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조 유학(儒學)의 학통(學統) 학맥(學脈) 학파(學派) 총람
1.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영남학통(嶺南學統)
길재(吉再)의 문인(門人)은 후일 善山학파로 불릴 만큼 번성하여 여기서 동방5현이 나오게 되며,이 흐름을 이어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嶺南學派)가 성장하게 되는 데 그 발단은 야은(冶隱) 吉再가 금오산(金烏山)에 은거하여 박서생(朴瑞生), 김숙자(金叔滋) 등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고부터였다.
吉再가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한 것은 商山(尙州)의 대 선생 박실(朴賁)을 스승으로 맞아 성리학설(性理學說)을 배우면서부터라고 한다. 吉再는 朴賁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당대의 거유(巨儒)요 대 정치가인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문하에서 공부하게 된다.
權近은『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하는 자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吉再가 독보(獨步)다』라고 극구 칭찬했다. 이 무렵 쓰러져가는 고려(高麗)를 학문으로써 바로 일으키고자 애쓰던 吉再가 후일 고려를 무너뜨리고 섬기던 임금을 무참히 죽인 이방원(李芳遠)과 동네 친구로, 대학(大學)의 동창으로 동문수학했다는 사실은 어쩌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해야 할까......
1388년, 이 해는 고려의 운명이 뒤바뀐 해였다. 요동정벌(遼東征伐)의 명령을 받은 李成桂 일파는 위화도(威化島)에서 군대를 돌려 우왕을 축출하고 충신 최영(崔瑩)을 무참히 죽였다.
태학(太學)의 교관(敎官)이던 吉再는 고려의 운명이 다했음을 슬퍼하면서 백이숙재(伯夷叔齊)와 같이 二姓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굳히게 된다. 바로 칼로서 왕권을 탈취한 李成桂 일파에 대한 무저항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吉再는 그 길로 금오산(金烏山)으로 낙향하여 이때부터 금오산에서 은거하며 문인을 교육하는 吉再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 吉再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不事二姓이라는 절의와 함께 훗날 善山學派를 형성케 함으로써 嶺南士林이 그에게서 뻗어나갔다는 사실이다.
吉再는 고려에 대하여 절의를 지킨 충신이면서 한편으로는 대유(大儒)로서 그 이름을 날렸지만 불행히도 그의 학문을 전하는 몇 편의 글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김숙자-김종직(金叔滋-金宗直) 부자를 거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으로 이어지는 맥(脈)이 吉再의 고향 금오산 기슭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吉再의 뛰어난 학문과 교육자로서의 인품을 말해주고 있다.
吉再의 위패를 모신 금오서원(金烏書院)에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을 합사(合祀)하고 있으며, 이들은 별도의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길재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금오산 기슭에 영조44년에 세워진 채미정(採薇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의 모습을 보인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로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었으며, 그의 문하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승언(李承彦), 홍유손(洪裕孫),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두었다.
후에 종묘(宗廟)에 배향된 이른바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일컬어지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남명학파를 형성하여 그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킨다.
2. 영남학파(嶺南學派)
조선 초기 영남지방에서는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계보가 형성되었고, 성종조에 김종직의 제자들에 의해 영남사림파로 불리는 학자들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남학파라고 할 때는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16세기 말엽에는 이황, 조식, 이이(李珥)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각각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이황과 조식의 제자·문도들로 구성된 학파를 영남학파라고 한다.
이황의 학풍은 이론적 탐구를 통해 성리학을 체계화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인간의 내면적 심성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조식의 학풍은 이론적 탐구보다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일상적 실천을 강조했으며, 그 실천도 내면적 심성 수양을 넘어서 사회적 실천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도 영남지방 내에서 각각 달랐기 때문에 별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은 안동권(安東圈) 예안(醴安)에서 활동하고, 조식은 진주권(晉州圈) 산청(山淸)에서 활동하였다.
조식의 학통은 비록 오건(吳健), 최영경(崔永慶) 등에 의해 그 맥이 이어졌으나, 정인홍(鄭仁弘) 등이 주축을 이루었던 북인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학통이 붕괴되었다.
따라서 영남학파라고 할 경우에는 퇴계학파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황의 문하에서는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 그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출현하고, 그 뒤를 이어 정경세(鄭經世), 이현일(李玄逸), 장현광(張顯光) 등이 퇴계 학맥을 전승하는 영남학파가 성립했다.
영남학파가 이이의 제자와 문도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이론적 대립의식을 명확히 하게 된 것은 이이 계열의 성리학자들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하자, 이이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비판하면서부터이다. 17세기 전반에는 김해(金垓), 유원지(柳元之)·이구(李) 등이 이이의 성리설을 혼륜일변설(混淪一邊說)로 비판했으며, 17세기 후반에 오면 이현일이 이이의 성리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이황의 성리설을 옹호하는 이론 체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영남학파는 그 내부에서도 다양한 학맥이 형성되었는데 북부지역에서는 안동권과 상주권(尙州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안동권에서는 김성일, 장흥효(張興孝), 이휘일(李徽逸), 이현일,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 남한조(南漢朝), 유치명(柳致明). 김흥락(金興洛), 유필영(柳必永), 김도화(金道和)로 이어지는 계보를 볼 수 있다.
이 안동권의 학맥이 확실하게 정립된 것은 이현일에 이르러서이며, 그 손제자인 이상정에 이르러 안동권의 학맥은 영남학파의 중심으로서 가장 큰 비중과 권위를 누리게 되어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상주권에서는 유성룡, 정경세, 유진(柳袗), 유원지로 계승되는 학맥이 형성되었다.
영남 중부지역에서는 인동(仁同)의 장현광 계열과 성주(星州)의 정구 계열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퇴계 학통의 순수한 계승에 집착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학설·학풍을 수립한 특징이 있다. 먼저 장현광은 성리설에서 퇴계 학맥에 구애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이의 학설과도 달리 이기를 일도(一道)의 경위(經緯)로 파악하는 독자적인 이기경위설을 제시했다. 정구는 이황과 조식의 두 문하에서 수학했고, 정경세와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예학자이며, 그 자신은 이황의 성리설을 계승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의 학맥은 영남 안에서 발전되기보다는 기호지역의 남인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즉 정구-허목-이익(李翼)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그것이다. 그 후 이익-안정복(安鼎福)-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지는 성호학파를 계승한 허전(許傳)이 다시 영남으로 돌아와 김해지역에서 활동했다. 19세기 성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성리학자로는 이진상(李震相), 이승희(李承熙), 곽종석(郭鍾錫)이 있다. 이진상은 그의 숙부인 이원조(李源祚)의 영향을 받았으며, 안동권 유치명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진상의 독자적인 성리설은 그의 아들인 이승희와 제자인 곽종석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 19세기 후반 경에 오면 영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성리학자들 가운데서도 호남의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잇는 노사학파(蘆沙學派)와, 호남의 전우(田愚)를 추종하는 간재학파(艮齋學派)에 속하는 인물들이 나오기도 했다.
a. 퇴계(退溪) 학맥(學脈)
이황(李滉) 1501년 ~ 1570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 두 사람을 꼽는다면 하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요, 또 하나는 다산 정약용일 것이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철저한 유학교육을 시켜 관리를 양성했는데 뒷날 이들은 여론형성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러고는 거듭 출사(出仕)하라는 선조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성학십도(聖學十圖)》만을 바치고 다시 낙향했다.
이황이 고향에 돌아가려고 뚝섬에서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을 적에 그를 전송하기 위해 기대승 등 수백 명의 후배, 제자들이 몰려나와 눈물로 이별했다고 전한다.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그의 움직임 하나, 말 한 마디가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평생 소망하던 학자의 길, 학문탐구의 여가를 갖게 된다.
이황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학문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확립시켜 끊임없이 수정 · 보완을 거듭했다. 이기론을 쉽게 설명하면, 인간은 본래 착한 바탕[理]이나, 태어나 살다 보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氣]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해 끊임없이 자기 수양이나 교육을 통해 연마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그를 주리론자(主理論者)라 단정한다.
퇴계 문하에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성암 김효원(金孝元),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춘당(春塘),오수영(吳守盈), 인재(忍齋) 권대기(權大器), 조목(趙穆),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약포(藥圃) 정탁(鄭琢), 성재(惺齊) 금난수(琴蘭秀),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권오문, 임연재(臨淵齋) 배삼익,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겸암(謙菴) 유운용(柳雲龍),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등을 배출하였다.
(a-1) 유일재(惟一齋) 학맥(學脈)
김언기(金彦璣) .............. 1520(중종 15)∼1588(선조 21)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서 정사성(鄭士誠), 권위(權暐), 박의장(朴毅長)·신지제(申之悌), 권태일權泰一) 등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a-2) 서애(西厓) 학맥(學脈)
류성룡(柳成龍) .............. 1542년 11월 7일 ~ 1607년 5월 31일
이황의 문하에는 조목(趙穆)과 김성일(金誠一) 등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선배로 활동했다.
류성룡은 이황의 문하에서 후에 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趙穆), 김성일과 동문수학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 당해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류성룡 문하에서 권굉(權宏), 유인배, 이시명, 권창일, 이상일, 이휘일, 이현일, 이숭일, 유원지, 유진, 이숭일, 장흥효, 정경세(鄭經世) 등이 배출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고, 상주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 이곳에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 신석번(申碩蕃), 강진룡(姜震龍), 황뉴(黃紐), 홍호(洪鎬) 등이 있다.
(a-3)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학맥(學脈)
김성일(金誠一) .................... 1538(중종 33)∼1593(선조 26)
김성일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하였고,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 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전해졌다.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아우인 갈암(渴巖) 이현일(李玄逸)은 1699년 서인의 탄핵을 받아 방귀전리(放歸田里: 재야로 돌아감) 명을 받아 안동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강학하였는데 이때의 금양문인록(錦陽門人錄)에는 채문징(蔡文徵), 홍백원(洪百源),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박래봉(朴來鳳), 권상정(權相精), 백훤(白暄), 김세중(金世重), 채헌징(蔡獻徵), 김태중(金台重), 김세흠(金世欽), 유세장(柳世章), 유후장(柳後章), 백돈(白暾), 이형상(李衡祥), 남시훈(南時薰), 박기봉(朴岐鳳), 권성기(權聖器), 이재(李栽) 등을 포함 368명이 등록되어 있다.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문하에는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하당(荷堂) 권두인(權斗寅),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금헌(琴軒) 백돈(白暾), 해은(海隱) 박기봉(朴岐鳳),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 회양당(晦養堂) 권상정(權尙精) 갈암(渴巖) 이현일(李玄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등이 있다.
안동 출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1740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는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理學派)의 중추적 인물로서, 그의 학문적 흐름은 동생 이광정(李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해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도암(陶菴) 이재(李縡)는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남)되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이재는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동 출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은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이고, 이상정 문인인 남한조(南漢朝), 유범휴(柳範休), 정종로(鄭宗魯), 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종로 문하에는 이원조(李源祚), 강엄(康儼) 등이 있다.
그는 경학(經學), 성리학, 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動靜)에 의해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그는 이황(李滉), 김성일(金誠一),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이진상(李震相), 류종교(柳宗喬), 이돈우(李敦禹), 권영하(權泳夏), 이석영(李錫永), 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b. 남명학파(南冥學派)
조식(曺植)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 1572년 2월 21일(음력 2월 8일)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써 당시의 경상우도(오늘날의 경상남도) 사림을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문인들
20대 중반까지는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기묘사화 후 고향으로 내려와 처가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제자 양성에 몰두한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金孝元),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鄭仁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배출하었다.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과 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계승되었다. 이밖에 그의 문인으로는 최영경(崔永慶), 오견, 정여립(鄭汝立) 등이 있다.
동인의 영수였던 김효원은 이황의 문인으로 수학했지만 조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의 문인들은 대부분 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대북 정인홍과 정인홍의 문인 이이첨이 인조반정 이후 몰락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그 뒤 윤휴, 허목 등 일부를 통해 남인으로도 학맥이 일부 이어졌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을 받았다. 그밖에 진주의 덕천서원, 삼가의 용암서원에 제향 되었다
경상남도 산청군 사천의 덕천서원은 남명학파(南冥學派), 강우유맥(江右儒脈)의 총본산으로, 퇴계학파의 중심이 되는 도산서원이나 안동 병산서원 등, 강좌유맥과는 그 계통과 성격을 달리 하는 곳이다.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b-1) 한강(寒岡) 정구(鄭逑) 학맥(學脈)
정구(鄭逑) ........................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밑에서 공부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 조식(曺植)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경학을 비롯해 산수, 병진(兵陣), 의약, 풍수, 역사, 천문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영남학풍을 계승했다.
한강 정구의 문인들은 이후경(李厚慶), 서사원(徐思遠), 송원기(宋元器), 손치눌, 한준겸(韓浚謙), 문위(文緯), 장흥효(張興孝), 이윤우(李潤雨), 허목(許穆), 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이들은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와 함께 영남 남인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그의 사상 가운데 경세론 분야는 허목 등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한 학자에게 계승되어,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서 더욱 심화·발전되었다.
(b-2)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학맥(學脈)
장현광(張顯光) ................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여헌 장현광은 어리 때 학거(鶴渠)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정구의 질서가(26세때) 되어 교류 하였다. 김종직 계열의 직계를 통해 김종직-김굉필-정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장현광 문인으로는 허목(許穆), 류성룡의 삼남 류진(柳袗), 정극후(鄭克後), 사서(沙西) 전식(全湜),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등암 배상룡,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신류 (申瀏)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허목, 허후, 배상룡 등은 장현광 처숙부인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정구 사후 그에게 찾아와 수학하였던 것이다.
3. 기호학파(畿湖學派)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중종 31)∼1584(선조 17)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함과 동시에 후학을 지도한 사람으로는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서경덕(徐敬德)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좀 더 성숙된 성리학자로서 영남에는 이황, 조식(曺植), 호남에는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기호에는 이이와 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이 있다.
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 성혼, 송익필의 세 사람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비록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지만, 그와 논변을 벌인 성혼이나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혼이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해도 대립적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 송익필의 사단칠정 이기설이 이이의 견해와 같았던 점으로 보아, 서로 학문적 갈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후학들이 세 학자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의 학문을 형성하였으니, 이를 율곡학파라 하지 않고 기호학파라 하였다. .
그 대표적 학자는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한교(韓嶠), 이귀(李貴), 조헌(趙憲), 안방준(安邦俊),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 등이다. 이들은 기호의 서인으로서 동서분당의 당쟁에 관련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그것은 송시열 이후에 더욱 심했다. 특히, 이이의 문인 김장생으로부터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韓元震), 이간(李柬),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김원행(金元行) 등이 학파 흐름의 중심이 되었다.
율곡 이이는 종래의 학자 나흠순(羅欽順), 서경덕, 이황 등의 학설에 대해, “나정암이 가장 높고 다음이 퇴계·화담의 순이 된다.”고 평가하면서, “정암과 화담의 학설은 독창적 자득(自得)의 맛이 많고, 퇴계는 주자의 학설에 한결같이 따르는 의양(依樣)의 맛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이황을 비교해서, “재주와 기국(器局)은 퇴계가 정암에 미치지 못하고, 학문의 정미함은 정암이 퇴계를 따를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이의 학문적 입장은 자주적이고 비판적이며 논리성을 강조하는 것이어서, 그의 철학적 전제는 본질에 있어 두 근원[二元]을 상정하지 않는 데 있다. 비록 양면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원적 본원성(本源性)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말한다 해도, 그 원초적 작위인 발(發)이 이원(二源)일 수 없으며, 이기가 서로 발할 수 없다고 하여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기(氣) 이전에 이(理)가 별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들어, 이가 발한다는 이황의 이발설(理發說)을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이황의 “이가 발하는 데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탄다(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는 학설 가운데, 후자는 인정되지만 전자는 모순되는 것이라 한다. 율곡 이이는 “발하는 것이 기이고, 발하게 하는 소이가 이이다(發之者氣, 所以發者理).”라는 원칙에 근거해서 발(發)의 속성을 오직 기(氣)에만 인정하였던 것이다.
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이황이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고 말한 데 대해, 율곡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이 다 같이 기가 발한 것”이라 하고, “칠정 가운데 사단을 말할 수 있으니 그 순선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우주생성론의 입장에서도 태극음양에 그 선후나 상호작위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 역시 기가 발하는 데 이가 타는 것뿐이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일치된 해석으로 보인다. 심성정(心性情)의 인성론적 입장에서도 두 개의 마음이나 두 개의 정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그 근원적 작위[動]에서 선악의 성향이 갈라진다고 하는 일원적 견해가 이이의 주된 이론이다.
이황의 호발설을 이이가 비판한 이후, 영남학파의 이현일(李玄逸) 등이 그 호발설을 옹호하기 위해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를 주기파 또는 기학파(氣學派)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이 문하에서 그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은 김장생(金長生)으로 선조 때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송익필에게서 『근사록』과 예학을 배우고, 이이에게서 경학과 성리학을 배워 통달했는데, 특히 예학에 밝아 예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한편, 그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자득하고 조심스레 삼가고 덕행군자로 유명해져 많은 후학들이 찾아와 배웠다. 그는 아들 김집(金集)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학덕인(學德人)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예학은 송시열에게 전해져 당시 서인을 중심한 기호학파에서 널리 성행하였다.
이이 문인 송시열은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에게서 배운 뒤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心經)』·『근사록』·『가례(家禮)』 등을 배우고, 그 뒤로는 연산(連山)에 있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에게 배워 대성하였다.
권상하는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총애를 받은 대표적 학자이다. 그는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괴산(槐山)의 화양동에다 부근의 유생들과 함께,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기 위해서 1717년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1704년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신종·의종에게 제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양동의 만동묘는 부근 유자들의 근거지로서, 지나치게 세도를 부리거나 당론을 일삼는 등 폐단이 없지 않았다. 권상하의 문인에는 한원진과 이간이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문제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기 기호학파의 중심인물로 조헌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모든 의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충의를 드러냈다. 그의 절의를 드높이고 유고를 모아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한 이가 안방준이다.
기호학파의 연원은 이이에서 비롯되었으나, 주로 서인 중심이었다. 이이는 이미 시작된 동서분당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후기로 내려올수록 기호학파의 흐름과 병행해 기호인에서 서인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a)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학맥(學脈)
송익필(宋翼弼) ..................... 1534(중종 29)∼1599(선조 32)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은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송익필 문하에서 김장생,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徐渻), 정홍명(鄭弘溟), 강찬(姜澯), 김반(金槃). 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최립(崔岦), 이순신(李純臣),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가로 불렸다.
(b)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학맥(學脈)
김장생(金長生) ..................... 1548(명종 3), ~ 1631(인조 9)
사계(沙溪)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예학을 배워 아들 집(集)에게 이어받게 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했다.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이시직(李時稷), 최명길(崔鳴吉), 이덕수(李德洙), 최명룡(崔命龍), 유계(俞棨), 윤선거(尹宣擧)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크게 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루었다. 특히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유계, 김선거는 호서산림(湖西山林) 5현(五賢)으로 불린다.
이밖에도 그의 학맥은 김경여(金慶餘), 윤문거(尹文擧), 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어진다.
(c)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학맥(學脈)
송시열(宋時烈) ................... 1607(선조 40)∼1689(숙종 15)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김경여(金景餘), 윤선거(尹宣擧), 윤문거(尹文擧), 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權諰)·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들인 수증(壽增), 수흥(壽興), 수항(壽恒) 형제들,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형제, 이후원(李厚源), 이시백(李時伯)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이경석(李景奭)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제자로는 윤증(尹拯)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 이단하(李端夏), 이희조(李喜朝), 정호(鄭澔), 이선(李選), 최신(崔愼), 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진다.
그 밖에 그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이간(李諫)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d)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학맥(學脈)
권상하(權尙夏) ................... 1641년(인조 19)∼1721년(경종 1)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그는 이단하(李端夏), 박세채(朴世采), 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권상하(權尙夏) 문하에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외암(巍巖) 이간(李柬), 병계(屛溪) 윤봉구, 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 화암(華巖) 이이근(李頤根), 관봉(冠峰) 현상벽(玄尙璧), 매
봉(梅峰) 최징후(崔徵厚),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호팔학사(江湖八學士) 등이 있다.
(e)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학맥
서경덕(徐敬德) .................... 1489(성종 20) ~ 1546(명종 1)
화담(花潭) 제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보면 첫째는 사암(思菴) 박순(朴淳), 초당(草堂) 허엽(許曄), 슬한재(瑟僩齋) 박민헌(朴民獻) 같은 명문 출신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요, 둘째는 〈토정비결 土亭秘訣〉의 저자 이지함(李之菡), 강문우(姜文佑), 나주 선비의 종주 가 된 정개청(鄭介) 등 특별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황진이(黃眞伊, 1506년~ 1567년)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로서 화담과 학문적 교유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의 3절‘ 로 일컬어진다.
(f)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학맥(學脈)
기대승(奇大升 ............................... 1527(중종 22) ~ 1572(선조 5)
기대승은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 정지운(鄭之雲), 이항(李恒) 등과 교유했다. 그는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기준(奇遵)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景會), 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그는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 김안국 문하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성혼 문하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송당(松堂) 박영(朴英) 문하에 일재(一齋) 이항(李恒) 등이 기호학파에 속한다.
The end 2016년 8월 25일 정리(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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