 말 그대로 국가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 게다가 그는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면 정여립은 한국 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비운의 천재 (이런 면에서 신채호가 그를 많이 띄웠다.)

 

허균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시대를 뛰어넘은 사상가로 꼽히고 있지만 모반 사건으로 그의 문집이 소실되어서 그의 사상을 더 연구할 길이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실록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그가 자결한 이후, 시신이 한양으로 이송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영조시기에 작성된 봉사말록은 진안현감 등이 정여립을 살해한 이후, 자결한 것으로 꾸며 상소를 올렸다고 나왔다.

 

159011정여립(鄭汝立)의 난평정에 기여한 공로로 선조(宣祖) 에 책봉한 평난공신(平難功臣) ....... 22명은 다음과 같다.

 

1(一等)3.

박충간(朴忠侃), 이축(李軸), 한응인(韓應寅)

 

2(二等)12.

민인백(閔仁伯), 한준(韓準), 이수(李綏), 조구(趙球), 남절(南嶻), 김귀영(金貴榮)

유전(柳㙉), 유홍(兪泓), 정철(鄭澈), 이산해(李山海), 홍성민(洪聖民), 이준(李準)

 

3(三等)7.

이헌국(李憲國), 최황(崔滉), 김명원(金命元), 이증(李增), 이항복(李恒福), 강신(姜紳), 이정립(李廷立)

 

1596년 이몽학의 난(李夢鶴)

 

1596(선조 29) 임진왜란 중에 이몽학이 주동이 되어 충청도에서 일으킨 반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는 명(() 사이에 강화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자 확대되어가는 민중의 원성과 고통은 현실 여건과 타협될 수 없는 사회 모순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포착해 이몽학은 불평불만에 가득 찬 민중을 선동, 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이몽학은 본래 왕실의 서얼(庶孽)출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는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한현과 함께 홍산(鴻山 : 지금의 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를 조련(操鍊)하였다.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군 규합에 열중했다.

 

한현은 선봉장 권인룡(權仁龍), 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어사 이시발(李時發)의 휘하에 있으면서 호서 지방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소홀함을 알아차리고 이몽학과 함께 시리(時利)에 편승해서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때 한현은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洪州 : 지금의 홍성)로 내려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사할 것을 이르고 자신은 내포(內浦)로부터 상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사의 성패만을 관망하려 한 것이다.

 

이몽학은 김경창(金慶昌), 이구(李龜), 장후재(張後載), 도천사(道泉寺) 승려 능운(凌雲), 사노(私奴) 팽종(彭從) 등과 함께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주둔하니 승속군(僧俗軍)이 무려 600700명이었다. 159676일 이몽학 일당이 야음을 타고 홍산현을 습격해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붙잡았다.

 

이어 임천군(林川郡)을 습격해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납치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반군에게 항복해 빌붙게 되었다. 7일에는 정산현(定山縣),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을 함락하니 정산현감 정대경(鄭大卿)과 청양현감 윤승서(尹承緖)는 도망하였다.

 

9일에는 대흥군(大興郡)을 함락하니 군수 이질수(李質粹) 또한 산중으로 도주하였다가 간신히 적정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수령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해 항복하거나 도주하고 이민(吏民)들도 모두 반군에게 복종하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은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겁을 먹어, 수하인들이 무기를 적진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고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자 문서를 반란군에 전해주었다.

 

서산군수 이충길(李忠吉)은 아우 3명을 반란군에게 몰래 통하게 하여 도와주었다. 이렇게 되자, 이몽학은 대흥을 함락한 같은 날에 홍주를 침범하게 되었다.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주관속(州官屬) 이희(李希신수(申壽)를 반군 진영에 보내어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어에 따른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얻는 한편,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을 기용, 많은 무사들을 모이게 하였다.

 

체찰사종사관 신경행(辛景行)도 인근 수령에게 전령해 구원을 청했다. 수사 최호(崔湖)도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니 홍주성의 수성 계획은 완전히 갖추어졌다.

 

반란군과 맞서 싸우는 동안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이 홍주로 향해 무량사에 이르렀고, 어사 이시발은 유구(維鳩), 중군(中軍) 이간(李侃)은 청양에 포진해 장차 홍주로 향하려는 군사의 위세를 떨쳤다.

 

이몽학이 성의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덕산(德山)을 향해 달아나자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를 이용해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어 혼란시키면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이때 한현은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홍가신의 진군으로 패주하다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은 33 명이며 외방에서 처형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연좌율(緣坐律)을 적용하게 되면 그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해 희생자를 가급적 줄였다. 이리하여 반란 주모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도들의 입에서 나온 의병장들의 무인사건(誣引事件)은 당시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덕령(金德齡), 최담령(崔聃齡), 홍계남(洪季男), 곽재우(郭再祐), 고언백(高彦伯) 등이 무인되었다. 그 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당하거나 옥사하였다. 김덕령은 뒤에 신원되었으나 반란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난 처리가 끝난 뒤에도 늘어났다.

 

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 책록되었다.

 

갑진년(1604) 625. 선조 때 서얼 이몽학(李夢鶴)의 난진압에 기여한 5명이 청난공신(淸難功臣)에 책록되었다.

 

1(一等)1. 홍가신(洪可臣)

2(二等)2. 박명현(朴名賢), 최호(崔湖)

3(三等)2. 신경행(辛景行), 임득의(林得義)

 

 

. 1600~ 1700년대(100) 先祖 朝 ~ 肅宗 朝

 

{피해자 수혜자(가해자)}

 

1612년 김직재의 옥 ......................... 대북파 정권 장악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서 꾸민 그 첫 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 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 군수 신율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며 시작되었다. 신율은 그를 체포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인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 이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의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 전정언 ,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 자백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한 명이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들은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인하여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였으며, 직제와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16135. 광해군(光海君)김직재(金直哉) 역모평정에 기여한 공신을 형난공신(亨難功臣)[위훈삭탈]으로 책봉한다.

책봉 시에는 24명이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위훈삭탈(僞勳削奪) .]

 

1(一等)2.

신율(申慄), 유공량(柳公亮)

 

2(二等)12.

김이원(金履元), 강욱(康昱),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기자헌(奇自獻), 조정(趙挺), 송순(宋諄), 이이첨(李爾瞻), 민덕남(閔德男), 박진원(朴震元), 신경진(辛慶晉)

3(三等)10.

심희수(沈喜壽), 유인길(柳寅吉), 박건(朴楗), 최유원(崔有源), 윤훤(尹暄), 이필영(李必榮), 윤수겸(尹守謙), 윤중삼(尹重三), 유숙(柳潚), 기협(奇恊)

 

 

1613년 칠서의 옥(七庶 -) = 계축옥사 ........ 大北派 정권 장악

1613(광해군 5) 문경세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서얼(庶孼) 7인의 강도 사건

 

이때의 범인들은 영의정을 지낸 박 순의 서자 박응서 , 심 전의 서자 심우영 ,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허균 , 이사호 ,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며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 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 달래는 상소를 올린바 있는데 이에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 무륜당 " 을 짓고, 그 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 칠서의 옥 " 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 개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 정 향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는데,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 한 명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혼란을 야기 시키려 했으며,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 후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인목대비로서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 협을 비롯해서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 받았던 신 흠, 박동량 포함 일곱 대신과 이정구, 김상용, 황 신 등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추국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다 무당을 보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 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축년에 일어났다 하여 <계축옥사> 라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 서인 정권 장악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仁祖)를 올립한 사건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 법을 어김)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 서얼 출신 7인이 은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옥사)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다. 선왕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유훈을 받든 일곱 신하) 중 재직자인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한준겸(韓浚謙)을 내쫓았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하였다. ,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 능창군 전(綾昌君佺: 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금고 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및 정홍익(鄭弘翼), 김덕함(金德諴)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멀리 귀양 보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발론(發論)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尊號)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한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죽이고 동생을 살해함.)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중요한 구실을 주었다.

 

서인의 이귀, 김자점(金自點), 김류(金瑬), 이괄(李适) 등은 마침내 이를 이유로 무력 정변을 기도하게 되었다.

 

일찍이 함흥판관으로 있었던 이귀는 북우후(北虞候) 신경진(申景禛)과 맺고, 또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과 통하여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대북 정권을 타도하고 능양군 종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623313일 밤에 이귀, 심기원, 최명길(崔鳴吉), 김자점 등은 병력 600700명으로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延曙驛)에 나아가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병력 700여 명과 합류하였다.

 

먼저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宴會)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피신하였다. 그러나 반군의 횃불이 창덕궁의 제전(諸殿)에 인화되어 모두 불탔다. 능양군은 보새(寶璽)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바치니, 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가 곧 인조이며 이 정변이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었다. 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새 왕의 간청으로 서인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 보내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이위경 등 몇 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귀양 보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김류 등 33명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논공이 공평하지 못해 서인 간에 다소의 반목이 있었으며, 1년 뒤 이괄의 난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남인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상위(相位)에 오름으로써 남인이 제2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1623년 윤1018. 인조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기여한 공로로 책봉한 정사공신(靖社功臣) 47명은 다음과 같다.

 

책봉 시에는 53명이었으나, 삭탈 6명으로 47명으로 확정.)

 

1(一等)7.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신경진(申景禛), 이서(李曙), 최명길(崔鳴吉), 이흥립(李興立), 구굉(具宏), 심명세(沈命世)

- 삭제(3): 김자점, 심기원, 이흥립.

 

2(二等)13.

이괄(李适), 김경징(金慶徵), 신경인(申景禋), 이중로(李重老), 이시백(李時白), 이시방(李時昉), 장유(張維), 원두표(元斗杓), 이해(李澥), 신경유(申景裕), 박효립(朴孝立), 장돈(張暾), 장신(張紳), 구인후(具仁垕), 심기성(沈器成)

- 삭제(2): 이괄, 심기성.

 

3(三等)27.

박유명(朴維明), 한교(韓嶠), 송영망(宋英望), 이항(李沆), 최내길(崔來吉), 신경식(申景植), 구인기(具仁墍), 조흡(趙潝), 이후원(李厚源), 홍진도(洪振道), 원유남(元裕男), 김원량(金元亮), 신준(申埈), 노수원(盧守元), 유백증(兪伯曾), 박정(朴炡), 홍서봉(洪瑞鳳), 이의배(李義培), 이기축(李起築), 이원영(李元榮), 송시범(宋時范), 강득(姜得), 홍효손(洪孝孫), 김련(金鍊), 유순익(柳舜翼), 한여복(韓汝復), 홍진문(洪振文), 유구(柳䪷)

- 삭제(1): 김련.

 

 

1624년 이괄(李适)의 난 ....................................... . 3일 천하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반역 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의 하나였다. 16241월에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등은 이괄과 아들 전(),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이 불측한 생각으로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의 사자(使者)들을 목 베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전 계획에 의한 반란이라기보다는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한 인물로서 이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괄 군이 관군과 처음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薪橋)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인 박영서(朴永緖)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돈()을 능지처참하였다. 이괄은 서울로의 진격을 쉬지 않았다. 그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라 관군 측에서는 소재조차 확인하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이괄은 평산에 관군의 방비가 엄한 것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시켜 마탄(馬灘 : 예성강 상류, 지금의 猪灘)에서 또 한 차례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臨津)을 지키고 있던 관군을 기습 공격해 붕괴시켰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공주로 피난하였다. 211일 이괄 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興安君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들로 하여금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鞍峴에 진을 쳤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이괄은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날 밤 이괄·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 지금의 光熙門)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관군의 추격으로 이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2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 한명련 등은 그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162438.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진압에 기여한 32명에 대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봉하였다.

 

1(一等)3.

장만(張晩), 정충신(鄭忠信), 남이흥(南以興)

2(二等)9.

이수일(李守一), 김기종(金起宗), 변흡(邊潝), 유효걸(柳孝傑), 김경운(金慶雲), 이희건(李希建), 조시준(趙時俊), 박상(朴瑺), 성대훈(成大勳)

3(三等)20.

 

남이웅(南以雄), 신경원(申景瑗), 김완(金完), 이신(李愼), 이휴복(李休復), 송덕영(宋德榮), 최응일(崔應一), 김양언(金良彦), 김태흘(金泰屹), 오박(吳珀), 최응수(崔應水), 지계최(池繼漼), 이락(李珞), 이경정(李慶禎), 이택(李澤), 이정(李靖), 안몽윤(安夢尹), 이우(李祐), 윤회(尹晦), 김광소(金光熽)

 

 

1627년 이인거의 난(李仁居) ........ 광해군 복위 운동(실패)

 

1627(인조 5) 이인거(?∼1627)가 주동이 되어 광해군 복위를 음모한 반란.

 

이인거는 본관이 영천이며, 교리를 지낸 추()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북관(北關)을 떠돌다가 부모가 모두 죽자 그곳에 매장하였는데, 고향으로 반장(返葬 : 묘소를 되 돌려오는 것)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비탄하면서 횡성 산골짜기에 은거하였다.

 

은거하면서도 행실이 괴벽하고 거짓을 꾸며 여러 차례 조정에 방자한 글을 투서하고 남몰래 반역할 뜻을 가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아 그가 은일 자중한다고 여기고 오히려 현명함을 칭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는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으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유희분(柳希奮) 형의 아들인 유효립(柳孝立)이 제천에 귀양 가 있으면서 대북파 중 살아남은 자와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킬 음모를 하고 있었다. 는 이러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효립과 서로 내통하고 있었다.

 

1627928일에 신에게 정예한 군사 수천 명이 있으니 우선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간신들을 죽이고 전하의 측근에 있는 악한 무리들을 숙청해 전하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 소굴을 정벌, 국가의 수치를 씻게 해주십시오.”라는 소를 강원감사 최현(崔晛)에게 올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감사는 이를 패려한 잘못된 생각이라 여기고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는 10여명을 이끌고 횡성현에 와서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다.

 

이에 현감 이탁남(李擢男)이 현을 버리고 원주목(原州牧)으로 도망쳐 달려가니, 목사 홍보()가 놀라 고변을 조정에 알리고 군사를 동원해 요새를 지키게 하는 한편, 삼남 지방의 병사들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각 도 경계에서 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102일 홍보가 원주의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진군해 치니, 이인거와 세 아들이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저자에서 참형되었고, 난이 평정된다.

 

16271126. 인조는 이인거(李仁居)의 난진압에 기여한 6명에 대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으로 책봉한다.

 

1(一等)1 홍보(洪靌)

2(二等)2 이탁남(李擢男), 원극함(元克咸)

3(三等)3 이윤남(李胤男), 신경영(辛慶英), 진극일(陳克一)

 

 

1628년 유효립(柳孝立) 모반 사건 ......................... 실패

 

1628(인조 6) 유효립의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

 

1628(인조 6) 광해군의 외척 유효립(柳孝立)은 제천에서 전() 세마(洗馬) 허유(許愈), () 좌랑(佐郞) 정심(鄭沁), 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내통하여 자기 아들과 추종자를 도성(都城)으로 잠입시켜 광해군을 상왕(上王)으로 삼고,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죽산부사로 있던 허적이 역모를 알아차려 조정에 고변하였고 허적의 아우인 허계가 아들 허선과 함께 음모자를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군사를 동원해 동대문과 남대문에 잠복하였다가 거사 예정일 저녁에 도성으로 들어오던 역도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효립 등의 음모는 불발로 끝나고, 여기에 가담하였던 무리는 모두 처형되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능안마을 양천 허씨 종중에 허선의 초상과 그의 아버지 허계의 초상이 함께 전하고 있다. 이 초상은 허계·허선 부자가 큰 공을 세운 뒤 인조의 어명으로 인각되어 공신각(功臣閣)에 봉안되었던 공신도상(功臣圖像)이며, 이곳에 숙부 허적의 사당도 함께 있다.

1628) 315. 인조는 유효립(柳孝立)의 역모평정에 기여한 11명에 대하여 영사공신(寧社功臣)으로 책봉한다.

 

1(一等)1허적(許?)

2(二等)5홍서봉(洪瑞鳳), 황성원(黃性元), 허계(許禊), 황진(黃縉), 허선(許選)

3(三等)5김득성(金得聲), 김진성(金振聲), 신서회(申瑞檜), 최산휘(崔山輝), 이두견(李斗堅)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옥() ....... 김자점에 의해 권력이 독점

 

1644(인조 22) 남한산성 수어사로 있던 심기원이 회은군 덕인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복주된 사건.

 

심기원은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 공신에 녹훈되었고 청원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다.

 

심기원은 1644(인조 22)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였을 때 이일원, 권억 등과 함께 회은군을 추대하기 위해 모반을 꾀하였으나, 부하였던 황헌, 이원로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에게 밀고함으로써 드러났고 그 결과 심기원 일당과 회은군 덕인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중국에 잡혀가 있던 임경업도 이 모반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소환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뒤에는 심기원, 최명길이 협력하여 김자점 중심의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인조대의 정국은 김자점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었다.

 

 

1651년 김자점(金自點) 역모 사건 ..... 김자점 일당 완전 숙청됨

 

1651(효종 2) 봉림대군은 효종 임금에 즉위하여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김상헌 등의 신하들과 협의하여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한편, 송시열이 지은 장릉의 지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 지문에서는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청나라는 대군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부를 힐문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경석의 노력에 힘입어 이를 수습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1651(효종 2) 12월에 진사 신호 등이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를 고변하였다.

이에 효종은 인정문에서 김자점의 아들 익 등을 심문하였고, 익은 공모한 무장들을 모두 실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조의 후궁이자 효명옹주의 어머니인 조귀인이 자신의 며느리인 숭선군의 아내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효종은 조귀인사사하는 한편, 김자점 및 그의 손자이며 조귀인의 사위인 김세룡을 국문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김자점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다.

 

 

1659년 제1차 기해예송(己亥禮訟) ............. 西人이 정권 독점

 

1659(현종 즉위) 5, 효종의 국상에 계모후였던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喪服) 복제(服制) 문제로 일어났던 西人南人의 예송 분쟁.

 

기해예송(己亥禮訟)1659(현종 즉위) 5월 효종이 서거하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예설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중자임을 들어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인조의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정태화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몇 번의 수의(收議)를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하였다. 그러자 남인 윤선도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격분하여 윤선도를 유배시키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현종 대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예송은 효종이 종법적(宗法的) 지위에 대한 학자들 간의 인식 차이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즉 효종을 인조의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에 따라 자의대비(慈懿大妃, 조대비)의 복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1645(인조 23) 2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6월에 인조가 적장손인 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차자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시작되었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지만, 종법에 의하면 차자도 대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되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그를 장자로 볼 여지가 있었다. 서인들은 그를 차자로 인식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그를 장자로 간주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이 예송에는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예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서인 학자들이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한 반면, 남인 학자들은 왕실 전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두 차례의 복제 예송이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효종이 서거한 이후, 당시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서인들은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복으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중자(衆子, 차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 학자였던 윤휴(尹鑴)는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족이 참최복(斬衰服, 3)을 입는다는 주례규정을 들어 참최복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60(현종 1) 3월에 기년복의 기한이 다가오자, 남인 허목(許穆)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장자로 간주한다의례주소(註疏)를 근거로 자의대비의 복제 개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의례주소에서 대통을 계승해도 참최를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 규정[사종설(四種說)] 중에서 세 번째에 있는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가 계승한 경우)’을 들어 기년복을 주장하였다. 서인과 남인들의 논쟁이 격화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鄭太和)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는 두 설을 다 버리고, 대명률경국대전어머니는 장자와 중자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이를 국제 기년복이라 함)을 들어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국왕은 몇 번의 수의(收議)를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하였다. 그러자 남인 윤선도가 상소하여 서인 송시열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비주이종(卑主貳宗)]’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윤선도를 탄핵하여 삼수로 유배시켰다. 조경(趙絅), 권시(權諰) 등의 남인들이 윤선도를 옹호하자, 서인들은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대거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기해 예송은 비록 효종의 장자 차자 지위를 구분하지 않는 정태화의 국제 기년복(國制朞年服)’이 채택되었지만, 기년복은 기년복이었으므로 서인들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때 장자 차자를 구분하지 않은 것은 이로부터 14년 후 제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조선의 정치는 1623(인조 1)의 인조반정 이후 효종 때까지 50여 년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하면서 경제와 비판을 기조로 하는 이상적인 붕당정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기해예송으로 인하여 당파 간의 감정이 격화되고 군자-소인의 구별을 주장하는 흑백 논리가 팽배해지면서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와 치열한 정쟁으로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을 겪는 등 급격한 정국의 변환을 초래하게 되었다.

 

1674년 제2차 갑인예송(甲寅禮訟) ............ 南人이 정권 교체 실현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

 

초상 직후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대공복으로 결정하였으나, 76일 남인계의 대구 유생 도신징이 상소하여 기년복의 복제(服制)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에 현종은 조정의 대신과 중신들을 불러 대공복으로 정한 이유를 추궁하고 재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인들은 송시열의 체이부정논리에 따라 계속 대공복을 주장하였으나, 현종은 기해예송에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국제 기년설을 채택했음을 이유로 715일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 중심인물들을 처벌하였다. 그해 8월에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만에 정국이 개편되었다.

 

갑인예송은 기해예송의 재판으로서, 그 핵심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장자부로 볼 것인가, 중자부(衆子婦)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기해예송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효종의 장자와 차자의 지위를 구분하지 않는 정태화의 국제 기년복이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장자와 차자에 대한 상복은 구분하지 않았지만, 장자부와 중자부에 대하여는 각기 기년복과 대공복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당시 서인들은 기해예송에서 기년복이 채택되었으므로 인선왕후를 중자부로 인식하여 대공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신징은 기해예송에서 효종을 중자로 간주한 적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여 대공설을 비판하였다.

 

그해 7월의 복제 논란은 서인 고관들과 국왕 현종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종의 뒤에는 외척 김석주(金錫冑)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고 제1차 예송의 주역들인 남인들,즉 허목(許穆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권시(權諰) 등은 전혀 이 예송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해 76일 남인계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기년복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 요지는 기해예송에서 효종을 중자로 간주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종과 서인들 간에는 네 차례의 논쟁이 왕복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바꿀 수 없었으므로 계속 대공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은 기해예송에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국제 기년설(‘國制朞年說)’을 채택했음을 이유로 715일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 중요 인물들을 송시열에게 빌붙은 죄로 처벌하였다.

현종이 16748월에 갑자기 승하하자 나이 14살에 즉위한 숙종은 현종의 장례를 마친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하였다.

남인은 복제의 오례(誤禮)와 종통을 문란시킨 죄를 물어 송시열김수흥(金壽興) 서인의 핵심 인사들을 탄핵하여 유배 보냈고, 이 때문에 당쟁이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

 

갑인예송은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만에 南人서인 몰아내고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16803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 경신환국 ...... 西人 집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남인은 1674(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왕실 사용의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 조처를 단행하였다.

 

,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柳赫然)에서 서인계의 김만기(金萬基)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申汝哲),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 허적의 서자 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도체찰사부는 효종 때까지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현종 때부터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쪽의 정성공(鄭成功오삼계(吳三桂)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윤휴(尹鑴허적 등의 주장이 제기되어, 1676년 정월에 다시 설치되었다.

 

도체찰사부는 167812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나,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실상 중앙 군영들은 대부분 서인 측에 의하여 창설, 발전되어 온 것이어서, 이에 관한 서인의 관심이 높았다. 이 사건 벽두에 중앙 군영의 군권이 서인계에 전격적으로 넘겨진 것이나, 김석주가 서인과 제휴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모역 혐의의 주된 내용이 도체찰사부 군사의 동원 문제로 귀착됨에 따라, 이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계된 자 모두가 연루되게 마련이어서 허견과, 삼복(三福)뿐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李元楨), 오정위(吳挺緯) 등 남인계의 중진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고변자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변모이다. 이 사건으로 도체찰사부가 혁파됨에 따라 대흥산성의 재물은 김석주가 관리청을 따로 세워 관리사로서 관장하였다.

 

 

1680년 허견(許堅)의 옥사(三復)

 

허견의 옥사는 조선 숙종 때의 정승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이 종실 복창군(復昌君), 복선군(復善君), 복평군(福平君)3형제와 역모를 꾸민다고 고변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허견허적사형되고, 허견과 직접 관련이 없는 윤휴사형 당했으며, 허목 역시 죄인으로 몰려 파직, 문외 출송 당했다.

 

허견의 옥사는 연이어 터질 경신환국과 허새의 옥사의 전조가 되었고, 외척 김석주와 김익훈은 이를 계기로 서인과 손잡고, 남인을 일망타진할 계략을 꾸민다. 이 사건으로 남인은 몰락했으나 9년 뒤 기사환국으로 복권한다.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왕실의 전례문제인 복상문제는 송시열을 죽이자는 의견으로 흘러갔고, 이 과정에서 서인 역시 남인을 죽이려 하였다. 남인은 폐지된 도체찰사를 부활시키면서까지 군권의 중요직을 접수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도체찰사는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는 직제로서 영의정이 겸임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군권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그 외에도 훈련대장 등 모든 군 요직은 남인이 잡고 있었다.

 

군권을 남인이 장악한 것에 긴장한 숙종은 부체찰사직으로 자신의 외숙인 김석주를 천거했다. 남인은 김석주가 서인인 점 때문에 임명을 반대하였지만 이것은 숙종의 의지대로 서인인 김석주가 맡게 되었다. 남인 내에서 일부 반발 무마 세력이 있었는데, 이는 남인 내 온건파인 허적이 김석주의 일족이란 점도 일부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무렵 병판(兵判) 김석주(金錫胄),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를 남인에서 독주로 죽일 것이요, 허적의 서자(庶子) ()은 무사를 매복시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16803월 숙종은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조부 허잠에게 시호를 내린다. 허적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이날 아침 허적의 집에 잔치상을 차릴 때 닭이 한 마리 날아들어 상 또는 유리잔이 깨지는 일이 있었다. 허적 등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허잠의 연시연에 서인에서는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김만기, 김익훈, 신여철(申汝哲) 등 소수만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 날 비가 오자 허적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이라 하는 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왕이나 궁궐의 허락 없이 천막을 가져갔다. 숙종은 비가 오자 용봉차일을 허적에게 보내려고 명하였으나 허적이 가져간 사실을 확인하고 분노한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 김익훈, 신여철 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에 귀양 갔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작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창군, 복선군 그리고 복평군의 삼형제와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소위 삼복의 변'이 적발되었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으로 뒷받침 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복선군 등은 귀양을 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었다. 아들 허견이 역모사건으로 죽은 지 얼마 후 그 아버지인 허적 역시 안전할 수 없었다. 허적은 역모와 특별히 관련된 흔적은 없어 이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상소가 올라오긴 했지만 이미 서인들의 목표물이 된 허적은 부자연좌율에 따라 삭직되어 쫓겨났는데 그나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명대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허견의 결탁사건이 재조사되면서 결국 그도 사사된다. 그는 마침내 백성으로 강등되어 저리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55일에 사사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511일 사약을 받고 전격 처형되었다.

 

1680 518일 숙종은 복선군(福善君)과 허견(許堅)의 역모평정에 기여한 공신을 보사공신(保社功臣)으로 책봉하였다. (책봉 초기에 11명이었으나, 후에 5명으로 확정.)

 

1(一等)2

김석주(金錫胄), 김만기(金萬基)

 

2(二等)1.

이입신(李立身), 이사명(李師命), 김익훈(金益勳), 조태상(趙泰相), 신범화(申範華)

- 추가(4): 이사명, 김익훈, 조태상, 신범화.(16801122일에 추가)

- 삭제(4): 이사명, 김익훈, 조태상, 신범화.(1694년 복원되면서 취소)

3(三等)2.

남두북(南斗北), 정원로(鄭元老), 박빈(朴斌), 이광한(李光漢), 이원성(李元成)

- 삭제(1): 정원로.(16801122일에 취소)

- 추가(2): 이광한, 이원성.(16801122일에 추가)

- 삭제(2): 이광한, 이원성.(1694년 복원되면서 취소)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 南人 득세

 

 

1683년 경신대출척 이래 집권해 온 서인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크게 진출하게 되는 환국(換局) 사건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王妃: 仁敬王后)로 맞았으나 168010월에 왕비가 죽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 仁顯王后)로 맞았다. 그 때 김만기·민유중 등은 모두 노론계였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 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宗社)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으로 높였다.

 

이에 대하여 노론 측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봉조하(奉朝賀)로서 옛날 송나라 신종(神宗)28세에 철종(哲宗)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藩王)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태자로 책봉하여 그 뒤를 잇게 한 고사를 들어 반대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는 노론이 축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黜送) 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 민종도(閔宗道), 민암(閔黯), 목창명(睦昌明)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李頤命), 김만중(金萬重), 김수흥, 김수항(金壽恒) 등이 복주(伏誅) 또는 유배당하였다. 그 해 4월에 이르러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비할 뜻을 비추자, 이에 노론 측은 오두인(吳斗寅)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그 주동자인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 오두인 등이 국문당하여 위리안치되거나 귀양갔으며, 52일에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후궁 장씨가 1686년에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淑媛)으로 봉해진 이듬해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으로 올랐는데, 이는 장씨로 인한 정국 변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조사석은 장씨의 외가와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무렵 동평군 항(東平君 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 제조로서 궁중을 무상출입하였는데, 숙원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그와 연결을 맺고 있었다.

 

후궁 장씨의 이러한 주위 인물들이 마침내 그녀의 생남을 계기로 남인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자 정호 때는 민암·민종도·이의징(李義徵) 등의 남인이 동평군·장희재 등과 직접 연락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장씨의 집안은 작은 아버지가 역관으로 중인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신분으로 왕비에까지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경제상의 변동으로 상인·역관 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이 일로 1683년 경신환국 이래 집권해 온 서인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크게 진출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 ‘갑술옥사(甲戌獄事)’ ..... 老論 득세

 

1694년에 노론계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의 한중혁(韓重赫)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실권을 쥐고 있던 남인계의 민암(閔黯), 이의징(李義徵) 등이 민씨 복위 운동의 주동자들을 심문, 그 사실을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폐비 사건을 차츰 후회하게 된 숙종은 오히려 기사환국 당시 국문을 주관한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柳命賢) 등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훈련청과 어영청의 양대장에 신여철(申汝哲), 윤지완(尹趾完) 등 소론계를 등용, 정국을 일변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환국 도모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추구되었다. 하나는 한중혁의 소론 쪽이 집권 남인 측의 막후 실력자인 총융사이자, 왕비 장씨의 친동생인 장희재(張希載)와 동평군 항(東平君杭)에게 뇌물을 쓸 것을 계획한 것이다.

 

그것은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하게 한다.’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 남인계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세력을 잃은 노론과 소론의 진출을 어느 정도 만회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에 대한 숙종의 편향심을 돌리게 하여 남인의 나쁜 점을 자세히 알리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기사환국 이후 새로이 왕의 사랑을 받게 된 숙빈 최씨(淑嬪崔氏 : 영조의 어머니)와 연결을 가져, 숙종에게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자세히 알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숙종은 민암 등 남인의 보고를 받기 전에 태도를 돌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을 물리치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 박세채(朴世采)를 좌의정, 윤지완을 우의정에 각각 기용, 론 정권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노론 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된 것을 비롯,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김익훈(金益勳김수흥(金壽興조사석(趙師錫김수항(金壽恒) 등이 복관되는 등 기사환국 이전의 상태가 되었다.

 

반면, 남인 측은 민암, 이의징사사되고,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김덕원(金德遠), ·민종도(閔宗道), 이현일(李玄逸), 장희재 다수가 유배되었다. 그리고 왕비 장씨마저도 희빈(嬉嬪)으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력을 잃은 남인계는 그 뒤 이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 1700~1800년대(100年間) 肅宗 朝 ~ 正祖 朝

 

{피해자 수혜자(가해자)}

 

1721년 신임사화(辛壬士禍) ...................... 小論이 실권 장악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 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옥사로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逆謀)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신축년(辛丑年)과 임인년(壬寅年)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한다. 임인년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임인옥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 경종을 지지하느냐, 연잉군(후에 영조)를 지지하느냐?

 

숙종 말년에 소론은 세자인 균(: 뒤의 경종)을 지지했으며,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지지하였다. 경종은 세자 때에 생모인 장희빈(張禧嬪)이 죽자 이상스러운 병의 징후가 나타났으므로 숙종은 이를 매우 걱정하였다.

 

한편 1716(숙종 42) 병신처분(丙申處分 : 소론을 배척한 처분)으로 노론 정권이 실권을 잡은 이듬해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소위 정유독대(丁酉獨對 : 숙종 43년 왕이 세자 교체 문제를 이이명과 단독 대담을 통해 논의한 일)를 하였다.

 

이로써 소론은 경종 보호의 명분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반면 노론은 연잉군 추대의 의리로 맞서 이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이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8월에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유봉휘(柳鳳輝)는 시기 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노론 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세제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였다. 이에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 간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이와 같이 경종의 질환을 이유로 하여 경종 즉위년부터 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문제를 서둘렀으므로 그것을 쟁점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이때에 소론에 대한 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12월에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해 병신처분 이래 구축된 노론의 권력 기반은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換局)이 단행되었다.

 

이에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珍島郡), 이건명은 나로도(羅老島)에 각각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여러 노론들도 삭직, 문외출송(門外黜送) 또는 정배되었다.

 

한편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崔奎瑞), 우의정에 최석항(崔錫恒)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소론 측에서도 김일경의 인물됨을 경계해 노론 숙청에 온건적 입장을 취하는 조태구·최석항 일파는 완소(緩少), 강경론자인 김일경 일파를 준소(峻少)라 하였다.

 

17223월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격한 처단을 요구하고 있을 때에 목호룡(睦虎)노론 측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소위 삼급수설(三急手說), 즉 대급수(大急手 : 칼로써 살해), 소급수(小急手 : 약으로 살해), 평지수(平地手 : 모해해 폐출함.)를 들어 고변하였다.

 

이 음모에 관련자들은 정인중(鄭麟重), 김용택(金龍澤), 이기지(李器之), 이희지(李喜之), 심상길(沈尙吉), 홍의인(洪義人), 김민택(金民澤), 백망(白望, ·김성행(金省行)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자질(子姪)과 그들의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했다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목호룡이 남인 서얼(庶孽)로서 정치에 야심을 품고, 풍수술(風水術)을 이용해 노론에 접근했으나 시세의 변화에 따라 고변함으로써 노론에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 고변에 의해 국청(鞫廳)이 설치되고 역모에 관련된 자들이 잡혀서 처단되는 대옥사가 일어났다. 이 옥사에서 노론 4대신은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그리고 국청에서 처단된 자 중에 정법(正法)으로 처리된 자가 20여 인이고 장형(杖形)으로 죽은 자가 30여 인이었으며, 그 밖에 그들의 가족으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 유배된 자가 114,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 연좌된 자가 연인원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을 복관시키고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최석정(崔錫鼎) 등을 숙종묘(肅宗廟)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東城君)의 훈작(勳爵)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과 목호룡은 처단되었고, 임인옥안(壬寅獄案)은 번안(飜案 : 안건을 뒤집어 놓음)되었다.

 

요컨대,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 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옥사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다.

 

 

1728년 이인좌의 난(李麟佐 - )

 

영조(英祖) 즉위 후 노론(老論) 정권이 성립되자 소론(小論)을 등에 업은 이인좌 등이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대립한 사건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집권 층에 저항 거병하였으나 실패한 사건

조선후기 유민이 증가했으며 부세저항이 심해져 지배세력의 물적·인적 지배기반을 동요시켰다. 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은 심화되었으며 노론과 소론이 갈등하던 상황에서 영조가 즉위해 노론정권이 성립하자 소론에서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세력을 포섭했다.

 

17283월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란군은 청주성을 함락해 각 창고의 전곡을 민간에 나누어 주며 민의 참여를 유도, 반군세력을 확대했으나 영남병·호남병의 합세에 실패하여 3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다.

 

영조는 무신란의 원인을 폐쇄적 인사정책 때문으로 보고 노론 온건파 중심의 탕평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인좌가 거병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발생했으므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16,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과 상공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농민층 분해와 신분제 해체가 진행되었다.

 

정부는 수취체계 개편 및 운영개선을 논의·시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해 농민들의 부세저항이 심해지고 유민(流民)이 증가했다. 이러한 피지배층의 저항은 지배세력의 물적·인적 지배기반까지 동요시켰다. 지배세력 간에는 사회변동에 대한 관점에 따라 갈등이 심화되었고, 국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1720년에는 왕세자(뒤의 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해 경종의 즉위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이어 세제청정(世弟聽政)까지 실현하려다가 축출당했으며, 잇따른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철저히 축출되었다. 이때 소론 내에는 노론에 대한 처벌방법을 두고 과격파인 준소(峻少)와 온건파인 완소(緩少)로 분열되었다.

 

1724년 경종의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정권이 성립하자 김일경파의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등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여, 궁중에서는 이하(李河), 민관효(閔觀孝), 윤덕유(尹德裕)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鄭遵儒), 나만치(羅晩致), 조덕규(趙德奎), 조상(趙鏛), 임서호(任瑞虎),정세윤(鄭世胤), 권서린(權瑞麟), 이호(李昈), 민원보(閔元普), 민백효(閔百孝), 김홍수(金弘壽), 이일좌(李日佐) 등이, 그리고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과 중군별장 남태징(南泰徵)이 가담했다.

 

이들은 김홍수·정세윤 등 재지사족 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세가명족의 후예이지만 현실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통해 정치에 진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 영조의 왕위계승 부당성을 선전하며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밀풍군 탄을 추대하기로 하고, 정변의 기본전략을 외방(外方)에서 먼저 일으키면 경중(京中)에서 이에 내응하는 외기 내응(外起內應)으로 확정했다.

 

경중 내응은 준소·탁남·소북계 세력이, 외방기병은 정세윤·이인좌의 지도 아래 외방토호와 재지사족층이 하기로 했다. 외방기병의 지휘권을 맡게 된 이인좌는 감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손자로 남인명가의 출신이었지만 관직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는 경기·호서·영남 세력의 중개역할을 하는 한편 남인명가의 후광을 업고 영남의 사족과 접촉했다.

 

이인좌는 영남기병을 정희량(鄭希亮), 김홍수에게 맡기고, 호남기병은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에 맡겼으며, 자신은 정세윤과 경기기병을 추진하여 중도에서 영남병·호남병과 합세하기로 했다. 한편 정세윤은 호남 사족층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금영(禁營)의 조총을 사들여 무장하고, 평안병사 이사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이때 경중주도층은 한세홍을 통하여 거사강행의 소식을 전달받고 군사·자금을 모집했으나, 실천의지가 약했다.

 

한편 정미환국으로 재기용된 온건소론에 의해 정변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등이 각지의 취군상황에 대해 고변하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했다.

 

17283월초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란군은 안성·양성에서 거병하여, 315일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했다. 반군은 각 창고의 전곡··포를 민간에 분급하고 '불살인 불약민재'(不殺人 不掠民財) '제역감역'(除役減役)의 민정강령을 내세움으로써 민의 참여를 유도하여, 청주의 군관, 향임층, 일반행려·상인 등으로 반군세력이 확대되었다.

 

반군은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 등지를 점령하고, 수령을 파견하여 환곡을 분급하며 관노비에게 상급을 주고, 장정을 선발했다. 그런데 영남병·호남병의 합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남에서는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李熊輔)320일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거했으나, 안동·상주입거에 실패하고 결국은 관군에게 패했다. 호남에서는 박필몽박필현이 각각 괘서를 살포하는 등 취병을 했으나 태인 거병이 좌절당한 뒤 잡혀 처형당했다.

 

한편 정부는 관문·성문의 파수를 강화하고, 금위영·어영청의 군사를 각 진에 파견하여 내성유입을 통제하는 한편, 탁남세력과 윤휴(尹鑴), 이의징(李義徵) 등의 자손, 김일경·목호룡의 가속을 체포했다. 또한 민심동요를 막고자 강창세곡을 성내로 운반했고, 체불했던 공가(貢價)와 삭료(朔料)를 지급했으며, 아울러 도성 사수론을 내리고 황해·강원의 향병징발과 한강 수비령을 하달했다.

 

경중내응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뒤 오명항(吳命恒) 지휘의 도순무군(都巡撫軍)을 남파했다. 이에 반군은 경중내응과 영남병·호남병 북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각 처의 유민·소상인·화전민을 포섭하면서 도성을 향해 진천을 지나 안성·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睦涵敬)이 잡혔으며, 청주에 남아 있던 반군세력인 신천영과 이기좌(李騏佐)는 창의사인 박민웅(朴敏雄)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은 영남·호남 지방에도 알려져 잔존했던 반군세력은 소멸되었다.

 

무신란은 당시 영조와 집권 노론 층의 패쇄적 인사정책과 정치보복의 강화, 형정·민정의 실패에 따라서 발생한 사족층·잔반·향임층·하층민의 연대투쟁이었으나, 정미환국 이후의 결속력 약화, 경중세력의 취약성, 지도세력 부재와 이중 거사계획의 판단착오, 주도층의 오판, 분리적 탈퇴 등으로 실패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정미환국 때 재기용되었던 완소가 약화되었고, 노론은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무신란의 발생 원인을 노론 세력만으로 구성했던 폐쇄적 인사정책 때문인 것으로 보고, 노론강경파보다는 노·소 간의 조정과 병용책을 주장한 노론 온건파 중심의 탕평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728) 426일 영조(英祖)이인좌(李麟佐)의 난진압에 기여한 공신을 [분무공신(奮武功臣) :후에 1764년에 양무공신(揚武功臣)으로 개명]으로 책봉 서훈 하였다.

 

인원: 14.(책봉 15명이었으나 삭탈 1, 14명으로 확정.)

 

1(一等)1.

오명항(吳命恒)

 

2(二等)6.

박찬신(朴纘新), 박문수(朴文秀), 이삼(李森), 조문명(趙文命), 박필건(朴弼健)

김중만(金重萬), 이만빈(李萬彬)

- 삭제(1): 박찬신.

3(三等)7.

이수량(李遂良), 이익필(李益馝), 이보혁(李普赫), 조현명(趙顯命), 김협(金浹)

박동형(朴東亨), 권희학(權喜學)

 

 

17625월 임오화변(壬午禍變) ....................... 사도세자 사건

 

임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임오옥(壬午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노소당인(老少黨人)들의 정쟁(政爭) 과정에서 노론에 의해 세자가 희생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조선 후기의 당쟁은 탕평책이 추진되는 속에서도 보다 심각한 국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영조는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정빈이씨(靖嬪李氏) 소생으로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으로 추존), 영빈이씨(暎嬪李氏) 소생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獻世子)가 있었다. 효장세자가 요절하였으므로, 영조는 1749년에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는 영조와 성격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왕세자로서의 도량과 덕을 겸비하여 영조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리청정에 임하게 되면서 세자는 행동에 형평을 잃고, 비정상적인 성격이 나타나 영조로 하여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이보다 부자간의 대립 관계가 표면화된 것은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권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少論)의 영수였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 때부터이다.

 

1761년 세자는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윤재겸(尹在謙) 등이 상소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영조가 세자를 참살한 또 다른 계기는 17625월에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고발하는 나경언(羅景彦)의 무고 사건과 문소의(文昭儀) 등의 부자간의 이간책 등이 작용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세자와 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영조가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으로 보아 사건의 계기가 된 부자간의 불신과 이간은 노소론의 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남인·소론 등이 부왕 영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자를 앞세워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노론 정권의 전복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전개]

 

세자의 극심한 병증은 정권을 쥐고 있던 노론 일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다가왔다. 그들은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수시로 난행을 일삼던 세자를 빌미로 소론과 남인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노쇠한 영조의 후사조차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바꾸려 획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적들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1761(영조 37) 42일부터 22일까지 세자는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넉 달 후 영조가 그 사실에 대하여 추궁하자 세자는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잘못을 빌었다.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세자의 행동이 소론 잔존세력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던 1762(영조 38) 522, 노론에서는 특단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나경언이라는 자를 내세워 영조에게 그간 떠돌던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고발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영조는 입시해 있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의 과실을 알게 했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비로소 세자가 그 동안 저지른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그를 죽임으로써 궁중은 물론 정계의 모든 불화 요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762(영조 38) 513,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임오화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 이틀 뒤인 524, 영조는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로서 어찌 아들을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번민하던 영조는 며칠 뒤 건명문에서 밤을 지새운 영조는 새벽 나절 드디어 단안을 내리고 영의정과 우의정을 불렀다. 부리나케 입궐한 신료들은 세자가 뉘우치고 있다고 위로했지만 영조는 세자에게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고 탄식하면서 바른 말을 고한 나경언은 역적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아울러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 때문에 여러 당이 생겼으니 모두가 역적이라고 꾸짖었다.

 

1762년 윤513, 영조는 드디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가두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 뒤주의 빈틈으로 죽과 물을 넣어주었다는 것을 알고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았다. 결국 8일 뒤인 윤521일 세자는 뒤주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4일에는 세자를 모셨던 환관 박필수, 여승 가선 등이 처형되었다.

 

세자가 갇혀 있는 동안 영조는 일상적인 국무를 처리했다. 그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하고 문을 지키는 군사를 위로했으며, 주강에 참석하고 인사를 처리했다.

 

521, 이윽고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세자의 위호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723일에는 장례를 치르고, 시신은 양주군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에 안장되었다. 1764(영조 40)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그해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했다. 81일에는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했다. 실로 냉철한 뒤처리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갑신처분을 내렸다. 그렇지만 아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던 정조는 훗날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효자였던 아들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집권 노론 대신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이런 정조의 애타는 소망은 고종 때 이루어졌다.

 

1899(광무 3), 고종황제는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했고, 1901년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높였다.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비극의 실상]

 

사도세자의 비극을 몰고온 심리적 갈등은 기실 아버지 영조의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조는 일찍이 소론의 거센 공세 속에서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경종의 강력한 비호에 힘입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위 내내 소론 일파로부터 경종 독살설의 당사자로 거론되었고,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한 무수리였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등극했지만 곧 급진적인 소론 일파인 준소가 남인과 함께 일으킨 이인좌의 난, 소위 무신란으로 인하여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불의의 반란은 다행이 소론 온건파인 완소의 도움으로 수습했지만, 준소의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무신란이 진압되고 2년 뒤인 경술년에 영조는 남인과 소론일파가 궁녀와 무당을 동원하여 창덕궁의 양화당과 세자궁, 빈궁의 침실 근처에 사람의 뼈가루와 저주물을 묻어놓은 매흉(埋兇)과 세자, 옹주에게 타 먹이는 화흉(和凶)을 당했다.

 

그로 인해 영조는 맏아들인 효장세자를 잃었다고 믿게 되었고, 소론이나 남인에 대한 경계심과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소론 정파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붕괴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탕평의 기준은 무너지고 영조 재위 내내 노론 일파가 앙앙불락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영조는 뒤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과거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에게 맡김으로써 이미지 쇄신을 노렸지만, 오히려 스스로 자식이 소론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재위 초기부터 정적들의 완강한 저항과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아버지 영조에게 뿌리내린 깊은 트라우마는 어린 사도세자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로 전이되었고, 세월이 가면서 수시로 제기되는 부왕의 의심과 질책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785년 을사추조(乙巳秋曺) 적발사건

 

을사년(1785) 봄 추조(秋曹), 즉 형조(刑曹)의 금리(禁吏)들이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明洞)에서 모임을 갖던 천주교인들을 적발 체포한 사건. 1785년 봄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일신(權日身) 부자(父子) 등이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이승훈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강론을 하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들이 우연히 이를 적발, 모임에 참가한 이들을 체포하고 천주교 서적과 성화상(聖畵像)들을 압수하였다. 이때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체포된 이들이 모두 사대부(士大夫)이므로 중인 출신의 집주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훈방했으나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李閏夏), 이총억(李寵億), 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로 가서 김범우의 석방과 성화상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범우를 간단히 문초한 다음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시켰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이 유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짐으로써 이해 3() 태학생(太學生) 이용서(李龍舒), 정숙(鄭淑) 등은 척사위정의 통문(通文)을 돌려 이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뿐 아니라 친구 친척에게까지 천주교를 물리치라고 강요했고, 안정복(安鼎福)은 직접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반향으로 인해 이벽, 이승훈 등은 배교하게 되고, 김범우는 유배생활 1년 만에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여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 신해사옥, 진산 사건,

 

1791(정조 15)에 일어난 공서파(攻西에 의한 천주교도 박해 사건.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천주교는 경기와 내포(內浦)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尹持忠) 집안에서 폐제분주(廢祭焚主)의 문제가 일어났다.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1742, 교의적(敎義的)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紀律的)인 잠정적 변법(暫定的辨法)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 바 있었다(이 조치는 1939년에 교의적 결정에 의하여 조상제사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천주교회가 인정하게 됨으로써 실효되었다).

 

당시의 이 기율적 변법에 터전하여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은 그의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았고, 제사를 드리지 않고 천주교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렀다.

 

이 때문에 윤지충은 강상(綱常)을 범한 죄인으로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 때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權尙然윤지충의 인척)이 그를 옹호하고 나서 문제는 더욱 소란해졌다.

 

진산에서의 사건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공서파(攻西派천주교를 공격하는 세력)신서파(信西派천주교를 신봉 또는 묵인하는 세력)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서서 이 일을 정치문제로 확대시켰다.

 

공서파는 폐제분주는 전통적 유교사회의 제례질서를 파괴하는 패륜(悖倫)이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불효·불충이라고 잇따라 상소를 올려 신서파를 공격하며 정조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도 사태를 심각하게 느끼게 되어 마침내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으로 하여금 윤지충, 권상연을 체포하여 문초하게 하였다.

 

윤지충은 조상제사는 허례이며 진정한 조상추효(祖上追孝)의 방법이 아님을 항변하였으나, 결국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를 신봉하고 이를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되었다. 사건은 그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진산사건은 한국천주교 내외에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사건인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천주교회는 밖으로부터 전도의 사명을 띠고 한반도에 들어와 전교활동을 펴는 선교사의 활동 없이 쇄국 조선의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에 의하여 창립된 교회였다. , 서학(西學)이라는 학문 활동으로 천주신앙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창설된 교회였다.

 

그들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은 17세기 초부터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부연사행원(赴燕使行員)들에 의하여 도입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의 접촉과 연구를 통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 이해에 터전하여 천주신앙을 얻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천주교의 도리가 유교의 그것과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현세당위론적인 선()의 추구를 전지전능의 천주와 연결지어 이해하였고, 내세(來世)와의 연관에서 파악하고 천주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이제 신해진산사건으로 그들이 믿고 있던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라는 처지에 한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조상제사 문제에서 지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교의 전통적 가치체계로 후퇴하거나, 그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적 가치체계를 숭봉하느냐를 택하여 하나의 결정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어려운 결정의 시기에 탈락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새로운 결심에서 신앙생활의 새 경지로 매진하는 교인도 많았다. 이 시련을 통하여 한국천주교회는 보유론적 천주이해라는 초기신앙 형태의 문화주의적 종교신앙에서 순수한 천주신앙으로 접어들게 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제2의 장이 열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공서파는 천주교회에 대한 공격을 더욱 날카롭게 하게 되고,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구실을 조상제사의 거부라는 데서 명목을 찾게 되었다. 이 논리는 이후 100여 년을 두고 천주교 박해의 이유로 십분 활용되었다.

 

 

 

 

. 1800~1900년대(100年間) 純祖 朝 ~ 哲宗 朝

 

{피해자 수혜자(가해자)}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 벽파(僻派)에 의한 천주교 박해

 

1801(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벽파(僻派) 에 의한 천주교도 박해 사건.

 

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등으로 순교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 1만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천주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세력에 의한 성토·상소·박해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 정약종(丁若鍾), 최창현(崔昌顯), 강완숙(姜完淑), 최필공(崔必恭), 홍교만(洪敎萬), 김건순(金健淳), 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왕족인 송씨(宋氏 : 정조의 庶弟恩彦君의 부인)와 신씨(申氏 : 恩彦君의 며느리)도 사사(賜死)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 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 천주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한편,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천주교회가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된 점도 신유박해와 관계되는 천주교회 발전의 모습이었다.

 

 

1801년 황사영(黃嗣永) 백서(僻書) 사건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정조 14)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으며 이에 그는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 든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른다.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약종은 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 이로써 그는 부귀 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 9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1815년 을유박해(乙酉迫害) .........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박해

 

1801년 신유박해가 종결된 뒤 조정에서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몰아 신자들을 박해

 

그러므로 살아남은 천주교인들은 신앙이 노출된 원 거주지에서는 살 수 없었으므로 강원도나 경상도의 산골로 피신하여 교인 촌을 이루어 생계를 유지하여 나갔다.

 

그러던 중 1814년 전국에 혹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고난이 형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때 교인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몰지각한 백성들의 탐욕과 지방관들의 자의(恣意)로 중앙의 지시도 없이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기 시작하였다.

 

먼저 경상도에서는 청송의 노래산(老萊山) 교인촌에서 고성운(高聖云), 고성대(高聖大), 최봉한(崔奉漢) 35명의 교인들이 체포되어 경주 진영(慶州鎭營)으로 끌려가, 여기서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14명은 다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진보(眞寶)의 머루산에서는 김시우(金時佑) 30여 명이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서 22명이 배교하고 나머지 13명은 역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또한 영양에서는 김종한(金宗漢)김희성(金稀成)6명의 교인이 체포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렇게 하여 모두 71명이 체포되어 33명이 대구 감영에 갇히게 되었는데, 경상감사 이존수(李存秀)는 그들의 처형을 주청하는 계()를 조정에 올렸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처형은 1년 반 후에야 결정이 내려졌다. 그 동안 26명의 교인들이 옥사하여, 18161216일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에는 고성운 등 불과 7명의 교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한편, 강원도에서는 1815년 초에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원주 감영에 갇혔는데, 대개는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고, 김강이(金鋼伊) 혼자만이 끝까지 신앙을 지켜 125옥사하였다.

 

이렇듯 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산을 약탈하는 등 큰 피해를 입힌 을해박해는 조정의 박해령 없이 지방관의 자의에 의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박해와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 김대건(金大建) 체포

 

1846(헌종 12) 김대건(金大建)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

 

당시 우리나라에 입국해 있던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주교 페레올(Ferreol,J.J.)은 김대건과 함께 포교에 힘쓰는 한편, 우리나라에 입국할 기회만을 노리며 만주에 머물러 있던 신부 메스트르(Maistre)와 최양업(崔良業)을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게 된다.

 

페레올은 종래의 잠입로였던 육로는 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서해의 안전한 바닷길을 찾기 위해서 김대건을 황해도 서해안으로 보냈다.

 

김대건은 1846513일 서울을 떠나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해역으로 나가 청나라 배에 지도와 서신을 탁송하고, 귀로에 순위도에 들렀다가 우연한 일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대건은 등산진·옹진을 거쳐 해주감영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았는데,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해주감사는 일의 중대성에 놀라 곧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국사범으로 다루어져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교가 사학(邪學)이 아님을 주장하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세계의 정세를 알려 정부당국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는 동안 김대건과 함께 서해로 나갔던 선주 임성룡(林成龍), 뱃사공 엄수(嚴秀) 등 관련 교인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계속해서 선주의 아버지 임치백(林致白), 그와 함께 활동한 바 있는 현석문(玄錫文), 한이형(韓履亨) 등이 체포되었다. 때마침 그 해 9월 프랑스의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Cecil)이 군함 3척을 이끌고 홍주해역에 나타나, 1839(헌종 5) 기해사옥 때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학살한 책임을 묻고 통교를 강력히 요구하게 되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긴장한 정부는 김대건 등의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부 김대건은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언도받고 916일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함께 잡혀 있던 교인들 중 배교한 자들을 제외한 현석문, 임치백, 한이형, 남경문(南景文), 우술림(禹述林),김임이(金任伊), 정철염(鄭鐵艶) 8인의 남녀교인들은 920사형에 처해졌다.

 

이들 9인의 순교자들은 1925년 로마 교황에 의하여 복자(福者)로 시복되었고, 다시 1984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시성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 대원군에 의한 천주교 박해

 

1866(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1866년 봄에, 두 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 번째는 1868, 네 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 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 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장기간에 걸쳐 박해를 강행하게 된 데에는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숨어 있었다.

 

18586월 애로우호사건(Arow號事件)에 따라 톈진조약(天津條約)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 뒤 러시아는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 때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의 천주교도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鍾三)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주교 베르뇌(Berneux, 張敬一)와 만나볼 것을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나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고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는 우선 18661월에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사실이 보고되었다는 점에 있다.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더구나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18662월베르뇌를 선두로 홍봉주, 남종삼, 김면호는 물론 정의배(丁義培), 전장운(全長雲), 최형(崔炯) 등 대표적 교인들과 다른 수천 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이 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 못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Ridel, 李福明)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1868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펴나갔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부근의 지방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 뒤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펴고자 하면서 시작된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박해가 가중되었다.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었고,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히 하는 한편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에도 탄압이 계속되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박멸이라는 국내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는 다르다.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천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병인박해 기간 중에 순교한 24명이 복자(福者), 1984년에는 성인(聖人)으로 오르게 되었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은 1890년 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자료를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가 대표적이다.

 

 

1901년 제주교난(濟州敎難) ....... 신축교난, 이재수(李在守)의 난

 

1901년 제주도민들과 천주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충돌사건으로, 일명 신축교난, 이재수(李在守)의 난·제주민란·제주교란(濟州敎亂)이라고도 함.

 

제주도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858(철종 9) 펠렉스 베드로(세례명)라는 제주도민이 표류하여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귀향한 뒤, 도민 20여 명과 가족 40여 명을 개종시킨 데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포교가 이루어진 것은 1898년 대정에 사는 양 베드로라는 사람이 육지에 있을 때 영세, 입교하고 돌아와 고향에 선교의 터전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이어 다음해 페이네(Peynet, 裵嘉祿김원영(金元永) 신부가 들어오고, 라쿠르(Lacrouts, 具瑪瑟뭇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계속 들어와 교세는 크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도민들에게 교리 전파와 아울러 여러 가지 교육운동을 벌였다. 이리하여 교난이 일어난 해에는 이미 영세자 242, 예비자 600700명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 채어인(採漁人)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불법적인 통어활동(通漁活動)을 자행하였다. 특히 아라카와[荒川留十郎] 같은 사람은 어로 독점을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을 축출하려 하고 있었다.

 

또한 지방 관리들은 그들대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목사였던 이상규(李庠珪)는 사사로이 남세(濫稅)를 자행하여 축재하고 있었고, 대정군수였던 채구석(蔡龜錫)은 유림 오대현(吳大鉉), 관노(官奴) 이재수 등과 결탁하여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였다. 이는 우매한 백성들을 기만하여 개인의 영리를 꾀하려는 사설단체였다.

 

한편, 정부에서 파견된 제주도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은 평안도 출신으로 엄청난 양의 잡세를 징수하였고, 거기에다가 이러한 일에 천주교인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결국 채구석 일파와 일본인들은 경제적으로 봉세관의 방해를 받게 되었으며, 도민들을 일깨워 주는 천주교도들에게도 적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도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토지 내의 신당(神堂신목(神木) 들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이미 있었던 도민들의 배타적이고 미신적인 감정을 더욱 조장하였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190129일에 있었던 도민 오신락(吳信洛)의 죽음이었다. 그가 죽자 당시 그와 대립하여 있던 현유신(玄有信) 부자는 이 사건의 책임을 천주교인들의 탓으로 돌리는 낭설을 퍼뜨렸다. 그 뒤 5월에 들어 천주교 신부들이 서울회의에 참석하러 간 틈을 타서 상무사원들이 천주교인들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더욱 악화되어 상무사원들은 도민들을 선동하여 제주성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고, 이에 대항하여 마침 제주도로 돌아온 신부들은 신자들을 모아 방어계획을 세웠다. 516, 이재수 등의 지휘 아래 수천의 도민들은 제주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도민들은 이재수가 일본인 아라카와로부터 받은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이에 교인들도 김창수(金昌洙) 목사에게 청하여 무기고를 헐고 대항하였다.

 

528일 도민들은 성을 함락시키고 닥치는 대로 교인들을 살육하기 시작하였다. 사건이 이에 이르자 프랑스 신부들은 더 이상의 확대를 염려하여 뮈텔(Mutel, G. C. M., 閔德孝) 주교를 통하여 프랑스함대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함대가 제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난이 고비를 넘기고 수백 명의 교인이 학살된 뒤였다. 조선정부도 군대를 보내어 수습하고자 하였으며, 613일까지 강봉헌, 채구석, 오대현, 이재수 등 연루자들을 잡아들이고 도민들을 해산시켰다.

제주도 내부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어난 이 사건은 결과처리 문제에 있어서도 그만큼 복잡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730일 프랑스 공사 플랑시(Plancy, C., 葛林德)는 조선정부에게 서울로 압송된 자들의 처벌과 함께 신부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정부에서는 평리원(平理院)에서 재판을 열도록 함과 아울러, 프랑스 신부들과 미국인 고문관 등으로 하여금 조선 측 판사·검사와 함께 이 사건을 심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09일에는 판결이 내려져 오대현, 강우백(姜遇伯), 이재수 주모자들은 교수형, 그 밖의 선동자들은 징역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채구석은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와는 달리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않고 방면되었다.

 

프랑스공사는 이 소식을 듣고 항의전문을 조선정부에 보내왔으며, 결국 채구석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뒤 제주도민의 청원과 배상금문제로 채구석은 19031120일에 석방되었다. , 하나의 문제는 사망자들의 영장지(營葬地)를 정하는 것이었다.

 

본래 영장지는 프랑스함장과 제주목사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이 있었으나, 사건 후 1년이 지나도록 유골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이에 프랑스공사가 해결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그 뒤에도 오랜 시일을 끌다가 1903년 말부터 사라봉(沙羅峰) 아래에 있는 황사평(黃沙平)으로 유골을 안장함으로써 끝이 났다.

 

영장지 문제가 종결됨과 아울러 19031116일에 배상금 원금 5,160원이 조선정부에 의하여 청산되었다. 그리고 앞서 석방된 채구석은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을 도민들로부터 거두어 처리하였다. 이때가 1904627일경이었으니, 3년 만에 사건이 종결된 것이다.

 

The end ........ 2016년 삼복염천(三伏炎天)에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