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2년 10월13일
창녕시 대산면 남모산 퀸 모텔 - 삼랑진 -밀양역 32km
11. 밀양 아리랑
3일째 날이 밝았다. 오늘의 일정이 삼랑진까지 내려가서 영남루가 있는 밀양까지 답사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32km를 소화하자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만 한다. 송등 마을을 나서면 사방을 둘러봐도 너른 들판이다. 큰물이 나면 낙동강이 범람하던 미네포 들판에 제방을 쌓아 만든 대산면은 70%가 농경지일 만큼 면 자체가 넓은 들판 속에 안겨있다. 평야를 가로질러 모산리 제방으로 올라서면 추수를 앞둔 황금벌판이 장관을 이루고, 물안개 피어오르는 낙동강위로 수줍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곧게 뻗은 제방을 걷는 동안 사진에서만 보아오던 싸움소 훈련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보통소의 두 배는 됨직한 우람한 체구에 날카롭게 다듬어진 뿔하며 매서운 눈매는 보이는 물체 마다 공격의 대상이다. 자전거를 타고 조련하는 주인의 구령에 따라 가쁜 숨 몰아쉬며 천지가 진동할 만큼 콧바람을 일으키며 네 굽을 놓는다. 영호남을 중심으로 성행하고 있는 소싸움은 이 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이래 목동들이 심심풀이로 재미삼아 시작한 것이 그 규모가 확산되고 체계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싸움은 진주소싸움이 대표적이다. 진주소싸움의 역사는, 신라가 백제와 싸워 이긴 전승기념잔치에서 비롯되어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자생한 고유 민속놀이인 것이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는 소싸움은 씨름대회와 흡사하여 몸무게에 따라 소태백, 태백, 소한강, 한강, 소백두, 백두(850kg이상)등6체급으로 나누어진다.
싸움소들의 주무기는 날카로운 뿔의 모양에 따라 본능적으로 유리한 기술을 구사한다. 뿔은 비녀처럼 일자형으로 생긴 비녀 뿔, 하늘로 치솟은 형태의 옥 뿔, 옥 뿔이 앞으로 굽은 노고지리 뿔로 구분 된다. 사생결단의 자세로 싸우다가도 한쪽에서 꽁무니를 빼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 승자의 당당한 자세야 말로 우리인간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창원 쪽은 대산문화체육공원이 창녕 쪽은 수산강변공원을 조성하여 낙동강을 찾아오는 철새들을 탐조할 수 있는 전망대까지 갖추고 있다. 유등나루터 가는 길에 유청마을을 지난다. 수 백 년은 됨직한 팽나무 그늘 밑에는 휴식도 하고 좌담도 할 수 있는 정자가 있어 마을의 상징처럼 수호신으로 떠받들고, 담벼락마다 아름다운 산수화로 피어나는 유청마을을 바라보며 고향을 찾아온 듯 행복감에 젖어본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올라서면 유등배수장 준공기념비가 서있다. 창원농지개량조합장 명의로 된 문구를 살펴보면, 낙동강 변에 자리 잡고 있는 대산 벌은 2,000ha에 이르는 방대한 면적에 3,700세대의 주민이 살고 있는 고장으로 큰물이 나면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오던 중,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강바닥을 준설하고 제방을 높이 쌓아 강의 범람을 막고, 전동기 펌푸와 배수기 4대를 설치하여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명례강변공원과 솔뫼생태공원을 조성한 낙동강 고수부지는 김해시 오정마을까지 4km에 걸쳐 수십만 평의 자연습지가 펼쳐진다. 철새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들의 활동 공간을 확보하여 단풍나무길, 왕 벗 나무길, 수목 군락지, 데크전망대. 메타세콰이어길을 조성하고 있다.
창원시와 작별하고 김해시로 들어와 시산리 소나무쉼터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산이 봉화산이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은 노무현 대통령이 4살 때 이곳에 정착하여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라온 고향이다. 194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노무현은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제16대 대통령으로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으며 남북관계해빙의 무드를 조성하고, 퇴임 후 고향인 봉하 마을로 내려와 생활하다 재임 중 친인척 수뢰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사저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한글세대 첫 번째 대통령인 노무현은 군사정권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6월 민주화운동(1987)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하다, 42세 때 정계에 입문한 뒤 국민적 각광을 받은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된 뒤 민주민족세력의 정치적 대변자로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동서화합의 전도사를 자임하며 남다른 정치 역정을 걸어 왔다.
모정마을 입구에 있는 배수펌프장은 화포천이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강 어구에 설치하여 연례행사처럼 겪는 물난리를 피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에서 발원하여 한림면 금곡리에서 낙동강과 연결되는 화포천은 유로연장이 21.2km에 이른다.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황조롱이와 가시연꽃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등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밝혀진 화포천은 하천 물길과 습지로 이루어진 유수지만도 316만㎡에 이르는데다 희귀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보호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모정교를 건너면 작약산(377m)자락에 자리 잡은 모정마을을 만난다. 동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북쪽으로 몸을 트는 것도 작약산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랑진이나 밀양 쪽으로 가자면 모정마을을 거쳐야 하고, 옹골찬 모정고개를 넘어야 한다. 신바람 나게 달려가던 자전거도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고,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온 몸이 흠뻑 젖는다.
김해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사리를 지나면 낙동강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교량의 상부가 'X' 모양의 철제구조물로 둘러싸이는 트러스공법인 낙동강교는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총연장 38.8㎞로 삼랑진-한림-진영-진례-장유-부산 녹산을 경유하여 부산신항을 잇는 배후철도가 시작되는 교량이다. “경전선”이 시작되는 삼랑진~진주간 101.4㎞의 단선을 복선전철 화하여 마산·진주지역에 KTX를 운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2년 완공하였다.
낙동대교 밑으로 지나면 자연스럽게 낙동인도교(구 삼랑진교)와 연결된다. 일명 “콰이강의 다리”로 부르는 이 다리는 작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길어서 맞은편에서 차가 오는지 살핀 다음에 지나가야 한다. 자전거와 보도로 사용하고 있는 다리 입구에는 총 중량 3.3톤 이상의 차는 통과할 수 없고 10km이하로 달려야 한다는 경고문이 있다.
삼랑진은 조선 후기만 해도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을 만큼 수운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1905년 송지에 삼랑진역이 들어서면서 육로교통의 발달로 조창이 없어지고 경부선과 경전선이 갈라지는 철도의 중심지가 되어 동부경남에서 서부경남이나 전라도방면으로 가려면 삼랑진을 거쳐야하는 삼랑진의 전성기였으나, 남해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삼랑진은 쇠퇴의 길을 걸어 정체된 도시가 되고 말았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유일한 철도인 경전선은 삼랑진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308km나 되는 긴 구간이다. 1903년 삼랑진과 마산포를 잇는 공사를 시작으로 1905년 마산선이 운행하며 경전선이 탄생하고, 1968년 진주와 순천이 연결되며 명실 공히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철도가 완공되어 88고속도로와 함께 동서 화합의 장이 열린 것이다.
낙동인도교를 건너면 자전거도로는 부산방면과 밀양방면으로 갈라진다.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상부마을은 오우정이 있는 뒷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을 절단하여 만든 길이라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협소하여 자전거도 사람도 조심스럽게 지나야 한다. 수원지 노래연습장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교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끝없이 뻗어가는 교량은 우리나라가 번영의 길로 이어지는 상징처럼 보이고, 낙동강과 합류하는 밀양강은 대양으로 향하는 하구언처럼 보인다.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동쪽계곡에서 발원하여 청도군 운문면, 밀양시 상동면을 지나 밀양군 삼랑진읍 삼랑리와 상남면 외산리 사이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99㎞의 밀양강은 유로에 비하여 유역면적이 넓어 낙동강과의 합류지점에는 너비 4㎞에 이르는 넓은 충적평야(밀양평야)가 발달했다.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쌀 생산량이 많고, 시설채소와 사과·감·복숭아 등 과수재배도 활발하다.
뒤기미 마을을 지나면 미전들을 감싸는 제방이 나타난다. 하남읍을 경유하여 안동댐으로 연결되는 4대강 달리기 자전거도로가 제방위로 조성되고, 안동댐 334km, 부산하구언 51km이정표가 반겨준다. 제방을 중심으로 밀양강 쪽은 고수부지로 조성중이고, 제방안쪽은 부산시에 공급하는 시설채소들이 자라고 있는 비닐하우스가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질주하는 밀양강대교와 차량들이 홍수를 이루는 삼상교아래서 지루하던 3km의 제방도 끝이 나고 자전거도로는 앉은뱅이 다리를 건너 상남면 쪽으로 들어선다. 고수부지에서 안동방향의 자전거도로와 작별하고 제방위로 올라서면 8km의 밀양시가 아련히 바라보인다.
운동하기 좋은 10월이라 해도 한낮의 열기는 대단하다. 제방 밑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는 한증막이나 다름없다. 바람 한 점 없이 내려 쪼이는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머리위로는 고속도로의 굉음소리가 귓전을 파고들고, 25km를 걸어온 피로가 쏟아진다. 2시간의 고통을 참아내며 드디어 밀양시에 입성한다.
낙동강에서 비껴있는 밀양을 굳이 찾아온 이유는 영남루를 보기 위함이다. 밀양강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며 섬이 되어버린 구시가지에서 밀양교를 건너면 양지바른 언덕을 배경으로 죽림 속에 자리 잡은 영남루가 반겨준다. 포토 존이 다리중간에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영남루는 환상적이다. 밀양강에 비추는 영남루와 아랑각이 한 폭의 그림처럼, 밀양을 찾은 길손에게 한 아름 선물을 안겨준다.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嶺南樓)는 신라 법흥왕 때 세워진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 자리에 1365년(공민왕 14) 김주(金湊)가 창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이 거듭된 끝에 1844년 부사 이인재(李寅在)에 의해 마지막으로 재건된 것이다.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 3대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명성에 걸맞게 누각에 올라서면, 도도히 흐르는 남천강위로 사 뿐이 올라앉은 삼문동이 연못 가운데 떠 있는 부평초처럼 은밀한 자태를 뽐낸다. 영남루에서 층층계단을 내려서면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아랑 각을 만난다. 옛날 밀양 부사에게 아랑이란 딸이 있었는데, 아름답고 마음도 어진 그 딸을 관아의 심부름꾼인 통인이 사모하여 욕보이려 했으나 반항하자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것이다.
영남루에 얽힌 아랑의 슬픈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밀양 아리랑은 정선아리랑, 진도 아리랑과 함께 우리의 가슴속에 흐르는 민족혼이다.
1.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2.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3. 남천강 굽이 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 각을 비취네
후렴 :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낙동강 천리 길, 굽이치는 강물 따라 사연도 많고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누각과 정자가 많지만 그중에 으뜸이 영남루요, 안동의 영호루와 상주의 관수루를 3대 누각이라 칭송하는 것도 아름다운 절경과 애틋한 사연을 간직함이 아니겠는가. 3일간의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밀양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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