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알리는 양수리
한동안 삼월중순의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어 겨울이 다 간줄 알았더니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눈까지 몰고 와 맹위를 떨친다. 추위를 핑계 삼아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나이 탓인가? 겨우내 산행한번 나서지 못하고 방구석에서 소일하다 보니 몸이 근지러워 견딜 수가 없다.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를 지나며 평년의 날씨를 되찾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를 ?아 두 물머리 양수리로 향한다.
회기역에서 팔당 가는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건너편 환승장을 찾아가니 국수역까지 연장 운행을 하고 있단다. 겨우내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동안 세상이 이렇게 변하였으니 꼭 외국에라도 다녀온 듯 어리둥절 하기만하다. 주말만 되면 교통의 지옥이 따로 없이 몇 시간씩 정체되는 구간이라 양수리 쪽으로는 발걸음이 뜸 하였는데, 30분마다 한 번씩 운행하는 전철이 있어 마음 놓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차창을 스치는 풍광에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내년에는 양평을 지나 용문까지 연장 운행이 되고, 머지않아 원주까지 전철이 개통된다고 하니, 세상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팔당역을 지나며 길고긴 터널 속을 달리던 전철은 운길산역을 지나 목적지인 양수리 역에 도착한다. 모처럼의 나들이 길에 마음만큼이나 하늘도 푸르다. 코끝을 파고드는 추위도 아랑곳없이 내려선 양수리 역은 천지개벽이 따로 없는 듯 했다. 에스컬레이터와 장애인을 위한 에레베터가 작동을 하고 있어 서울의 어느 지하철 역 보다도 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으니, 백년대계를 위한 일이라지만 분에 넘치는 설비라는 생각이 든다.
양수리는 마을 전체가 물길로 둘러싸인 천혜의 절경으로, 호반의 도시 춘천보다도 물이 풍부한 팔당호 주변의 풍치가 뛰어난 마을이다. 역을 뒤로하고 오솔길을 나서면 한 여름 연꽃으로 가득 피어날 연못에는 살얼음위로 앙상한 연밥이 고개를 숙이고 봄이 머지않은 듯, 냇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통통하게 오른다.
가장먼저 향하는 두 물 머리는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화천과 춘천, 청평을 지나온 북한강과 대덕산의 검룡소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정선아리랑의 가락 속에 영월과 충주를 지나며 남한강으로 모여들어 합류하는 두 물머리. 400년이 넘은 고목나무아래서 바라보는 물줄기는 오대산의 비로봉에 내리는 빗물이 남북으로 갈라져 수 백리의 먼 길을 돌아 재회의 기쁨 속에 한 몸이 되었으니, 우리민족의 중심을 이루는 젖줄이 아닌가?
태초에 우리조상들이 기름진 옥토위에 생활의 터전을 잡은 것이 한강이요. 양수리의 두 물줄기가 수미강으로 거듭 태어나 도도히 흐르는 강물 따라 우리의 역사가 번영을 이루는 근원이 된 것이 아닌가?
또한 건너편의 조안면 능내리의 마재마을은 茶山(정약용)이 태어나서 자라고 학문을 익히며 청운의 꿈을 키우던 고향집이다.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다가 돌아온 고향집은 더욱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감회를 시 한수로 읊은 그 유명한 『환소천거(還苕川居)』를 감상하자.
갑자기 고향 마을에 이르고 보니 忽已到鄕里
문 앞에선 봄물이 흐르고 있네 門前春水流
기쁜 듯 약초밭에 다다라 보니 欣然臨藥塢
예전처럼 고깃배 눈에 보여라 依舊見漁舟
꽃들이 어우러져 산집은 고요하고 花煖林廬靜
솔가지 늘어진 들길은 그윽하다 松垂野徑幽
남녘 땅 수 천리를 노닐었으나 南遊數千里
어디 메서 이런 언덕 찾아 보리요 何處得玆丘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약용 선생의 생가는 차도에서 1,2km 떨어진 풍양나루의 경안천이 합류하는 경관 좋은 야산에 임산배수의 명당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아래 분지에는 새로 단장한 문화재 건물이 정돈되어 있는데 그 분의 철학이 담겨있는 거중기는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의 효시로서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발굴하고 연구한 업적이 돋보인다.
천마지맥과 한강기맥의 정기가 모여드는 두 물머리와 양수리의 전망은 운길산의 수종사 앞마당에서 바라보아야 절경임을 알 수 있다. 청계산을 정점으로 산줄기가 수백 수천가닥으로 퍼져 나가고, 수천 가닥의 계곡물이 한데 모여 강을 이룬다. 이른 아침 강가의 수초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골골마다 산자락을 휘감으며 피어오르는 정경은 꿈속에서나 만나는 이상향으로 신비롭다.
또한 부용산과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유혹을 하는데, 해질녁의 두 물머리는 능수버들 휘 늘어진 너른 바다위에 낙조의 그늘이 드리워 질 때 황금빛 물결로 출렁인다. 자! 이제 마을길로 걸어보자. 수반위에 빚어놓은 카페들이 물그림자를 드리우고 종이학이 있는 카페는 백조의 호수 위를 거니는 듯 동심의 세계로 흠뻑 빠져든다.
북한강을 따라 청평 쪽으로 십 여리를 거슬러 오르면 지금처럼 호안공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연그대로 강물이 흘러가던 시절, 홍수가 나면 강물이 범람하여 물을 내민다하여 내미리, 물에 받친다하여 바치리, 물이 들어 온다하여 무드리, 물이 넘친다하여 무너미로 부르다가 지금은 문호리가 되었다는 지명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해학이 묻어나는 곳이다.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이 아늑하고 포근하던 양수리에도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활발한 개발의 붐이 일고 있다. 자칫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개발이 돌이킬 수 없는 난개발이 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부디 바라건대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점을 살려 양수리만의 특성을 살린 전원도시로 개발이 되어 언제든지 찾아와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휴식의 공간으로 개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이다.
고향 가는 길
오늘은 아버님 30주기 기일이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되었으니 빠른 것이 세월인가보다.
고향을 지키시는 정신적인 지주(支柱).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주재(主宰)하시고 형제들 간의 갈등(葛藤)을 봉합하는 만능의 전도사(傳道師)이시다. 그러니 형님의 말씀 한마디에 순종하는 미덕으로 집안에 평화와 질서가 유지된다. 지금이야 마을에 저수지가 완공(完工)된 후로 문전옥답(門前沃畓)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홍수가 나고 삼일만 지나면 건천으로 변하여 돌 자갈이 앙상하게 드러나는 황무지(荒蕪地)나 다름없는 척박(瘠薄)한 땅이었다.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는 가난이 대물림되는 땅.
마을의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살길을 찾아 떠나도 형님만은 꿋꿋하고 우직하게 고향을 지키셨다.
十二代祖께서 이곳에 정착(定着)을 하신후로 대대로 뼈를 묻고 살아온 고향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으로, 고향(故鄕)의 지킴이가 되어 지극정성으로 조상님의 묘를 돌보고, 황무지를 일구어 옥토로 만드는 부지런함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를 이루셨으니 공덕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객지(客地)로 떠난 우리는 든든한 형님의 우산아래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을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이날만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다지는 것도 형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211번지가 내가 태어난 곳.
병풍산의 맥이 이어진 아담한 야산의 기슭에 터를 잡은 마을에는 삼십 여 호의 집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요도 천을 중심으로 곡창지대가 펼쳐지고, 2- 300m의 산줄기들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곳에 700m 가 넘는 산은 가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어린 동심에도 숭배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랑문을 열고 뜰에 나서면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거대하고 웅장한 산. 한여름 배부르게 풀을 뜯은 황소가 편안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다.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이 아늑하고 포근함 속에서 꿈을 키웠다. 가엽산 자락에 구름이 얹히면 비가 내리고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면 맑은 날이 계속되는 영험한 산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가슴속에 고이 간직한곳.
나이가 들어 전국의 유명한 산을 찾아 700여 산을 오르면서도 동경의 대상인 가엽산을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가슴앓이도 많이 하였지. 지척(咫尺)에서 바라보는 가엽산의 정상에는 뾰족한 철탑들이 진을 치고 있는 금단의 땅이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이곳 가엽산은 삼국시대부터 국경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한양으로 전달하는 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전국의 유명한 산의 정수리에 무수히 많은 구조물들이 우리의 눈과 귀가되어 지구촌의 소식을 한눈에 전달하는 첨단시설의 중계지로 현대판 봉수대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얼었던 동토에도 새싹이 돋아나고, 얼음장 밑에서도 꽃이 핀다고 하지 않던가? 금단의 땅에도 일반인들의 접근을 묵인하게 되니 이 얼마나 즐거운 비명인가. 몽매에도 그리던 가엽산을 찾아가는 발걸음에 설래 임이 가득하다. 형님 댁에서 밤잠을 설치며 행장을 꾸리고, 소풍가는 들뜬 마음으로 음성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어렵게 찾아온 길이기에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며 진입로를 찾는다. 동쪽으로 우뚝 솟은 정수리에는 첨탑들이 아침햇살에 눈이 부시고, 비포장의 농로를 따라 걸어가는 발걸음에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귀 볼이 얼얼하다.
송신소 진입로를 따라 지그재그로 산 비알을 기어오르는 발걸음에는 날숨과 들숨의 가빠 오는 호흡 속에 아름드리 소나무의 향내가 온 몸을 휘어 감는다. 산림청에서 우량 형질을 갖고 있거나 보존의 가치가 높은 소나무들을 선정하여 ?전국의 우량 소나무 림?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가엽산의 소나무도 60ha에 걸쳐 지정이 되었다는 안내 간판을 보며 6.25의 격전지로 초토화 되었던 땅인데, 수 백 년 된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너덜지대의 바위들이 쏟아져 내린 척박한 땅에 2-30m 높이의 아름드리 적송들이 빼 곡이 들어찬 모습은 가히 선경이 따로 없다. 소나무는 늘 푸른 상록수로, 진한 녹색의 잎과 붉은 줄기가 인상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강한 자생력으로, 힘차고 우람한 모습에서 뿜어내는 강직성은 곧은 선비의 정신을 기린다. 또 한 가지 자유스럽고 부드러운 곡선에서 보여주는 유연성은 소나무가 지닌 두 가지 대표적인 외형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임도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따로 없다. 부지런히 걸어도 1시간이 족히 걸리는 연도에는 소나무가 하늘 숲을 이루고 키 작은 진달래가 장관이다.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 나옹화상(羅甕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고찰 가섭사(迦葉寺)가 정상 가까운 부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를 뒤로하고 오르는 정상은 녹녹하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다.
산새들도 숨을 죽이는 적막한 정수리에는 새한 마리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육중한 대문이 잠겨있고, 송신소의 첨탑들이 무언의 중압감으로 가슴을 조여 온다. M.B.C 충주문화방송 로고가 새겨진 바위 옆으로 봉수대의 안내간판이 서있고, 철도 침목으로 만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언덕위로 올라서면 분지위에 봉수대의 모형과 삼각점(음성22, 1982년 복구)이 있다.
수 천 평의 너른 정수리에는 송신소의 시설물이 자리 잡고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곳은 10여 평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나마 배려해준 것에 감지덕지하며 흥분된 마음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이 무슨 심술인가? 높은 산이 별로 없는 음성에서 진산으로 모시는 이곳은 수 백리까지 조망이 터지는 전망대인데 짙은 연무로 주위를 분간하기 어려우니, 요도천도 고향의 집도 안개 속에 잠들고 만다.
부용산(644m)에서 시작하여, 선지봉(570m), 수리봉(578m)을 거쳐 가엽산(709m)까지 충주와 음성의 경계를 이루며 음성천과 신니천(요도천)으로 갈라놓은 분수령이 남한강의 수계인 달천 강에서 다시 만나는 신비로움 속에 남쪽의 유서 깊은 미타사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금동불이 있는 영험한 산.
내가 가장 존경하는 형님을 찾아뵙고, 어린 시절 꿈을 키워 오던 가엽산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마음의 짐을 벗어 놓은 듯, 훨훨 날아오르듯, 65세의 나이로 음성읍에서 금왕 버스터미널까지 18km를 6시간에 완주하였으니 이 모두 고향을 지키고 계신 형님의 음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양천 문학상 수상 작품 - 수필
현충원을 찾아서
국립묘지는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178m)을 주봉으로 하여 한강을 굽어보는 43만여 평의 성역에 16만 5천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항상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 속에 월남의 전선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나의 전우 “신재기 병장”이 잠들어있다.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지만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한 무심함을 자책하면서 금년에도 보훈의 달인 6월을 맞는다.
신록의 계절 오월의 마지막 날, 30도를 넘는 불볕더위 속에 지하철 4호선의 동작역에 내려서서 건너다보면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현충원이 시야에 들어온다. 너무도 늦은 발걸음이기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장미 한 다발을 가슴에 안고 현충문을 들어선다.
너른 광장에 빼곡히 들어찬 영령들, 신록에 눈이 부신 표지석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이 난감하기 그지없다. 생각다 못해 민원 안내실 직원의 도움으로 손에 쥔 안내표에는 제 19묘역 1판 2498호로 명명이 되어있다. 조국의 수호를 위해 헌신한 임들이 계신 현충원은 엄숙하면서도 정갈하고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묘지들이 너른 벌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국가의 성전 앞에 옷깃을 여미는 경건한 마음으로 나무하나 풀 한포기마다 살뜰하게 가꾸어온 정성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어 구천을 떠돌던 영령들이 영면 할 수 있는 안식처로 손색이 없다.
현충원을 들어서면 너른 광장 한 가운데 충성분수대가 있고 겨레 얼 마당 과 현충탑을 중심으로 묘역이 동서로 나누어진다.
오른쪽으로 호국의 종이 있는 곳에서부터 제1묘역이 시작되어 26묘역까지 왼쪽으로는 17묘역부터 56묘역까지 넓디넓은 잔디밭에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묘지들을 바라보면 장관이다.
큰 번호판의 순서대로 한참을 걸어서 찾아간 19묘역은 월남에서 전사한 사병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산화한 전사자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확인을 하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육군병장 신재기의 묘” 뒷면에는 2498의 숫자 아래 1969년 5월 16일 월남에서 전사라는 명문(銘文)을 확인 하무로서 우리는 40년 만에 해후를 한다.
울컥 솟구치는 격한 감정에 눈시울을 붉히며 망연히 표지 석을 쓸어안는다. 산자와 죽은 자의 사이가 이렇게도 멀단 말인가? 총알이 빗발치는 정글 속에서도 함께 살아서 돌아가자고 굳게 맹세를 했건만, 백마 9호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전사했다는 소식에 우리 모두 망연자실하여 절규와 통한의 시간을 보냈지.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오빠의 전사를 모르는 고국의 누이동생이 보내온 무운장구를 비는 편지를 보고 우리 전우들의 슬픔은 극에 달했지.
전우여! 미안 하이. 밤하늘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어깨를 얼싸안고 고국의 소식에 눈물지으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고 했는데 40년이 지난 후에 전우 앞에 머리를 숙이니 무슨 변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백마부대 52포병대대 B포대 통신 반에 근무하던 우리는 보병중대를 지원하는 엄호 부대로 관측 장교와 함께 백마 30연대 2대대의 예하 중대에 파견근무를 하게 된다. 의협심과 책임감이 강한 신 상병은 백마 9호 작전이 끝나는 대로 복귀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운명의 여신이 그를 데려갔으니 애석하고 원통한일이다.
전우여!
우리가 사선을 넘나들며 피를 흘린 숭고한 사명감이 헛되지 않아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고, “하면 된 다” 는 신념아래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올림픽과 월드컵도 개최 하였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초개와 같이 바친 조국이 번영하는 동안 열심이 노력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네. 어느덧 육십을 훌쩍 넘기고 반백의 머리에 홍안의 젊음이 주름살로 변하였으니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것이지.
전우여!
그동안의 서운함을 푸시고 진혼곡이 울리는 동작동의 양지바른 언덕에서 영면 하시게.
수필 당선 소감
평소 산을 좋아하는 제가 20여 년간 700여산을 오르 틈틈이 써온 글들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금년에는 우리 양천 문학회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시화전이 성공한 결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무된 분위기속에 한해를 마감하는 행사에서 영광의 수상을 하게 되어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심사하여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양천 문학회의 발전에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밝아오는 기축 년을 맞이하여 회원님들의 가정마다 행운이 함께하시고 소원하시는 일들이 성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호 : 풍운아
충주 출생
한국 문인 협회 회원
한국 수필가 협회 회원
양천문학 회원
시산문학 회원
양천 문학상 수상
전국의 700여산을 오름
저서: 산행 수필집 바람과 구름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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