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시: 2017년 12월 9일
강화도 나들길 2
강화 전등사
의정부송산복지관에서 역사탐방으로 다녀온 전등사 전모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사찰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를 지킨 호국 불교의 근본도량이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발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 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의 사신과 함께 들어온 승려(僧侶) 순도(順道)가 황제(皇帝) 부견(符堅)이 보낸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면서 부터이다. 소수림왕은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위하여 불교를 장려하면서, 375년 초문사(肖門寺)를 건립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375년)를 창건하여 승려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다.
381년(소수림왕 11년)에는 중국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에 의해 전등사(처음에는 진종사)가 창건되어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소재불명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도량이 되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의 남문(南門)인 종해루(宗海樓)를 들어서면, 울창한 수림 속에 전등사와 함께 살아온 650년 된 은행나무가 반겨준다.
전등사 현판이 걸려있는 누각을 지나면, 대한민국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정면으로 보인다. 노란 들국화로 계단을 장식한 대웅전은 1600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만고풍상(萬古風霜)의 역경 속에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소실되어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이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하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공사를 맡았던 목수가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각별한 사이가 되어, 재물을 보관하였는데, 재물을 가로챈 주모가 도망을 가고 말았다.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1259년 고려고종(45년) 때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고, 원종5년(1264년)에는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고, 고려왕실에서는 강화에 천도한 기간이므로 진종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철종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전등사 법화경판이 있다.
철 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판이한, 중국 종의 형태를 지니고 있고,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분실하였다. 이 밖에도 대웅전 앞뜰에는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가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인다.
약사전을 지나 정족산사고지에 도착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초기부터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남은 전주 본을 묘향산 사고로 옮겼다가 마니산사고를 거쳐 숙종 때인 1678년 이곳에 보관하였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중이다.
사고지 뒤편으로 이어지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은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三郞城)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면서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를 보호할 목적으로 축성을 하고, 군사주둔지 정족진(鼎足鎭)을 두었다고 한다.
프랑스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 시켰다가 밤에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4년(18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 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전등사는 강화의병이 일본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곳이다. 1907년 강화진위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군인들이 일제에 항거하면서 촉발되었다. 강화의병은 이능권의 지휘아래 1908년 10월30일과 31일 사이에 일본군 13연대 소속 70여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고려왕릉 가는 길
외지인이 강화도를 찾을 때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를 이용하게 되는데, 전등사와 마니산을 중심으로 남쪽지방을 찾는 관광객들이 주로 초지대교를 이용하게 된다. 한 가지 흠이라면 초지대교를 건너는 2000번 좌석버스가 1시간 30분에 한 번씩 다니다 보니, 승차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송정역에서 운행시간을 확인해보니, 2000번 버스가 13분 후에 도착한다는 표시이다. 3000번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의 짐을 덜게 되었다. 김포 시내를 돌아 40분 만에 초지대교를 건넌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草芝里)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藥岩里)를 잇는 아치형 4차선 교량으로, 2002년 8월에 개통된, 길이 1.2㎞, 폭 17.6m의 4차선 교량이다.
초지대교를 건너서도 십여 분을 달린 뒤에야, 온수리 공영주차장에 도착한다. C.U연쇄점 앞에 설치된 스탬프에서 도장을 받고 3구간을 시작한다. 나들길에서 권장하는 구간은 전등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지난 가을 의정부송산복지관에서 탐방한 것으로 정리를 하고, 성공회 성당을 찾는다. 길상면 소재지인 온수리는 시골마을 치고는 제법 번잡한 곳이다.
남쪽으로 전등사를 품고 있는 정족산성이 올려다 보인다. 산성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성당과 연결된다. 시도유형문화재 제52호인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江華溫水里聖公會聖堂)은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건물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과 서양의 종교적 성당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절충식으로 지은 목조건물이다.
프랑스와 미국은 통상수교를 요구하며 조선으로 함선을 파견해 왔지만, 영국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는지, 문호를 개방하고 나서야 1883년 통상수교체결을 요구하게 된다. 이 성당은 강화성당과 달리 선교본부의 지원이나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신도들 스스로 땅을 헌납하고 자금을 마련하여 쌓아올린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앞마당에서 일출을 보고 길정저수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강화학생체육관을 지나 길정저수지 입구에서 갈림길이 나타난다. 나들길에서는 이규보 묘가 있는 곳을 구간으로 표시로 하고 있지만, 3 ~ 4구간을 연이어 완주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구간이라 이규보 선생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3km정도 짧은 저수지방향으로 진행한다.
광세(曠世)의 문인인가, 시대의 아부 꾼인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두고 내려지는 평가는 극단적이다. 어릴 때부터 기재로 알려질 정도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무신정변으로 문신들이 뜻을 펼치지 못하는 세상이 되자,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불운한 시대를 살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의 나이 32세에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자, 최충헌을 국가적인 영웅으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 관직을 얻게 되었다. 이후 최충헌의 아들인 최이의 각별한 총애를 받게 되면서, 최씨 정권을 받드는 문사로 한평생을 살다가 고종 28년(1241)에 강화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무신정권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의 업적을 서사시로 읊은 동명왕편을 저술하였고,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 등 다양한 문집을 남기었다. 시와 술, 거문고를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승탐월광(山僧貪月光):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병급일호중(甁汲一壺中):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도사방응각(到寺方應覺):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병경월역공(甁傾月亦空):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길정저수지 제방으로 올라선다. 저수지라기보다는 호수라고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규모가 큰 길정저수지는 1989년 12월 준공되었는데, 만수위가 되면 56.71hr 이고 제방의 길이가 640m에 높이가 21m에 이른다. 길정저수지의 준공으로 도장리와 문산리 일대의 농경지가 천수답에서 문전옥답으로 변신하였다. 또 한 저수지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
진강산(443m)을 중심으로 마니산(469m)과 서쪽으로 후포항까지 그림 같은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강화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진강산(443m)은 정상에 봉수대가 있을 정도로 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하고, 풍수지리적으로도 영험한곳이라 고려 왕릉을 모시게 되었고, 나들길 이름도 「고려왕릉 가는 길」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탄핵을 받는 국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병신년은 떠나고 희망을 바라보는 정유년이 밝았다. 인간들의 이전투구가 혼돈의 세계로 변했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길정저수지 제방에는 아름다운 서리꽃이 피어났다. 호수의 수중기가 앙상한 억새와 나뭇가지에 옮겨와 살이 베어질것처럼 날카로운 결정체를 이루고, 삭막하던 가슴속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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