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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삼남길

전북제7길: 동학혁명 발상지

일  시: 2015년 7월 16일

구  간: 태인 - 향교 - 태인면사무소 - 정읍시 제2청사 - 2산업단지 -  정읍소방서 - 수성사거리 - 연지사거리 - 정읍역 (15km)

 

                                 

                                     전북 제7길: 동학의 발상지11km

태인 향교에서 동산을 넘어서면 3.1운동 만세비가 있고, 태인면사무소를 지나면서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활동무대가 전개된다.

 

전라도는 예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농민들은 항상 가혹한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부는 전라도에서도 으뜸가는 곡창 지대였다. 이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심해지자 1894년 1월에 전봉준(1854년-1895년)과 수백 명의 농민들이 고부 관아로 달려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사후계획을 세워놓지 않은 농민들은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순응하여 자진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민란으로 몰아 관련자들을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이 무장봉기를 감행하게 된다.

 

 

이것이 고부봉기로 부르는 제1차 동학농민운동이다. 민중을 수탈하는 조선 관료사회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어난 조직적인 민중봉기였다. 점령지에서는 집강소를 설치하여 마을마다 대표자를 선출하고 회의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는 민주정치의 싹을 틔웠다.

 

 

농민군은 1894년 3월 백산에 모여 4대강령을 발표하게 된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충효로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함락을 목표로 4월초 금구, 원평에 진을 친다.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로,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수탈을 시정해 달라는 주장이었다. 고부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친 농민군은 조직적으로 항거하기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면서 장성부근에 집결했다.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기세를 몰아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정부군은 우세한 무기를 앞세워 동학군을 격파하고,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징계하고,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겠다는 타협안에 동의하여 폐정개혁(弊政改革) 12개조를 요구하며 전주성에서 철병을 한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만만치를 않자,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청의 군대가 조선에 파병을 결정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서도 병력을 파병한다. 남의 나라 땅에서 외국 군대끼리 전쟁을 치르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전쟁에서 패한 청군은 본국으로 철수했지만, 일본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다. 일본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2차 봉기를 결의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른다.

 

 

일본은 1894년 6월 경복궁쿠데타를 일으켜 친일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한다. 그해 9월 전봉준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공주-수원-서울로 이어지는 북상 로를 구상하고, 북접의 손병희와 연합하여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의한다.

 

 

이에 조선조정에서는 일본군과 연합전선을 펼친다. 농민군과 조일연합군은 10월 23일부터 공주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이 참패를 당하고 만다. 전열을 재정비한 농민군이 공주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시작된 전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고, 불꽃처럼 일어나던 동학농민군도 끝장이 나고 말았다.

 

 

우국충정에서 일어났던 농민혁명군이 참패하면서,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낸 일본이 1910년 강제합방을 하고, 36년간 치욕을 당하는 가슴 아픈 역사가 이어진 것이다.

 

 

동진강 거산교를 건너 농로를 따라간다.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산자락, 사방을 둘러봐도 녹색물결로 출렁이는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우산리 비선마을을 휘돌아 정읍제2청사와 외야마을을 지나 2산단 삼거리에 도착한다. 70고개를 넘고 보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등산화 속에서 내뿜는 열기로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걸음이다. 하지만 삼남길이 어찌 속 타는 심정을 알아줄거나. 산업단지입구사거리에서 신영산업을 좌측으로 끼고 공단우회로를 따른다. 야속한 심정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리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대청산업 앞에서 야산으로 인도한 리본을 따라가는 중에 종적을 감추고 만다. 들어지봉에서 성황산까지 연결되는 종주코스인데, 한여름이 다가도록 사람들의 흔적도 없이 무성한 가시덤불이 앞을 가리고 있으니, 도저히 뚫고나갈 자신이 없다.

 

 

대청산업 뒷길로 내려와 정읍소방서-수성사거리-연지사거리를 지나 긴긴 하루해가 서산머리에 걸터앉는 시각 정읍역에 도착한다. 30도가 넘는 열기 속에서 27km를 주행하는 정말로 고된 하루였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보니 발가락마다 물집이 잡혀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따로 없다.

 

 

 

 

 

 

 

 

 

                                                   태인면 사무소

 

                                                                         동진강 대각교

 

 

 

 

                                                     舊 거산교 거너

 

 

                                                                         배수지 농로

 

 

 

                                              태인농협 벼 건조장

 

 

 

 

 

                                                                      1번 국도 횡단

 

                                                                   우산리 비선마을

 

 

                                                      복분자 농장

 

                                                                              1번국도 횡단

 

 

 

 

 

 

 

 

 

 

 

 

 

 

 

 

 

 

 

 

 

 

 

                                                                       로즈모텔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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