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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제26구간: 망양정 - 왕피천

일시 : 2014년 8월 27일

구간 : 수산교 - 망양정 - 울진엑스포 공원 - 연호공원 - 봉평 신라비 - 죽변항 - 죽변등대(16.2km)

 

                               26구간: 수산교-죽변등대(16.2km)

 

25구간을 빠르게 지나온 우리는 가장 먼저 망양정에 오른다. 망양정(望洋亭)은 울진군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왕피천 하구에 자리 잡고 있는 관동8경중 한곳이다.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산 정상에 날아갈 듯이 올라앉은 아름다운 자태는, 바다로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아낙네의 간절한 모습으로 보인다.

 

 

망양정은 고려시대 기성면 망양리 해안에 세워졌으나, 1471년(성종2년) 평해군수 채갑보(蔡甲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기슭으로 옮긴 뒤로 수차례 보수 끝에, 1860년(철종11) 울진 현령 이희호(李熙虎)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기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숙종은 관동팔경 중에서도 망양루의 경치가 으뜸이라며,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란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부실하게 먹은 조반으로 허기가 드는지라, 망양정아래 망양정횟집을 찾아 아내의 간청으로 물회와 회덧밥을 주문했다. 동해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싱싱한 횟감으로 차린 식사는 말 그대로 꿀맛이다.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감칠맛이 혀끝에서 녹아들고, 곁들이는 소주야말로 찰떡궁합이다.

 

 

울진이 자랑하는 왕피천은 경상북도 영양군과 울진군을 북동쪽으로 김입곡류(嵌入曲流)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가 67.7km에 이르는 동해안에서 가장 긴 하천이다. 영양군 수비면 금장산(849m) 서쪽에서 발원하여 장수포천으로 부르다가 울진군 서면 왕피리 마을을 지나면서 왕피천으로 부른다.

 

 

실직국의 왕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왕피리로, 계곡이름을 왕피천이라 부른다. 하천의 상류나 중류는 원시림과 산간협곡이 절경을 이루고, 감입곡류로 돌아가는 계곡마다 아름다운 비경이 숨어있다. 동해바다와 인접한 하류에서는 수산리와 노음리의 너른 충적평야를 펼쳐놓아 울진군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울진이 자랑하는 성류굴을 찾아간다. 왕피천 하류에 있는 성류굴은 길이가 915m에 이르는 석회암동굴로 담홍색과 회백색을 띠고 있다. 동굴 안에는 여러 곳의 광장과 수심이 4∼5m에 이르는 물웅덩이,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鐘乳石)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석주(石柱)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성류굴은 원래 신선들이 한가로이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선유굴이라고 불렀으나, 임진왜란(1592)때 왜군을 피해 불상을 굴 안에 피신시킨 후로, 성스런 부처가 머물던 곳이라는 뜻에서 성류굴이라 부른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주민 500여 명이 굴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왜병이 굴 입구를 막아 모두 굶어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격암 남사고 유적지다.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서 태어난 남사고(1509-1571)선생은 조선중기의 유학자로 본관이 영양이고, 자는 경원,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깨달은바가 있어 호를 격암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심취하더니, 중년에 이르러서는 역학과 천문, 지리에 능통하여 임진왜란과 분당정치, 선조즉위를 예언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의 생활신조가 절제된 의식을 몸소 실천하여 평생 소학(小學)을 가까이 두고, 그의 나이 56세인 명종19년(1564년)에 사직 참봉에 천거된 것이 고작이다 그의 저서로는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남격암십승지론(南格菴十勝地論)이 정감록에 전해지고 있으며, 후세사람들이 그를 해동강절(海東康節)이라 부른다.

 

 

다음으로 왕피천을 간단하게 순례하고 엑스포 공원으로 향한다. 울창한 소나무숲속에 민물고기연구센터, 미생물 전시관, 아쿠리움까지 모든 시설물이 한 군데 조성되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여 고장의 특산물을 홍보하는 이벤트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옛 성현들의 말씀이 아니던가. 지방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문화축제와 남발되는 홍보물이 사전준비도 없이 선심성공약으로 자행되어, 곳간의 재물을 탕진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고 보니 말이다.

 

 

울진 읍내를 관통하는 남대천은 응봉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면 하당리를 지나 울진읍 비래봉 부근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25㎞의 하천이다. 울진에서는 왕피천과 광천 다음으로 큰 하천이다. 상류구간은 감입곡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좁은 곡저평야를 지나 남쪽의 왕피천과 인접하여 수산리 일대에서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인근에 있는 연호정을 찾아간다. 연호라 부르는 자연호수는 연꽃이 만발하고 경관이 수려하여,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어 흥을 돋우던 곳이고, 태공들이 속세의 번뇌를 타파하기위해 명상을 즐기던 곳이다. 연호는 고씨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땅이 꺼지며 늪으로 변하여 고성 늪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여 년 전만 해도 울진읍 중심부까지 차지할 정도로 큰 호수였으나, 토사의 유입으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송림 속에 자리 잡은 연호정은 1815년(순조15년) 향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정자가 퇴락하자 1922년 동헌의 객사건물을 옮겨 세우고 연호정이라 부르고 있다.

 

 

물어물어 찾아간 연호정은 연못을 가득 메운 연잎이 장관이다. 계절이 지난 탓에 연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지는 못했지만, 싱그러운 연잎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싹 가신다. 우아함과 고귀함, 순결을 상징하는 연꽃은 열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연꽃은 진흙탕위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연잎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물지 않는다. 연꽃이 피면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만 남고,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에는 청정함을 유지한다. 연꽃의 줄기는 부드러워 비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잎과 꽃이 둥글어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연꽃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꿈에 보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해파랑길과 겹쳐지는 관동팔경 녹색 경관길은 고성군대진등대부터 시작하여 울진군 월송정까지 330km의 도보 길을 일컫는 말로, 정부의 초광역권개발의 일환으로 추진하여 동해안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환상의 구간이다. 죽변항 가는 길에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을 만난다.

 

 

영문도 모른 채 제1전시실로 들어서면, 전시실 중앙에 국보 제242호로 지정된 울진봉평신라비가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에는, 당시 국왕의 지위와 신라 십칠 관등의 성립연대와 지방통치조직 및 촌락구조, 그리고 복속 민에 대한 시책 등 신라 사회전반의 여러 면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제2전시실에는 삼국시대의 비 10여 기를 실물모형으로 제작하여 전시하고, 제3전시실에는 삼국시대의 그림에서 글자로 변모되는 과정을 소상하게 적어놓은 금석학의 계보 및 역사와 한글의 기록유산과 미래를 지향하는 비전을 제시 하고 있다.

 

 

10여 년 전 중국 서안을 방문하여 碑林을 찾아간 적이 있다. 이곳에서 사서삼경이 새겨진 비석을 보고 감탄하였는데, 오늘 울진봉평신라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한자리에 모아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데서, 새로운 자긍심을 갖는다.

 

 

 

    

 

 

 

 

 

 

 

 

 

 

 

 

 

 

 

 

 

 

 

 

 

 

 

 

 

 

 

 

 

 

 

 

 

 

 

 

                                                                            울진읍 연호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