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시: 2016년 11월 11일
국토순례 - 삼남길
경기 제9길(진위고을길)
맑음터공원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으로 엔돌핀이 몸과 마음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가벼운 발걸음에 맑아지는 머리, 상쾌한 기분으로 남부대로 고가도로 밑을 빠져나오면 평택시 진위면이다. 이제부터 농촌 들녘을 걷는다. 세월호의 시름 속에 나라전체가 우울증에 걸렸어도 무심한 세월은 제갈 길을 가는가.
너른 들녘에는 웃자란 벼 포기들이 녹색물결을 이루고, 배나무에 봉지 씌우는 농부의 손길이 잽싸게 돌아간다. 비닐하우스가 천국을 이루는 야막리.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차려주는 수도권 채소1번지가 바로 야막리 시설단지라고 한다. 소나무, 대나무, 철골로 지은 비닐하우스의 원조가 이곳이고, 진위오이와 진위애호박으로 명성이 높은 생산지가 바로 이곳이란다.
수도권전철이 지나는 야막고가도로를 건너 원미들을 걷는다. 마른장마 덕분에 일찍 찾아온 더위로 30도가 넘는 열기로 대지를 녹인다. 화영아파트와 서원아파트의 샛길을 빠져나오면, 열녀 이효순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가곡리 후곡마을이다.
19세에 시집 온지 5년 만에 집을 나간 남편을 대신하여 30여 년간 삯바느질과 날품팔이를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시어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미담이다. 또한 가곡리 신가곡마을은 경주이씨 상서공파 집성촌이다.
백사 이항복 이후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족으로,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명문가의 특권을 버리고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이회영, 이시영등 6형제가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다. 6형제 중에서 살아서 돌아온 이시영선생이 초대 부통령이다.
무봉산 자락을 넘어 진위면 소재지에 도착한다. 평택의 옛 중심지인 진위현청이 지금의 진위면주민센터 자리이고,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고 한다. 웃다리농악을 대표하는 농악이 평택농악이고 그 중심에는 남사당이 있는데, 진위면 소재지인 봉남리는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유세기의 고향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전국5대 놀이패인 진위패를 육성한 가문으로서, 그의 부친이 솥전을 운영하며 농악에 소질이 있는 패거리를 모아 고종4년 경복궁건축위안공연을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도대방기(都大房旗)를 하사받은 뒤로 더욱 분전하여 평택과 안성이 남사당패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진위향교를 찾아간다. 무봉산자락이 남쪽으로 내려앉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진위향교는 좌청룡우백호의 지세가 뚜렷하다. 앞으로는 진위천이 흐르고 남쪽의 퇴봉산을 안산으로 바라보며 조산으로 무봉산이 솟아있으니 명당자리가 분명하다.
명당중의 명당인 진위향교는 1398년에 창건되어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 현령인 남두극이 대성전을 중수하면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진위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추고,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성현27명의 위폐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를 올리고 있다.
도도하게 흐르는 진위천(세월교)을 건넌다. 진위면 중심부를 흐르는 진위천은 용인시 이동면 시궁산에서 발원하여 용덕저수지와 이동저수지를 거쳐 서탄면에서 황구지천을 흡수하여 팽성읍 석봉리에서 안성천과 합류하게 된다. 진위천을 건너 마산길로 접어들면 평화로운 와곡마을을 만난다.
동구밖 삼거리에는 백 여 년 된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정자까지 갖추었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갈증에 시장기를 느끼는 길손에게는 이보다 반가운 곳이 없다. 평상에 걸터앉아 주섬주섬 배낭을 풀어보니 장수막걸리 한 병이 고개를 내민다. 집을 나서는 길손에게는 보약이 따로 없다. 필수품으로 챙기는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고 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원기를 회복하고 나서 내딛는 발걸음에는 거칠 것이 없다. 신 만고강산을 흥얼거리며 마을 고샅길을 돌아서면 단양우씨 가족묘지와 317번 국도를 만난다. 단양우씨 가족묘지 옆으로 산책로를 따라가면 이곳이 소백치다. 국도를 신설하며 잘라낸 산자락을 동물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인간과 동물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자연보호 차원에서 꼭 필요한 시설이다.
동막길과 삼남로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부락산 둘레 길과 만난다. 이곳에서 삼남길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대백치로 넘어가게 되지만, 지난 6월 지인들과 다녀간 곳이라 서쪽의 둘레길을 따라 송탄중학교를 경유하여 송탄역으로 방향을 잡는다. 잠시 후 최유림장군 가족묘지에 도착한다.
최유림(1426~1491)장군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능통하여, 그의 나이24세인 1450년(세종32)무과에 급제하여 고성현령, 의금부진부 등의 관직을 맡는다. 최유림 장군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공격하여 큰 공을 세우면서 병조참판 수성군에 봉해지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면서부터이다.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최유림장군을 애석하게 여긴 왕(성종)이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벼슬을 높여주고, 이후 오좌동 일대는 최유림장군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평택시에서는 장군의 높은 뜻을 기려 사당과 묘지를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하고 있다.
울창한 숲속으로 이어지는 부락산 둘레길. 삼복더위의 열기도 접근하지 못하는 시원한 오솔길이 펼쳐진다. 숲속은 어머니의 품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진다. 어린아이가 자장가소리에 스르르 잠이 드는 모습처럼,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숲속이야말로 행복의 안식처가 아닌가. 풍진세상을 등지고, 풍류과객으로 살아가는 오늘하루가 덧없이 행복하다.
경기 제10길(소사원길)
회를 거듭할수록 거리가 멀어지는 관계로 집을 나선지 2시간 반 만에 도착한 곳이 서정리역이다. 한때는 송탄시에 속했었지만, 송탄시가 평택시로 편입됨에 따라 현재는 평택시 관할로 되어있다. 옛날 관아가 있던 양성현에서 서쪽으로 물맛이 좋은 마을이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 서정리(西井里)라고 한다.
서정리는 한적한 시골마을 이었지만,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8년 개설하여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서정리 전통시장과 1934년 신축된 성당이 어느덧 80여년이 되었으니 서정리의 역사를 증언하는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삼남길 10구간이 시작되는 원균장군 묘는 불편한 대중교통 보다는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우선 고갯마루에 있는 사당을 참배한다. 원릉군사우란 현판이 걸려있는 사당엔 근엄하고 늠름한 장군의 초상화가 모셔있다. 내리저수지가 있는 마을로 내려서면 장군의 묘소가 올려다 보인다. 비운의 원균장군,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 장군을 모함했던 비열한 졸장으로 알고 있다.
홍살문 옆의 안내문에는 원균(1540~1597)장군의 내력이 적혀있다.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자는 평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선 30척을 격파 하고, 그 후 합포, 적진포 등 여러 차례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칠천량 전투에서 전사 했다고 적혀있다.
과연 원균장군이 이순신장군을 모함한 속 좁은 졸장이었던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공적을 평가한 사료에 의하면 선무1등 공신에 원균 장군과 이순신 장군 그리고 권율 장군을 적고 있다.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여 삭탈관직 시키고, 삼군수군통제사가 되어 전투에 나섰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참패한 패전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선무1등 공신에 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당시의 사료에 의하면, 연전연승하던 이순신장군도 칠천량 해전은 질수밖에 없는 전투라는 사실을 알고는 참전하지 않았고 한다. 선조의 간절한 요청에도 출정하지 않으면서 수륙병진책을 장계로 올리지만, 선조는 세자였던 광해군을 보내면서까지 전투를 재촉했다고 한다.
끝내 출정하지 않은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한 죄로 삭탈관직을 당한 채 한양으로 압송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 원균이 삼군수군통제사가 된다. 그러면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 곧바로 참전을 했는가하면 그렇지가 않다. 선조는 원균에게도 똑같은 군령을 내린다. 하지만 원균도 이순신과같이 출정을 거부한다.
무능한 선조의 재촉은 더욱 심해지고, 도원수였던 권율장군도 원균에게 출정할 것을 재촉하지만, 거부하자 원균을 형틀에 묶고 곤장 50대를 치는 사단이 일어난다. 궁지에 몰린 원균은 지는 전투임을 뻔히 알면서도 불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순신과 원균의 예상대로 수많은 군선과 병사들의 목숨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도 전사를 하게 된다.
패전의 책임은 전적으로 선조의 무리한 출정 명령임에도, 임금에게 죄를 물을 수 없는 현실상황이라 모든 죄를 원균에게 뒤집어씌우게 된 것이다. 나라를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원균장군이지만, 이순신장군과 한 시대에 태어난 불운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말았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균은 아들과 함께 전사함으로 절손을 당하여 원주 원씨 종친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원균장군 묘에서 이어지는 소사원길은 조용한 마을과 산길을 따라간다. 채마밭에는 심한 가뭄 속에서도 알알이 영글어가는 참깨와 고추, 밤송이들이 농촌 들녘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팔용저수지를 지나 나타나는 토끼굴이 302번 국도를 통과하는 길이고, 송탄요금소와 평택 제천간 고속도로를 빠져 나오면 아디다스 물류창고 옆으로 이어진다.
동광아파트가 있는 칠원동에 도착한다. 칠원동은 원래 갈원(葛院)으로 부르다가 이조말엽에 칠원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갈원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숙식장소를 두어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의 숙소를 제공하던 곳이다. 또한 갈원에는 물맛이 좋아 인조 임금이 벼슬을 내렸다는 옥관자정이 있다.
칠원마을의 자랑거리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여 1976년 최우수 모범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표창을 받은 곳이며, 물맛이 좋은 옥관자정을 중심으로 작은 공원을 조성하여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동광아파트 담장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서는 삼남길은 안토시아닌이 풍부하여 시력보호에 효능이 있다는 불루베리 농장을 지난다. 천적인 새들의 공격을 방어하기위해 촘촘한 그물로 정성스럽게 보호하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농민들의 주름살이 깊어만 가는데, 극성스런 새들의 공격까지 당하는 농민들의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모습이다. 동복천을 건넌다. 동복천은 안성시 원곡면 칠곡저수지에서 시작하여 평택중심지를 경유하여 안성천과 합류하는 비교적 작은 하천이다. 앉은뱅이 돌다리를 건너 드넓은 고리기들을 지나면 평택시에서 야심차게 추진하는 소사벌택지구와 만난다.
상전이 벽해가 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수백만평의 너른 대지를 펜스로 막아 30여 분 간 돌아가는 구간이다. 이정표라는 것이 필요한곳에 있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것인데, 막상 필요한곳에서 이정표가 사라지고 말았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금호건설에서 신축중인 아파트 담장이 끝나는 곳에서 종적이 묘연하다.
용이택지개발 현장은 서부개척시대와 같이, 산을 파서 골을 메우고 황량한 벌판위에 아파트가 하늘높이 솟아오르니, 방향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운 곳이다. 현장 인부들도 모른다는 답변뿐이다. 한우리 아파트가 있는 동부공원을 찾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평택대학교 정문에 도착하면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게 된다.
평택대학교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면, 굿모닝병원이 있는 사거리에서 종적이 묘연하던 삼남길 이정표를 만난다. 주위를 살펴보니, 신명나리apt, 벽산늘푸른 apt, 동부공원이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소사2길을 따라가면, 대동법시행기념비를 만난다. 나라에 내는 세금 중에 공납제가 있었는데, 그 지방의 특산물을 선정하여 가구마다 일정하게 배당을 하다 보니 생산하지 않는 가구에도 부과하는 폐단이 있었다. 탐관오리들의 전유물이었던 공납제를 혁신하기위해 새로 도입한 것이 대동법이다.
광해군이 야심차게 추진한 대동법은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기위해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베 혹은 돈으로 내는 것인데,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면 기득권의 심한 반발을 사게 마련이라. 우선 경기도를 시범지역으로 시행하게 된다. 하지만 대동법도 힘 있는 권문세도가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으니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정착되는 데는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옛날 소사원이 있던 소사마을을 지난다. 마을 앞에 있는 소사천에 배가 들어오고, 사방 백리를 바라보는 소사들이 펼쳐지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정유재란과 청일전쟁 당시에는 소사동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와 벌인 휴전이 실패하자 다시 침공한 일본군을 소사벌 전투에서 물리치면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였고, 청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과 청나라가 아산만과 소사벌에서 전투를 벌여 이곳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치욕의 현장이다.
소사들을 가로질러 도착한 안성천은 경기도와 충청도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태령역에서 시작하여 90km를 10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된 삼남길 경기도편이 이곳에서 끝이 나고 안성천을 건너 충청도삼남길로 이어진다. 우리의 뇌리에서 멀어졌던 삼남길. 선조들의 숨결과 애환이 담겨있는 삼남길을 답사할 수 있도록 옛길을 조성해준 경기문화재단과 코롱스포츠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나의 작품세계 > 시산 반년간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86호 - 낙엽의 꿈 (0) | 2017.12.14 |
---|---|
제 85호 - 다시 가슴이 뛴다. (0) | 2017.02.25 |
제 83호 - 시산지교를 꿈꾸며... (0) | 2016.03.01 |
제 82호 - 詩山 20년 사화집 (0) | 2015.12.21 |
제 81호 - 소녀와 해바라기 (0) | 2015.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