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청댐
대청댐 가는 길이 간단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회룡역을 지나는 전철로 서울역에 도착하면 6시10분. 경부선 무궁화호(6시40분발)가 대청댐과 가까운 신탄진역에서 정차를 하지 않으니 대전역까지 가야만 한다. 대전역에서 급행버스(2번)로 신탄진역까지 되돌아오면 2시간마다 운행하는 72번 버스가 10시를 훌쩍 넘기고도 도착하지를 않는다. 조급한 마음에 택시로 대청댐 주차장에 도착하지만 이곳에서 끝이 아니다. 자전거 인증센터가 있는 물 문화관 까지는 오르막길로 1km를 더 가야만 한다.
어렵게 찾아온 마음고생도 대청댐을 바라보는 순간 봄눈 녹듯 사라진다. 육지속의 바다처럼 푸른 숲속으로 파고드는 물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청남대가 산 모랑이 사이로 살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이 주변 환경이 빼어나다는 의견에 따라 1983년 6월 착공하여 6개월만인 12월에 완공한 “청남대”는 역대 대통령들이 여름휴가를 보내며 국정을 수행하던 곳으로, 2003. 4. 18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대덕구 미호동과 청원군 문의면을 잇는 곳에 형각진(荊角津)이란 나루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 대청댐을 건설하여 홍수를 예방하고 중부지방의 식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다목적 댐이다. 금강 수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대청댐은 1975년 3월 착공하여 1980년 12월에 완공된 중력식 콘크리트 댐으로 높이 72m, 길이 495m에 14억9,000만㎥의 저수용량과 9만kW의 발전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청댐 왼쪽언덕에 자리 잡은 물 문화관은 대청호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좋은 곳이다. 파노라마 영상과 물 박사 컴퓨터, 매직비전 등 물에 대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너른 광장에는 대청다목적댐준공기념탑이 있다. 울창한 수림과 전망 좋은 광장에서 금강 답사 길이 시작된다. 물 문화관에서 보무도 당당히 내딛는 발걸음에 거칠 것이 없고, 시원한 수림 속으로 조성된 자전거 길에는 금강 하구언에서 150km를 달려온 종주 팀들이 마지막 고비를 남겨두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자전거도로가 시작되는 표지판에는 금강하구언까지 145km를 알려주고 있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에 어느 사연이 담겨질지 자못 궁금하고 기대가 크다.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이 차윤주·윤도 효자정려각이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정려각은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이 아름드리 노송과 어우러진 전각이 과수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과수원을 가로질러 현장을 찾아가면 멀리서 바라보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을씨년스런 모습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향토문화재로 지정해 놓으면 무얼 하나, 안내문조차 없는 정려각에 단청은 퇴색되고, 거미줄이 덕지덕지. 게다가 과수원을 지키는 경비견이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접근하는 것조차 겁이 나서 되돌아서고 만다.
동생 윤도는 17세 때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인육탕을 끓여 완쾌시켰으며, 형 윤주는 20리길 어버이의 묘소를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하는 등, 차씨 형제의 효심을 기려 고종 28년(1891)에 세운 것이다. 정려 내용을 적은 두 개의 비를 세워 비각 내부에 보존하고 있을 뿐, 제대로 관리가 되지를 않아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잠시 후 취백정(濢白亭) 안내판이 나타난다. 제월당 송규렴이 벼슬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던 강학처의 처음이름이 渼湖新舍였다. 그 뒤 증손인 송재희의 아호를 사용하여 취백정으로 부르고 있다는데, 많은 시간이 지체된 관계로 현장을 답사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금강은 한강이나 낙동강에 비해 강폭이 좁고 수심이 깊다. 그러하기에 강 언덕에는 왕 버들이 습지를 이루고, 4대강 복원사업도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친환경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가 있다.
금강은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긴 강이며, 남한에서는 한강. 낙동강에 이어 3번째로 긴 강이다.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神舞山:897m) 북동쪽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 연기, 공주, 부여, 논산, 강경 등 10여 개 지역을 지나 군산만으로 흘러들며 발원지에서 금강하구 둑까지 397㎞가 이어진다.
금강으로 유입되는 주요하천으로는 진안의 정자천(程子川), 주자천(朱子川), 무주의 남대천(南大川), 금산의 봉황천(鳳凰川), 옥천의 보청천(報靑川)이 있고 대청댐을 지나 자전거 도로에서는 연기의 미호천(美湖川), 공주의 유구천(維鳩川)과 논산의 논산천(論山川)을 만날 수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지역에 따라 명칭도 달라, 상류로부터 적등강(赤登江), 호강(湖江), 차탄강(車灘江)이라 하고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로 내려오며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부른다. 강 상류는 지질구조가 복잡하여 험준한 산지를 지나며 하천들이 감입곡류(嵌入曲流)로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중하류로 내려오며 청주분지, 보은분지, 대전분지 등, 내륙분지와 논산평야, 미호평야 등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취백정을 지나며 새벽부터 서둔 탓에 시장기가 든다. 공원으로 조성된 大渼湖亭에 오르니 굽이쳐 흐르는 금강을 중심으로 농촌들녘이 평화롭고, 은륜에 몸을 싣고 달려가는 자전거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김밥에 막걸리, 한 잔술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白鷺酒라. 자연을 벗 삼아 팔도유람에 나섰으니 더 바라 무엇 하리.
대전시 대덕구에서는 대청댐에서 용정초까지 5km에 이르는 강둑을 자연그대로 보존하면서 나무 테크로 자전거와 보행할 수 있는 산책로를 만들어 “금강 로하스 해피로드”로 명명하였다. 왕 버들 늘어진 그늘 속으로 달리는 사람, 걷는 사람, 자전거까지 건강을 챙기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에서 행복을 찾는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가뭄으로 저수지 바닥이 쩍쩍 갈라진 모습과 하늘을 처다 보며 탄식하는 농부의 얼굴이 신문1면을 장식하고 있다. 4대강 복원사업으로 강바닥을 준설하고 수중보를 만들어 물을 관리하므로, 금년과 같이 가뭄이 심해도 물 걱정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治山治水야말로 나라의 根本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조정지 댐을 지나 몽선대에 도착하면 금강이 휘돌아가는 수십 길 벼랑위에 淸閑亭이 날렵하게 자세를 잡고 있다. 정자에 올라서면 시원한 강바람이 가슴속을 파고들며, 산수화의 진경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산줄기가 흘러내리는 곳에 노산리가 터를 잡고, 경운기 소리도 요란한 문전옥답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라. 너른 들녘을 등에 업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시간도 멈추고 만다.
옛날 이 마을에 류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 이곳 바위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선인이 되어 하늘로 올라 仙境을 구경하고 왔다하여 몽선대라 부르며 학을 타고 올랐다하여 학선대라 부르고 있다.
용정초등학교를 지나 현도교에 도착한다. 신탄진에서 청주를 이어주는 17번 국도가 지나는 교량이다. 금강 하구언으로 가는 자전거 종주 길은 필히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무심코 지나쳤다가는 갑천이 있는 대전시내로 빠지는 낭패를 보게 된다. 신탄진이라면 담배공장을 먼저 연상하게 되지만, 읍지나 고지도를 보면 회덕현 북면(서원북면)과 문의현(현도면 양지리)을 잇는 나루로 기록되어있다. 금강 하구에서 물길 따라 거슬러 新灘津(새여울)에 도착하는 대전의 북쪽 관문을 일컫는다.
현도교를 건너 장어구이집이 있는 장수정 맞은편에서 경부선철교를 지나는 양지지하차도를 빠져나오면 금강을 사이에 두고 솟아오른 고층 아파트가 대전의 번영을 상징한다. 대전(大田)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적했던 '한밭'마을이었으나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회덕군청이 이전하고, 1913년 대전에서 출발하는 호남선이 개통되어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부터이다. 해방 뒤 대전시와 대덕군으로 나뉘었다가 통합되어 대전직할시가 되었고, 현재는 중부권을 대표하는 인구 백오십만명이 상주하는 전국 5대도시로 발전하였다.
대전시를 관통하는 갑천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878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금강 남쪽 목상동으로 흘러드는 길이 62㎞의 하천이다. 갑천이 합류하는 여세를 몰아 강물이 몸을 뒤채며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대전 권역을 벗어나며 금강복원사업도 열기가 식어 보인다. 자동차가 다니는 갓길을 따라가다 보면 강변으로 내려서는 길은 먼지가 펄펄 날리는 비포장이고, 뙤약볕아래 가로수하나 없이 제방도 옛날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농촌건강 장수마을 시목리를 지난다. 경부고속도로 죽암휴계소로 많이 알려진 현도면 시목리는 감나무가 많아 감나무 골이라 부른다. 금강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언덕에 터를 잡은 마을에서 맑은 물과 좋은 공기마시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 한다. 강변의 고수부지에는 수확을 앞둔 감자밭이 흰 꽃으로 만발하고, 흐드러진 밤나무 꽃이 진동하는 마을 앞으로 자정능력이 뛰어난 갈대 습지가 금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매포역을 지나며 강물이 서남쪽으로, 북서쪽으로 감입곡류(嵌入曲流)하며 부용산업단지를 끼고 흘러내린다. 월송정 표지판을 지나면, 부용면소재지인 부강공단이 먼발치로 선을 보인다. 경부선이 지나는 부강역으로부터 남쪽 1㎞ 지점에 있는 부강 약수는 약 100년 전에 발견되어 초정약수, 명암약수와 더불어 부강의 3대 약수로 알려져 있다. 계곡의 바위틈에서 철 이온과 황화물이 함유된 탄산수가 흘러나온다. 용출량은 많지 않으나 피부병은 물론 위장병, 눈병 등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용면 소재지인 부강리에 도착한다. 조치원과 인접해 있는 새로운 행정도시 세종시와도 지근거리에 있고, 금강이라는 생명수가 남서부를 지나고 온천수까지 용출되고 있으니, 심신이 피로한 도시민들을 위해 전원도시로 개발하면 좋은 반응이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대청댐 22km. 금강하구언 124km. 세종시 12km이정표를 바라보며 조치원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2. 행정도시 세종
가슴속을 태우던 가뭄도, 세찬 폭우 속에 말끔히 씻겨 내리고 둔치로 넘실거리는 강물에서 생동감을 맛본다. 임진년 7월을 맞아 우리집안에는 큰 경사가 났다. 둘째 딸 미숙이가 결혼 한지 4년 만에 예쁜 공주를 순산한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사위 정모가 40이고 산모의 나이 38세에 얻은 보물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이다.
집안의 경사를 생각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한 줄을 모른다. 지난 6월27일 청주와 청원군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청주와 청원은 한 몸이면서 둘로 갈라져 기형적인 삶을 살아오는 도너츠형 도시라는 말이 실감나게 청주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청원이요. 모든 생활권이 청주에 있지 않은가.
66년 만에 숙원을 이룬 청주와 청원군이 옥동자를 분만하는 기쁨으로 축제의 분위기속에 들떠있다. 2년간 준비가 완료되고 나면 통합시로 거듭 태어나 인구 83만 명의 충청권 최대 기초자치단체로 탄생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집안의 경사와 내 고향 충청도의 경사가 겹쳤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의미가 깊은 것이 아닌가.
세종시로 편입된 합강리로 들어서면 合江亭이 반겨준다. 금강 8경으로 선정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새로 지은 정자다. 합강정 2층 누각에 올라서면 유유히 흘러온 금강과 미호천이 어우러지는 두 물머리가 시야에 가득하다. 왕 버들 무성한 수초사이로 백로들이 날아오르고,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보행교를 건너면, 공주(27km)와 청원(35km)으로 갈라지는 자전거도로분기점에 두강이 하나로 모아진다는 상징적인 조형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보현산(普賢山:482m)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미호천은 진천군을 지나 청원군 오창읍 신평리에서 청주 시내를 관통하는 무심천과 만나 미호평야를 일구고, 세종시 남면 월산리와 동면 합강리 사이에서 금강으로 흘러드는 길이가 89㎞에 이르는 제법 긴 하천이다.
미호천 기슭에 있는 함호서원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주자학을 전파한 고려시대 안향 선생의 영정(충남문화재자료 41호)을 모신 곳이고, 덕성서원은 임헌회를 배향한 사우(祠宇)로 창건되었다. 임헌회는 풍천(豊川) 사람으로 1811년(순조 11) 천안 직산면 산음리에서 태어나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뒤 방축리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합강정에서 독락정으로 내려오는 6km는 노적봉(181m)과 전월산 기슭을 따라 자연 늪지가 형성되어 四時節 철새들이 찾아드는 보금자리다. 4대강 살리기로 습지가 많이 사라졌지만, 이곳 만큼은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그나마 다행이다. 1번국도가 지나는 금남교를 목전에 두고 강기슭에 자리 잡은 독락정이 반겨준다.
고려시대 최영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고 공조전서를 역임한 임 난수 장군이 忠臣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둘째아들 양양도호부사 임목이 아버지가 머물던 자리에 지은정자다. 세종대왕께서 그의 충절을 기려 林氏家廟를 써주고 不遷之位로 모시도록 명하였으며 賜牌地로 羅城一丘江山을 하사하였다.
세종14년(1468)에 세운 독락정은 후손들이 지극정성으로 모신 까닭에 600년이 넘었지만, 옛 모습 그대로 단청도 선명하고 연기 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경관이 빼어나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감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금남교를 지나며 세종시개발현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 세종시는 2002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후보의 신행정수도공약으로 시작돼 헌재의 위헌판결, 수정안 논란 등을 거쳐 지난 7월 2일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탄생한 것이다. 원수산을 중심으로 전월산과 괴화산을 합하여 삼산(三山)을 이루고, 동쪽의 금강과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미호천이 이수(二水)가 되어, 산과 물이 어우러진 연기군이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서부개척시대를 연상하리만치 어수선한 공사현장에는 중장비들의 굉음소리가 요란하고 세종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한두리대교와 입주가 시작된 첫 마을 아파트단지가 선을 보인다. 세종시는 면적이 서울의 77%에 이르고, 2030년 까지 인구 50만의 행정 타운으로 발전한다는 계획이다.
안내 표시도 없이 인증센터부스가 나타난다. 영문도 모른 채 도장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세종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금강110km이정표가 반겨준다. 앉은뱅이 다리로 금강을 건너 남쪽 제방을 따라가며 세종시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의 의지가 세상을 바꾸고 상전이 벽해가 된다고 하지만, “행정도시 세종” 이 원래의 목표대로 발전할지, 아니면 용두사미로 변하고 말지 지켜볼 일이다.
금강 7경으로 선정된 세종보가 나타난다. 금강 3개보 중에서 가장 상류에 있는 세종보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자음 14개와 측우기 모양을 형상화하여 길이 348m(고정보 125m, 가동보 223m)에 높이 2.8~4.0m의 개량형 전도식 수문형태로 건설됐다. 일반 하천의 수중보처럼 단순하게 가로막은 것은, 세종시의 경관을 보호하기위해 간결하게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당진대전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금강교를 지나면 翰林亭이 나타난다. 平山申氏世居地로 소개하고 있는 한림정은 주위에 펼쳐지는 경관이 수려하고, 세종시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신 한림학사가 새 거주지로 정하고 이곳에 정자를 지으려고 제자들과 터를 닦고 있었는데, 술에 취한 사나이가 신 한림학사 앞을 지나자 숲속에서 꿩 한 마리가 갑자기 날아오르며, 놀란 말이 뛰어오르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금강 쪽 절벽으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불길한 예감으로 공사를 중단한 뒤, 그의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 한림정이라고 한다. (백제신문 인용)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물이 불티교와 만난다. 옛날 금강 하구에서 소금을 실은 배가 이곳 나루까지 올라와 짐을 풀면, 기다리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소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 불티나루라 불렀다고 한다. 이제는 주홍색 아치로 멋을 부린 불티교가 나루터를 대신하고 강물이 굽이치는 청벽에서 물살을 가르는 수상스키와 충남산림박물관 팔각정이 새로운 명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불티교를 건너 금암리 강변길을 따른다. 장맛비가 멈춘 틈새를 비집고 떠 오른 태양이 가마솥 열기를 쏟아낸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바람도 숨을 죽이고, 아스콘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와 습도가 합하여 40도가 넘는 한증막에서 숨이 턱턱 막힌다. 인간의 한계라는 극한상황에서 확고한 목표와 강한의지력이 없다면 견디기 어려운 고행이다.
TV에서 ⌜차마고도⌟라는 프로를 본적이 있다. 중국 서남부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 인도까지 이어지는 육상 무역로인데, 길이가 5000㎞에 평균고도가 4,000m 이상인 높고 험준한 설산(雪山)에서 수십 마리의 말을 이끄는 마방들과 오체투어를 하는 성지순례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쪽은 살아가는 생활수단이고, 다른 쪽은 극락정토를 찾아가는 성지 순례길이다. 극한상황에서도 자신의 삶과 정신세계를 찾아가는 모습은 처절하고도 엄숙한 모습이다.
어려운 난관을 뚫고 이루어낸 목적달성은 그 어느 것 보다도 소중하고 달콤한 열매가 아닌가. 이제 국토대행진의 여정도 ⅔를 지나고 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의지가 살아난다. 한 여름 한증막에서, 한 겨울의 눈보라를 헤치는 것도 내 마음을 다지는 경종이고, 체력을 길러내는 보양 책이다.
국립공원 계룡산으로 가는 청벽대교 밑을 지난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지금의 계룡시)에 도읍을 정하려고 할 때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요.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형국이라 닭(鷄)과 용(龍)을 따서 鷄龍山(845m)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광이 아름답고 고유 동, 식물들의 서식처로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기위해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이다.
청벽대교를 지나며 공주 시내가 아련히 바라보인다. 공주는 백제22대 문주왕이 하남위례성에서 왕도를 웅진(현재 공주)으로 옮긴 뒤,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성왕이 사비성(현재 부여)으로 천도 할 때까지 5대 64년 간 백제의 도읍지로 사용하던 곳이다. 공주는 금강기슭에 자리 잡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유서 깊은 고을이다. 고종 32년에(서기 1895년) 공주부를 신설하고, 1932년 도청소재지가 대전으로 이전할 때까지 충청남도의 수부로서 인근 27개 군을 관할하였다.
시내로 들어오며 금강 둔치에는 각종 체육시설과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신시가지에는 공주 교육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예로부터 공주를 교육도시라 지칭한 것도 공주교육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충청남도에서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주대-공주교대-충남대가 통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통합 후 세종시에 글로벌 융복합 캠퍼스가 조성되면 총 학생수가 4만9000명에, 천안, 공주, 대전, 세종시 등 충남권 각지에 캠퍼스가 있는 초대형 국립대로 탄생하게 된다.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을 찾아간다. 금강교 남쪽 곰나루 형상이 있는 소공원에 도착하면 금강 하구 둑 92km, 대청댐 53km 이정표가 반겨준다.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여 왕도를 지키던 백제산성이다. 정문인 금서루를 찾아가는 길옆으로 이고장의 자랑인 공덕비가 빼곡히 자리를 잡아 충효의 고장임을 대변하고 있다.
금강 변 야산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부른 성의 길이는 석성이 1,930m 토성 730m를 합하여 2,660m에 이르는 철옹성으로 금강의 기암절벽을 따라 축성하였다.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하던 임류각은 공산성에서 가장 큰 누각이고, 정상에 있는 광복루는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공산성을 방문하여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광복루가 있는 정상에서 이어지는 공산성 둘레 길은, 공주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절경이다. 금강이 있어 공주가 돋보이고 공산성이 있어 금강의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천혜의 요새인 성벽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면 백제의 사직과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듯, 과거와 현재가 금강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다.
3. 백제의 발자취
유순하게 지나가는 장마덕분에 틈새를 이용하여 백제의 발자취를 따라 3구간이 시작된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니 목마름에 갈증을 느끼던 나무들도 생기를 되찾고 녹음이 짙어진 길을 따라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 입구 교차로에서 무령왕릉 쪽으로 답사 길이 이어진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행운을 얻었지만 이 일을 어쩌랴. 매주 월요일은 고궁을 비롯한 문화재 관람이 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니, 담장 밖에서 눈요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의 배수구를 정비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분의 축조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하고, 도굴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삼국시대 고분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백제 25대왕으로 즉위한 무령왕이 무덤의 주인공이다.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하고,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는 한편,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고목성(高木城) 남쪽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중국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일본에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민생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하여 농사를 짓게 하는 등 백제부흥을 이룬 성군이다.
고분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봉토의 평면은 직경이 20m가량의 원형이고, 묘실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는데, 왕과 왕비를 합장하여 옻칠된 목관에 꽃 모양의 금 은제 장식으로 꾸며 각기 안치하였다. 장신구로는 왕의 것으로 금제 관장식, 심엽형 귀걸이, 은제 허리띠[銙帶], 금동 신발 등이 있으며, 왕비의 것으로는 금제 관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금 은제 팔찌 외에도 많은 수의 장식이 발견되었다.
2010년 세계 대백제전이 열렸던 국립공주박물관 광장에 도착한다.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라해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무령왕릉에서 백제연구에 귀중한 사료들이 출토되면서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공주박물관 1층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2층에는 구석기, 신석기, 철기시대를 거쳐 마한과 백제의 웅진,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통일시대까지 이 지역의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강기슭을 따라 노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곰 나루터는 옛날 한 어부가 인근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에게 잡혀가 부부의 인연을 맺어 두 명의 자식까지 두었으나, 어부가 도망가 버리자 이를 비관한 암곰이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475년 문주왕이 이곳으로 천도함에 따라 백제의 왕도가 되었고,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태조 23년에 공주(公州)로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곰나루는 백제 문주왕이 웅진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백제 역사의 중심 무대이자 관문이었다.
강 건너 정안면은 우리나라 밤의 70%를 생산하는 공주 밤의 특산지로 명성이 높다. 조선중기 어느 대갓집에 무남독녀가 살고 있었는데, 무럭무럭 자라서 과년한 나이가 된 선비의 딸이 밤만 되면 타오르는 정염을 주체하지 못해 이웃집 총각들을 방앗간으로 불러들였다.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던 선비의 꿈에 뒷산밤나무 밭에 집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라는 현몽에 따라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얌전한 요조숙녀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잠시 후 금강 6경으로 선정된 공주보가 웅장한 모습을 선보인다. 고마나루 솔밭을 배경으로 조성된 공주보는 길이가 280m(가동보 238m, 고정보 42m)에 높이가 7m에 달한다. 공주시가 간직해온 역사문화를 토대로 백제의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은 무령왕의 부활을 꿈꾸며 백제의 황제를 상징하는 봉황을 형상화한 구조물이다. 공주시 우성면과 웅진동사이를 가로막은 공주보는 가동보와 고정보 콘크리트 중력식이다. 마무리공사가 한창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지나는 웅진대교를 지나면 공주시 사곡면과 신풍면 경계에서 발원하여 우성면을 지나온 유구천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두 물머리에 이른다. 하천의 길이가 16㎞에 불과하지만 충청남도 산간 오지를 지나오는 탓에,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에 한곳으로 선정된 오지마을이다.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굶주림과 전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한다.
참고로 전국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풍기豊基 금계촌(경상북도 영주시) 2. 봉화奉化 내성촌(경상북도 봉화군)
3. 보은報恩 증항촌(충청북도 보은군) 4. 남원南原 운봉 동점촌(전라북도 남원시)
5. 예천醴泉 금당동(경상북도 예천군) 6. 공주公州 유마지방(충청남도 공주시)
7. 영월寧月 정동 상류(강원도 영월군) 8. 무주武州 무풍 북동쪽(전라북도 무주군)
9. 부안扶安 호암(전라북도 부안군) 10. 가야산伽倻山 만수동(경상북도 성주군)
백제큰길을 따라 백제보까지 25km는 야생화단지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꽃의 개망초와 달맞이꽃을 중심으로 화려한 색상의 이름 모를 꽃들이 그 넓은 둔치를 가득 메운다. 왕 버들 숲 사이로 수초가 어우러지고, 꽃을 찾아 모여드는 벌 나비와 새들의 천국이다.
견동리 둔치에 이르면 금강하구까지 72km 표지판이 반겨준다. 자전거 도로중간 지점이다. 삼복더위의 열기 속에서도 분전하는 보람이 있어 절반을 지나온 셈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같이 대청호를 출발할 때는 아득하게 멀어만 보이더니, 하구 둑이 가까워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의지가 샘솟는다. 넓어진 강폭에다 백제 보에서 차오른 강물이 육지속의 바다를 이루고, 강 건너 천내리의 강촌마을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분강 양수장을 지나면 부여군이다. 가장먼저 반겨주는 마을이 신정리이고, 새로 건설된 왕진대교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청양군 청남면과 부여군을 잇는 주요 교통로인 왕진나루는 백제 때 왕이 다녀간 곳이라 하여 왕진나루로 부른다.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와 부여의 삼각지점에 있어 사비성의 외곽나루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하다.
청양군의 특산물을 이곳에서 운반하고 강경이나 군산에서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지경이라 7-8월에는 제주도에서 새우젓배가 왕래하는 등, 부근 10여개 나루 중에서 가장 번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왕진대교를 건너 청남면을 지나면 도립공원 칠갑산 가는 길이다. 칠갑산은 차령산맥이 지나는 중심에 솟구친 산으로 산장로, 천장로, 사찰로, 장곡로가 사방으로 뻗어 내리며 산세가 험하여 충남의 알프스라 부른다.
부여읍 지석리에 도착하면 강어구의 아담한 야산 기슭에 청강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재 107호로 지정된 청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을 지낸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높은 뜻을 기려 인조7년(1629년)에 건립한 서원이다. 선생은 이이와 성혼의 가르침을 받았고 1588년 알성문과 장원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1591년 사화로 물러난 후로 우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고종5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것을 1966년 지방 유생들과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금강이 웅진을 지나 사비성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백제보를 막았다. 강폭이 넓은 지역에 막은 백제보는 길이 311m(가동보 120m, 고정보 191m), 높이7.2m의 보를 설치하고, 680m의 공도교를 가설하여 청양지역과 부여지역을 연결해 주고 있다. 백마강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계백장군이 백마강을 굽어보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백제보가 이루는 치수개념을 현대적인 수문장 이미지로 표현했다고 한다.
수십 길 절벽위에 자리 잡은 전망대주차장에는 백제의 예술품을 형상화한 화강암과 검은 오석으로 조화를 이룬 분수대가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반가사유상과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조형미가 마음에 와 닿는다. 공항의 관제탑처럼 높은 전망대는 낙동강 달성보와 함께 조형미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3층 전망대는 승강기가동이 중단된 탓에 걸어서 올라가는 수고를 한꺼번에 풀어주고도 남을 만큼 멋진 장면들이 펼쳐진다.
백제보와 금강문화관을 한눈에 굽어볼 수가 있고, 강 건너 청남면의 문전옥답과 멀리 공주에서 내려오는 금강을 중심으로 둔치의 각종 위락시설과 자왕리의 넓은 들을 덮고 있는 비닐하우스가 장관을 이룬다. 남쪽으로 백마강의 물줄기가 낙화암을 휘돌아 사비성으로 흘러가는 정경은 백제의 700년 사직이 살아 움직이는 듯, 아련한 향수 속으로 빠져든다.
백제보를 뒤로하고 강줄기를 따라가면, 백마강교를 건너 백제문화단지가 있는 규암면 쪽으로 진행한다. 백제역사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17년간 충청남도 부여군 합정리 일원에 백제왕궁인 사비궁과 백제의 대표적 사찰인 능사를 비롯하여 백제초기의 궁성인 위례성, 백제의 대표적인 고분공원과 백제 숲이 조성돼있다.
특히 2010년 9월 18일부터 1개월간 개최된 세계대백제전은 수백만 인파들이 다녀간 우리나라 3대 문화축제로 승화되었다. 온조왕이 위례성(서울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여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약 700년 동안 고유한 문화를 꽃피워 동북아 문화교류의 중심역할을 했던 해상 강국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승리자의 손을 들어주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백제역사가 왜곡되고 축소된 것을 이번기회에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역사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이자 최고의 역사박물관이다. 규암면 소재지에서 40번 국도를 따라 백마강을 건너 부여읍으로 들어선다. 백마강을 건너는 커브 길에서 아스콘 바닥에 흘러내린 왕사를 잘못 밟으며 콘크리트에 무릅을 찧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사고다. 응급처방을 해보지만 낭자하게 흐르는 피를 막을 방법이 없어 인근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집에 돌아와서도 완치될 때까지 한 달간 고통의 나날을 보냈으니, 사고에는 예고가 없고 한순간의 방심이 큰 화를 자초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4. 백제의 한(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서연이가 의정부생활을 정리하고 보금자리인 수서로 가는 날이다. 육아일기에 어설픈 어미가 미덥지 않아 백일까지라도 보살펴 준다는 마음으로 취미활동을 뒤로 미루고 오직 서연이를 위해 올 인하기로 하였다. 야심차게 추진하던 국토 대행진도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덕분에 삼복더위도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9월이 되었으니 운동하기에는 가장 좋은 계절이다.
부여는 남부 터미널에서 2시간 10분이면 도착하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다. 백제는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기원전 18년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기슭의 위래성에 도읍을 정하고 490여 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례성에서 밀려나 538년까지 60여 년간 백제의 수도로 사용하던 곳이 웅진이요. 성왕 16년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간 사용하던 도읍지이다.
부여 읍내로 들어서면 중심가 로타리에 성왕의 동상이 있다. 광화문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부여에는 성왕이 있어 백제 인들의 긍지를 높여주는 곳이다. 성왕은 백제26대 왕으로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중흥을 위해 538년 사비(泗泚)로 천도하여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쳐 부르고, 554년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고 한강 유역을 회복했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회복된 영토를 신라에 빼앗기자 신라를 공격하다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하였다.
사비성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있는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사적 제5호로 지정된 부소산성은 둘레가 2,200m에 면적이 약 74만㎡로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흐르는 백마강과 함께 어우러진 절경이다.
성왕동상이 있는 로터리에서 부소산성 매표소까지는 100m 남짓한 가까운 거리다. 월남에 참전한 경력으로 국립공원이나 유적지를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특혜를 받고 보니 국가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산문을 지나면 곧바로 동헌이 나오고 오른쪽 오솔길을 따르면 삼충사가 반겨준다. 폭정을 일삼던 의자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우국충정으로 마지막 혼을 불사른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의열문(義烈門)을 지나면 충의문(忠義門)이 나오고, 그 뒤로 영정을 모신 사당(삼충사)이 있어 중앙에 흥수, 왼쪽에 성충, 오른쪽에 계백의 영정을 나란히 모시고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던가. 삼충사의 충언을 가납하여 나라를 돌보았더라면 백제의 역사는 새롭게 쓰였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전시에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사용하던 사비성은 많은 문화유적지가 산재하여 부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곳이고, 이곳주민들에게는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사비 길로 명명된 오솔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노약자도 쉽게 오를 수가 있다.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국정을 계획했다는 영일루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라 그대로 지나치고, 노송이 어우러진 군창지를 지나 반월루 2층 누각에 올라서면 부여 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좋은 곳이다. 후원을 거닐다가 반월루에 올라 백성들이 살고 있는 도성을 굽어보며 국정을 구상하고, 교교히 흐르는 달빛을 벗 삼아 시조한수 풀어내는 왕족들의 모습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오늘의 행로가 만만치가 않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가쁜 숨을 몰아쉬면 곧바로 사자루에 오른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2층 누각에 올라서면 사면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울창한 나무숲에 가려 전망이 신통치를 않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낙화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106m에 불과한 부소산이지만 낙화암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다. 층층계단을 내려서면 기암괴석위에 날렵하게 올라앉은 백화정이 반겨준다. 1929년 당시 군수였던 홍한표의 발의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소동파가 혜주에 귀양을 갔을 때 성 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榭百花州)라는 시에서 취해왔다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배경으로 강 건너 백제문화단지와 부소산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가파른 계단을 좀 더 내려가면 낙화암이다.
백마강과 낙화암은 백제를 지켜주는 보루였지만, 종말을 알리는 비극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수십 길 벼랑위에서 내려다보는 절벽은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급경사를 이룬다. 꽃잎처럼 스러져간 삼천궁녀의 혼이 서려있는 낙화암은 충주의 탄금대와 함께 우리역사에서 가슴 아픈 현장이다. 두 곳 모두 수심이 깊은 한강과 금강이 흐르고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배수의 진을 친 신립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한곳이 탄금대이고, 백제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낙화암이다.
씁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사자루가 있는 정상으로 되돌아와 구드레나루 쪽으로 내려선다. 금강에 산재한 100여 곳의 나루터 중에서 웅진과 함께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이었다고 한다. 「구드레」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하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레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드레나루터에는 황포돛배로 백마강을 유람할 수 있는 선착장이 있고, 2010년 백제대전을 기념하여 조성해놓은 조각공원을 중심으로 자전거도로와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천연잔디로 조성된 축구연습장이 있어 학생들의 체력단련은 물론, 타지방 학생들의 전지훈련장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 건너 부소산을 바라보며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면 부여읍과 규암면을 연결하는 백제대교와 만난다. 대청댐에서 내려오는 자전거도로도 백제문화단지를 지나 규암면소재지에서 백제대교를 건너 금강하구 둑으로 이어지며, 백제대교 남단에는 대청댐 88km, 금강하구 둑 55.4km 이정표가 반겨준다.
불교전래 사은비와 선화공원이 있는 부여대교를 지나며, 백마강이 동쪽으로 몸을 틀어 석성면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사비의 혼이 흐르는 백마강 비단물길” 표지 석을 지나면서 인적도 별로 없는 한가로운 둔치에는 멋없이 자란 망초대가 숲을 이루고, 맹꽁이 서식처 입간판이 반겨준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요란하게 울어대는 맹꽁이는 수놈이 암컷에게 구애하는 표현방식으로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울어댄다고 한다. 환경부 멸종위기종(2급)으로 지정된 맹꽁이는 주로 땅속에서 생활하며 장마철인 6~8월 사이에 이곳 웅덩이에 알을 낳는다. 참개구리가 부화하는데 10일이 걸리지만 맹꽁이는 2일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만큼 주위에 천적이 많고 생존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꽁이는 땅속 10cm깊이에서 동면하며 양분이 글리코겐이라는 단백질로 변해 혈관 속에서 부동액 역할을 하여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특이 체질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강 건너 장암면에는 성흥산성이 있다. 백제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해 금강 하류에 쌓은 석성으로 산 정상에서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이다.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 드리는 사당이 있고, 장하리에 있는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으로 자연석에 가까운 바닥 돌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로 너비를 좁히면서 3단의 기단(基壇)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또한 금강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언덕에는 조선시대 과천현감을 지낸 난재(蘭齊) 조태징(趙泰徵) 선생을 배향한 흥학당(興學堂)이 있다.
둔치로 진행하던 자전거길이
논산 23km이정표를 지나며 제방위로 올라선다. 단조롭고 지루하던 여정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현북리 일대의 문전옥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허나 이일을 어쩌랴. 지난 8월 28일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으로 비닐하우스가 갈기갈기 찧어지고 농경지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농민들의 심정이 오죽할까. 사람도 날아갈 정도로 순간풍속이 51m에 많은 비를 동반한 볼라벤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며 가뭄을 극복하고 거둔 결실이 한순간에 초토화되고 말았으니... 물 빠진 농경지는 멍게 흙으로 범벅이 되고, 갈 갈이 찢겨진 비닐하우스는 엿가락처럼 뒤엉켜있다. 출하를 앞둔 과수원의 사과와 배들이 밭고랑에 수북하게 쏟아져 내리고, 경천동지할 현실 앞에서 농민들의 가슴이 미어지고 만다.
참담한 현장을 바라보며 무거운 발길을 이어가면 현북 양수장을 만난다. 현북리 일대의 문전옥답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양수장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금강은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하다. 부여의 백마강에서 흘러온 강물이 넓은 호수를 이루고, 수초가 무성한 강변에는 철새들이 둥지를 틀어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든다.
협소한 벼랑길에는 나무테크로 다리를 놓고 시원하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동안 마음도 안정을 되찾는다. 꿀맛 같은 2km를 지나고 나니 또다시 폭염속의 뙤약볕 아래로 내몰리고 만다. 대청댐 기점100km 표지를 지나며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만은 천리라도 달려갈 기세다. 그래서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매사를 긍정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힘도 덜 들고 능률도 배가되지만, 마지못해하는 피동적인 생각은 금새지치고 결국에는 포기하고 마는 실망스런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부여와 논산이 접경을 이루는 석성천을 지나며 금강하구 둑 40km 이정표를 만난다. 활등같이 휘어진 제방길로 올라서면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너른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풍년을 기약하던 문전옥답이 태풍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좌절과 실의를 이겨내려는 극복의 현장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군인들의 모습이 마음 든든하다.
불암산 기슭을 돌아 개척리 제방에 올라서면, 강경읍의 고층아파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58㎞를 흘러온 논산천이 금강과 어우러지는 두 물머리 강어귀를 막아 개척리와 삼호동 앞뜰에 수 십 만평의 옥토를 일구었으니 광활하게 펼쳐지는 평야가 장관을 이룬다.
논산 천을 건너 마주하는 곳이 옥녀봉공원이다. 물이 너무도 깨끗하여 옥황상제의 딸이 내려와 목욕을 하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올라오라는 재촉에, 급한 나머지 앞가슴을 내놓고 올라오는 딸을 보고 화가 난 옥황상제가 딸에게 거울하나만 주고 땅에서 살게 했다. 옥녀는 슬픈 나머지 울다 지쳐 지상에서 죽게 되었는데, 묘처럼 봉우리가 생겨 이곳을 옥녀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강하구 둑 36.7km 이정표를 지나 유람선과 등대모형으로 만든 “강경젓갈전시장”앞에서 금강 제4구간을 완료한다. 부소산성과 금강답사 20km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강경역에서 14시 41분에 출발하는 호남선 무궁화호 편으로 상경하여 양천문학회 시화전까지 참석하였으니 정말로 보람 있는 하루였다.
5. 금강 하구언
2개월 만에 찾아온 강경 뜰은 추수가 끝난 터라 황량하지만, 김장철을 맞아 분주해진 젓갈시장이 강경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 1930년까지만 해도 강경시장은 금강의 강경포구를 통해 서해에서 잡은 고깃배들이 드나들며 서해 수산물의 최대시장으로 발전하여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성시를 이루었다.
전국의 도매상과 보부상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파시를 이루던 강경에도 강심이 낮아지고, 금강 하구언에 뚝 을 막으면서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1978년을 마지막으로 강경포구에는 더 이상 새우젓 배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읍민들이 강경의 옛 영화를 찾아야한다는데 뜻을 같이하여, 1997년 제1회 강경전통맛깔젓축제를 개최하여 강경의 문화적 명성을 되찾고, 1930년대 성시를 이루었던 강경의 수산물 및 젓갈시장을 활성화하는데 성공하여 2008년 현재 전국 젓갈시장의 60%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젓갈의 효시는 지금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는 등짐장수들이 다리품을 팔며 전국의 오지까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선이 상하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염장법을 개발하여 각종생선을 소금에 절인 젓갈과 수산가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젓은 각종 어패류의 살, 알, 창자 등을 소금기 있는 양념에 절여 삭힌 저장식품이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반찬 또는 조미용으로 사용된다.
젓갈시장을 뒤로하고 제방으로 올라서면,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물결 따라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황산리는 금강 변 구릉지대에 있는 곳이라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에 조선 기호유학의 거장인 김장생과 송시열이 후학들을 가르친 정자와 그들을 배향한 죽림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죽림서원은 1626년(인조 4)에 처음으로 건립되어 1663년(현종 4)에 중건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665년 사액되었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 또한 서원에 제향 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했다.
대나무와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임리정은 고요한 정적 속에 금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임리정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건립하여 후학들에게 강학하던 곳으로 원래는 황산정(黃山亭)이라고 하였으나,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의하면 『시경』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어름을 밟는 것같이 하라”는 구절을 따라 임리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스승인 김장생이 임리정을 짓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은 마음에서 송시열이 건립하였다고 하는 팔괘정.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지는 팔괘정은 송시열이 죽림서원에 배향되자 죽림서원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또한 암벽에 각자된 靑草岸은 송시열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대둔산과 금강의 정기를 받은 논산은 계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충과 효의 고장이다.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여 인심 좋고 풍요로운 논산을 사랑하자는 의미에서 “함께하는 시민, 번영하는 논산”의 슬로건아래 2읍 11면에 인구 십 삼만 천여 명이 살고 있다.
논산은 일찍이 한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이 발달한 예학의 본산이요. 기호학파의 근원지로 알려진 고장이다. 사계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의 예학, 양명학의 학문적 원천이 된 노서 윤선거와 명제 윤증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후진들을 양성하고 이분들이 남긴 학문과 예법, 그리고 선비다운 삶의 실천을 한데 묶어 선비정신이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무너져 가는 백제를 구하기 위해 충정과 목숨을 바친 계백과 더불어 성충, 홍수의 정신은 외세침략을 막기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이었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국난과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이 고장의 열사와 지사들은 광복과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백제사에서 논산이 특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백제 역사상 최대의 격전이자 국운을 걸었던 황산벌 전투(연산지역)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황산벌 전투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여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도성 사비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전선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국 이 전투의 패배로 백제는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오천 결사대의 함성이 메아리치는 황산벌에 신병훈련소가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나라의 방패를 길러내는 요람으로써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의 남성이라면 눈물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육군훈련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는 기초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교육부대로 1951년 11월 '육군 제2훈련소'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제1훈련소는 제주도 모슬포에, 제3훈련소는 경상남도 거제도에 있었다. 한국전쟁 후 제2훈련소를 제외한 모든 훈련소가 폐쇄되고, 대한민국 육군의 모든 신병 기초군사교육을 이곳에서 실시하였다. 연무대(鍊武臺)라는 휘호도 설립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부여했다고 한다.
황산대교를 지나 전라북도 익산시로 들어서면 화산리에서 난포리까지 금강의 물길이 넓어지며 흐름도 멈추어버린 듯, 어머니의 품속처럼 평화롭고 포근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현지사정은 격양가만 부르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높은 주민들의 고민을 어찌 외면 할 수 있으리오.
금강줄기를 바라보며 조상 대대로 터전을 일구어온 토박이들이 4대강 살리기라는 국가시책에 의해 수용된 전답 수 십 만평이 전시행정의 표본인 갈대숲으로 조성되어 황금벌판을 이루고 있으니, 타는 속을 그 누가 알겠는가.
인구도 별로 없는 강촌마을 고수부지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생활체육공원을 만들면,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관리비는 어찌 감당할지. 반만년 역사 이래 최대공사로 치적을 쌓고 싶어 하는 정부에서 물먹는 하마처럼 애물단지로 전락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지난달에는 수 십 만 마리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는 수난이 일어나자 현지 주민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4대강 홍보대사로 부를 만큼 4대강 살리기의 당위성을 주장해왔지만,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너무 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부곡 천을 건너면 성당포구 금강체험관이 반겨준다. 이곳에는 애초에 없던 인증센터도도 다시 생겨나고, 강과 산, 포구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소공원을 조성하여 벼랑을 피해 우회로를 찾아가는 메니아들이 힘을 비축하기위한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대청댐 119km, 금강하구 둑 25km이정표를 뒤로하고 성당마을을 휘돌아 이어지는 우회로는 “백제의 숨결 익산 둘레 길”로 명명된 오솔 길이 전개되어, 완만한 경사에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팔도유람에 나선 나그네의 시한수가 떠오를 정도로 고즈넉한 사색의 길이다.
마한, 백제시대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익산시는 인구 31만 명이 살고 있는 전라북도 중심도시다. 100년의 철도역사와 함께 교통물류중심도시로서 호남선이 지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장항선이 동서로 통과하는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익산시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기양리에 있는 미륵사지를 꼽을 수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로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 삼존이 나타나자, 왕비의 부탁으로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는데,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로는 부처를 모신 금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귀중한 보물로서,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 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우회로를 벗어나면 대붕암리 제방과 만난다. 3km가 넘는 제방을 따라 웅포대교에 도착하여 그대로 직진하면 군산(18.5km)하구언에 이르고, 웅포대교를 건너면 서천(20km)하구언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군산하구언에서 서천 쪽으로 건너오는 번거로움보다는 웅천대교를 건너 신성리 갈대숲을 보는 것이 정석이라는 생각에 1,242m의 웅포대교를 건넌다.
또다시 부여 땅으로 들어선다. 양화면 시음리 벼랑길 2km를 지나면, 서사천을 사이에 두고 서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서사천은 복심저수지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14㎞를 흘러와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에서 금강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쌓인 퇴적물이 아름다운 갈대숲을 형성하여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 갈대 7선”으로, “금강 제2경” 으로 손꼽히는 명소가 되었다.
때마침 갈대축제 기간이라 많은 인파들이 갈대숲속을 거닐며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12월이면 수 십 만 마리의 겨울철새들이 찾아와 신성리 갈대숲을 뒤덮는다고 하니 상상만으로도 그 황홀경에 도취되고 만다. 2읍11면에 인구 6만 명이 살고 있는 서천군은 금강의 역사와 문화가 시작되는 곳이고, 교류가 시작되는 창구역할을 한다.
장항제련소라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던 공장이 아닌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광물을 수탈하기위해 건설한 금 제련소가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던 장항이 하구언공사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고 만다. 하지만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의 서천군. 그 중심에 한산 이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는 한산면이 있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한산모시는 우리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전통 옷감으로, 그 역사는 1500년 전인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산지방의 한 노인이 건지산에 약초를 캐러갔다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여 이를 재배하여 모시를 짜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예종 때에는 한산지역의 생저를 토산품 공물로 지정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여름 전통옷감이다. 모시섬유 비중이 면보다는 무겁지만, 내구성과 열전도율이 높고 땀 흡수와 발산이 잘돼 여름철 옷감으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는 한산모시전시관이 있어 우리조상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가 있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제작기술을 보호하고자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으며, 한산모시 짜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여름철 천연섬유 옷감으로 가장 많이 선호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지방에는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한산소곡주가 있다. 백제때의 궁중 술로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빚어 마셨다고 한다. 소곡주는 찹쌀을 빚어 100일 동안 익힌다. 이때 며느리가 술맛을 보느라고 젓가락으로 찍어 먹다보면 저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고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 부르는 한산 소곡주는 술맛이 독특한 민속주로 정평이 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는 금강대교를 지나며, 5km, 4km, 3km 카운트다운이 시작 된다. 대청댐에서 시작된 144km가 어느덧 금강하구 둑을 2km 남겨둔 지점에서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천리 물길의 고단한 여정을 마무리하는 서천군 조류생태전시관에 도착하며 금강자전거길 답사도 종지부를 찍는다.
때마침 서천 철새여행 동아리에서 “금강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11월 15일부터 4일간 철새 축제를 열어, 김영희 총무의 안내로 철새 동아리의 활동상황과 전국최대의 철새도래지인 금강의 변화된 모습을 참관하며, 금강 지킴이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들이 부럽기만 하다.
'나의 작품세계 > 물길따라 삼천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 진 (0) | 2013.05.30 |
---|---|
제7부 : 영산강 (0) | 2013.05.24 |
제5부 : 낙동강 천리 길 (0) | 2013.05.21 |
제4부 : 문경새재 (0) | 2013.05.21 |
제3부 : 북한강 (0) | 2013.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