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12년 7월 23일
경유지: 공주 터미널 - 금강교 - 무령왕릉 - 공주박물관 - 공주보 - 유구천 합수머리 - 웅진대교 - 바우성 - 만수리 -
대학리 - 유학리 - 왕진교 - 백제보 - 백마강교 - 백제역사단지 - 백제교 - 시외버스터미널
3. 백제의 발자취 (32km)
유순하게 지나가는 장마덕분에 틈새를 이용하여 백제의 발자취를 따라 3구간이 시작된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니 목마름에 갈증을 느끼던 나무들도 생기를 되찾고 녹음이 짙어진 길을 따라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 입구 교차로에서 무령왕릉 쪽으로 답사 길이 연결된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행운을 얻었지만 이 일을 어찌하랴. 매주 월요일은 고궁을 비롯한 문화재 관람이 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니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의 배수구를 정비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분의 축조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하고, 도굴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백제 25대왕으로 즉위한 무령왕이 무덤의 주인공이다.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하고,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는 한편,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고목성(高木城) 남쪽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일본에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민생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하여 농사를 짓게 하는 등 백제부흥을 이룬 성군이다.
고분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봉토의 평면은 직경이 20m가량의 원형이고, 묘실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는데, 왕과 왕비를 합장하여 옻칠된 목관에 꽃 모양의 금·은제 장식으로 꾸며 각기 안치하였다. 장신구로는 왕의 것으로 금제 관장식, 심엽형 귀걸이, 은제 허리띠[銙帶], 금동 신발 등이 있으며, 왕비의 것으로는 금제 관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금·은제 팔찌 외에도 많은 수의 장식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을 뒤로하고 도착한 공주종합운동장을 지나면 2010년 세계 대백제전이 열렸던 국립공주박물관 광장이 나타난다.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라해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무령왕릉에서 백제연구에 귀중한 사료들이 출토되면서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공주박물관 1층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2층에는 구석기, 신석기, 철기시대를 거쳐 마한과 백제의 웅진,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통일시대까지 이 지역의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웃에 있는 곰 나루터는 옛날 한 어부가 인근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에게 잡혀가 부부의 인연을 맺어 두 명의 자식까지 두었으나, 어부가 도망가 버리자 그것을 비관한 암곰이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곰나루를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하며, 475년 문주왕이 이곳으로 천도함에 따라 백제의 왕도가 되었고,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태조 23년에 공주(公州)로 부른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곰나루는 백제 문주왕이 475년 웅진 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백제 역사의 중심 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강 건너 정안면은 우리나라 밤의 70%를 생산하는 공주 밤의 특산지로 명성이 높다. 조선중기 어느 대갓집에 무남독녀가 살고 있었는데, 무럭무럭 자라서 과년한 나이가 된 선비의 딸이 밤만 되면 타오르는 정염을 주체 못해 이웃집 총각들을 방앗간으로 불러들였다.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던 선비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뒷산의 밤나무 밭에 집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라는 현몽에 따라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얌전한 요조숙녀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잠시 후 금강 6경으로 선정된 공주보가 웅장한 모습을 선보인다. 고마나루 솔밭을 배경으로 조성된 공주보는 길이가 280m(가동보 238m, 고정보 42m)에 높이가 7.0m에 달한다. 공주시가 간직해온 역사문화를 토대로 백제의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은 무령왕의 부활을 꿈꾸며 백제의 황제를 상징하는 봉황을 형상화한 구조물이다. 공주시 우성면과 웅진동사이를 가로막은 공주보는 가동보와 고정보 콘크리트 중력식이다. 마무리공사가 한창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지나는 웅진대교를 지나면 공주시 사곡면과 신풍면 경계에서 발원하여 우성면을 지나온 유구천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두 물머리에 이른다. 하천의 길이가 16㎞에 불과하지만 충청남도 산간 오지를 지나오는 탓에,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이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에 한곳으로 선정된 오지마을이다.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굶주림과 전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의미한다.
참고로 전국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풍기豊基 금계촌(경상북도 영주시) 2. 봉화奉化 내성촌(경상북도 봉화군)
3. 보은報恩 증항촌(충청북도 보은군) 4. 남원南原 운봉 동점촌(전라북도 남원시)
5. 예천醴泉 금당동(경상북도 예천군) 6. 공주公州 유마지방(충청남도 공주시)
7. 영월寧月 정동 상류(강원도 영월군) 8. 무주武州 무풍 북동쪽(전라북도 무주군)
9. 부안扶安 호암(전라북도 부안군) 10. 가야산伽倻山 만수동(경상북도 성주군)
백제큰길을 따라 백제보까지 25km는 야생화단지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꽃의 개망초와 달맞이꽃을 중심으로 화려한 색상의 이름 모를 꽃들이 그 넓은 둔치를 가득 메운다. 왕 버들 숲 사이로 수초가 어우러지고, 꽃을 찾아 모여드는 벌 나비와 새들의 천국이다.
견동리 둔치에 이르면 금강하구까지 72km 표지판이 반겨준다. 자전거 도로중간 지점이다. 삼복더위의 열기 속에서도 분전하는 보람이 있어 절반을 지나온 셈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대청호를 출발할 때는 아득하게 멀어만 보이더니 하구 둑이 가까워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의지가 샘솟는다. 넓어진 강폭에다 백제 보에서 차오른 강물이 육지속의 바다를 이루고, 강 건너 천내리의 강촌마을이 평화롭게 졸고 있다.
분강 양수장을 지나면 부여군이다. 가장먼저 반겨주는 마을이 신정리이고, 새로 건설된 왕진대교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청양군 청남면과 부여군을 잇는 주요 교통로인 왕진나루는 백제 때 왕이 다녀간 곳이라 하여 왕진나루로 부른다. 백제의 도읍지인 공주와 부여의 삼각지점에 있어 사비성의 외곽나루로 중요한 거점이다.
청양군의 특산물을 이곳에서 운반하고 강경이나 군산에서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기에 7-8월에는 제주도에서 새우젓배가 왕래하는 부근 10여개 나루 중에서 가장 번창 한 나루였다고 한다. 왕진대교를 건너 청남면을 지나면 도립공원 칠갑산 가는 길이다. 칠갑산은 차령산맥이 지나는 주봉으로 대덕봉(472m). 명덕봉(320m). 정혜산(355m)이 있는 충남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산세가 험하여 전 사면이 급경사를 이룬다.
부여읍 지석리에 도착하면 강어구의 아담한 야산 기슭에 청강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재 107호로 지정된 청강서원은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을 지낸 추포(秋浦) 황신(黃愼)의 높은 뜻을 기려 인조7년(1629년)에 건립한 서원이다. 선생은 이이와 성혼의 가르침을 받았고 1588년 알성문과 장원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1591년 사화로 물러난 후로 우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고종5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것을 1966년 지방 유생들과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금강이 웅진을 지나 사비성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백제보를 막았다. 강폭이 넓은 지역에 막은 백제보는 길이 311m(가동보 120m, 고정보 191m), 높이7.2m의 보를 설치하고, 680m의 공도교를 가설하여 청양지역과 부여지역을 연결해 주고 있다. 백마강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계백장군이 백마강을 굽어보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백제보가 이루는 치수, 이수 개념을 현대적인 수문장 이미지로 표현했다고 한다.
수십 길 절벽위에 자리 잡은 전망대주차장에는 백제의 예술품을 형상화한 화강암과 검은 오석으로 조화를 이룬 분수대가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반가사유상과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조형미가 마음에 와 닿는다. 공항의 관제탑처럼 높은 전망대는 낙동강 달성보와 함께 조형미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3층 전망대는 승강기가동이 중단된 탓에 걸어서 올라가는 수고를 한꺼번에 풀어주고도 남을 만큼 멋진 장면들이 펼쳐진다.
백제보와 금강문화관을 한눈에 굽어볼 수가 있고, 강 건너 청남면의 문전옥답과 멀리 공주에서 내려오는 금강을 중심으로 둔치의 각종 위락시설과 자왕리의 넓은 들을 덮고 있는 비닐하우스가 장관을 이룬다. 남쪽으로 백마강의 물줄기가 낙화암을 휘돌아 사비성으로 흘러가는 정경은 백제의 700년 사직이 살아나는 듯, 아련한 향수 속으로 빠져든다.
백제보를 뒤로하고 강줄기를 따라가면, 백마강교를 건너 백제문화단지가 있는 규암면 쪽으로 진행한다. 백제역사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17년간 충청남도 부여군 합정리 일원에 백제왕궁인 사비궁과 백제의 대표적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죽 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마을, 백제 개국초기의 궁성인 위례성, 백제의 대표적 고분을 보여주는 고분공원과 백제 숲이 조성돼있다.
특히 2010년 9월 18일부터 1개월간 개최된 세계대백제전은 수백만 인파들이 다녀간 우리나라 3대 문화축제로 승화되었다. 온조왕이 위례성(서울 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여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약 700년 동안 고유한 문화를 꽃피워 동북아 문화교류의 중심역할을 했던 해상 강국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승리자의 손을 들어주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백제역사가 왜곡되고 축소된 것을 이번기회에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역사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이자 최고의 백제역사 전문박물관이다. 규암면 소재지에서 40번 국도를 따라 백마강을 건너 부여읍으로 들어선다. 백마강을 건너는 커브 길에서 아스콘 바닥에 흘러내린 왕사를 잘못 밟으며 콘크리트에 무릅을 찧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사고다. 응급처방을 해보지만 낭자하게 흐르는 피를 막을 방법이 없어 인근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집에 돌아와서도 완치될 때까지 한 달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말았으니, 사고에는 예고가 없고 한순간의 방심이 큰 화를 자초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공주전시장 - 웅진성의 하루
유구천 두불머리
금강 중간 지점
분강교를 사이에 두고 공주시와 부여군이 경계를 이룬다.
일시: 2010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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