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한강 르네상스
1.경인 아라 뱃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아라 뱃길. 정부정책의 당위성과 환경론자들의 첨예한 대립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를 수차례.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로 기록되는 아라 뱃길은 각 지방의 조세를 한양으로 운반하기위해서는 꼭 필요한 물길이었다. 800여 년 전인 고려 고종 시절부터 항로를 개척하기위해 실권자인 최충헌이 인천 앞바다와 한강을 직접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근세에 들어와서도 운하의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에서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사를 추진하여 45년 만에 개통을 본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과 연계하여 추진한 사업이 결실을 보아 자연환경(한남정맥)의 파괴와 경제성논란을 잠재우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관문인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연도에 고속도로와 지하철에 운하까지 구색을 갖추어 외국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위상을 보여줄 수 있는 상징성이 크다고 하겠다.
나의 야심찬 목표가 4대강을 이어가는 국토대행진으로 정해진 만큼. 시발점을 아라 뱃길의 인천 선착장으로 정하고 답사 길에 나선다. 김포에서 인천 쪽으로 답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람선을 승선한다는 계획으로 개화산역에 내렸지만, 터미널까지 운행한다는 셔틀버스를 찾을 길이 없다. 한강이 가까워질수록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고속도로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빤히 건너다보이는 선착장을 바라보면서도 접근을 할 수가 없다. 큰 장벽을 바라보며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전호리 수송도로 삼거리까지 진행하여 39번 국도를 넘어서며 큰 고비를 넘긴다. 부대시설 공사로 어수선한 강변길을 더듬어 가면 비로소 아라 뱃길 터미널 건물과 자전거도로를 만난다.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지만, 서해와 한강을 이어주는 운하를 바라보는 순간 모든 근심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바둑판처럼 조성된 운하의 길이가 18km에 폭이 80m, 깊이6.3m의 뱃길이 열린 것이다. 운하를 가운데 두고 조성된 자전거 길은 갈색 아스콘으로 단장을 하고 초록색보도와 어울려 고속도로처럼 거침이 없다.
전호대교를 시작으로 16개의 다리가 걸려있는 수로는 두꺼운 빙판으로 변하여 철새들도 몸을 움츠리는 동토의 세계가 펼쳐진다. “천년 뱃길의 꿈, 미래를 타고 흐른다.” 오랜 세월의 염원이 이루어진 아라 뱃길에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시작되고, 백운교와 나래교를 지나면 풀라잉 가든과 만난다.
풀라잉 가든은 김포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근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사진을 직접 찍을 수 있도록 전망대를 겸하여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서쪽으로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이 대양으로 향하는 등대처럼 인천과 김포평야를 보듬어 안고 있다. 두리나루에 도착하면, 대형형광판에서 아라 뱃길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잠시 후 등대공원에 도착한다.
등대공원은 아라 뱃길과 굴포천이 만나는 곳에 등대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전망 테크를 만들었다. 굴포천(掘浦川)은 인천광역시 부평구 만월산 칠성약수터에서 발원하여 부천시를 거쳐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태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총 길이가 17.8km에 이르는 하천이다.
87년 굴포천 유역의 대홍수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면서 방수로를 신설하여 홍수량 일부를 서해로 방류하는 내용의 굴포천 치수대책을 수립하게 된다. 굴포천 유역의 40%가 한강 홍수위 이하의 저지대로, 평상시에는 하천물이 한강으로 흐르다가 홍수가 나면 한강수위가 굴포천 수위보다 4m이상 높아 자연배수가 불가능하므로, 홍수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서해로 직접 방류하는 방수로건설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아라 뱃길에는 수향 8경을 선정하여 아름다운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수향이란 물길이 아름다운 지역이나 하천 주변의 마을을 의미하며, 그 중에 6경이 두리 생태공원이다. 굴포천이 만나는 곳에 조성한 두리 생태공원은 자연친화적인 놀이터로서, 평상시에는 생태학습장으로 활용하다가 홍수가 나면 저류지로 수위를 조절하게 된다.
운하에 걸려있는 16개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양대교는 수향5경인 수향원과 어우러진 조형미를 자랑한다. 다리를 상징하는 네 개의 교각에는 승강기가 설치되어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하고 있다.
인근에는 공항철도와 인천지하철을 환승할 수 있는 계양역이 있어 아라 뱃길로 진입하는 접근성이 뛰어난 곳이다. 다음에 도착하는 곳이 목상교다. 아라 뱃길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수향4경이 있는 곳으로, 국내 제일의 인공폭포와 원형전망대가 있어 강심을 타고 흐르는 유람선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시설물이 영하의 기온 속에 가동이 중단되어 을씨년스럽지만, 지하수가 흘러나온 응달 편으로 수 십 길 빙벽이 생겨난 것도 겨울이 아니면 볼 수없는 진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은 환경론자들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곳이다. 안성시 칠장산에서 김포시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이 지나는 원통이 고개다. 178km를 이어오는 정맥이 이곳에서 깊은 운하로 단절되고 말았으니 애석한일이다. 고려시대 운하공사 중에 원통현 구간 400m의 암석층을 뚫지 못해 결국 운하건설이 실패한 것도 바로 이곳이다.
양쪽으로 수십 길 단애를 이룬 아라 협곡을 빠져나가면 수향3경인 시천 나루에 도착한다. 인천시 서구 검암동과 백석동을 가운데 두고 펼쳐지는 시천 공원은 바닥을 흐르는 물길과 바닥에서 솟아나는 바닥 분수, 봉수마당, 매화동산, 가족소풍마당 등 테마별로 놀이공간이 조성되고 강 건너 드림파크 야생화단지가 있어 볼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
계양대교와 함께 전망대를 갖추고 있는 시천 대교는 아름다운 외형과 함께 다양한 조명을 연출한다. 공항철도의 검암역에서 하차하여 셔틀버스를 이용한다면 인천터미널로 연결된다. 또한 인천지하철 2호선 예정지역이라 아라 뱃길의 랜드 마크로서 시천 나루의 장래성이 기대되며,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이 가능한 지역이다.
신공항 요금소가 있는 백석교를 지나며 수도권 매립지 관리공사 건물이 시선을 끈다. 2천만 수도 시민들이 사용하고 버린 쓰레기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안일한 생각으로 쓰레기를 마구 버린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쓰레기더미 속에 묻혀 신음 하는 날이 올 것이니, 생활쓰레기를 배출할 수밖에 없다면 그 양을 줄여서라도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8km를 이어온 자전거 길도 청운교아래서 끝이 나고 인천터미널 전망 탑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지만 육중한 철조망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터미널을 지척에 두고 부대시설 공사로 분주한 벌판을 가로질러 1km가 넘는 길을 돌아 터미널에 도착한다. 아라 뱃길의 홍보관을 겸하고 있는 아라리움에는 뱃길의 역사 및 문화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모아 홍보물을 전시하고, 15분짜리 만화입체영화를 상영하여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아라 뱃길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있다.
유람선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터미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23층(71m)의 아라타워에 올라간다.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대는 인천앞 바다와 영종대교, 서해바다와 운하를 연결하는 갑문이 발밑으로 내려다보이고, 수향2경으로 명명된 공원의 아름다운 조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인천 연안 부두에서 출발한 유람선이 갑문을 통해 운하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바다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해주는 2개의 갑문이 있어 바다에서 운하 쪽으로 배가 들어올 경우, 바다와 갑문의 수위가 같아지기를 기다려 배가 들어온 다음 바다 쪽의 갑문을 닫는다. 그다음 갑문의 수위와 운하의 수위가 같아지기를 기다린 다음 운하 쪽의 갑문을 열어 배가 운하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황포돛배모양의 통제소에서 지시를 받는 갑문의 규모는 길이가 31m에 높이가 19m, 갑문의 무게가 무려 1,500여 톤에 이르는 육중한 문으로, 갑실의 길이가 210m에 폭이 28m에 이른다. 우리가 타고 갈 현대유람선 하모니호는 길이가 60m에 700톤급으로 650여명이 승선할 수 있는 규모로, 동절기라 관광객이 적은 탓에 하루에 한번 씩만 운행하고 있다.
동장군의 기세로 아라 뱃길도 결빙이 되었지만, 유람선의 뱃고동 소리에 부서지는 얼음조각. 둔탁한 굉음소리에 뱃길이 열리니, 마치 북극해를 찾아가는 탐험선과 같이 겨울이 아니면 체험할 수 없는 스릴을 맛본다. 선상에서는 러시아 무용수들의 공연이 무르익고, 조금 전에 걸어왔던 그 길을 유람선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자기만족이요 자아실현이다.
인천 앞바다에서 시작한 국토대행진이 한강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나라사랑의 징표로서, 백두대간 종주가 우리 몸의 뼈대를 이루는 등줄기를 따라가는 것이라면 4대강 답사는 혈관을 따라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찾아가는 답사 길이라 하겠다. 내 나이 69세 로 늦은 감이 있지만, 무사히 완주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
2. 한강의 기적
김포선착장과 마주보고 있는 행주산성은 한강이 흐르는 남서쪽으로 수직단애의 험준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한양을 사수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이곳을 행주산성으로 부르게 된 것도 임진왜란 3대첩으로 일본군을 물리친 격전지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길이 시작되는 이곳은, 창릉천이 한강으로 유입되고 방화대교와 접속하는 북로 분기점과 자유로가 관통하는 곳이라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육지속의 고도라 할 수 있다. 서울역에서 경의선으로 환승하여 행신역에 내렸지만, 강변 쪽으로 고속철도 차량기지가 있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다. 봉대산이 있는 강매동으로 진입하여 노인정이 있는 강고산마을에서 제방을 따라 방화대교 밑까지 진행하여 창릉천의 수중보를 건넌다.
서울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방화대교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과 경기도 고양시 강매동을 잇는 총연장 2,559m의 교량이다. 비행기의 이착륙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미관이 뛰어나서 남쪽의 개화산과 북쪽의 행주산성 등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 여름 서울에서 자전거로 달려온 하이킹 족들이 방화대교 교각아래서 시원한 막걸리로 피로를 달래는 곳이지만, 동장군의 기세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찬바람만 세차게 몰아친다.
난지기점 5.5km이정표를 바라보며 시작되는 답사 길은 고양난지 습지지구다. 습지는 인간의 활동으로 발생된 물질을 정화하여 자연생태를 보존하는 자정능력이 있어 자연의 콩팥으로 부른다. 무성했던 버드나무와 갈대밭이 새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강어귀의 모래톱에서 먹이를 찾는 청둥오리와 두루미의 날개 짓에 우리의 마음도 순화된다.
철새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시설물이 갈대밭 사이로 이어진다. 얼음 덮인 샛강사이로 무성한 갈대숲과 푸른 강물, 창공을 날아오르는 철새, 방화대교의 조화로운 모습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경기도와 서울시 경계지점인 난지교를 지나며 난지한강공원이 시작된다.
난지도의 마른습지에 한강물을 지속적으로 유입하여 생태 습지원을 만들고, 생태수로에는 정수된 한강물을 이용하여 수생식물 및 어패류를 관찰할 수 있는 학습장으로 꾸미는 등, 습지지구로 조성하여 주위 환경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꾸미고 있다.
난초와 영지가 자라던 아름다운 섬. 난지도가 수난을 당하여 쓰레기 산으로 버림받았던 그곳에 월드컵의 함성이 메아리 치고, 105만평의 너른 대지위에 평화 공원, 난지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의 이름을 달고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한번 파괴된 자연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서울시에서 한강 르네상스 사업으로 옛날의 아름다운 섬으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 기대해 볼만하다.
한강의 기적을 실감할 수 있는 한강변의 변화는 난지공원 전망대에서 시작된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중심으로 고층빌딩이 현란하게 솟아오르고, 한강다리를 질주하는 차량들, 강심을 가르는 요트와 윈드서핑,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 메니아들, 모두들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의욕을 불태운다.
월드컵 경기장을 사이에 두고 한강으로 유입되는 홍제천은 종로구 평창동에서 발원하여 마포구 성산동을 경유하는 11km의 2급 하천으로 불광천과 녹번천을 아우르고 있다. 참고로 한강으로 유입되는 서울의 하천으로는 강남쪽으로 고덕천, 성내천, 탄천, 반포천, 안양천과 강북쪽으로 향동천, 홍제천, 봉원천, 욱천, 중랑천, 등 10개에 이른다.
양화대교북쪽 기슭에는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지가 있다. 양화나루는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다. 조선시대 병선 훈련장이 있었고, 강가에 버들이 많아 버들 꽃이라는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인근에 있는 잠두봉은 20여 m의 기암절벽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방어기지로 사용했으며,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천주교에서 병인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절두산 정상에 한국순교자 박물관을 세웠다.
당인리 화력발전소를 지나면 강 건너 밤섬이 나타난다. 밤섬은 1968년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골재를 조달하느라 사라졌다가 모래가 쌓이고 억새와 갯버들 등 습지식물이 자생하면서 섬이 다시 생겨난 것이다. 밤섬에는 큰기러기와 가창오리 등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7종 등 모두 582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환경단체에서 국제적인 습지보호구역인 ‘람사르 습지’로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해질녘이면 하늘을 날아오르는 철새들과 여의도 빌딩숲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마포대교 밑으로 마포나루의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여의도 백사장을 지나 시흥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는 용산강 하류에 있는 포구로서, 삼남지방의 곡식과 새우젓 등 젓갈류의 집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부근에는 소금배가 자주 왕래하여 이를 매매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염리동이 생기고, 용강동 일대에는 젓갈류와 소금 등을 보관하는데 필요한 옹기를 만드는 옹리가 있었다고 한다.
노들나루로 부르던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 시흥을 연결하는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되고 이듬해인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주요 교통수단이던 뱃길도 뒷전으로 밀려나고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용산역을 중심으로 150층의 초고층 랜드 마크 타워가 준공되고 나면, 여의도와 어우러지는 한강 르네상스의 중심축으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게 된다.
동작대교를 따라 한강을 건너면 국립현충원이 자리 잡고 있다. 관악산 공작봉을 주봉으로 한강을 굽어보며 조성된 43만평의 면적에 16만 3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끝나면서 장렬하게 산화한 영령들을 모시기 위한 방안으로 1955년 국군묘지로 안장하여 오다가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하여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고, 기관 명칭도 국립현충원으로 격상하였다.
가수 혜은이의 제3한강교로 유명한 한남대교는 한강에 건설된 네 번째 교량이다. 강남개발의 효시를 이루며,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의 관문이다. 한강이 시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름답게 조성한 시민 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강북에는 난지지구에서 뚝섬지구까지 강남에는 강서지구에서 광나루 지구까지 강을 사이에 두고 각종 체육시설과 오락시설이 마련되어 서울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안양천과 함께 가장 큰 중랑천에 도착한다.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시와 서울시 동북부지역을 관통하며 36km를 흘러 한강으로 유입된다. 중랑천지류 중에서 가장 주목할 하천이 청계천이다.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모여든 물골이 도심지를 관통하는 청계천이 6.25전쟁이후 서울로 몰려드는 피난행렬로 둑 방촌이 형성되고 마구 쏟아내는 오물과 생활하수로 시궁창이 되고 말았다.
악취 풍기는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고, 천형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미생물도 살지 못하는 하수구로 전락하고 하고 말았다. 도심지를 살리자는 환경보호 단체들의 요청에 의해 2003년 7월부터 시작된 서울시 청계천복원사업이 2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2005년 10월 1일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 새로 태어난 청계천이 서울의 숲과 연계되는 그린벨트를 형성하며 도심지의 공기를 정화하고 삼복더위의 온도를 2-3도나 낮추어주는 일석 삼조의 효과를 누리고 있으니, 쾌적한 환경 속에서 장밋빛 무드가 펼쳐진다.
뚝섬유원지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 청담동 아파트 숲이 장관을 이룬다. “桑田이 碧海”라는 말이 실감나게 뽕나무밭이 무성하던 삼전나루에 무역센타를 중심으로 빌딩들이 하늘 숲을 이루고 88올림픽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던 잠실종합 운동장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또한 석촌 호수는 롯데재벌이 꿈을 펼치고 있는 곳이다. 성남비행장의 이착륙에 지장이 있다는 항의로 14년간 줄다리기를 하던 끝에 공사가 진행 중인 제2롯데 월드(112층에 550m)가 완공되고 나면 잠실일대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할 것이다.
올림픽 대교를 지나며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고, 버드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뚝섬유원지와 함께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던 광나루 유원지. 엄동설한에 속살을 드러낸 수양버들 사이로 평화롭게 물장구치는 청둥오리와 강 건너 빌딩숲이 자연친화적인 모습으로 조화를 이룬다. 난지기점 26km 표지판을 지나며 광나루에 도착한다.
서울의 동쪽에 자리 잡은 광나루는 조선시대 영남, 강원, 충북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다. 특히 충주와 춘천에서 뱃길로 운반된 세곡선을 관리하는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광나루의 조운을 관장하였다. 육로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그 시절, 정부에서 관리하는 물품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의 생필품도 모두 배로 운반하므로 강의 포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3. 하남 위레성
광나루역을 올라서면 건너편으로 광진 청소년수련관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건물 뒤편으로 자전거 전용도로가 연결되어 접근성이 아주 편리하다. 한강에서 2번째로 건설된 광진교. 천호대교에게 무거운 짐을 물려주고, 작은 차량과 사람들만 건너는 전용도로로 천수를 누리고 있다. 우수 경칩이 지났건만,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찾아와 강가의 수초사이로 스멀스멀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앙상한 갈대 잎에 서리꽃을 피워낸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강을 중심으로 생활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암사동의 선사유적지는 전곡 선사유적지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곳이다. 신석기시대(약 6,000년 전)의 주거지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67호로 지정된 암사 유적지는 중서부 지역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바위절(백중사)이 지금의 암사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구 천호가 살만한 곳이라 하여 천호동으로 부르던 이곳에, 수십만이 생활하는 거점도시로 발전하였다. 천호대교 옆으로 사적 제11호인 풍납토성이 새로 복원되어 옛 조상들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풍납토성은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룬다. 3.740m에 이르던 성벽이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고 현재는 2,700 여m 정도 남아 있다.
암사유적지에서 6km 하류에 있는 몽촌토성은 움막의 형태를 버리고 지상에 건물을 지어 그 당시로는 첨단문명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백제초기의 건축물이다. 목책과 진흙으로 토성을 쌓고 해자를 파서 방어용 성을 구축하였는데, 백제의 都城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백제 초기의 군사적. 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지로 사료된다.
이성산성은 춘궁동 왕궁지를 보호하는 형태의 산성으로 해석되며, 춘궁동 왕궁지는 남쪽에 천왕사지와 동사지가 주요유적으로 남아있다. 춘궁동 왕궁지의 규모가 고구려, 신라의 왕궁지에 버금가는 규모라는 분석에 따라 이곳이 백제의 하남위레성이라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서기전 18년 백제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이 강동구와 하남시 일대로 추정되는 만큼, 하루빨리 발굴 작업이 완료되어 백제 건국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으로는 물이 있어야 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산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너른 벌판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강이야말로 3가지를 모두 갖춘 천혜의 요지라 할 수 있다. 백제시조인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며 근거지를 찾던 중 한강에 터전을 잡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한강을 굽어보는 아차산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곳이기에, 삼국이 첨예한 대립을 하며 항시 전투가 끊이질 않는 접전지역이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그러나 고구려(475년 장수왕)가 남진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다. 551년 백제가 한강 유역을 되찾았지만, 2년 뒤 곧바로 신라에게 넘겨주고 만다.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의 성왕이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되찾았으나, 2년 후에는 신라가 한강유역의 모든 영토를 차지하고, 북한산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워 군사적인 요지로 삼았다. 이상과 같이 한강변에는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일구어온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명소가 많다. 따라서 한강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요람이라 할 수 있다.
아차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워커힐은 강 건너 천호동에서 바라보면 그림속의 무릉도원처럼 선경이 따로 없다. 경사심한 벼랑아래 강심을 따라 아차산 대교가 길게 뻗어있고 교각 아래로 자전거 전용도로가 이어진다. 난지기점 27km 표지석을 지나면 곧바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지점이다.
세계 속의 경기도 전광판아래 “토막나루”안내판이 서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나무토막을 엮어 만든 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강 건너 암사동과 천호동을 이어주는 작은 나루터는 교통사정이 열악한 아천동주민들이 외지로 나갈 때, 사용하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구리암사대교 공사장에 도착한다. 1900년 한강철교가 건설되기 시작한 이래 한강 상류 팔당대교부터 하류에 있는 일산대교까지 교량이 모두 29개이고, 2013년 암사대교가 완공되면 30개로 늘어난다. 중앙의 트러스 아치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자랑하는 암사대교는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연결하는 연장 2.74㎞(교량 1.13㎞, 연결도로 1.61㎞)가 된다.
곧 이어 구리시 한강 시민공원에 도착한다. 한강둔치를 조성하여 14만평의 너른 부지에 꽃 단지와 각종 위락시설을 조성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이 대형태극기가 휘날리는 태극기 공원이다. 구리시에서 태극기 사랑 캠페인을 벌이며 집집마다 거리마다 태극기를 계양하고 나라사랑의 상징인 태극기 보존 운동을 몸소 실천하는 상징성 있는 공원이다.
1882년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특명 전권대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 박영효 일행이 우리나라를 상징할 표시로 고안한 것이 국기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태극문양과 乾, 坤, 坎, 離의 4괘로 이루어진다.
흰색바탕은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을 나타냈고, 태극문양은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며, 우주만물이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 발전하는 진리를 형상화 했다. 4괘는 음과 양이 서로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구체화한 것이다. 4괘중에 乾은 하늘, 坤은 땅, 坎은 물, 離는 불을 각각 상징한다.
태극기에 대한 존엄성을 되새기며 여울천과 들꽃동산을 지나노라면, 회색빛 들녘의 스산함에 아직도 봄소식이 멀게만 느껴진다. 경비행장을 뒤로하고 강동대교 밑을 돌아서면 왕숙천이 반겨준다. 포천시 내촌면 신팔리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길이가 37km에 이르는 하천이다.
부근에는 세조를 모신 광릉(光陵)과 광릉수목원, 자연사박물관, 밤섬유원지, 동구릉(東九陵) 등 사적 및 관광지가 있고,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팔야리(八夜里)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석교를 건너면 남양주 한강시민공원이 펼쳐진다. 거창한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 미음나루는 남양주시 수석동과 하남시 미사리를 건너던 나루터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한강을 오가던 배들이 중간쉼터로 이용하고, 부근에 있는 석실서원에 필요한 물건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뱃사공을 위해 밥을 짓던 소박한 주막거리를 기념하여 남양주에서 대표적인 음식명소로 조성하여 30여 곳의 음식점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미음나루는 강이 “ᄂ” 로 꺾여있어 물위로 떠오르는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서, 겸재 정선이 “삼주삼신각”이나 “석실서원”을 그린 것처럼 주위에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특히 석실서원 앞에 있는 한강을 미호(渼湖)라 하여 잔잔히 흐르는 한강이 마치 너른 호수와 같다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일명 풍속마을로 불리는 이곳을 자전거로 넘자면, 여간한 메니아도 진땀을 흘리는 고갯마루가 있어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는 것이 속편한 구간이다.
삼패동이 바라보이는 한강 시민공원에 도착하면 아파트 숲이 장관을 이룬다. 예봉산과 갑산의 줄기가 내려앉은 너른 분지에 터를 잡은 와부읍은 20여년전만해도 논밭이 즐비한 농촌 들녘이었다. 서울과 20여km의 근거리에 한강을 바라보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라 분양 때부터 인기가 있었고, 전철이 개통된 뒤로는 출퇴근 시간이 수월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강 건너 미사리는 라이브 카페의 메카로 명성을 얻고 있다. 88올림픽 조정경기가 열린 이후로 세인의 관심을 받으며 90년대 후반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카페 촌이 명동과 무교동의 음악 감상실을 옮겨와 노년층의 향수를 달래주는 추억의 거리가 되었다. 모처럼 도심을 벗어나 식사도하고 진한커피에 음악 감상까지도 할 수 있으니, 피로를 풀어주는 데이트 장소로는 이만한 곳도 없다.
풍속마을 9km표지판을 지나면 곧바로 팔당대교에 도착한다. 예봉산과 검단산이 어우러지는 협곡에 수도 서울의 식수를 공급하는 팔당댐까지 있으니,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가히 천하절경이다. 4대강 살리기 한강 자전거 전용도로가 시작되는 이곳이 팔당대교기점이고, 양평과 여주를 지나 충주댐까지 136km를 이어갈 수가 있다. 남양주 역사박물관까지 둘러보며 한강 르네상스 75km 답사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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