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정신문화의 요람 安東
지난 10월 팔당댐에서 시작한 국토대행진이 문경새재를 넘어 한강과 새재 길을 완주하고 낙동강이 시작되는 안동댐을 찾아오니 감회가 새롭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실감나게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더니 구간을 거듭하면서, 의지와 보람으로 ⌜백두대간 종주⌟이후 또 하나의 목표가 현실화되면서 삶의 의욕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낙동강은 태백시를 둘러싼 태백산, 함백산, 백병산, 매봉산의 물줄기가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태백시 황지연못에서 발원하여 부산 을숙도에서 남해로 유입되는 525km의 강이다. 수자원공사에서 국토대행진 코스를 강 상류의 댐으로 설정한 관계로 낙동강은 안동댐 월영교가 있는 물 문화관 앞에서 시작된다.
정신문화의 요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옛 전통을 지키고 있는 안동에는 명소가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안동댐상류에 있는 陶山書院을 지나칠 수가 없다. 해동주자로 일컬어지는 한국최고의 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당을 지어 유생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정진하던 곳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다.
또한 개인적인 일이지만, 안동시 녹전면 죽산리 선영에는 중 시조이신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님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명장이신 할아버님은 16세에 散員(산원)으로 출사하시어 監察御使를 거쳐 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시고, 刑部尙書, 樞密院副使,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대원수로서, 일본을 정벌할 때는 중군장이 되셨고, 문무를 겸비한 재상으로 萬人之上 一人地下의 上洛郡開國公으로 壁上三韓三重大匡에 이르셨다.
안동댐은 경북 안동시 옥정동과 주전리를 가로막은 다목적댐으로 높이 83m, 길이 612m이며 총저수량이 약 12억 5천만 톤에 이르는 낙동강 본류를 가로막은 사력(砂礫)댐이다. 낙동강 수계에 처음 등장한 이 댐은 하류지역의 연례적인 홍수 피해를 줄이고 농, 공업용수 및 생활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1971년 4월 착공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하였다. 특히 댐 주변에는 민속마을과 민속박물관, 안동문화 관광단지, KBS드라마 촬영장등을 조성하여 안동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 40분 만에 도착한 시외버스터미널은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있어 이용하기에 매우 불편하다. 택시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경북도청이 이전해올 것을 대비하여 외곽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만 삼천 원을 지불하고 도착한 안동댐은 지난2월 아내와 함께 다녀간 곳이라 낯설지가 않다. 물 문화회관에서 국토종주 인증수첩을 구입하여 부산의 을숙도를 향해 387km의 대장정에 오른다.
보조댐과 법흥교를 지나면 곧바로 안동시내로 들어선다. 인구17만의 안동시는 양반의 도시, 정신문화의 도시로 알려진 곳이라, 특별히 생산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전이라는 말부터 거리가 먼 관광의 고장, 선비의 고장이다. 고수부지에 펼쳐지는 강변공원은 쾌적한 안동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4대강 살리기의 수혜지구라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도로는 안동댐과 임하댐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강어귀의 앉은뱅이 다리를 건너 귀래정과 영호루를 지나도록 인도하고 있다. 하지만 시내 쪽 고수부지로 진행해도 별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북 문화재17호인 귀래정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둘째아들 이굉이 지은 정자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동의 정자 가운데 귀래정과 임청각, 군자정, 옥연정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한다. 영호대교가 끝나는 강기슭에 있는 영호루는 영남3대 누각의 하나로 전해지며 현판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졌다.
또한 안동지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태사묘는 안동시 북문동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930년 태조가 안동에서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세운 공로로, 권행과 장정필은 대상(大相)이란 벼슬을, 김선평은 대광(大匡)이란 벼슬을 받으며 3태사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세 사람은 피로 맺은 형제로서 후손들에게 이르기를, 서로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이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낙동철교를 지나 안동대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안동병원이 있는 곳으로 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깔끔하게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따라 옥수교까지 내려서는 바람에 많은 시간이 지체된다. 옥수교를 건너면 안동시시설관리공단을 비롯하여 건축자재공장들이 밀집되어 진행하기에 어려운 곳이다. 안동병원 쪽으로 1km쯤 역주행하면, 배 고개를 넘는 자전거우회도로와 다시 만난다.
지체된 시간을 보충하기위해 서두르다보니, 가파른 경사는 아니라도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검암1리 노인정과 개곡 보건진료소를 지나 강변 쪽으로 방향을 잡아 검암교를 건너 중앙고속도로가 지나는 풍산대교 밑을 지난다. 삼거리에서 풍산읍과 단호면 쪽으로 단호재 오르는 5번 국도를 따르면 낙암정이 있는 전망대에 올라선다.
경상북도 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落巖亭은 조선전기의 문신인 배환이 지은 정자이다. 건지산을 배경으로 낙동강변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낙암정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옥수교를 지나온 낙동강이 벼랑 밑을 휘돌아 풍산 쪽으로 빠져 나가며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배상지의 차남으로 태어나 1401년(태종1)중광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사, 병조좌랑을 거쳐 정랑에 오른 인물이다.
낙동강 생태학습관을 지나 단호리 상단지마을에서 활등처럼 휘어진 제방위로 자전거길이 연결된다.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 오미봉 표지석이 있다. 설명에 의하면, 건지산의 한 자락이 하단지 강변으로 내려와 둥실한 봉우리를 만들었으니, 그 모습이 강에서 땅으로 기어오르는 자라와 같다고 하여 오미봉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자라(鼇)와 꼬리(尾)를 합하여 오미마을이라고 부른다.
단호대교를 건너면, 정면으로 수 백 년 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17호 마애동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진 곳이다. 이 불상은 오랫동안 외부에 노출되어 얼굴 부분의 훼손이 심한 것이 흠이다. 통일신라 말에 유행한 석조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마애유원지가 시작되는 강 언덕에 노송이 어우러진 그늘 속으로 山水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산수정은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낸 호봉(壺峰) 이돈(李燉:1568∼1624)이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610년(광해군 2) 경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나지막한 평지에 자리 잡은 산수정은 마을 앞 낙동강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강 건너 적벽삼봉(赤壁三峰)을 마주하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선사유적지전시관이 있는 매요리는 山水를 겸비한 地勢에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 앞으로 門前沃畓이 펼쳐지니, 저절로 마음이 끌리는 살아보고 싶은 고장이다. 풍산평야를 보듬어 안고 있는 길이 3.7km의 중리제방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풍요로운 풍산평야와 평산 뜰이 있기에 도청까지 이전하는 장밋빛 청사진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안동이 자랑하는 문화유산 하회마을이 지척으로 다가온다. 낙동강이 화산의 벼랑을 만나 병산서원 쪽으로 돌아가고, 자전거 길은 우회로를 따라 하회마을 입구에서 삼거리를 지나 풍천면 소재지로 들어선다.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된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집성촌을 이루는 마을이다.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며 ‘S‚형으로 흐르고 있어 하회(河回)라는 지명을 얻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3개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기암절벽의 부용대, 백사장과 만송정소나무 숲길이 장관을 이룬다. 조선전기의 전통가옥과 하회별신굿을 보존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인근에 있는 병산서원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 5)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鄭經世)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폐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는 47개 서원중에 하나다.
30여 km를 걸어오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서산너머로 내려앉고, 하루저녁 숙식할 자리를 찾아보지만 변변한 음식점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하회마을 입구나 풍천면소재지에 여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지만, 모두들 고개를 흔들며, 6km거리에 있는 구담리까지 가야한다는 대답이다. 그렇게도 흔하던 서울근교의 모텔들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곳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기대를 한 것이 큰 화근을 만나고 말았다.
땅거미가 지는 풍천 땅에서 급해지는 것은 마음이요 따라주지 않는 것이 몸이다. 국토대행진 12번째 구간을 지나오는 동안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물집 잡힌 발바닥의 통증보다도 숙소정하는 것이 급선무라. 어둠속으로 불빛이 아른거리는 구담리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다. 살았다는 희망으로 달려간 구담리는 한집건너 다방이 진을 치고, 노래방과 단란주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환락의 시골마을이다.
구세주처럼 반겨주는 모텔을 들어서니 빈방 없다는 표지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주인을 찾아 통사정을 해보지만 막무가내다. 일망의 희망을 안고 다음 집을 찾아가지만 역시나 마찬 가지라. 사정을 들어보니 티켓 다방에서 빈 방을 매점하여 긴 잠자는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개뿐인 모텔에서 퇴짜를 맞고 보니 눈앞이 캄캄하다. 15km가 넘는 풍산으로 나가야 한다는 대답인데, 그렇다고 버스나 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풍산에 있는 대절 택시를 불러와야한다니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딱한 사정이 안쓰럽던지, 지금은 휴업중이라는 경북장 여인숙을 알려준다. 물어물어 찾아간 여인숙은 불도 켜지 않고, 어둠속에 잠겨있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통 사정을 한 끝에 들어선 빈방은 냉천한골이라, 사람의 덕을 보자고 덤벼든다.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感之德之한 마음으로 짐부터 풀어놓고, 식당으로 달려가 주린 배를 채우고 보니 백리 길을 걸어온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2. 삼강주막
70년대 유행하던 여인숙도 고단한 육신을 누이기에는 분수에 넘치는 곳이라, 눈을 떠보니 어느새 먼동이 터온다. 부랴부랴 배낭을 꾸리고 길을 나서니, 하룻저녁 신세를 진 곳이라 거리가 벌써 눈에 익는다.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와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오순도순 살아가지만, 얄궂게도 행정단위가 달라 민원해결을 위해서는 제각기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어제하루 종일 걸어온 안동시와 이별이 아쉬워 이곳 특산물인 안동찜닭과, 간 고등어, 안동소주에 대한 내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안동찜닭은 조선시대 안동의 부촌인 안(內)동네에서 특별한 날 해먹던 닭찜을 바깥 동네 사람들이 보고 “안동네찜닭”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1980년대 중반 안동 舊시장 닭 골목에서 단골손님들이 닭볶음탕에 이런저런 재료를 넣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재료가 더해져 지금의 “안동찜닭”으로 변모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서양식 프라이드치킨 점의 확장에 위기를 느낀 舊 市場 닭 골목 상인들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맛을 찾던 중, 생긴 퓨전요리가 “안동찜닭” 이라고 한다. 안동찜닭은 고온에서 조리하므로 기름기가 적고 담백하며, 닭고기의 맛과 매콤한 양념의 조화를 혀끝에서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닭에 풍부한 단백질과 다양한 채소에 함유된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가 어우러져 영양학적으로도 좋은 음식이라고 한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영해, 영덕 지역에서 잡은 고등어를 내륙 지방인 안동으로 들여와 판매하려면, 꼬박 하루가 걸려야 임동면 채거리 장터에서 물건을 넘길 수 있었다. 이때 고등어는 뜨거운 날씨를 견디면서 뱃속의 창자가 상하게 되므로 이곳에서 창자를 제거하고 뱃속에 소금을 한 줌 넣어 팔았는데, 이것이 얼간재비 간 고등어이다. 임동면에서 다시 걸어서 안동장에 이르러 팔기 전에 한 번 더 소금을 넣은 것이 안동 간 고등어라고 한다.
생선은 본래 상하기 직전에 나오는 효소가 맛을 좋게 하기 때문에, 영덕에서 임동면 채거리까지 하루가 넘게 걸어오다 보면 얼추 상하기 직전이 되며, 이때 소금 간을 하면 가장 맛있는 간 고등어가 된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역사적 고찰을 바탕으로 현대시설에서 체계적으로 생산되어 전국으로 유통되면서 안동의 특산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소주는 고려시대부터 전승되어왔는데 특히 안동, 개성, 제주산이 유명하다. 이 중에서 안동 소주는 명문가의 접객 및 가양주(家釀酒)로 전승되어오다 1920년 안동시 남문동에 현대식 공장을 세워 “제비원 소주”라는 상표로 상품화되었다. 1962년 주세법이 개정되어 순 곡주생산이 금지되면서 생산이 금지된 후로 민간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7년 안동 소주제조법이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1990년 민속주로서 생산이 재개된 것이다.
제조과정은 조옥화 안동소주의 경우, 멥쌀을 물에 불린 후 시루에 쪄 고두밥을 만들고, 여기에 밀로 만든 누룩을 20일 동안 띄운 후 콩알 크기로 파쇄한 후 고두밥과 누룩과 물을 섞어 20일 가량 발효시켜 전술을 빚는다. 전술을 솥에 담고 그 위에 소줏고리를 얹어 김이 새지 않게 틈을 막은 후 열을 가하면 증류되어 소주가 되며, 알코올 농도는 45도로 독한 편이다.
구담리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지금까지도 5일장이 열리는 곳이다. 서쪽으로 916번 국도를 따라 상주와 지보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예천과 호명으로, 왼쪽은 일직과 신평으로, 뒤돌아보면 풍천과 안동으로 통한다. 물안개가 살짝 피어오르는 강 언덕을 신풍제라 하고, 활등같이 굽은 낙동강과 강 건너 기산리 너른 들이 평화롭게 전개된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위로 구담교가 걸리고, 엷은 안개 속으로 떠오르는 태양의 수줍은 자태는 갓 태어난 신생아의 수밀도처럼 향긋한 내 음이 풍기는 싱그러운 아침이다. 어제 무리한 탓인지, 온몸이 찌뿌듯한 것이 아직도 개운치를 않다. 몸 풀기를 하는 자세로 서서히 워밍업을 한다.
도화양수장을 지나 벼랑길에 막힌 우회로를 따라, 산기슭을 돌아가면 의성지방의 특산물인 마늘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의성지역은 토양이 비옥하고 부식토로 덮여 있어 마늘이 단단하고, 쪽수가 적은 육 쪽마늘이라 인기가 있다. 즙액이 많고 매운맛이 강하며 살균력이 강해서 김치를 담글 때 사용하면 맛도 좋고 잘 변질되지 않는다고 한다. 1526년(조선 중종 21년) 의성읍 치선리에 경주 최씨와 김해 김씨 두 성씨가 터전을 잡으면서 재배되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역사가 매우 깊다.
강 건너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광산천은 신평면 덕봉리에서 시작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는 길이가 비교적 짧은 하천이지만, 봉암산과 봉화산의 경사심한 협곡을 지나오는 동안 몸을 심하게 뒤틀며 아름다운 절경을 빗어낸다. 지보리의 문전옥답을 보호하는 지보제에 올라서면, 활등같이 휘어진 제방이 풍지교까지 5km가 이어진다.
자인교에 무거운 집을 넘겨주고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풍지교는 아쉬운 대로 자전거동호인들에게 자리를 제공하며, 세월을 이겨낸 흔적으로 검게 그을려 보기에 민망하다. 경상북도 의성군 단인면 용곡리(龍谷二里)와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내포리(內浦李)를 잇는 용공나루터에 1972년 길이 480m, 폭 7.5m의 풍지교(豊知橋)를 건설하였으나, 부실공사로 인해 1994년 상류 200m지점에 지인교를 새로 놓았다.
풍지교를 건너 시작되는 의성군은 태백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낙동정맥과 서남쪽으로 뻗은 백두대간사이에 마치 소쿠리 모양을 하고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의성군은 동서로 52km, 남북으로 33km이며, 동서 중간지역이 잘록하여 누에고치 모양을 하고 있다. 용곡리는 의성 땅이고, 청곡리는 예천 땅이니 논두렁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휘어진 청감제가 2km에 걸쳐 펼쳐진다. 청곡리 양지마을 사람들이 들녘으로 나와 농사준비에 분주하고, 강가의 왕 버들이 눈망울을 터트리니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산 모랑이 돌아가면, 자전거길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인부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저들의 노력이 있기에 4대강 국토대행진도 순조롭게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이 별실마을의 三樹亭에 당도한다. 수령 200년이 넘은 소나무 세 그루와 회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루는 산등성이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486호로 지정된 삼수정은 1420년대에 지어졌으나, 1636년에 폐하였다가 1829년 경상감사로 부임한 정기선에 의해 중건되고, 그 후 다른 곳으로 세 차례 이전하였다가 1909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중건되었다고 한다.
솔바람 부는 삼수정의 그늘에 앉아 바라보는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잔잔한 호수처럼 멈추는 듯 흘러온 강물이 흥국현의 벼랑을 만나면서 몸을 틀어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은 장강을 거슬러 오르는 삼협처럼,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경이롭게 보인다. 백사장이 펼쳐지는 푸른 강물에 나룻배를 띄워놓고, 시 한수 풀어내는 시인 묵객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서 삼강주막으로 향하는 강물을 바라보며, 흥국현의 벼랑에 막혀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우회도로를 따른다. 임산배수의 마을 우망리 뒤쪽으로 임도를 따라 안골고개를 넘으면 청운리 사막마을이다. 풍양면에서 삼강나루로 연결되는 59번 국도가 지나고 있지만, 이곳에서도 삼강나루를 외면하고 구룡마을 쪽으로 발길을 이어간다. 삼강주막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지난 2월 아내와 다녀간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내성천, 금천, 낙동강 등 3강이 합하는 삼강(三江)에는 낙동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 장삿배들과 문경새재를 오르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이들과 함께 존속해오던 삼강주막(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은 1900년 무렵 세운 건물이다. 삼강나루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음식과 술을 제공하고, 보부상들이나 시인 묵객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쉼터로 이용되었다.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2007년 군에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주막 옆에 있는 들돌은 본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돌로, 장성한 농촌 청년들이 농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는 의례에서 생겨난 도구였다. 이곳에 있는 들돌은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물류의 이동이 늘어 인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자,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일꾼들의 품삯을 정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돌은 둥근 타원형이며 무게는 50Kg 정도 나간다.
내성천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며 영주시와 예천군을 지나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길이가 110여㎞에 이르는 하천이다. 하류로 내려오며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하고 금천과 합류하기 직전 예천군 제일의 관광 명소를 빗어 놓으니, 그 유명한 회룡포가 바로 이곳이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에 있는 회룡포는 내성천이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물을 Ʊ로 휘감아 돌아가는 지형이다. 하천과 그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경사의 산악지형 그리고 농경지와 마을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하천을 둘러싸고 있는 비룡산에는 신라시대 고찰인 장안사 등의 문화유적이 잘 보존되어 문화재청에서 명승지 제16호로 지정하고 있다.
6km의 우회로를 지나 용호동마을로 들어서면, 삼강나루에서 모여든 세 물길이 한데 어울려 大河를 이루며 더욱 의젓한 모습으로 유유히 흘러온다. 물이란 무색무취하고 모양도 힘도 없어 보이지만, 외부에서 가하는 힘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신한다. 온유하면서도 강직하여 태산을 허무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를 공급하는 사랑의 손길을 뻗는다.
대풍리 앞들을 보호하는 제방을 따라 영풍교에 도착한다. 문경시 영순면과 예천군 풍양면 사이에 건설된 영풍교는 1987년 완공된 왕복2차로 교량이다. 통과하중이 25.9t인 다리를 문경과 예천지역의 낙동강 정비사업 일부공구에 투입된 덤프트럭이 통과하중 한계치에 육박한 상태에서 매일 수 백회씩 교량을 통과하고 있어 안전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4대강 살리기도 좋지만,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것이 불여튼튼이라 하지 않는가? “자연과 사람이 숨 쉬는 낙동강”을 만들자는 35공구 사업장의 구호를 바라보며 영풍교 길목에 자리 잡은 산수정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팔자 좋다고 했나. 더해서 팔도유람 길에 나섰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이 또 있으리요.
와룡제에 올라서니 오늘의 목적지가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상풍교까지 4km에 현재시각 12시 30분. 서울 가는 길에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안정시킨다. 한강을 두 번 건너야할 만큼 와룡제는 가도 가도 끝없이 멀어만 보이고 정수리에 내려 쪼이는 봄볕이 따갑기만 하다. 안동댐에서 시작한 일박이일의 일정을 무사히 소화했으니, 머지않아 부산의 을숙도까지 달려갈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즐겁다.
3. 삼백의 고장
상풍대교를 찾아가는 길에 퇴강나루를 지난다. 낙동강 천 삼 백리는 태백산 기슭의 황지연못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말하는 것이고, 낙동강 칠 백리란 부산 을숙도에서 거슬러 오른 배들이 이곳 퇴강 나루에서 짐을 풀어 한양으로 운송하는 물류센터로서 기능을 유지하던 곳이라, 강 언덕에는 기념 표지석이 있다.
인심 좋은 운전기사 덕분에 풍양까지 가지 않고 상풍대교에서 내려, 시간과 거리를 절약할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은가. 자전거 우회도로를 따라 효갈리를 지나 곧바로 상주 땅으로 들어선다. 낙동강의 주인이 이곳 상주이고,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이다. 동쪽은 낙동, 서쪽은 낙서, 남쪽은 낙평, 북쪽은 낙원이라고 불렀으니. 낙양의 동쪽을 굽이쳐 흐르는 강이 바로 낙동강인 것이다.
삼백의 고장 상주는 산수가 수려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다.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한반도의 골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이 지나며,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중화지구대가 화령재에서 추풍령까지 이어진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사과, 배, 포도를 비롯하여 삼백으로 명성이 높은 감나무가 이곳 상주의 특산물로 유명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상주는 삼한시대에 사벌국이라는 소국이 있었고,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 중 고령가야의 왕릉이 함창읍에서 발견되었으며, 신라시대에 상주(尙州)라는 이름으로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경주와 상주를 따서 경상도로 부를 만큼 유서 깊은 상주는 1392년(태조1)경주로부터 관찰사영이 상주로 옮겨와 경상도의 정치. 행정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추풍령으로 교통의 중심축이 옮겨간 뒤로 역사의 뒤안길로 돌아선 상주는 1958년 시로 승격되어 인구 십만여 명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친환경적인 도시이다. 이 고장의 특산물인 쌀, 곶감, 누에고치를 삼백이라 하여 상주의 상징이 된 것도, 우리 조상들이 수 천 년 간 생활해온 의. 식. 주의 기본 필수품이기에 더욱 각광을 받는 것이다.
곧게 뻗은 회상제를 따라가는 강가에는 물오른 수양버들이 초록색옷으로 갈아입고, 붉게 물든 진달래가 함박웃음으로 반겨준다. 나무테크로 만든 다리를 건너가면, 상주가 자랑하는 관광명소 경천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완만하게 흘러온 낙동강이 산자락을 파고들며 수직단애를 빗어내니, 하늘로 솟아오른 절벽사이로 노송이 어우러지고 푸른 강심을 따라 깊이를 알 수 없는 담소와 금빛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自天臺를,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으로 敬天臺라 부르고 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운 정기룡장군이 어린 시절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며, 금흔리에 있는 충의사는 장군의 위패를 모신사당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주차장에서 벼랑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산책로가 연결되고, 정상의 정자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시원하게 펼쳐진다. 아름다운 무대는 정면에서 보는 것이 제격이라 회상제를 따라가는 자전거도로가 경천대 제일의 관람석이 되는 셈이다.
明鏡止水와 같이 푸른 강심을 가로지르는 경천교는 회상나루터가 있던 자리다. 상주시 중동면과 사벌면을 이어주던 회상나루에 전통나루터와 주막체험, 강변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낙동강 新나루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100여개 나루 중에서 역사와 문화. 생태자원이 풍부한 안동 개목나루, 상주 회상나루, 구미 비산나루, 고령 개경포나루 등 4개 나루를 중점적으로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경천교는 상주가 자랑하는 자전거행렬이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다. 자전거의 도시 상주는 매연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도시와는 다르게 쾌적한 환경을 자랑하며, 산수가 수려한 명승지를 오래도록 보존하기위해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으로 자전거타기 캠페인을 벌이며 자전거의 천국으로 자부심을 갖는다. 다리를 건너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자전거 박물관이다.
「꿈이 있는 행복도시. 세계속의 으뜸 상주⌟ 슬로건을 앞세운 자전거 박물관이 주위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조형물로 시선을 끈다. 이명박 정부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던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완료하고, 자전거도로 준공기념으로 상주시민들과 함께 시승한 자전거가 전시된 곳에는 이색적인 자전거들이 진열되어있다.
자전거란 사람의 힘으로 페달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구동장치와 조향장치, 제동장치가 있는 두 바퀴 이상의 차를 말한다. 1818년 독일의 칼폰 드라이스 남작이 발명하고, 1818년 프랑스에서처음으로 특허를 얻어 세계최초의 자전거로 인정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896년 예조시랑 고휘성이 장안을 활보하고, 서재필박사가 독립문 신축현장을 타고 다닌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평야지대에 형성된 상주는 경주와 함께 경상도의 뿌리인 만큼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여서, 그 당시 高價였던 자전거가 다른 지역보다 빨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경북선개통을 기념하여 1925년 상주역 광장에서 조선8도 전국자전거대회를 개최하여 상주가 낳은 자전거 영웅 박상헌을 배출하면서, 자전거 붐이 일어나고 전국제일의 자전거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상주의 자전거 보유대수가 인구와 맞먹는 8만5천대나 되어 학생들의 등교시간이면 도로를 가득 메운 자전거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벚꽃이 만발한 호반을 따라가면 경천섬유원지 조성사업이 한창이고, 선비의 고장 상주를 대표하는 도남서원이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영남의 명현 9위를 제향하는 도남서원은 1606년 정경세 등이 영남 5현인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제향하기위해 무심포에 세운 서원으로 그 뒤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이 추가 배향되었다.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92년 지역유림의 힘으로 다시 세웠다.
드디어 상주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낙동강 최상류에 신설된 상주보는 자전거의 도시 상주의 특징을 살려 보 기둥에 자전거를 새겨 넣은 것이 특징이다. 총 1845억 원이 투입된 상주보는 연장 335m, 높이 11m로 저수용량이 2870만 톤에 달한다. 전동식가동보가 설치돼 수위조절과 홍수조절 능력이 원활하고 1500㎾급 소 수력발전소 2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다목적 기능을 갖고 있다.
상주보에서 차 오른 물이 비봉산 자락을 품에 안고 경천섬유원지와 경천대까지 명경지수와 같은 호수가 생겨나며 낙동강 제일의 경승지를 빗어내니, 경천대와 자전거 박물관, 경천섬에 도남서원까지 상주시민들의 멋진 휴식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상주보는 竹岩亭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
산과 호수, 하늘이 어우러진 비경이 인공 구조물의 부실공사로 말썽을 빚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누수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백년대계를 바라는 국토사업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많은 시간과 물자를 낭비하여 보수공사를 한다고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으니 부실공사라는 오명을 씻어버리고 완벽하고 튼튼한 토목공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상주보에서 500여 m를 내려오면 병성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국수봉 남쪽계곡에서 발원하여 청리면에서 신흥동과 경계를 이루며 상주시를 관통하는 길이 30여 km에 이르는 지방1급 하천이다. 낙동강을 바라보며 우뚝 솟은 병풍산에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웅거했다는 병풍산성이 있고, 하천변에는 삼한시대 사벌국의 고분군(경북기념물 125)이 산재해 있다.
상주보에서 시작되는 죽암제는 병풍산 자락으로 강물을 밀어내고, 반원형으로 생겨난 백사장에 강둑을 모아 문전옥답을 만들었으니, 바둑판처럼 정리된 농경지가 오상리 마을의 보물단지가 되었다. 곧이어 강창 나루에 도착한다. 중동면 죽암과 낙동면 신상을 잇는 나루로서 외지에서 중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지역주민의 오랜 숙원인 강창 잠수교가 1992년 가설되며 나루로서의 기능도 사라지고, 애환과 추억이 서린 이곳에 지난날의 명성을 기리고저 기념비를 세웠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하천을 사행천이라 한다. 산의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 몸을 뒤틀며 기어가는 뱀처럼 낙동강의 물줄기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듬어 안고 흘러가는 영남의 젖줄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생활습관도 다르고 행정구역도 갈라지게 마련인데,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상주시 16개면 중에서 유독 중동면만 낙동강을 건너 홀로 떨어져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죽암제를 지나 중동교까지는 지방도를 따라 7km가 넘는 길이 이어진다. 서울 가는 시간이 촉박하여 조바심을 하던 차, 자전거도로 개통을 앞두고 마무리 점검을 하던 중동면장님의 호의로 중동교까지 편안하게 이동을 하게 된다. 중동교는 토진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중동의 신암과 낙동의 물량을 잇는 나루로서 상주, 의성, 예천 지방의 왕래가 빈번하고, 강심이 깊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토진 나루를 이용하다가 1982년 중동교가 개통되며 나루터로서의 명운도 끝나고 말았다.
중동교를 건너 남쪽으로 물량제를 따르면, 강 건너 수암종택(풍산유씨 우천파)이 있는 산기슭이 수직절벽을 이룬다. 이곳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위천은 경상북도 군위군, 의성군, 청송군이 경계를 이루는 매봉에서 발원하여 군위군 중심부를 섭렵하고 소보면의 협곡을 지나 구천면과 안계면의 경계를 이루며, 단북면 남쪽에 넓은 평야를 형성하는 유로연장이 110.7㎞에 달하는 큰 하천이다.
참고로 고로면 유역은 매년 태풍이 오면 많은 피해를 입는 상습홍수 피해지역이어서 2003년 착공한 화북댐(높이 45m, 길이 330m, 저수량 4900만t)이 준공을 앞두고 있다. 댐이 준공되면 군위, 의성, 칠곡 등지에 하루 10만 5000톤의 생활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물론, 연간 2870㎿h의 전력을 생산하여 댐 주변의 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가 된다.
물량제가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옛길과 산길은 수암종택에서 시작하는 낙동강 생태문화 탐방로의 일부분으로 3km를 진행하면 낙단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까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낙단보는 낙동강 3대 정자인 관수루(觀水樓)의 처마를 모방하여 의성, 상주, 구미 세지역의 자연과 역사, 문화가 융합되고 사람이 어우러지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형상화하여 설계되었다고 한다.
총 연장 286m, 높이 11.5m, 저수용량 3,430만톤의 친환경 다기능 보로, 1,500㎾급 소 수력발전소2기가 설치되어 연간 1,472만kWh의 전기를 생산한다. 시공과정의 부실공사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낙단보는 문화관 부지 조성공사과정에서 고려시대 마애불이 발견돼 전국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재 훼손 문제로 조계종과 문화재청이 1년 동안 갈등을 벌였던 현장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낙단교에 도착하면, 노송이 어우러진 강 언덕에 관수루 2층 누각이 반겨준다. 관수루는 낙동강 연안에 있는 안동의 영호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낙동강 삼대누각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중엽 강 건너에 건립되어 여러 차례 중건하였지만, 강물에 떠내려가 유실된 것을 199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의성군 안계에서 출발하는 동서울 행 직행버스(16시20분)에 오르며, 삼백의 고장 상주의 경내를 지나오는 답사 길도 무사히 마친다.
4. 구미 보
새벽안개가 고속도로위로 내려앉으며 차량들이 거북이운행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지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안개까지 한몫을 거들고 나서니 오늘의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노련한 기사덕분에 정시에 도착해 다행이다 싶었는데, 28km나 떨어진 낙동면으로 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이 또한 고민거리다. 서울에서 상주 오는 요금보다도 비싼 교통비를 지불하며 낙단대교를 건넌다.
낙단대교를 뒤로하고 月林堤防(3,645m)으로 올라서면 구미시 지경으로 들어선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옥성면이요, 동쪽은 도계면이라. 구미시에서 북쪽으로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이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것이 마을이요 마을이 모여 도시를 형성하니,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
신라시대부터 일선군으로 부르다가 조선 태종13년 처음으로 선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1978년 전자산업단지가 개발되며 구미시로 승격되었다. 구미시는 대한민국 최대의 내륙 산업단지(740만평)를 보유하고 있는 공업도시로 서울에서 277km, 부산에서 167km거리에 인구42만 명이 살고 있다.
의성지구 가산제 고수부지 공원을 지나면, 낙동강 하구둑 282km, 안동댐 103km 이정표가 반겨준다. 도로 바닥에는 구미보 인증센터 19km가 선명하여 오늘의 일정이 만만치 않음을 암시한다. 잠시 후 용산리와 가산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반듯반듯하게 구획정리가 된 전답이 열병하는 군인들처럼 질서정연하고, 우리 몸의 혈관처럼 수로가 연결되어 필요할 때 마다 낙동강 물을 이용할 수 있으니 문전옥답이 따로 없다.
강 건너 농소리에는 천연기념물225호로 지정된 농소야 은행나무가 있다.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높이가 30m에 밑 둥에 나무줄기처럼 자란 싹이 많아 둘레를 측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골골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대접받고 있는 당산나무들이 있어 마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가 있고, 무사안녕을 비는 마을의 축제로 승화되는 구심점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이 많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용문사 은행나무로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67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다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벼슬을 하사받은 나무로는 천연기념물103호로 지정된 속리산의 정이품소나무가 있다.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높이 14.5m에 가슴높이 둘레가 4.77m에 이른다. 이밖에 재산을 가지고 있는 나무로는 예천지방의 석송령(石松靈)을 들 수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洪水)가 났을 때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주민들이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1927년 8월경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란 사람이 영험(靈驗)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 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 토지 5,259㎡를 상속(相續)해 주어, 수목(樹木)으로서 토지를 가진 부자(富者)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재산을 가지고 세금(稅金)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마을사업을 잘한다고 하여 대통령(大統領)이 준 500만원으로 장학회를 만들어 고향의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는 미담이 전해진다.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시인묵객들의 풍류가 어우러진 도개면 월골에 있는 월암정은 사육신의 하위지(河緯地), 생육신의 이맹전(李孟專), 명종 때의 문신 김주(金澍)의 위패를 모셨던 월암서원이다. 1694년(숙종 20)에 사액서원이 되었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월암정만 남아 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을 비석의 뒷면에 새긴 月巖書院 標識石을 뒤로하고 도개제로 향한다. 산수가 수려한 궁기리. 문암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잔잔한 물결 속에 육지속의 호수를 빗어낸다. 아름다운 강변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초곡리를 왕래하는 신풍진 나루가 생겨나고, 지금은 도개면 소재지로 면면을 이어오고 있다.
선산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도개면 신림리와 선산읍 생곡리를 이어주는 신용진 나루가 있던자리에 건설된 일선교는 박정희 대통령이 다리 준공식에 직접 참석할 정도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며 선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교량이다.
인간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개만도 못하다고 하지 않던가? 속된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실화가 전해오는 칠장마을에 의구총(義狗冢)이라는 무덤이 있다. 일선교를 지나며 마주치는 칠장마을은 노송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다. 노성원이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들불이 나서 주인이 타죽을 위험에 처하자 개가 꼬리에 물을 적셔와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기진하여 죽었다.
그 뒤 깨어난 노성원이 감동하여 장사를 지내주고, 후세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칭송하여 그곳을 구분방(狗墳坊)이라 부르고, 의구총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하였다. 4대강 살리기의 숨은 공로자인 준설선이 임무를 완수하고 느긋하게 정박하고 있는 낙산제를 따라가면 구미보가 시야에 들어온다. 조명산 자락이 물가로 내려앉는 월곡리 협곡에 건설된 구미보는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1,880억 원이 투입된 구미보는 길이 374m에 수문2개를 갖추어 홍수조절이 가능하고 천5백 kw급 소 수력발전소 2기를 갖춘 친환경 다목적 보로 건설됐다. 장수와 복의 상징인 거북이, 수호의 상징인 용을 형상화한 중앙 권양대는 360도 모든 방향으로 아름다운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설치하여, 구미보를 중심으로 조성된 낙동강 생태관광지구와 수변공원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구미보에서 조금 내려가면 낙동강과 합류하는 감천을 만난다. 김천시 대덕면 태리에 있는 수도산(修道山:1,318m)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김천시와 선산읍을 관통하고 낙동강서쪽으로 흘러드는 길이 74km의 큰 하천이다. 김천시 관내에서 여러 지천이 모여드는 구성면과 조마면 경계를 지나오며 굴곡심한 사행천을 이루다가 중하류 유역에서 개령들을 비롯한 비교적 넓은 평야를 이루고, 선산읍과 고아읍을 지나며 포평들, 중들을 비롯한 관심리, 예강리의 너른 들판이 선산 분지를 형성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감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서원마을에는 금오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말 三隱(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중의 한사람인 冶隱 길재의 충절을 기리고저 1570년(선조 3)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곧바로 복원되어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그 뒤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의 위폐가 모셔진 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남아,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25번 국도가 지나는 송암교 아래서 자전거 도로는 주평마을까지 돌아 나오는 700여 m의 여정이 기다린다. 50m의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제방을 돌아오는 길은 지친 몸에 맥이 풀리고 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신라 최초의 불교 도래지인 도리사 진입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15년 전 베틀산 등산 후에 찾아간 곳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도리사는 고구려승려인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며 진기승지(眞奇勝地)를 찾아다니던 중, 냉산 기슭에 이르러 눈(雪) 속에 오색의 도화(桃花)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지은 다음 도리사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불교 초전성지(初轉聖地)인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는 1977년 4월18일 서울 승가사 주지 상륜스님에 의해 오색영롱한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적멸보궁으로 확인되었다.
국보 제208호로 지정된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김천의 직지사는 신라시대인 418년(눌지마립간 2)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하며,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강 건너 관심리와 예강리의 문전옥답을 바라보며, 금호제를 따라가면 숭선대교에 이른다. 해평면과 고아읍을 연결하는 숭선대교는 옛날 강정나루가 있던 곳이다. 이곳이 해평 습지의 중심지를 이루어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철새들의 군무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계절 탓도 있겠지만 끝을 모르는 넓은 호수에는 정적감만 감돈다.
습지의 왕 버들도, 석양녘에 머리 풀어 휘날리던 갈대숲도 자취를 감추고,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철새들이 떠난 자리엔 모래톱이 완전히 사라지고 깊고 깊은 강물이 출렁일 뿐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당위성이 시험을 받고 있는 현장에서, 자연정화에 꼭 필요한 생태계의 복원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구미보와 칠곡보사이에 있는 해평습지는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 흑두루미(제203호)와 큰고니(제201호) 등이 월동하는 곳이다. 맑은 강물에 깨끗한 모래톱, 안락한 습지와 강 양쪽으로 약 1,500ha에 달하는 농경지가 있어 먹이공급원이 풍부하여 철새들이 천국을 이루던 곳이다.
생물이 살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자연 다큐멘타리에서 수없이 보아오며 공감하고 있다. 강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한다면, 해평습지도 그 모습을 되찾을 것이고, 철새들도 다시 날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강은 흘러야 하고, 낙동강은 복원되어야 한다.
5. 금오산의 정기
해평 습지를 뒤로하고 제방을 따라가면 문량리와 괴평리의 너른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우루과이 라운드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농민들의 주름살이 깊어가지만, 낙동강을 중심으로 조성된 수백만평의 농경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지구촌이 한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이고 보면, 내 것만 가지고는 살수 없는 세상이라. 값싼 물건들로 인해 경쟁력이 떨어지며 생업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무한의 경쟁시대에서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가격 경쟁력에서 뒤진다고 해도 내나라 내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야말로 우리 몸에 좋은 身土不二가 아닌가. 앞으로 종자전쟁의 시대가 온다고 한다. 벌써 일부 품종은 외국에서 로얄티를 지불하여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우리의 우수한 품종을 개발하고 육성하여 발전시킨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장벽도 거뜬하게 넘어서고 새로운 황금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비산나루가 있던 산호대교를 건넌다. 비산나루는 신라시대부터 낙동강을 이용하여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던 중심지여서, 부산 등지에서 올라온 수산물과 서해에서 소금을 싣고 온, 배들이 정박하고, 의성, 김천 등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대구나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또한 낙시 터로도 유명하여 민물고기 매운탕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산호대교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정상부근을 유심히 살펴보면 교교히 흐르는 달빛아래 팔등신 미인이 요염한 자태로 누워있는 형상이다. 뉘라서 경국지색의 미모에 반하지 않겠는가? 구미시의 상징이기도 한 금오산은 수도지맥의 정상인 수도산(1323m)에서 분기하여 88km를 지나오는 동안 수많은 고산준령들을 거치며 마지막으로 금오산(976m)을 빗어 놓는다.
신라의 도선 국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황금까마귀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금오산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소림사가 있는 숭산을 닮아 개성 송악산을 북 숭산, 구미 금오산을 남 숭산이라 부르며, 두 곳 모두 왕기를 품고 있는 신령스런 산이다. 금오산에 대해 예언하기를 왕기가 서린 거북이 알 세 개를 품고 있어 1000년 후에 조선과 세계를 다스릴 인재가 출현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미시 상모동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떠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하면 된다.„ 는 자신감과 “새벽종이 울렸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우리민족이 긴 冬眠속에서 깨어나 스스로 노력하는 부지런함을 일깨워주고, “할 수 있다„는 자긍심으로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게 되었으니, 도선 국사의 예언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197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금오산은 37.65㎢의 면적에 정상의 높이가 976m이며, 기암괴석과 수림, 계곡 등이 절경을 이루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다. 고려 말 충신 야은 길재(吉再)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채미정(採薇亭)과 신라시대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도하던 도선굴을 비롯하여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 금오산성 등의 유적과 명금폭포, 금오랜드, 경상북도 자연환경연수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구미전자공단은 경상북도 구미시와 칠곡군사이 10.4㎢의 넒은 대지에 전자, 반도체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위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하여 1968년 3월 1단지착공을 시작으로 4단지 조성공사를 완공하므로 한국수출의 역군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내륙지방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지대가 비교적 평탄하고, 단지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수원이 풍부하여 공업용수(하루 33만 톤)를 공급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2005년에는 단일 산업단지로는 최초로 300억불 수출을 달성하였으니 정말로 자랑스럽다.
초기에 조성한 제1단지에는 섬유와 가정용 전자제품이 생산되었지만, 제2단지에 입주한 삼성전자에서 휴대전화를 생산하면서 LG필립스LCD, 하이닉스 등의 기업을 중심으로 반도체, 디지털 산업을 육성하였다. 제3단지에는 첨단전자산업이 들어서고, 2006년에 완공된 제4단지에는 디지털 산업 및 외국인기업 전용단지로 조성하여 I.T강국으로서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남구미대교를 건너며 칠곡 땅으로 들어선다. 칠곡(漆谷)이란 이름은 팔거현의 名山인 가산((架山)이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렸는데, 산정(山頂)에는 나직한 7개의 봉(峰)으로 둘러싸인 평정(平頂)을 이루고, 골짜기 또한 7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서 명칭을 따서 「七谷」이라고 부르다가, 일곱 칠(七)자를 칠(柒)자로 바뀌어「柒谷」으로 사용하고, 칠(柒)과 같은 칠(漆)로 고쳐「漆谷」이 되었다고 백과사전에서 언급하고 있다.
칠곡의 진산인 가산에는 사적 제216호로 지정된 가산산성(架山山城)이 있으니, 호국의 고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외침에 대비하여 인조18년(1640년)부터 영조17년(1714년)까지 약 7.6km에 이르는 산성을 축조하게 된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삼중성으로 축조하여 출입이 불편함에도 험준한 산성 안에 칠곡 도호부 관아를 설치하고 군위, 의흥, 신령, 하양 등 4현을 관장하여 조선시대 국방 최우선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감행하여, 아무런 대비도 없이 불의에 허를 찔린 한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7월말에는 낙동강까지 밀리는 수모를 당하면서 風前燈火와 같이 絶體絶命의 순간을 맞는다. 意氣揚揚한 북한군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고, 이곳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방어선을 사수하며 격전을 벌인다.
수많은 군인들의 희생을 딛고 일어선 왜관읍은, 칠곡군의 중심지로 3만 4천 여 명이 꿈을 안고 살아가는 호국의 고장이다.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어도, 우리조상들의 喜怒哀樂과 興亡盛衰를 보듬어 어루만지고, 신나게 달려가는 KTX(경부고속철도)가 낙동강을 가로지르며 우리의 번영을 노래할 때 칠곡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칠곡보는 신라 때 도참사상에 따라 땅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가산바위에 묻혔다는 철우(鐵牛) 이야기를 테마로 설계됐다. 낙동강 구간의 함안 창녕보, 강정 고령보에 이어 3번째 규모로 길이 400m, 높이 14.8m, 저수용량 9.360만 t의 친환경 다기능 보와 1500㎾급 小 수력발전소 2기가 설치돼 연간 1.528만㎾h의 전기를 생산하게 된다.
주변으로 수상레포츠 장을 비롯한 각종 체육시설, 오토캠핑장, 생태공원 등 수변공간과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칠곡 호국평화공원을 연계하는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역사의 한이 서린 낙동강철교를 지나면 곧바로 왜관 시외버스 터미널이다. 이곳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감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구미시 상모동으로 향한다.
1917년 태어나서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집 건물은 지금도 당시의 앉은뱅이책상이 전시되어 있는 초가삼간 그대로이다. 구미지역 사회단체로 구성된 박정희대통령 동상건립추진위원회에서 국민성금으로 모은 6억 원과 시 도비 6억 원을 합하여 양복차림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쥔 모습으로 5m 높이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정치에 대한 평가는 時機尙早라 하겠으나, 가난을 대물림하며 전쟁의 폐허에서 신음하던 우리국민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여 “잘살아보자”는 국민운동을 실천하므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으니, 국민을 위한 충정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6. 호국경
아카시아가 만발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원호의 달 6월을 맞는다. 아내와 함께 여수 엑스포 관광을 다녀오느라 국토대행진의 발걸음을 잠시 늦추었더니, 푸른 숲에 둘러싸인 산과 강이 한층 더 활기가 넘친다. 어린 시절 겪었던 6.25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있다. 6.25전사에 기리 남을 낙동강전투가 벌어진 왜관읍을 원호의 달에 찾아 온 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意味深長하다.
구미와 대구의 중간지점에 있는 왜관은 읍 소재지이면서도 서울에서 직접 오는 버스가 없어 구미에서 시내버스를 갈아타는 번거로움이 있다. 동서울에서 첫차를 타고 왜관에 도착하니 10시가 훌쩍 넘는다. 이제부터 당일 행사로는 시간과 교통비가 만만치 않아 2박3일의 일정으로 계획을 세우고, 왜관 터미널을 빠져나오면 가장먼저 반겨주는 곳이 자고산 자락에 조성된 호국동산이다.
애국동산에는 6.25전쟁 희생자와 항일 애국지사 추모비가 모셔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장진홍 의사를 비롯하여 이창기, 도병철, 정행국, 이수일 의사 등 독립유공자기념비와 경찰위령비가 건립돼 있다. 애국지사 이수일 선생은 영남 유림단을 결성하여 삼일운동을 지원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7년 유림단 사건에 관련돼 1년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자전거길이 조성된 강가로 나오면 가장먼저 반겨주는 곳이 호국의 다리(왜관철교)다. 낙동강 700리를 피로 물들이던 55일간의 혈전은 6.25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 기록된다.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8월 3일 왜관 주민들에게 소개령이 내려졌고, 8월 4일 새벽까지 왜관 인도교를 포함하여 구(舊)철교를 폭파함으로써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피아간에 뺏고 빼앗기는 혈전이 벌어지는 동안, 8월 16일 4만 여명의 인민군이 왜관지역 낙동강 서북방 일대에 집결중이라는 첩보에 따라 B29폭격기 98대를 출격시켜 융단 폭격을 가하므로, 인민군 3만 여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려 전세가 역전되었다고 한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총 반격이 있을 때, 인도교 폭파 구간을 침목 등으로 긴급복구한 후 사용하다가 다리가 노후하여 1979년 11월부터 통행을 전면 중단하고 철거하게 되었다. 호국의 상징인 이 다리를 보존하자는 군민들의 의사를 수렴하여 1993년 2월 새로 복구하여 호국의 다리로 명명함으로써 호국정신을 되새기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피로 물들었던 낙동강은 오늘도 말없이 흘러간다. 당시의 격전지였던 낙동강 변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만발하고, 조국번영의 상징으로 조성된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서울로, 부산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니 이 또한 隔世之感이라 할 수 있다.
왜관읍에서 대구광역시와 경계를 이루는 하빈 고개까지 강변 따라 수변식물인 갈대와 왕 버들이 무성한 습지를 이루어 해평 습지와 함께 철새들이 찾아오는 낙동강 철새도래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여독도 풀 겸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휴식을 하고 있는 동안 전화벨소리가 들려온다. 대구에 사는 처제가 저녁식사를 하자는 전갈이다. 의정부에서 만나 형부와 처제의 호칭으로 정을 나누던 다정한 이웃이었다. 반가운 소식에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참외로 명성이 높은 성주군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다보인다. 성주하면 참외, 참외하면 성주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명사가 되어버린 성주참외는 공해 없는 가야산의 깨끗한 물과 충분한 일조량에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는 노하우가 있어 전국하우스재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비타민 C와 칼슘이 함유되어 피부미용에 좋고, 사근사근한 육질이 혀끝을 녹이는 감칠맛과 신선한 향이 천하일품이라고 한다.
성주대교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품위 있는 고택 한 채가 시야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니 이곳이 바로 전의이씨가 터를 잡은 하목정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1638) 선생이 1604년(선조 37)에 세운 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머무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장자인 이지영에게 하목정이라는 정호를 써 주었으며, 또한 일반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부연을 서까래 위에 달았다고 한다.
사랑채로 이용하는 이 정자는 평면이 丁자형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다. 처마 곡선도 부채 모양의 팔작지붕이고, 내부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명인들의 시액이 걸려 있다. 아름다운 노을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 노니는 따오기를 형상화 했다는 하목정.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성주대교를 지나 남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죽정나루를 바라보며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강물 따라 직선으로 5km만 내려가면 강정보에 도착하지만, 자전거 길이 문산리 벼랑에 가로막혀 하빈 천을 따라 동곡교로 올라온 다음 30번 국도를 따라 문양역까지 진행하고, 다사읍을 통과하여 금호강을 끼고 강정보로 돌아오는 13km에서 모두들 지치고 만다.
강창교를 지나 강정마을에 이르면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두 물머리가 나타난다. 금호강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가사리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영천시와 경산시 일대를 지나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과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경계에서 낙동강 본류에 유입되는 길이 118km에 이르는 강이다.
금호라는 명칭은 금호읍 강변 구릉지의 갈대 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마치 비파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강 유역에는 넓은 금호평야가 발달하여 대구, 영천, 경산을 중심으로 사과산지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의 청못[菁堤]은 삼한시대에 축조되어 현재까지 관개에 이용되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저수지라 한다.
드디어 강정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정보를 제대로 감상하자면 강정마을 뒷산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야한다. “강정보 녹색길”로 명명된 오솔길을 따라가면 2층 누각 팔각정이 반겨준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육지속의 바다처럼 잔잔하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고령 땅의 너른 평야와 산과 강이 어우러진 강정나루에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장관을 이룬다. 강정마을은 신라시대 정자인 浮江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왕이 이곳에서 유람을 하고, 이조시대에는 많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강론을 펼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후기가야시대의 중심이라는 지역특성과 대구의 첨단과학과 패션을 형상화하여 건설한 강정보는 원반부를 회전시켜 수문을 개폐하는 회전식 수문으로, 최적의 유량 조절이 가능하며 하층의 퇴적물을 배출하는 기능을 겸비하고 있다. 중간지점에는 가야토기를 형상화한 탄주대가 설치돼 있고, 톱니바퀴 형상을 한 낙락섬과 12계단, 12색 조명으로 구성된 물 풍금 등이 설치돼 있다.
안동댐으로부터 166㎞, 낙동강 하구 둑으로부터 218㎞ 지점에 있는 강정보는 4대강 16보중에서 길이가 가장 길어 953m(가동보120m, 고정보833.5m)에 이르고, 저류용량이 1억800만 톤으로 영천댐보다도 많다고 한다. 또한 3,000kw의 발전시설을 갖추고 있어 3000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큰 규모와 색다른 시설로 눈길을 끌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은 것은 해질 무렵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탄생한 것이다. 강정보 중간지점에 설치한 탄주대에서 상류쪽이 정서방향이라 죽정나루까지 5km에 이르는 물길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지고,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 수면위로 붉은 노을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공도교를 건너면 고령 땅이다. “희망찬 고령 행복한 군민”을 목표로 살아가는 고령군은 1읍 7개면에 3만5천 여 명이 살고 있는 경상북도 남쪽에 있어 경상남도와 도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 낙동강이 관내 4개 면을 우회하면서 달성군과 경계하여 흐르고, 북쪽은 의봉산과 가야산 줄기가 연결되어 성주군과 접하고 있다.
고령군 홍보관에 의하면 서기 42년부터 520년간 옛 대가야국의 도읍지로 철의 왕국을 건설하고, 가야금을 창제하여 신령스러운 역사유적을 간직한 문화의 보고라고 한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에는 국보 제138호인 가야 금관을 비롯해서 금동관 금은동의 장신구류와 갑옷, 대도 같은 무기류, 발걸이, 마구리 등 철의 왕국이었던 대가야의 진수를 볼 수 있다. 가실왕의 명을 받아 만든 열 두 줄의 가야금은 박연, 왕산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인 우륵에 의해 창제되었다고 한다.
선사시대 유적에서부터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불교문화, 그리고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산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고령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가야산의 정기와 낙동강이 어우러진 자연환경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산 문화공원을 지나 사문진교에서 고령 땅과 작별하고 대교를 건너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이다. 낙동강 종주 6구간을 7시간 만에 완주하고 화원읍에서 첫날밤을 맞는다. 화원읍 시장 입구에서 기다리는 처제를 만나 시원한 저녁공기를 마시며 만찬을 즐기고, 앞산공원에서 데이트까지 하였으니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7 . 달성 습지
이른 새벽 숙소를 나선다. 백년 만에 찾아온 가뭄과 때 이른 더위로 한 낮이면 30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라. 기온이 서늘한 오전에 답사를 하고 오후에는 휴식을 하자는 생각으로 일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화원시장이 있는 중심가에서 고령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구마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낙동강이 보이는 사문진교 주변으로 화원유원지가 펼쳐진다.
신라 경덕왕이 재임시절 아름다운 풍광에 반하여 9번이나 찾아왔다는 설화가 전해질만큼 낙동강 푸른 물과 강변에 펼쳐진 백사장이 수려하여 대구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해질녘이면 西山日落으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낙동강 물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이야말로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없는 진풍경이다.
사문진이란 모래밭(백사장)을 걸어가서 배를 탄다는 의미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곳 사문진 나루는 낙동강을 거슬러온 배들이 정박하며 물물교환을 하던 곳이며, 강 건너 고령에서 생산한 특산물을 대구로 운송하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하지만 사문진교가 건설되며 나루터의 명성도 사라지고 대구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발전한 것이다.
간경리 제방을 따라 진행되는 자전거 길은 기세곡천을 거슬러 간경2교를 돌아오는 U턴 구간이다. 구마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가 분기하는 화원나들목을 바라보며 신당리 제방으로 들어서면 낙동강을 중심으로 광활한 평야가 전개된다. 극심한 가뭄으로 농민들의 가슴이 타 들어가도 이곳만큼은 물 걱정 없이 격양가(擊壤歌)가 울려 퍼지니, 아마도 4대강 살리기의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싶다.
논에서 논농사를 짓지 않고 연을 재배함은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라 사연을 물어보니,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쌀농사로는 경쟁력이 없어 이지역의 특성에 맞는 연 재배를 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높은 강바닥을 준설하여 깊은 강심을 만들고, 든든한 달성보를 막아 사시사철 넘쳐흐르는 옥포평야에서 하늘을 처다 보지 않고 과학영농으로 내일의 부를 축적하는 농민들이 부럽다.
안동댐 192km, 부산 하구언 193km 이정표에서 보듯이, 옥포생태공원이 낙동강 자전거 길에서 중간지점이다. 안동댐에서 출발 할 때만해도 385km의 낙동강이 멀어만 보였는데,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옛 말이 실감난다. 인천 아라 뱃길에서 527km를 걸어왔으니, 어느새 절반을 지나온 셈이다. 부산하구언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진정하며, 뚜벅뚜벅 황소걸음을 이어간다.
강정보에서 달성보까지 18km 구간을 달성습지라 부른다. 옥포생태공원은 강둑만 높였을 뿐, 인위적인 작업을 가미하지 않아 자연그대로 습지를 보존하고 있다. 왕 버들 늘어진 수초 사이로 무성한 갈대가 물고기들의 천국을 만들고, 친화적인 생태공원에는 수변동식물들이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강변에 둥지를 튼 노고지리의 날개 짓이 한창이고, 드넓은 고수부지에는 백일홍, 현호색, 양귀비를 비롯한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진 옥포제 5km와 논공제를 지나는 지루함도 위천리에 도착하며 낙동강교(88고속도로), 고령교, 성산대교 아래 펼쳐지는 담소원에서 자연 속으로 동화된다. 봉화산 기슭을 돌아가는 강물과 질주하는 차량들, 너른 강변에 흐드러진 개 망초의 꽃물결이 강바람을 타고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남서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성보로 가는 중간에 오실나루 터를 지난다. 고령지역은 토양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관내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대구시장에 팔기 위해서는 강을 건널 수밖에 없다. 낙동강 연안에 있는 고령군 성산면 오곡리와 달성군 논공읍 사이를 나룻배로 왕래하면서 사람과 물건을 운반하던 곳이 오실나루터다.
달성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보아도 웅장한 달성보는 논공읍 하리와 경북 고령군 개진면 인안리를 잇는 다목적보로 낙동강을 항해하는 뱃머리를 형상화 하였다. 가동보 162m와 고정보 418m로 총 연장 580m에 높이 9.5m규모로 유량조절이 가능한 회전식 수문을 갖추고 있다.
달성노을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곳이 천년별빛 광장이다. 달성보를 지키는 12성좌 별자리를 형상화한 광장에는 야간조명과 분수체험이 가능하다. 나래센터로 명명된 전망대에 올라서면 달성보를 비롯한 주위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다리 중간에 있는 전망데크는 낙동강을 운행하는 달성보의 뱃머리를 형상화하여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지역경제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달성보 공도교를 건너 고령 땅으로 들어선다. 활등처럼 휘어진 제방 길 5km를 지나면 박석진교 아래 개진강변공원이 시작된다. 낙동강 둔치에 조성된 연잎마당에서 싱그러운 연잎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조류관찰 탐방로가 강변을 따라 갈대숲속으로 이어진다. 박석진나루 또한 사문진나루와 오실나루처럼 고령의 특산물을 대구에 납품하면서 달성군 현풍을 오가던 뱃길이다.
자전거 길은 박석진교아래 둔치로 연결되지만, 오늘의 숙소를 현풍으로 정한만큼, 박석진교를 건너 현풍 땅으로 들어선다. 일찍 시작한 만큼 오후의 가마솥열기를 피할 수 있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강 언덕에 자리 잡은 정자에 올라서니, 강 건너 고령 땅의 개진제방이 부챗살처럼 휘돌아 서쪽으로 흘러간다.
8 . 충효의 고장 현풍
종주 삼일 째 되는 날이다. 서울 올라가는 차편을 물색하던 중, 의령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합천군 청덕면 적교에서 정차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하루에 3회 운행하는 버스가 11시에 있다고 하니 새벽4시에 출발을 해야 한다. 낮이 길다는 하지가 임박했어도 가로등 불빛만이 시가지를 밝혀줄 뿐, 오가는 인적도 없이 깊은 잠속에 빠져있는 시각이다.
싱그러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는 낙동대교 굴다리를 빠져 나오면 강물이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낙동강 가에 자리 잡은 달성군은 선사시대부터 달구벌이라 부르던 유서 깊은 곳으로, 1995년까지 경상북도에 속해 있었으나, 이후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어 3읍6면을 관할하고 있다.
달성군에 속한 현풍면은 임산배수의 고장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며 용리산(483m)기슭에 자리 잡은 어촌 마을이다. 인구 일만 이천오백여 명이 살고 있는 현풍은 충효의 고장이다. 현풍을 본으로 하는 현풍 곽씨(玄風 郭氏)의 시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건너온 곽경(郭鏡)이다. 고려 인종(1122~1146) 때 귀화하여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로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진 인물이다.
현풍의 대명사가 된 현풍 곽씨는 충신 열녀를 많이 배출한 명망 있는 가문이다. 후손 중에는 임진왜란 때 홍의 장군으로 명성을 날린 의병장 곽재우장군이 있다. 학문은 물론 무예도 뛰어나 34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그의 글이 임금의 뜻에 거슬렸다 하여 급제가 취소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은거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킨다.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 방어사가 되어 왜병을 물리쳤으며, 그 해 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울진으로 가서 바깥출입을 삼가며 3년 상을 모셨다고 하니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한 망우당 곽재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현풍면 지리에 있는 현풍 곽씨 십이 정려 각은 조선시대 충신, 열녀, 효자에게 내리는 임금의 하사품으로 현풍곽씨 가문의 명예이자 이고장의 자랑이다. 동녘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수초에서 잠든 물고기를 깨우는 이른 새벽,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를 지난다.
도동서원은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1607년 '도동'(道東)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소학〉을 배우고, 조광조(趙光祖)에게〈소학〉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으나,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1517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낙동강변의 맑고 푸른 물줄기가 흐르는 곳에 철을 따라 새들이 찾아오고, 그 옛날 팔만대장경을 운반해 해인사까지 머리에 이고 옮겼다는 개포나루에서 낙동강물줄기는 남쪽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요즈음 MBC에서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는 ⌜무신⌟에서 몽고의 침입으로 전국토가 유린되고, 대구 구인사에 있던 대장경이 불타는 수난을 당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한 최우는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고자 팔만대장경의 제작에 착수한다. 그 시절 나라형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리산에서 벌목한 산 벚꽃 나무가 만 그루에 이르고, 소금에 절여 말리는데 3년, 글씨를 파고 옻칠하는데 십 수 년이 걸렸다고 한다. 강화도 봉은사와 남해 관음포에서 제작된 팔만대장경을 낙동강의 수로를 통해 이곳 개포나루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과정 또한 만만치가 않으니, 불심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현풍면에서 동쪽으로 높이 1,084m에 이르는 웅장한 비슬산이 있다. 대구광역시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비슬산은 북쪽의 팔공산과 함께 달구벌을 보듬어 안고 있는 명산이다. 가장 높은 대견봉(大見峰)을 중심으로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빗어놓은 암석들이 장관을 이룬다. 1,000m 이상의 산정상은 평탄하고, 남쪽과 북쪽은 급경사를, 북동쪽은 완만하다.
봄철에 피는 진달래와 철쭉능선을 따라 자생하는 억새풀에 울창한 수림과 어우러진 계곡이 아름다워 1986년 비슬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북쪽 기슭에는 신라시대 선덕여왕1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는 용연사(龍淵寺)를 비롯하여 유가사(瑜伽寺), 소재사(消災寺), 용문사(龍門寺), 용천사(湧泉寺) 등 많은 사찰이 있다.
구지면에서 강줄기는 또다시 서남쪽으로 몸을 튼다. S자를 포개 놓은 것처럼,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감입곡류(嵌入曲流)로 흘러가니, 지나는 고을마다 생명수가 넘쳐나고, 강가의 습지와 전원풍경이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낸다.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노정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조선 성종 때 대유학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무오사화를 당하여 시골로 내려와 지내면서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제일강정’이라고도 하며, ‘이노정(二老亭)’이라는 이름은 김굉필, 정여창을 두 늙은이라 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고령 땅으로 달려온 자전거 도로가 우곡교를 건너 대암리로 넘어오고, 박석진교에서 현풍면 쪽으로 달려온 자전거 도로와 우곡교 아래서 합류한다. 달성군보다는 고령군 쪽의 도로가 1km정도 더 길고, 우회로를 따라가는 길이 험하여 양자택일하여도 큰 무리는 없다.
창녕군 이방면 지경으로 들어온 도로가 굽은 다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송곡리 강변의 벼랑길을 따라 가면 회천(回天)과 만난다. 고령군 운수면(雲水面)에서 시작하는 회천은 고령읍 본관리(本館里)에서 소가천(小伽川)이 흘러들고, 고령읍 동남 하부지역에서 안림천(安林川)과 만나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德谷面)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24.5㎞의 하천이다.
율지교를 지나면 강물은 또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합천 창녕보가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낸다. 곧게 뻗은 제방 옆으로 드넓은 호수가 펼쳐지고 웅장한 합천 창녕보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합천 창녕보는 창녕군 이방면과 합천군 청덕면 사이에 막은 길이가 328m이며, 가동보는 승강식 수문과 회전식수문으로 구성되고, 창녕과 합천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한다.
국내최대의 원시적 습지인 창녕 우포늪을 연결하는 생태복원의 일환으로 멸종위기에 있는 따오기를 낙동강 살리기의 희망 심 볼로 도입하여, 푸른 날개를 달아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창녕보. 외관은 그럴듯하게 모양을 갖추었으나 누수로 인한 부실공사로 준공식까지 미루어가며 보강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백년대계를 내다보며 진행돼야할 공사를 임기 내에 마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졸속공사가 이루어진 결과이다.
창녕보 공도교를 건너면 합천 땅이다.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남덕유산(1,507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합천호(陜川湖)를 빚어놓고 119㎞를 흘러온 황강이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황강에서 흘러온 퇴적물이 아름다운 습지를 만들고, 낙동강 물을 자연 정화시키는 자정능력을 갖고 있어 철새들이 찾아오는 지상낙원이 형성된다.
“푸른 숲 맑은 물 아름다운 고장”의 상징인 합천댐은 1988년 12월 31일 준공된 높이 96m 길이 472m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7억 9천만 톤의 물을 담수할 수 있는 서부경남의 산간오지에 그림 같은 호수가 생겨나고, 연간 234백만kw의 전력을 생산한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인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 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76년(문무왕16)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해인사, 화엄사, 범어사 등 화엄10찰(華嚴十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의상의 손제자였다는 사실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엄의 대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적포교에 도착하며 3일 동안 자전거도로 85km에 진입로 까지 95km를 답사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부산 하구 둑135km, 안동댐250km 이정표를 뒤로하고 의령에서 출발하는 동서울 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9. 자연의 습지 우포늪
지난번 적교를 다녀갈 때는 하지를 불과 일주일 남겨둔 때라, 극심한 가뭄과 때 이른 불볕더위로 애를 먹었는데,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가 지난 탓인지 아침저녁으로 선들바람이 불어오는 10월도 중순이 되었다. 운동하기에 좋은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이하여 2박3일의 일정을 잡아 낙동강 답사를 위해 또다시 적교를 찾아왔다.
동서울에서 의령까지 운행하는 고속버스가 하루에 3번이라, 9시에 출발하는 첫차로 4시간을 달려온 끝에 오후1시 적교에 도착한다. 오늘의 숙박지를 남지읍으로 정하고보니 35km 걸어야 하는 강행군인데, 출발이 너무 늦어 무사히 소화할지 걱정이 앞선다. 지난번 안동구간에서 겪었던 일이지만 서울근교와는 달리 읍 소재지가 아니면 숙박업소를 찾기가 어렵고, 농촌의 인심이 예전만 같지 않아 낮선 사람을 경계하는 탓에 늦은 밤에는 마을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제방위로 신설된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면 태풍이 할퀴고 간 흔적으로 왕 버들가지에 걸린 부유물이 바람에 나풀거리고, 한여름 뙤약볕아래서 구슬땀 흘리며 고생한 보람으로 낙동강변의 너른 들판이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창녕함안보 44.5km이정표를 지나면, 낙동강 하구 둑 134km 안동댐 251km 이정표가 반겨준다.
신반천을 경계로 합천군과 작별하고 의령군 지경으로 들어선다. 강 건너 창녕군 쪽으로 보이는 토평천은 우포늪에서 흘러넘치는 물이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곳이다. 토평 천을 거슬러 오르면 대한민국 최대의 자연내륙습지인 창녕 우포늪과 만난다. 동쪽에 있는 화왕산 물줄기가 토평천으로 흘러들어 사지포를 만들고, 우포로 넘어온 물이 목포를 거쳐 쪽지 벌로 가는 4개의 못을 합하여 우포늪이라 부르며 70여만 평의 면적을 자랑한다.
철새나 생태계,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우포늪은 어린이들의 자연 학습장으로 명성이 높다. 늪이 시작되는 가장자리로 왕 버들이 습지를 이루고 양서류의 좋은 서식처가 되어 세계적으로 희귀종인 남생이를 비롯하여 능구렁이, 두꺼비, 논두렁에 구멍을 내는 드렁허리, 3년 가물에도 살아남는 가물치가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늪의 중심부에는 직경이 1m에 이르는 가시연을 비롯하여 마름, 줄풀, 억새와 갈대들이 꽃술을 활짝 펼쳐 각종곤충들을 불러 모으고, 겨울을 나며 번식하려는 댕기물떼새, 쇠오리, 넓적부리 등의 겨울철새들이 보금자리를 찾아 모여든다. 자연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피톤치트라는 항균물질을 발산하므로 우리 몸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의령군은 의령읍을 중심으로 12개면에 3만 명이 살아가는 고장이다. “군민과 함께하는 희망찬 의령”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난 삼성그룹 창업자이자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끈 대표적 기업가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다. 호암선생의 조부께서 터전을 이룬 고향에서 유년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할 때 까지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산 모랑이 돌아서면 양지바른 언덕아래 아담한 감곡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앞으로 펼쳐지는 문전옥답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마 밭이다. 마는 생으로 먹을 때 끈적거리는 것이 특징인데, 뮤신이라는 성분 때문에 뱀장어와 같은 효과가 있어 살아있는 뱀장어라고 부르는 스테미너 식품이기도 하다. 단백질과 지방, 칼슘, 인산의 함량이 높은 마는 비위에 열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아 식은땀과 설사, 구토증세가 나타나기도 하니 주의가 필요한 식품이다.
특용작물로 농촌소득의 보탬이 되고 있는 마 밭을 지나면,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 하얀 랩으로 포장된 둥근 물체가 즐비하게 보인다. 곤포 사일리지라고 하는 이 물체는 일명 볏짚 김치라고 부르는, 가축먹이로 사용하기 위하여 볏짚을 압축한 것이다. 500kG정도의 크기로 젖산발효를 위해 미생물 첨가제를 주입하여 40일간 숙성시킨 후 사용하게 된다.
여의마을은 200년 전통을 이어온 숭어 잡이 마을이라고 한다. 4대강 공사로 징발된 선박이 손을 놓고 있는 강기슭이 숭어 잡이의 현장이다. mbc “고향은 지금” 에 방영된 안내문에 의하면 숭어는 바닷물고기이지만 민물에서도 살 수 있어, 가을부터 겨울까지 산란 할 장소를 찾아 얕은 곳으로 올라오는 때가 숭어 잡이의 적기인데, 고기의 육질이 최고의 맛을 낸다고 한다.
이 마을이 숭어 잡이로 유명한 것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방식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어, 살도리(소나무)와 비장대(대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그물을 지탱할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그물들이 고기를 몰기위해 유인책으로 설치된다. 그물의 엉성함은 큰 고기들도 빠져나갈 정도이지만 물살에 흔들리는 그물의 움직임에 놀란 숭어가 얕은 곳으로 서서히 이동하게 되고 숭어 막이 통 안으로 뛰어 오르게 된다.
가을정취는 강가의 억새밭에서 시작된다. 산들바람 불어오는 강 언덕에 흰머리 풀어헤친 억새들이 따사로운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고, 보랏빛 구절초의 가녀린 손짓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만다. 끈질긴 집념으로 물고기를 낚아채는 백로, 담쟁이와 칡넝쿨에 결박당한 왕 버들도 먹이사슬의 일종인가. 겨울을 준비하는 야생초들의 잎 새들도 누렇게 시들어가고 쑥대머리 잡초들이 을씨년스럽다.
낙서면 남쪽자락에서 진동고개를 만난다. 오르막이 2km 내리막이 4km. 자전거 동호인들의 수난이 시작되는 눈물고개다. 신나게 질주하던 메니아들도 이곳에서만큼은 내 뒤를 따라오기가 힘에 겨운지 안간힘을 쏟는다. 정상에 올라서면 그동안의 고통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낙동강 물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자전거 우회로가 있는 곳이면 아름다운 절경이 숨어있다. 수 십 길 벼랑을 뚫지 못하고 돌아온 길에 박진교가 자리 잡고, 다리난간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절경을 이룬다.
의령군 부림면과 창녕군 남지읍을 왕래하던 박진나루터는 우리 선조들의 애환이 묻어나던 교통의 요지이다. 먼동이 트기 전에 사공을 부르는 낮선 과객들, 시집살이가 무서워 서럽게 울며 건너던 새색시, 보부상들의 고단한 숨결이 이곳 뱃사공의 한 서린 푸념 속에 전해오던 곳이다. 세월 따라 세상도 변하여 초현대식 다리가 건설되니 826m의 박진교라. 강 하구가 넓어지며 끝없이 길어지는 다리를 건너며 맞은편 산자락에 있는 박진지구 전 적비를 바라본다.
휴전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어찌 우리 잊으랴 6.25의 그날을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차를 앞세우고 기습 남침한 북한 공산군은 38선을 돌파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넘어 남으로 계속 내려 왔다. 개전 40여일이 경과한 8월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끼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 바로 창녕박진나루 전투였다.
한국전쟁이 일어 난지도 60년이 지났다.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는 다부동전투. 마산정연전투. 영천지구전투. 기계안강포항전투. 박진나루전투였다. 그중 박진나루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과 마지막일전을 벌였던 전투이고, 이곳이 무너지면 부산은 물론 나라전체가 순식간에 공산군에 점령당하는 최후의 순간이었다.
1950년 8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박진나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함으로써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결국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박진나루전투는 낙동강만 건너면 부산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낙동강에 집결한 공산군을 향해 전투기들이 벌 때같이 날아와 포탄을 퍼부었으니, 적군의 사단병력이 이곳에서 괴멸되어 북한군의 시체가 낙동강을 피로 물들인 곳이다.
그 시절 절체절명의 순간들도 역사박물관을 통하여 실감할 수 있게 되고, 평화로운 박진나루를 건너 코스모스 피어있는 자전거 길을 따르면 집집마다 빨갛게 물든 고추들이 마당가에 널려있고, 가을걷이에 한창인 트랙터가 너른 들판을 누비는 정경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적포교를 건너며 작별한 창녕군으로 다시 돌아왔다. 화왕산과 부곡하와이, 우포늪으로 더욱 알려진 창녕군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 농경문화가 발전한 지역이다. 창녕읍과 남지읍을 비롯하여 12개면에 6만3천여 명이 상주하고 있다. 남지읍은 계성천과 고곡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며 하천 주변에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하고, 구마고속도로와 마산방면의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에 인구 1만 여명이 살고 있다.
남지읍에 도착했어도 오늘의 숙박지는 10여 km를 더 가야한다. 해는 서산에 기우는데 갈 길은 멀고, 객지를 떠돌며 가장 서러운 것이 고단한 육신을 누일 잠자리하나 구하지 못하는 일이다. 칠현마을에서 1008번 지방도로는 구평마을 쪽으로 돌아서고 자전거 길은 창아지 나루로 향한다.
백두대간을 오르며 야간산행에 이골이 난 터라, 미리 준비한 헤드랜턴으로 길을 밝히며 어둠속을 더듬는다. 창아지 나루에서 강을 버리고 영아지 마을로 향한다. 가로등불빛이 밝혀주는 마을회관에서 산기슭을 돌아가는 고개 길이 시작된다. 사람이 두려움을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 어둠속이라고 한다. 주위를 살펴볼 수 없는 검은 장막 속에서, 고립무원의 외로운 신세가 되고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온몸이 땀투성이다. 정상에 설치한 간이휴게소 전망데크에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어둠뿐이다. 낮에 이곳에 올랐다면 남강이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기강나루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남강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西上面) 남덕유산 서쪽계곡의 “참샘”과 지리산 천왕봉 아래 “천왕샘” 에서 발원한다.
산청(山淸), 진주(晋州), 함안(咸安), 의령(宜寧)을 지나 의령군과 함안군이 경계를 이루는 기강나루터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길이 189킬로미터로 낙동강 유역에서 가장 긴 강이다. 강의 상류지역은 내륙 분지로 형성되고, 하류 지역은 진주 평야를 비롯한 충적 평야가 펼쳐진다.
남강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진주의 촉석루다. 역사 속에서는 처절한 전쟁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축제의 마당이 된 남강의 유등놀이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기원하고 있다.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성 밖의 지원군과 연락하기 위해 군사신호로 풍등을 올리고,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워 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전술로 쓰였던 것이다.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유등놀이축제는 “물․ 불․ 빛” 을 주제로 우리의 소망"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세계평화와 인류 복락(福樂)을 소망하는 등불을 역사의 강, 진주남강에다 밝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포마을에서 학계리로 내려서며 남지읍 내가 불야성을 이룬다. 어둠속을 헤치는 2시간이야말로 4대강 답사에서 길이 남을 야간산행이다. 무사히 완주했다는 자신감으로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만은 천리라도 달려갈 기세다. 7시간의 강행군으로 35km를 완주하고 M모텔에서 첫날밤의 단꿈을 꾼다.
10. 남지 철교
어제의 강행군이 무리였던지 온몸이 찌뿌듯하다. 하지만 귀중한 시간을 내어 찾아온 종주 길을 그대로 포기할 수가 없어 무거운 몸을 추수리어 행군을 시작한다.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낙동강 물을 붉게 물들이고, 길가의 쑥부쟁이가 아침이슬을 흠뻑 머금고 함초롬히 피어있다.
길고긴 남지교(746m)를 지나며 그 옆으로 트러스형의 아름다운 다리를 바라본다. 1933년 개통하여 당시의 최신기술이 동원된 교량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다. 다리가 건설 된지 79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에서 다시 한 번 감탄하며, 그 당시의 기술로 이렇게 아름다운다리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마산-대구를 잇는 낙동강 도하교인 이 다리의 규모는 길이 390m에 너비가 6m로 차량 두 대가 비껴갈 정도로 좁다. 다리의 구조는 당시 유행하던 첨단 방식인 게르버식 연속 트러스교로, 1867년 독일 기술자 하인리히 게르버가 교각을 적게 설치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교량이다. 625전쟁 시에는 중앙부분 25m가 폭파되는 비운 속에 1953년 복구되어 사용하던 중, 1994년 안전진단으로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어 철거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오랜 세월 낙동강의 가교역할을 해왔던 남지철교가 철거될 위기를 맞게 되자, 남지 사람들이 철교 살리기 운동을 벌인 끝에 2004년 12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45호로 지정하여 자전거도로와 보도로 새롭게 태어났다. 현재는 2007년 6월 준공된 남지교가 남지철교를 대신하고, 푸른색의 남지철교와 주황색의 남지교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남지철교 옆 벼랑 끝에 자리 잡은 능가사 또한 아름다운 절경이다. 용화산의 머리에 해당하는 능가사는 합천해인사의 말사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희롱하는 형상이라는데, 조선시대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용당터였다고 한다. 남지사람들이 즐겨 찾는 능가사는 낙동강 변에 자리 잡은 유일한 사찰이라 할 수 있다.
남지철교를 건너오면 함안 땅이다. 경상남도 중심부에 자리 잡은 함안군은 1읍 9면을 관할하며 인구 6만7천명이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함안군의 특산물로는 파수 곶감을 제일로 꼽는다. 조선 중엽부터 왕실에 올린 진상품으로, 감이 씨가 없고 사람의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어진 이 곶감은 완제품이 된 후에도 말랑말랑하여 더운물에 넣어 저으면 꿀처럼 풀리는 특징을 갖고 있어 명절 때 만드는 수정과에 넣으면 천하일품이라고 한다.
함안군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로 형성되어, 북과 서는 낙동강과 남강으로 남과 동은 6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여건으로 일찍이 삼한시대 이전부터 6가야 중 아라가야(阿羅伽倻)의 도읍지였던 가야읍 도항 · 말산리 일원에 찬란한 가야문화가 발굴되고 있다. 산 아래 북쪽 언덕에는 가야의 무덤들이 있어 공자모양의 굽다리접시(工字形高杯), 불꽃모양의 창을 낸 굽다리접시(火焰型透窓高杯)는 아라가야가 여러 가야중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가진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함안군 대산면 악양나루터는 60년대를 풍미하며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처녀 뱃사공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박기준이라는 뱃사공이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를 하게 된다. 생계가 막막해진 집안에서는 고모와 조카 사이었던 두 처녀가 오빠를 대신하여 나룻배를 저으며 군대 간 오라버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전쟁터에 나갔던 오빠 박기준이 그만 전사하고 만다.
그 해 함안 땅에 피난 왔던 유랑극단 단장이었던 윤부길씨가 피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대산장터에서 공연하기위해 나루를 건너 악양에 머무르면서 애절한 처녀뱃사공의 사연을 듣고, 가사를 지어 서울로 돌아와 작곡가 한복남씨에게 부탁하여 곡을 만들고, 당시의 민요가수 황정자를 통해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 속에 흰머리 풀어 강바람에 휘날리는 억새꽃사이로 연보라에 노란꽃술이 앙증맞은 들국화가 짙은 향기로 유혹을 한다. 고수부지 일구어 강나루 숲을 만들고, 코스모스 꽃 길 따라 자전거가 바람을 가르면, 요강나루 지나 지척이 낙동대교라. 한강대교의 두 배나 되려나, 끝없이 무한정 길기만 하다.
함안창녕보 5km를 남겨두고 안동댐 288km에 부산하구 97km라 당당한 발걸음에 꽃가꾸기로 바쁜 중에도 반겨주는 아주머니들에게 반가운미소를 보낸다. 웅장한 덕남배수장을 돌아가면 드디어 함안창녕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도 수중보에서 걸음을 멈추고 너른 담수호를 빗어내니, 혈관처럼 뻗어나간 충적평야에 보혈주사를 놓아 十年大旱 왕 가뭄에도 격양가가 절로 나고, 4대강 살리기의 진수도 이곳에서 꽃이 핀다.
창녕보를 지나 온지 55km만에 함안보 인증센터에 안착한다. 낙동강 8개 보중에서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함안보는 함안군 칠북면 어시미산(324m)과 창녕군 길곡면 신성봉(328m)사이를 오가던 멸포나루를 막아 낙동강을 품은 고니의 날개를 형상화하여 녹색성장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총길이549m(가동보 144m, 고정보 405m)에 이르는 거대한 교량이 탄생하여 두 지방이 소통의 길로 연결된다.
배낭에 꽂은 국토대행진의 깃발을 보고, 국토대행진 600여 km를 걸어온 집념에 수자원공사 함안보 직원들의 환호와 격려를 받는다. 필자의 저서인 “백두대간에 부는 바람”(백두대간 종주 수필집)을 건네주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의기투합하는 것도 4대강 답사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이 아닌가 싶다.
함안보를 건너면 또다시 창녕군이다. 이방면에서 시작된 낙동강이 부곡면까지 70여 km를 이어오고 있으니, 낙동강을 중심으로 생활터전을 일구어 온 창녕군은 우리 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부곡하와이로 명성을 날린 온천이 대표적이다. 덕암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부곡온천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영산온정(靈山溫井)이라 부르고, 여기서 나온 샘물이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 하여 문둥이 샘이라 불렀다. 한국최고의 유황온천으로 수온이 50~75℃나 된다.
창녕군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인 여건으로 서쪽과 남쪽은 지세가 낮은 충적평야가 발달하고, 동쪽은 산세가 험하여 고산준령이 지나고 있으니 그 중심에 화왕산이 자리 잡고 있다. 창녕군의 대명사라 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화왕산(757m)은 완만한 동쪽 사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급경사를 이루어,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화왕산성(사적 제64호)이 있어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장군과 의병이 분전한 곳이다.
정상에는 수 천 명의 장졸들이 주둔할 수 있는 너른 평지가 있고, 억새들의 천국이 펼쳐진다. 창녕군에서는 정월대보름을 맞이하여 억새 태우기 축제를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행사였지만, 2009년 발생한 화재로 관광객을 비롯하여 현장 공무원 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후로 폐지되고 말았다. 또한 정상에 삼지(三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서 용자(龍子)의 정기를 받아 창녕 조 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청한정을 지나며 가파른 벼랑사이로 자동차가 겨우 비껴갈 정도로 위험하고 협소한 이 길을 청학로라 命名하고 개설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부곡면 청암리와 학포리 사이의 2km는 천애의 절벽으로 가로막혀 사람들의 왕래가 불가능한 곳이었으나 두 마을의 견공들이 오랜 세월 짝을 찾아 오가면서 자연스레 오솔길이 열리고, 사람들도 이 길을 따라 겨우 지나게 되었다.
수 백 년 간 교통이 불편하던 두 마을에 1986년 육군 공병대가 비상시 작전훈련용으로 도로를 시공하게 되었고, 이에 주민들이 경상남도와 창녕군에 진정하여 군, 관, 민이 새마을 운동정신으로 이 도로를 개설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차량2대가 겨우 비껴갈 정도로 협소한 이 길에는 자전거 도로도 개설하지 못하고 위험한 구간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야한다.
생태공원을 가득 메운 억새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사이 길을 질주하는 자전거 종주 팀들의 경쾌한 리듬 속에 본포교(1,080m)를 건너 창원 땅으로 들어선다. 마산ㆍ진해ㆍ창원의 3개 도시가 전국 최초로 자율통합을 이루어낸 고장이다. 내 고향 남쪽바다로 시작되는 마산에 자유무역지대로 경제의 기반을 다지고, 벚꽃놀이로 상춘객을 불러 모으는 진해, 새롭게 태어난 기초행정도시 창원이 거대한 복합도시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찬 도시다.
낙동강 변 고수부지에 제방을 쌓아 황무지를 개척한 충적평야가 동읍과 대산면의 광활한 대지위에 바둑판처럼 펼쳐지고,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주남저수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창원시 동읍에 위치한 주남저수지는 602ha의 광활한 면적에 가창오리와 천연기념물 203호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한 천연기념물 20여종과 다양한 철새들이 감동을 주는 자연사 박물관이다.
오늘의 숙박지로 점찍어둔 하남읍이 시야에 들어온다. 러브호텔로 인기가 있는 모텔은 잠시 쉬었다가는 사랑 놀음을 더욱 반기는 탓에, 하룻밤 신세를 져야하는 긴 밤손님이 벌건 대낮에 찾아드는 것을 꺼리고, 부득이 통사정을 해보면 웃돈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벌건 대낮에 모텔에 들어서기가 민망하여 정자에 올라 배낭을 베고 누워보니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에 슬며시 잠이 들고 만다.
한 식경의 꿈나라 여행으로 몸은 더욱 가뿐해지고, 수산교를 건너가니 밀양시 하남읍이다. 수산리로 알려진 하남읍은 국도 25호선이 통과하고, 창원시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룬다. 경상남도 지정문화재인 수산제는 전북 김제의 벽골제, 충북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농경문화유적으로 삼한시대에 축조된 관개수리 시설이다.
면단위 보다 조금 큰 하남읍은 버스정류장 부근에 여인숙2개와 모텔이 하나 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식당에서 점심요기를 하고 곧바로 수산대교를 건너 창원시 대산면 송등 마을에 있는 퀸 모텔에 여장을 풀고, 하루에 낙동강을 5번 건너(남지교, 함안보, 본포교, 수산교, 수산대교)는 진기록을 세운다.
11. 밀양 아리랑
3일째 날이 밝았다. 오늘의 일정이 삼랑진까지 내려가서 영남루가 있는 밀양까지 답사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32km를 소화하자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만 한다. 송등 마을을 나서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들판이다. 모산리 제방으로 올라서면, 물안개 피어오르는 낙동강위로 수줍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곧게 뻗은 제방을 걷는 동안 사진에서만 보아오던 싸움소 훈련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보통소의 두 배는 됨직한 우람한 체구에 날카롭게 다듬어진 뿔하며 매서운 눈매는 보이는 물체 마다 공격의 대상이다. 자전거를 타고 조련하는 주인의 구령에 따라 천지가 진동할 만큼 콧바람을 일으키며 네 굽을 놓는다. 영호남을 중심으로 성행하고 있는 소싸움은, 이 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이래 목동들이 심심풀이로 재미삼아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싸움은 진주소싸움이 대표적이다. 진주소싸움의 역사는, 신라가 백제와 싸워 이긴 전승기념잔치에서 비롯되어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자생한 민속놀이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는 소싸움은 씨름대회와 흡사하여 몸무게에 따라 소태백, 태백, 소한강, 한강, 소백두, 백두(850kg이상)등 6체급으로 나누어진다.
싸움소들의 주무기는 날카로운 뿔의 모양에 따라 본능적으로 유리한 기술을 구사한다. 뿔은 비녀처럼 일자형으로 생긴 비녀 뿔, 하늘로 치솟은 형태의 옥 뿔, 옥 뿔이 앞으로 굽은 노고지리 뿔로 구분 된다. 사생결단의 자세로 싸우다가도 한쪽에서 꽁무니를 빼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 승자의 당당한 자세야 말로 우리인간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창원 쪽은 대산문화체육공원이 창녕 쪽은 수산강변공원을 조성하여 낙동강을 찾아오는 철새들을 탐조할 수 있는 전망대까지 갖추고 있다. 유등나루터 가는 길에 유청마을을 지난다. 수 백 년은 됨직한 팽나무 그늘에는 휴식도 하고 좌담도 할 수 있는 정자가 있어 마을의 상징처럼 수호신으로 떠받들고, 담벼락마다 아름다운 산수화로 피어나는 유청마을을 바라보며 고향을 찾아온 듯 행복감에 젖어본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올라서면 유등배수장 준공기념비가 서있다. 창원농지개량조합장 명의로 된 문구를 살펴보면, 낙동강 변에 자리 잡고 있는 대산 벌은 2,000ha에 이르는 방대한 면적에 3,700세대의 주민이 살고 있는 고장이다. 큰물이 나면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오던 중,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강바닥을 준설하고 제방을 쌓아 강의 범람을 막고, 전동기 펌푸와 배수기 4대를 설치하여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명례강변공원과 솔뫼생태공원을 조성한 낙동강 고수부지는 김해시 오정마을까지 4km에 걸쳐 수십만 평의 자연습지가 펼쳐진다. 철새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들의 활동 공간을 확보하여 단풍나무길, 왕 벗 나무길, 수목 군락지, 데크전망대. 메타세콰이어길을 조성하고 있다.
창원시와 작별하고 김해시로 들어와 시산리 소나무쉼터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봉화산이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은 노무현 대통령이 4살 때 이곳에 정착하여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라온 고향이다. 194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노무현은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제16대 대통령으로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으며, 남북관계에서 해빙의 시대를 조성하고, 퇴임 후 고향인 봉하 마을로 내려와 생활하다 재임 중 친인척 수뢰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사저 뒷산에서 투신하였다. 한글세대 첫 번째 대통령인 노무현은 군사정권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42세 때 정계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된 뒤, 민주민족세력의 정치적 대변자를 자임하며 남다른 정치 역정을 걸어 왔다.
모정마을 입구에 있는 배수펌프장은 화포천이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강 어구에 설치하여 연례행사처럼 겪는 물난리를 피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에서 발원하여 한림면 금곡리에서 낙동강과 연결되는 화포천은 유로연장이 21.2km에 이른다.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밝혀진 화포천은 하천 물길과 습지로 이루어진 유수지만도 316만㎡에 이르는데다 천연기념물 323호인 황조롱이와 가시연꽃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보호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모정교를 건너면 작약산(377m)자락에 자리 잡은 모정마을을 만난다. 동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북쪽으로 몸을 트는 것도 작약산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랑진이나 밀양 쪽으로 가자면 모정마을을 거쳐야 하고, 옹골찬 모정고개를 넘어야 한다. 신바람 나게 달려가던 자전거도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고,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온 몸이 흠뻑 젖는다.
김해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사리를 지나면 낙동강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교량의 상부가 'X' 모양의 철제구조물로 둘러싸이는 트러스공법인 낙동강교는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삼랑진에서 부산녹산을 경유하여 부산신항을 잇는 총연장 38.8㎞의 배후철도가 시작되는 교량이다. “경전선”이 시작되는 삼랑진~진주간 101.4㎞를 복선전철 화하여 마산, 진주지역에 KTX를 운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2년 완공하였다.
낙동대교 밑으로 지나면 자연스럽게 낙동인도교(구 삼랑진교)와 연결된다. 일명 “콰이강의 다리”로 부르는 이 다리는 작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서 맞은편에서 차가 오는지 살핀 다음에 지나가야 한다. 자전거와 보도로 사용하고 있는 다리 입구에는 총 중량 3.3톤 이상의 차는 통과할 수 없고 10km이하로 달려야 한다는 경고문이 있다.
삼랑진은 조선 후기만 해도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을 만큼 수운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1905년 송지에 삼랑진역이 들어서면서 경부선과 경전선이 갈라지는 철도의 중심지가 되어 동부경남에서 서부경남이나 전라도방면으로 가려면 삼랑진을 거쳐야하는 전성기였으나, 남해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삼랑진은 쇠퇴의 길을 걸어 정체된 도시가 되고 말았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유일한 철도인 경전선은 삼랑진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308km나 되는 긴 구간이다. 1903년 삼랑진과 마산포를 잇는 공사를 시작으로 1905년 경전선이 탄생하고, 1968년 진주와 순천을 연결하여 88고속도로와 함께 동서 화합의 장이 열린 것이다.
낙동인도교를 건너면 자전거도로는 부산방면과 밀양방면으로 갈라진다.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상부마을은 오우정이 있는 뒷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을 절단하여 만든 길이라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협소하다. 수원지 노래연습장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교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끝없이 뻗어가는 교량은 우리나라가 번영의 길로 이어지는 상징처럼 보이고, 낙동강과 합류하는 밀양강은 대양으로 향하는 하구언처럼 보인다.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동쪽계곡에서 발원하여 청도군과 밀양시를 지나 삼랑진읍 삼랑리와 상남면 외산리 사이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99㎞의 긴 강이다. 밀양강은 유로에 비하여 유역면적이 넓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에는 넓이 4㎞에 이르는 충적평야(밀양평야)가 발달하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쌀 생산량이 많고, 시설채소와 사과, 감, 복숭아 등 과수재배도 활발하다.
뒤기미 마을을 지나면 미전들을 감싸는 제방이 나타난다. 하남읍을 경유하여 안동댐으로 연결되는 4대강 달리기 자전거도로가 제방위로 조성되고, 안동댐 334km, 부산하구언 51km이정표가 반겨준다. 제방을 중심으로 밀양강 쪽은 고수부지로 조성중이고 제방안쪽은 부산시에 공급하는 시설채소들이 자라고 있는 비닐하우스가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질주하는 밀양강대교와 차량들이 홍수를 이루는 삼상교아래서 지루하던 3km 제방도 끝이 나고, 자전거도로는 앉은뱅이 다리를 건너 상남면 쪽으로 들어선다. 고수부지에서 안동방향의 자전거도로와 작별하고 제방위로 올라서면 8km의 밀양시가 아련히 바라보인다.
운동하기 좋은 10월이라 해도 한낮의 열기는 대단하다. 제방 밑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는 한증막이나 다름없다. 바람 한 점 없이 내려 쪼이는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머리위로는 고속도로의 굉음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25km를 걸어온 피로가 쏟아진다. 2시간의 고통을 참아내며 드디어 밀양시에 입성한다.
낙동강에서 비껴있는 밀양을 굳이 찾아온 이유는 영남루를 보기 위함이다. 밀양강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며 섬이 되어버린 구시가지에서 밀양교를 건너면 양지바른 언덕을 배경으로 죽림 속에 자리 잡은 영남루가 반겨준다. 포토 존이 다리중간에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영남루는 환상적이다. 밀양강에 비추는 영남루와 아랑각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嶺南樓)는 신라 법흥왕 때 세워진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 자리에 1365년(공민왕 14) 김주(金湊)가 창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이 거듭된 끝에 1844년 부사 이인재(李寅在)에 의해 마지막으로 재건되었다.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3대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명성에 걸맞게 누각에 올라서면, 도도히 흐르는 남천강위로 사 뿐이 올라앉은 삼문동이 연못가운데 떠 있는 부평초처럼 은밀한 자태를 뽐낸다. 영남루에서 층층계단을 내려서면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아랑 각을 만난다. 옛날 밀양 부사에게 아랑이란 딸이 있었는데, 아름답고 마음도 어진 그 딸을 관아의 심부름꾼인 통인이 사모하여 욕보이려 했으나 반항하자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것이다.
영남루에 얽힌 아랑의 슬픈 설화에서 비롯된 밀양 아리랑은 정선아리랑, 진도 아리랑과 함께 우리의 가슴속에 흐르는 민족의 혼이다. 또한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다는 기쁜 소식이 프랑스 파리에서 전해온다.
1.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2.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3. 남천강 굽이 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 각을 비추네.
후렴 :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낙동강 천리 길, 굽이치는 강물 따라 사연도 많고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누각과 정자가 많지만 그중에 으뜸이 영남루요, 안동의 영호루와 상주의 관수루를 3대 누각이라 칭송하는 것도 아름다운 절경과 애틋한 사연을 간직함이 아니겠는가. 3일간의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밀양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싣는다.
12. 양산 통도사
안동에서 시작된 낙동강 답사 길도 그 여정을 마무리하는 구간이다.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인 삼랑진을 찾아가는 길이 녹녹치를 않다. 고속버스와 KTX가 삼랑진을 지나면서도 정차를 하지 않으니 그림의 떡이라고 할까. 밀양이나 구포에서 다시 갈아타야 하지만, 그나마도 산간마을까지 찾아가는 시골버스로는 하루해가 저물도록 애간장이 녹을 판이다. 다행이도 30분후에 도착하는 무궁화호(서울발 부산행 10시 45분)가 있어, 밀양역에서 다시 갈아타고 보니 10분 만에 삼랑진에 도착한다.
영하의 날씨와 폭설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따뜻한 남쪽나라답게 훈풍이 불고 있다. 경부선과 경전선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 세 갈래의 물결이 어우러지는 삼랑진은 낙동강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콰이강의 다리를 비롯하여 5개의 다리가 건설되며 화려한 영화를 누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곳이라 더욱 쓸쓸해 보인다.
경부철도 지하도를 빠져나오면 삼랑진 생태공원이다. 낙동강변의 드넓은 고수부지에 조성되는 강변공원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습지공원으로, 낙동3경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낙동강하구언 45km이정표를 지나면, 4대강 살리기 사업현장에서 발굴된 처자교를 만난다.
처자교는 조선시대 영남 대로상에 남아있는 보기드믄 쌍홍예교로 폭이 4.25m에 길이가 25.3m 높이3.2m의 교량이다. 전설에 의하면 작원관 근처의 작은 절에 있던 스님이 인근마을의 처녀를 사모하면서, 두 남녀가 사랑 놀음으로 다리 놓기 시합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연약한 힘을 깔본 스님이 게으름을 피운 사이 처녀가 먼저 다리를 완성하자, 이를 부끄럽게 여긴 스님이 강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슬픔에 잠긴 처녀도 따라 죽었다는 슬픈 사연이다. 스님이 만든 다리를 승교, 처녀가 만든 다리를 처자교로 불렀다고 한다.
삼량진읍 검세리는 작원관(鵲院關)이 있던 곳이다. 여행하는 관원의 숙소를 제공하고, 나루터를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로 여행하던 관리들의 숙소를 院이라 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關관이라 하였다. 삼랑진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진(鵲院關津)은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부산포에서 한양에 이르는 2대요충지로, 비석만 남아있던 자리에 1995년 성문을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지휘하는 軍.官.民 300여명이 왜적1만 8천여 명을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救國忠魂의 성지이고, 경부철도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낙동강 변에 조성하였으나 1936년 대홍수에 휩쓸려 흔적조차 없어진 것을 삼랑진 읍민들의 정성으로 복원하였다는 설명이다.
삼랑진이 자랑하는 특산물로는 딸기를 꼽을 수 있다. 1943년 삼랑진 금융조합 이사였던 송준생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벼슬딸기’ 모종 10여포기를 가져와 심은 것이 우리나라 딸기재배의 시초라고 한다.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토지에서 재배하는 딸기의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지역딸기생산량이 전국의 42%를 차지하고, 밀양시에서 도전체의 26%를 생산하고 있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는 안태공원은 삼랑진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조성된 공원이다. 상부저수지까지 6km에 이르는 도로주변으로 경관이 수려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아주 좋은 곳이다. 1급수의 맑은 물을 담수하고 있는 상하부 댐과 함께 삼랑진양수발전소의 전시실에서는 에너지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가 있다.
양수 발전소는 수력 발전의 일종이다. 전력 수요가 적은 심야 또는 주말의 여유전력을 이용하여 하부저수지의 물을 높은 곳에 있는 상부저수지에 끌어 올려 물을 저장하였다가 전력사용이 가장 많은 시간에 상부저수지의 물을 다시 하부저수지로 낙하시키면서 전기를 발생하는 방식이다.
작원터널이 나타나며 산세가 험해진다. 천태산 자락이 낙동강 물에 발을 담그며 수직단애를 이루는 절경이다.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경부선 철로와 강물에 다리발을 세운 자전거 도로가 조화를 이루어 삼랑진의 새로운 명소로 탄생하였다.
절벽 중간지점이 밀양시와 양산시 접경이다. “아름다운 변화 희망찬 양산”의 슬로건을 내건 양산시는 영남알프스로 부르는 영축산과 신불산이 있고, 낙동강이 흐르는 산수가 수려한 청정 지역이다. 또한 부산광역시의 위성도시로서 기능을 발휘하여 인구 27만 명이 상주하는 쾌적한 환경 속에 부산지하철 2호선이 연결되어 있다.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는 가야진사가 있다. 신라의 눌지왕이 가야를 정벌하기위해 건너던 용당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일명 옥지주(玉池州)라고도 불렀다. 공주의 웅진과 함께 나라에서 향촉과 칙사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고 장병들의 명운을 빌던 곳이다. 용당 나루의 전설을 바탕으로 龍을 主神으로 모시고 있는 내부에는 가야진사 전설의 주인공인 머리가 셋 달린 龍이 그려져 있다.
전설에는 한 마리의 황룡(남편)과 두 마리의 청룡(처와 첩)이 살고 있었는데, 첩을 시기한 처가 사자(使者)에게 첩을 죽이도록 부탁을 하였다. 사자가 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첩을 죽이기 위해 용소에 갔는데, 실수로 황룡을 죽이는 사단이 벌어지고 만다. 슬피 울던 본처용이 사자를 용궁으로 데리고 간 뒤로, 마을에 재앙이 끊이지 않아 억울하게 죽은 황룡의 넋을 달래는 용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낙동강 천리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루터가 이곳 용당 나루터라 할 수 있다. 천태산 자락이 내려앉은 수 십 만평의 고수부지에 조성된 가야진사와 강 건너 용산이 그림처럼 솟아있고, 대구부산 고속도로가 질주하는 정경이야말로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다.
새벽부터 천리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 터라 시장기가 돌기시작 한다. 언덕위에 자리 잡은 정자를 찾아가니 때 마침 양산에서 달려온 자전거 팀들이 술파티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지나는 길손을 그대로 보내는 것이 우리네 인정이 아니기에, 자리를 함께하자고 불러들인다. 염치불구하고 자리를 비집고 들어서니 군침 도는 홍어회가 기다리고 있다. 초고추장을 듬뿍 찍은 홍어회의 맛은 山海珍味가 따로 없고, 목울대를 넘어가는 시원한 소주야말로 피로를 풀어주는 보약이 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통성명이 시작되고, 인천의 아라 뱃길에서 한강과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 하구언을 찾아가는 4대강 답사 국토대행진 중이라는 설명에 모두들 놀라고 만다. 자전거로도 어려운 길을, 걸어서 간다는 말에 감탄사와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보니, 마음이 우쭐해지는 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차이가 없다.
공짜 술이 어디 있는가. 백두대간 종주 수필집(백두대간에 부는 바람)을 건네주니 더 한층 반가워하며 연거푸 술잔이 건네진다. 생각지도 못한 술대접을 융숭하게 받고 보니 피로도 싹 가시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다. 신 바람나는 발걸음에 말을 걸어오는 인기척에 돌아보니, 자전거로 에스코트를 하고 있는 양산의 박춘석 씨다. 배낭에 달고 있는 국토대행진 깃발을 보고 말동무를 하는 중이다.
종주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기에 간단하게 설명을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자세한 일정까지 물어 온다. 30여 분간 에스코트를 받으며 주고받는 대화는 끊임이 없고, 걸어서 국토대행진을 하는 사람이 처음이라며 인증 샷으로 기념사진까지 찍고, 기다리는 일행들에게 소개까지 시켜준다.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부산의 동래부에 이르는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에 하나였다.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길이요, 보부상들이 등짐을 지고 넘던 길이다. 이곳 황산잔도는 영남대로 상에서 문경의 고모산성 토끼비리와 창녕군의 청한정 길과 함께 3대 험로라 전해질 정도로 낙동강이 흐르는 기암절벽의 벼랑 사이를 지나야하는 아슬아슬한 구간이다.
“황산 베랑 길”로 부르는 이곳은 지금도 KTX 경부선 복선철도가 한쪽은 터널로, 다른 한쪽은 비좁은 벼랑사이를 달리고 있어 마치 단선 철도로 보인다. 강심에 다리를 박은 2km의 자전거 길은 종주 팀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다. 다리아래 보이는 경파대(鏡波臺)는 조선시대 선비 정임교가 친구들과 시를 읊던 장소로, 중국 당나라 詩 채련곡(採蓮曲)에서 “거울 같은 물, 바람 없어도 절로 물결 인다.” 는 구절을 인용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양산 물 문화회관 인증센터를 지나 스릴 넘치는 2km의 황산 베랑 길도 끝이 나고, 양산시 물금취수장이 반겨준다. 동지섣달의 짧은 해가 낙동강에 낙조를 드리우는 시간. 물금읍을 보듬어 안고 있는 고수부지위로 황산 문화체육공원이 펼쳐진다. 직선거리로 4km에 이르는 황산 문화체육공원은 갈대숲이 무성한 낙동강둔치에 각종위락시설을 조성하여 양산천을 따라 조성하였다.
양산천(梁山川)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영취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양산시를 관통하는 길이가 32km에 이르는 하천이다. 하천변에는 양산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된 자연생태공원이 있고, 수달과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이 발견되기도 한다.
부산 하구언 24km 이정표가 있는 호포역에서 하루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예정된 양산역으로 향한다. 양산에서 가장 중요한곳이 통도사다. 영축산자락에 터를 잡은 통도사는 천년 고찰로서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해인사(법보사찰), 송광사(승보사찰)와 함께 불보사찰로 꼽히는 명찰이다. 당나라에 修道를 다녀온 자장율사가 석가의 진신 사리를 모시고와서 선덕여왕 15년(646년)에 건립하였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고 있는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의 법흥사, 정선의 정암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한곳이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 유형불교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1999년 신축 개관한 성보박물관은 세계박물관 중에서 가장 풍부한 불교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참고로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로를 소개하면, 고구려 소수림왕(372년)시절에 전진에서 승려 순도가 외교사절과 함께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왔으며, 374년 아도에 의해 전파된 불교는 신라 법흥왕(527년)때 이차돈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다가 대신들의 반대에 몰려 순교를 당하면서 신라에 불교가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서기 384년 전남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들어온 마라난타가 불갑사를 창건하고, 다음해 백제의 수도인 한산주로 올라가 침류왕을 예방하여 절을 짓고 승려 열 명을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라고 한다. "불법이 들어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에서 법성포(法聖浦)란 지명으로 부른다.
13. 철새도래지 을숙도
부산 지하철 호포역에서 시작하는 마지막 구간이야말로 감회가 새롭다. 안동댐 물 문화회관에서 시작한 종주 길 385km. 멀고도 험한 길을 지나오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몇 시간 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동녘 하늘이 밝아오며 유난히 돋보이는 거봉이 있으니, 금정산정상인 고당봉(801m)이다.
금정산은 강원도 태백시 매봉산에서 시작하여 백병산(1,259m), 통고산(1,067m), 백암산(1,004m), 주왕산(720m), 단석산(829m), 가지산(1,240m), 신불산(1,209m)을 지나온 낙동정맥이 부산으로 들어오며 가장먼저 솟아오른 산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고당봉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수영강과 서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가 발원하여 두 하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 기슭에는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가 있고, 남쪽에는 1703년(숙종 29)에 축성한 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이 있다. 수차례에 걸쳐 증축을 거듭하다가 1972년에 복원된 금정산성은 둘레가 17km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산성이다. 금강공원에서 산성고개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산성에 올라서면, 천리 길을 달려온 낙동강물줄기가 유유히 흘러가고, 부산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낙동정맥과 낙동강은 한 몸에서 태어난 불가분의 관계이다. 낙동정맥의 수많은 산정에서 모아진 물줄기가 낙동강으로 태어나고, 강물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가 바로 낙동정맥인 것이다. 낙동정맥은 백양산(642m)과 정광산을 넘어 다대포 몰운대에서 끝이 나는 397km의 긴 산맥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전개되는 김해시는 서기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을 건립하여 532년 신라(법흥왕 19년)에 합병 될 때까지 500여 년간 통치하던 금관가야의 중심지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수로왕의 탄생설화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이 어린 아이로 변해 먼저 나온 수로가 가락국(본가야)의 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아이도 각각 5가야의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수로왕비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부모의 꿈에 상제로부터 “가라국왕 수로를 하늘에서 내려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는 현몽에 따라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하여 왕비가 되어,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서릿발내린 수초사이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고니들의 물장구 속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사장교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김해시 대동면과 부산시 북구 화명동을 잇는 대동화명대교는 길이가 1.54㎞에 달하는 왕복 4차로의 최신형 교량이다.
2007년 3월 착공하여 5년만인 금년7월 준공된 화명교는 사장교 상판이 콘크리트로 건설된 국내최초로 선형관리기술 및 하중제어기술등 첨단공법이 적용돼 국내외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는 自評이다.
강이나 하천, 바다를 연결하는 다리가 단순하게 차량이나 사람들의 왕래를 위한 목적을 벗어나,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형미를 강조하는 시대로 변천되었다. 그대표적인 교량으로 부산의 광안대교와 서해대교, 인천대교, 한강의 방화대교를 꼽을 수 있다.
주위 경관을 살려 건설한 “대동화명대교”는 시원하게 펼쳐지는 강철 케이불선이 아침햇살에 반사되어, 마치 강물을 박차고 오르는 고니의 모습으로 보인다. 저녁노을에 비친 교량은 황금빛으로 물든 강물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모습으로, 야간에는 화명동의 화려한 불빛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금곡동과 덕천동 사이 3.5km에 이르는 경부선 철로 변으로 수림대를 정비하여 열차소음을 완화하는 기찻길 숲속산책로가 이어진다. 우리의 경제사정이 나아진 만큼, 衣食住 문제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소음이 심한 도로변에 방음벽을 설치하고 수림대를 조성하여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낙동강 하구언 13km 이정표가 있는 곳이 구포역이다. 서부경남으로 연결되는 부산의 관문인 구포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다.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는 구포낙동강교를 비롯하여 경부선이 지나는 구포역에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고, 구포대교를 건너 강서구로 김해시로 연결된다.
구포는 대양으로 향하는 출발점이요. 낙동강 뱃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낙동강의 물목인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어 해산물을 육지로 운송하고 내륙지방의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포구가 형성되면서 낙동강제일의 나루터로 명성을 얻게 된다. 배를 기다리는 시간과 강을 건너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불편함과, 홍수로 물이 불어나면 운항이 중단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위해 1933년 구포교를 건설하게 된다.
강서구 대저동과 구포동을 잇는 구포교는 길이가 1,060m에 폭이 8.4m인 그 당시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므로 “낙동장교”라 불렀다. 다리준공과 함께 부산과 경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6.25 전쟁 때는 군사장비와 전쟁물자가 이 다리를 통해 수송되어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 가교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물동량을 소화하는데 한계를 느낀 나머지 1997년 첨단공법을 이용한 “구포대교”를 완공하면서 차량통행을 새로 건설된 다리에 넘겨주고, 승용차의 일방통행로로 사용하다가 2003년 9월14일 태풍 “매미”의 여파로 유실되면서, 수많은 추억의 역사를 뒤로한 채 우리의 곁에서 사라지고 만다.
부산의 명물로 등장한 갈맷길 21구간(총연장 300km) 중 7코스인 "낙동강 하구언 길"이 구포역에서 을숙도까지 14.3km가 이어진다. 낙동강자전거 길과 함께 걷는 갈맷길은 매서운 강풍 속에서도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동쪽으로 불응산과 백양산 자락이 다대포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강 서쪽으로 김해공항을 오르내리는 비행기가 줄을 잇는다.
제방 길 2km를 진행하면 삼락강변공원을 만난다. 143만평의 넓은 공간에 각종 체육시설을 비롯하여 잔디광장, 야생화단지, 자연습지 및 자전거도로, 산책코스 등으로 꾸며진 휴식공간이다.
서부버스 터미널이 있는 감전동에는 김해경전철의 미니 전차가 낙동강을 건너다닌다. 의정부에도 경전철이 운행되고 있으니 신기할 것은 없다. 하지만 장밋빛 청사진으로 만들어진 경전철은 선거 때마다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며 재정을 파탄지경으로 몰고 가는 애물단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10km, 8km... 마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듯, 을숙도가 가까워짐을 알려준다. 세찬바람 속에서도 목적지를 향하는 발걸음이 멈출 줄을 모르고, 지나는 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는다. 제방을 따라오던 자전거길이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는 남해대교를 지나며 강변길로 넘어 선다. 거침없이 달려오던 자전거 길도 신호대기로 숨을 고르면, 저 멀리 낙동강하구언이 모습을 드러낸다.
낙동강이 운반해온 토사가 하구에 퇴적되어 형성된 을숙도. 해발고도가 1m에 수로 망이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수로를 따라 길이 3m 내외의 갈대가 숲을 이룬다. 을숙도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에는 플랑크톤 등 어류의 먹이가 풍부하고, 수초가 많아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가 형성되었다.
김해평야의 용수공급과 염해방지를 위해 이 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낙동강하구 둑을 준공하기 까지는 부산시민들의 낚시터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하구 둑 공사로 갈대숲이 사라지고 철새의 종류와 그 수가 차츰 줄어드는 등, 자연생태계가 파괴되는 안타까움이 있다.
꿈에도 그리던 목적지. 수천km를 날아온 철새들이 을숙도를 바라보는 심정이 나와 같을까. 바다와 강물을 분리시키는 하구언의 공도교를 건너, 물 문화회관에 도착하며 385km 낙동강 종주 길도 대미를 장식한다. 수고하셨습니다. 담당 직원의 위로와 “국토대행진완주 증”을 받아든 순간, 어려웠던 고비길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남아있는 영산강 답사 길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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