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5현(湖西五賢)
청람(晴嵐)
♣ 머리에
예로부터 충청도는 예(禮)를 숭상하는 뿌리 깊은 사대부 문화의 고장이며, 지금도 충청도는 올곧은 예향(禮鄕)의 자긍심과 명맥(命脈)을 면면히 이어받은 전통적 기호(畿湖) 유교문화권이다.
호서지방(湖西地方)은 충청도 일대를 가리키는 지역으로서 호남 지방(湖南地方), 영남 지방(嶺南地方)과 함께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중부권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른바 호서 5 현(湖西五賢)으로 불리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산천재(山川齋) 윤선거(尹宣擧), 시남(市南) 유계(俞棨),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를 낳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영남학파의 조종 야은(冶隱) 길재(吉再)-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른바 동방 5 현(東方五賢)으로 일컬어지는 영남 사림과 대비하여,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킨 호서오현(湖西五賢)은 바로 17세기를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으로 온통 사직이 흔들리는 와중에서 벌어지는 사색 붕당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성리학의 대의명분과 갈등 속에서 치열한 논쟁과 함께 꽃피운 유학자들을 면모를 여기에서 간략하게 조명해보기로 한다.
≪청람(晴嵐) 정리≫
1.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송시열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서,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와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우암의 친척으로는 정좌와(靜坐窩) 송이창(宋爾昌)과 그의 아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은 친족이고, 산천재(山川齋) 윤선거(尹宣擧) 및 후에 소론의 영수가 된 그의 아들 명재(明齋) 윤증(尹拯), 백호(白湖) 윤휴(尹鑴), 탄옹(灘翁) 권시(權諰)와는 모두 사돈 간이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면서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문을 마쳤다.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그 후 현종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고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숭앙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으며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로 교유(交遊) 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북 정읍 태인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 83세로 일생을 마친 송시열은 광해군-인조-효종-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정치뿐만 아니라 성리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우뚝 빛나는 출중한 학자의 면모를 보였으며,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하였으며,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다. 그는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에 더 역점을 뒀으며, 정통 주자 성리학의 입장에서 통치자의 덕성 확립을 강조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 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 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그중에서도 제자였던 윤증(尹拯) 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인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영조 및 정조 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은 신덕왕후 복권 운동을 주관하여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단종, 사육신 복권 운동 주관함으로써 1691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복권되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직후에는 노산군이 대군으로 승격되었다가 곧 추복되어 노산군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으로 정하게 되었다.
송시열은 서예 역시 하나의 도학(道學)으로 생각하였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우암은 글씨를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간주하면서 기교가 아니라 마음수련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실제 송시열은 이황의 서첩을 보고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하고 감탄하였다.
유배, 사사에 대하여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는 스승의 묘비문을 쓰면서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며 하여 다시 노론, 소론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예송 이후 송시열은 윤휴를 적휴(賊鑴), 참적(斬賊), 허목을 독물(毒物), 독극물, 흉목(凶穆)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권상하에게도 계승되어, 권상하는 윤휴를 지칭할 때마다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지칭할 때는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2.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송준길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서 아버지 정좌와(靜坐窩) 송이창(宋爾昌)과 어머니(光山金氏 김은휘(金殷輝)의 딸) 사이에서 1606년 12월 28일(선조 39) 외가가 있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이곳 외가(김은휘의 집)는 일찍이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었으므로 송준길의 출생까지를 합쳐 사람들이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 불렀다.
동춘당의 친척으로는 외손녀가 숙종 비 인현왕후 여흥민씨(仁顯王后), 외조부 김은휘(金殷輝), 친척 송갑조(宋甲祚), 송인수(宋麟壽), 송시열(宋時烈), 사돈 민광훈(閔光勳), 사돈 민정중(閔鼎重), 인척 허적(許積), 사위 여성부원군 민유증(閔有贈) 등이다.
송준길은 일찍부터 김장생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한 조선 시대 후기의 정치가이며 유교 주자학의 대가로서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고.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 18 현(海東十八賢)의 하나이다. [註 1]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 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남인 학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었으며,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제자 중 민유중을 눈여겨 본 송준길은 그를 사위로 삼는데, 민유중에게는 그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고, 후에 이들 사이에서 인현왕후가 태어난다. 민유중의 둘째 딸이 왕비로 낙점되면서 국구가 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으며, 세자 현종의 사부로서 가르쳤다. 그 뒤 벼슬길에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퇴하였다.
동춘당 송준길의 명민함은 유별하며 글씨를 잘 썼다. 당대 선배 명필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이 일찍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보다 낫다."라고 경탄했다.
그는 1672년 12월 2일(현종) 66세를 일기로 충청도 대덕군 회덕 송촌 향리에 은거하다가 1672년에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어록해 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 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 순절 비문尹啓殉節碑文) 등이 있다.
1681년(숙종 7년) 대덕군 회덕의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 되고, 1756년(영조 32) 송시열 등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제향 되었다.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배향되었다.
3. 산천재(山川齋) 윤선거(尹宣擧)
윤선거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아버지는 팔송(八松)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서인의 거두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딸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1607년(광해군 2)에 태어났다.
윤선거는 본래 아버지 아래에서 학문을 배워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 문하에서도 수학하였으며, 그때 송시열을 만나게 되어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된다. 김집(金集)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몰두하였다.
윤선거의 친척으로는 형제인 용서(龍西) 윤원거(尹元擧),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를 비롯하여, 외조부 우계(牛溪) 성혼(成渾), 외증조부 죽우당(竹雨堂) 성수침(成守琛), 외손자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사돈으로는 탄옹(炭翁) 권시(權諰, 사돈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사돈 백호(白湖) 윤휴(尹鑴), 사돈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사위 잠수(潛叟) 박세당(朴世堂) 등이다.
윤선거는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형 윤문거와 함께 급제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처 이씨(李氏)가 자결하였으나 윤선거는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켜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에서 부인을 잃은 뒤 노성 본가에 머물지 않고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 자락에 서재를 짓고 은둔하며 유계(兪棨)와 이웃에 살면서 강학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이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였는데, 뒷날 후손들 사이에 유계와의 공편 문제로 아들인 윤증과 송시열 사이에 배사론(背師論)이 일어났다.
윤선거와 교류가 있었던 남인 윤휴가 "사물의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느냐"라는 발언을 하자 그는 1653년 송시열, 이유태, 권시, 유계 등과 함께 황산 서원에 모여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과 같다며 비난하자 그는 윤휴를 옹호하자 송시열과 급속도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1669년 4월 (현종 10년) 향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별세하기 몇 달 전 송시열에게 “남인 백호(白湖) 윤휴(尹鑴)와 묵재(墨齋) 허적(許積)을 '참람한 무리'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폭넓게 생각하라”란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그의 묘갈명을 부탁하면서 같이 전달해 알려지게 되었고, 송시열은 편지에 대해 노여워하며 조문에 병자호란 때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 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묘갈명을 적어주었다. 이에 대해 윤증이 여러 번 수정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는 윤증과 송시열이 척을 지고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저서로 『가례원류』·『후천도설(後天圖說)』 및 이에 관하여 유계와 논변한 편지를 비롯하여 『계갑록(癸甲錄)』·『노서유고(魯西遺稿)』 등이 있다.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4. 시남(市南) 유계(俞棨)
유계(兪棨)는 기계 유씨(杞溪兪氏)로. 1607(선조 40)∼1664(현종 5) 태어났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호서 산림 5 현(湖西山林五賢)으로 일컬어졌다.
1630년(인조 8) 출사하여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 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다가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작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어 부교리가 되었고, 장례 절차를 예론에 따라 시행토록 건의하여 그대로 실시하였다. 그는 특히 예론에 대해서 매우 뛰어난 학자였다.
1659년 병조 참지로서 비변사 부제조를 겸임하고, 이어서 대사간·공조참의·대사성·부제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 해에 효종이 죽고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였으며, 3년 설을 주장한 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 등의 남인을 논박하여 유배 또는 좌천시켰다. 1662년(현종 3) 예문관 제학을 거쳐 1663년 대사헌·이조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유계의 학문 세계는 이이(李珥)와 김장생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예론의 입장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을 본받아 고금의 치도(治道)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피력한 『강거문답(江居問答)』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이이의 학설을 요약하여 “정치의 근본은 수기(修己)이고, 정치의 핵심은 임관(任官)이며, 정치의 급무는 구민(救民)이다”라고 보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또한 주자의 『가례』를 기본으로 하고, 『의례(儀禮)』·『주례(周禮)』·『대례(戴禮)』 등 여러 경전의 내용을 뽑고 주를 붙여 ‘원(源)’이라 하며, 후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예설을 조사하여 ‘유(流)’라 하여 역사상의 예설들을 밝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였다. 이는 김장생의 예설에 토대를 둔 것이며, 1715년 숙종 때 그가 지은 《가례원류》로 인해 윤선거와 공편했는지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말년에는 주자의 『자치통감 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받아 노론 정권하의 고려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해 주는 강목체(綱目體)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을 편찬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는 문집인 『시남집』이 있다.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5.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1607년(선조 40)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 김집 부자를 사사,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 이름이 높았다. 그 문하의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尹宣擧), 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 산림 오현(湖西山林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이유태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천거로 1634년(인조 12)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대군 사부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으며.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 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 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복제 시비 때 호군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다. 뒤 이어 효종 말년 이래 적어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고 구민(救民)·구국(救國)의 대책을 제시, 왕이 비변사로 하여금 검토하게 했으나 제대로 채택되지 않자 실망해 사직, 귀향하였다. 그 뒤에도 이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이조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674년의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복제를 잘못 정했다는 남인 윤휴(尹鑴) 등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불만 끝에 1684년(숙종 10)에 죽었다.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 했으며, 특히 치국 경제(治國經濟)의 문제에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즉, 향약에 의한 향촌 조직과 오가작 통제(五家作統制)의 실시, 양전(量田) 시행과 사창(社倉) 설치를 주장하고, 양인(良人) 이상 자제의 취학과 15세 이후 능력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선택을 역설하였다.
소론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 했다가 1713년 노론 때문에 일시 훼철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초려집』 26권이 전한다.
[註1] 성균관 대성당(大聖堂) 문묘(文廟)에 배향(背向) 된 해동 18 현(海東十八賢)은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 빙월당(氷月堂) 설총(薛聰)과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고려 시대 회헌(晦軒) 안향(安珦)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포함하여 조선시대 동방5현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 중봉(重峯) 조헌(趙憲),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이상 18현으로 불린다.
The end 2016년 8월 28일 청람(晴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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