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16년 5월 12일
구 간: 오천항 - 충청수영성 - 갈매못 성지 - 보령 화력발전소 - 이지함묘소 - 대천 방조제 -
보령시 생태공원 - 대천역 (22km)
20. 광천 토굴새우젓
용산역에서 6시23분발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 달려온 장항선 열차가 광천역에 도착한 시각이 8시48분이다. 8시54분에 출발하는 관내버스를 타기위해 300여m 거리에 있는 터미널로 줄달음친다. 너무도 숨 막히는 순간이다. 이번 차를 타지 못하면 11까지 2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가까스로 차에 오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옹암교를 건너 광천토굴새우젓단지와 보부상유품전시관을 지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활성암반토굴새우젓을 생산하고 있는 광천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새우젓장터로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5일 장날이면 오서산(790m)에서 채취해온 나무장터와 함께 새우젓을 사고파는 젓갈시장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조선시대 후기에는 전국3대 젓갈시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광천 옹암포구(독배)는 안면도와 천수만을 바라보는 육지 깊숙한 포구로서, 보령방조제가 완공되기 전만해도 새우 잡는 어선들이 옹암포구까지 들어와 전국제일의 새우젓시장이 형성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이르러 토굴을 이용한 새우젓 숙성ㆍ저장방식이 발달되면서 새우젓시장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옹암리 독배마을에 있는 바위산 밑에는 활석암반을 파들어 간 토굴이 40여개 가 넘는다. 길이가 100~200m에 이르는 토굴 속에는 새우젓을 담은 수 백 개의 드럼통에서 연간 3,500여 톤의 새우젓이 생산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폐백음식으로 ‘해(醢)’를 준비했다고 나오는데, 이 ‘해’가 바로 오늘날의 젓갈을 의미한다. 『고려도경』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용하던 음식이 젓갈’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해안지방의 젓갈이 보부상들에 의해 전국 각지로 유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젓갈역사 참조)
관내버스로 30분 만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보령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이다. 서쪽 망화문 터의 아치형 석문(石門)을 들어서며 시작되는 수영성은 충청남도 사적 제5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천 항은 수심이 깊은 천수만 연안에 자리를 잡고 있어, 백제 때는 화이포라 부르며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고려 때에는 왜구의 침몰이 잦아 군선을 두어 지키다가 조선에 들어와서 충청수영(忠淸水營)을 설치했다.
태조 때 수군첨절제사를 두어 수영(水營)을 설치하였고, 1510년(중종 5년) 축조가 시작되어 16년이 걸려 완성됐다. 성의 길이는 1650m에 높이가 11척이고, 5개의 성문마다, 옹성을 설치하여 수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오천항에는 군선 100여척이 정박하고 병력 3천여 명이 상주하며, 금강하구에서 평택에 이르는 연안경비와 조운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진휼청을 지나 포토죤 언덕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오천 항이 펼쳐진다. 밀물시간이라 보령방조제까지 가득채운 바다위로 월척의 꿈을 안고 낚싯대를 드리운 수 백 척의 낚시 배들이 장관을 이룬다. 보령방조제가 완공되기 전에는 광천 옹암포구까지 사 십리 뱃길이 이어졌다고 하니 리아스식 해안의 절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 인다.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수영성(水營城) 영보정(永保亭)에 올라 고소어화(故蘇漁火)요. 연항누선沿港樓船)이라 하였으니, 고소대의 고기 잡는 불빛이 아름답고, 항구에 정박한 높은 배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중에서도 다산 정약용과 백사 이항복은 조선 최고의 정자라 칭송했다.
전국을 유람하는 한 사람의 동지를 만났다. 교육자로서 정년퇴직을 하고, 국토사랑의 일념으로 동해와 남해를 돌아 서해안을 북상중이라는 일명 김산(金山) 선생이다. 서로간의 사고방식이 같고 마음이 의기투합할 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갈매못 성지를 찾아 오천항을 떠난다.
천수만에서 오천항을 거슬러 오르는 입구에 있는 영보리 백사장이 갈매못 성지다. 1846년(헌종12) 프랑스함대 세실사령관이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외연도에 상륙하여 기해박해(1839년) 때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경위를 묻는 서한을 남겨둔 사실이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해침범사건으로 간주하여 다불리 주교, 오매트로 신부, 위애 신부, 장주기, 황석두 등 다섯 명을 영보리 백사장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집행한 사건이 1866년 병인박해다.
순교 후 신자들에 의해 시신을 미산면 서짓골 성지로 이동하는 고통의 길이, 오늘 답사하는 길과 같은 방향이라 그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갈매못 성지를 뒤로하고 610번 도로를 따라 산 고개를 넘어서면, LNG 터미널 정문을 지나 1시간 동안 지루하게 보령화력발전소를 바라보며 걷게 된다.
서해안을 지나면서 우리나라기간산업인 화력발전소를 많이 만난다. 보령화력발전소는 국내최대면적을 확보하여 50만㎾급 발전설비 2기로 구성되어 있다. 충청남도에서 서천화력발전소와 함께 최초로 건설된 보령화력발전소는 1979년 12월 착공하여, 1983년 12월에 1호기를, 1984년 9월에 2호기를 준공했다.
산굽이를 돌아서면 이지함 선생 묘소가 있다. 매년 정월이 되면, 한 해운수를 보던 “토정비결”이란 책이 있었다.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이지함 선생이다. 조선중기(1517-1578) 학자(學者)이며 기인(奇人)으로 이름난 명현(名賢) 이지함(李之函) 선생은 본관이 한산(漢山)이고 호가 토정(土亭)이다.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출생한 선생은 화담 서경덕(徐敬德)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등에 능통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는 마포나루에 살면서 어염상고(魚鹽商買)로 많은 돈을 벌어 간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에 포천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백성들의 가난해결을 위한 경제개혁방안을 상소하였고, 임진강범람을 예견하는 등 우리나라 실학(實學)의 효시(嚆矢)로 알려 진 인물이다.
보령화력발전소 덕분에 내륙 깊숙이 돌아 나온 길이 고정리에 도착하며 바다와 만난다. 그동안 갯벌을 품에 안고 출렁이던 물길도 십리 밖으로 물러나고, 덩그렇게 바닥을 드러낸 갯벌에서 바지락이며 소라 캐는 손길이 분주하다. 건너다보이는 대섬(竹島)이 손짓을 하지만 외지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어로채취금지구역”이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멀리 산자락 아래 대천 읍내가 나타나고, 그 유명한 대천 방조제가 시작된다. 대천해수욕장은 알아도 대천읍내는 알지 못하는 것이 외지관광객들이다. 그 만큼 대천읍내는 방조제로 인해 바다에서 멀어진 내륙 깊숙한 곳으로 밀려 나고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방조제 7km길, 푸른 바다가 문전옥답(門前沃畓)으로 변신한 주교면 일대를 바라보며 대천 천을 따라 서해안고속도로 교각 밑을 지나서도 20여분을 걸어간 뒤에야 대천역에 도착하게 된다. 성주산(677m)자락에 터를 잡은 대천읍은 장항선직강공사로 새로 지은 대천역이 인상적이다.
현재시각이 14시40분. 16시 36분발 무궁화열차 예매시간을 감안하면 대천여객선터미널까지 6km는 갈수 있는 시간이지만,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면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다. 오늘 일정을 22km로 만족하고, 15시 27분에 출발하는 새마을호로 승차권을 교환하여 서울로 향한다.
광천터미널에서 타고 온 관내버스
보령시 오천면사무소
보령 방조제
오천항 입구
오천항 610번 해안도로
보령화력 빌전소 전경
그림같은 대섬
독살
보령 화력발전소
마을 공동 어로구역
대천 방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