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6일 발행
시 : 나홀로 가는 길
신로봉 오르는 길
평화로운 길
앞서가는 사람 없어 약오르지 않고
뒤 처지는 사람 없어 기다리지 않아 좋고
마주오는 사람 없어 비켜줄 일 없고
훠이 훠이 자유로운 몸짓으로
산길을 가네
가리산 오르는 길 즐거운 길
다래넝쿨 칡넝쿨 앞을 가려도
쪽박새 울음소리 애처러워도
단풍나무 사이로 파고드는 했볕이 좋아
콧노래 흥얼대며 산길을 가네
심장의 박동소리 폭포수 되어
몸속의 찌꺼기 쏟아 버리고
민들레의 홀씨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늘과 맞다은 정상에 오르면
천상의 화원에는 얼레지 꽃 만발하고
흥겨운 어깨춤이 절로 나오네.
유럽여행기. 3
6. 로마 교황청
오후에 찾은 교황청(바티칸시국)은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정문을 통과하기 전부터 담장을 따라 도로변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뜨거운 태양아래서 무작정 기다리는 행렬은 흐트러짐 없이 질서를 지키는 유럽인들의 자존심이기도하다. 가이드의 수완으로 줄을 서지 않고도 짧은 시간에 입장을 할 수 있었으니, 줄을 서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가이드가 고맙기만 하다.
0.44㎢의 면적에 인구 729(1978)명인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시국. 독자적인 우표와 화폐를 발행하는 당당한 종교국가로서 교황의 공식직함은 “바티칸시국 국가 원수” 이다. 1년에 천 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1인당 입장료가 15유로(22,500원)이니, 그 수입만도 만만치가 않다. 입장객의 검색이 국제공항을 통과하는 것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된 바티칸 시국은 전 세계 수 억 명의 가톨릭 신도들의 성지이기도하다.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시스타나성당에 있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전시한 사진이다. 시스타나 성당에서는 촬영이 금지된 관계로 성당 측에서 관광객을 위한 배려 차원이다.
로비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 성베드로 대성당이다. 남북186m, 동서150m에 중앙제대 위에서 돔까지 높이가 137m의 웅장한 건물이 우리를 압도한다. 예수의 12제자 중 1명이며, 로마초대 주교이자 1대 교황으로 로마에 가톨릭을 세우고, 네로 치하에서 순교한 성인 성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지은 성당이다.
광장중앙에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을 기념하여 만든 지구본이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환경 파괴로 멸망되어 가는 지구를 형상화 했는데, 빙빙 돌아가면서 다양한 모양으로 변한다. 성당 맞은편에는 교황청을 상징하는 4m높이의 솔방울 조각품이 자리를 잡고, 티그리스 강을 지키는 물의 신 포세이돈의 입에서 쏟아지는 물이 신비스럽다.
이어 예술품들이 진열되어있는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수많은 인파에 밀려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불편함도 있지만, 단편적이나마 예술품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보니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 지나기 십상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나마도 소음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시스티나 성당으로 이어지는 회랑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진열되어 힘을 준 발가락에서 근육의 섬세한 부분과 옷깃 하나까지 역동감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나의 돌덩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신의경지에 이른 예술적 재능으로 이루어지며, 천장의 벽화를 비롯하여 방마다 공간적으로 조화롭게 배치한 감각 능력이 뛰어나다.
1506년 로마의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인근 포도밭에서 발견된 라오콘은 ,아폴로 신을 섬기는 트로이의 제관이었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고대 트로이 사람들에게 그리스군의 “선물”인 속이 빈 거대한 목마를 도시 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성직자이다. 라오콘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 뱀에게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는데.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원형의 실내광장에는 네로 황제의 욕조(둘레 13m)가 전시되어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상이 받들고 있다. 욕조가 너무 커서 네로황제 궁에서 일단 가져온 다음, 방의 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욕조주위로 둘러싸고 있는 조각들 가운데는 사자가죽과 곤봉을 든 네로황제의 청동상이 있다.
바닥의 대리석 모자이크와 벽화, 천장화로 이루어진 미술관 복도에서 천장을 보면 조각품으로 보이지만, 조각이 아닌 입체적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입체감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아도 조각품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양쪽벽면이 지도로 덮여있는 지도의 방을 지난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대학당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지식인들이 총 망라 되어 있는 그림의 방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지나면 피에타상이 있다. 미켈란젤로가 24때 조각한 작품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가 성모마리아의 팔에 안겨진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높이 174Cm, 폭 195Cm의 대작이다.
박물관을 지나 시스타나 소 성당으로 들어서면,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조반니 노데 돌체가 1483년에 완공한 방이다. 천장화는 미켈란젤로가 5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천지창조”로 성당 좌우에 있는 12개의 벽화는 각각 모세의 생애(구약 성서)와 그리스도의 생애(신약 성서)를 나타내고 있는데 1481-1483년 사이 당시 대가들의 작품이다.
율리우스 2세 시절, 시스타나 성당을 개축하던 브라만테는 지붕이 갈라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난다. 브라만테는 앙숙이었던 미켈란젤로를 제거할 구실로 천장화 화가로 추천한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는 아무도 들어오면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림을 그린다. 브라만테가 몰래 들여다보니 나체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켈란젤로는 교황과 충돌 하면서도 4년 7개월 만에 천장화를 완성시킨다.
천장화니까 누워서 그려야 했고, 물감이 얼굴에 떨어지며 눈으로 들어가 시력이 저하되고,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다 보니 등에는 욕창이 생기는 고통의 연속이다. 5년간 참기 힘든 고통을 이겨내며 신기에 가까운 작품을 완성하였으니, 그의 뛰어난 재능과 집념이 경탄스럽다. 더욱 놀라운 것은 평평한 곳이 아닌 곡선으로 휘어진 천장에 완벽하게 그림을 완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사진촬영이 금지된 탓에 박물관 정원 안내판 앞에서 설명 듣고 입장한다.
바티칸에 있는 교황 직속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가톨릭의 총본산으로 유럽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1506년 건립하기 시작하여 백십 여년에 걸쳐 완성한 성당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 품들이다.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긴 행렬 속에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스위스의 근위병들 때문이다. 1527년 찰스 5세가 침략했을 때. 전멸 직전의 상황 속에서도,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끝까지 지켜낸 충성심으로, 교황청 수비를 스위스 용병이 맡게 되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한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관광객들에 떠밀려 성당을 나오면, 그 유명한 성 베드로 광장이다. 베르니니의 천재적 능력이 발휘된 걸작 품으로 로마에서 가장 큰 광장이다. 거대한 타원형으로 이루어진 광장은 성당 입구에서, 두 팔을 벌려 인류를 포용하는 모습이다. 광장은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 된 기둥이 각각 네 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으며,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 높이가 16미터에 이른다.
성 베드로 광장은 네로 황제시대 대전차 경기장과 사형수의 처형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네로황제의 핍박으로 베드로가 이곳에서 처형되고,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처형 된 곳이다. 성 베드로 무덤위에 세워진 성당은 12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라만테 등, 당대의 천재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열주회랑위에는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140개의 성인들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대성당 정면에는 9개의 발코니가 있는데, 중앙에 있는 발코니는 새로 선출된 교황을 선포하고, 새로 선출된 교황이 전 세계를 향하여 첫 번째 강복을 하는 곳이다. 회랑에는 죽음의 문, 선과 악의 문, 청동 문, 성찬의 문, 거룩한 문 등, 5개의 문이 있는데, 이중에 거룩한 문은 25년마다 성년(聖年) 에만 열린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25m에 무게 350톤이나 되어, 탑을 세우는데 900명의 인원과 140여 마리의 말을 동원하여 5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서기37년 이집트에서 가져와 칼라굴라 황제의 경기장에 세운 것이, 네로황제의 경기장으로 사용하다가 1.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성베드로 광장으로 변신하였다.
열주회랑 선물 파는 상점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평생에 한번이라도 이곳 성지순례 하는 것을 소원으로 여기는 카도릭 신자들이 선물을 사려는 장사진이다. 하루에 로마와 교황청을 둘러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 일인가. 주마간산으로 스치는 단체관광으로 일정을 소화하고 보니,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멍청이가 되고 만다.
7. 네델란드
꿈의 도시 로마관광도 끝이 나고 ENEA HOTEL에서 하룻밤을 더 유숙한 후, 파우미치노 공항을 출발하여 로마상공을 벗어나면 아침햇살에 모습을 드러내는 알프스산맥이 장관이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날씨 속에 만년설에 덮인 산과 계곡은 3일전 융프라우를 오른 여진으로 더욱 감명 깊게 느껴진다. 2시간 30분 만에 암스텔담 스키폴공항에 도착한다.
네덜란드 하면 튜립과 풍차를 먼저 떠 올리게 된다. 동화의 나라를 연상하면서, 꽃이 피는 강가에 풍차가 도는 풍경을 상상만 해도 달려가고 싶은 나라가 바로 네델란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네델란드는 바다를 메워 국토를 넓혀가는 방파제가, 구획정리 된 바둑판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현지가이드의 안내로 시작되는 관광은 네델란드가 자랑하는 꽃 박람회장이다. 큐켄호프 꽃 축제는 85,000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꽃밭에서 매년 3월말부터 5월 중순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구근 화훼류 꽃 축제가 열린다. 우리가 찾아가는 4월 25일이 절정기이지만, 이상기온으로 투립의 꽃망울이 이제 피어오르기 시작해서 아쉬움이 많다. 그래도 꽃 축제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고양시의 꽃박람회와 순천에서 개최되는 정원박람회 소식이 이곳 가이드의 입에서 전해질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한 축제이다. 15세기 한 백작부인이 자신의 야채, 허브 정원을 관리하며 여기서 재배된 야채로 음식을 만든 것을 Kitchen Garden 이라 하였고, Keukenhof 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49년 리세시장이 구근식물 재배자 들과 함께 연례행사로 야외 꽃 전시회를 계획하고 큐켄호프주를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선정하여 첫 회에 236,000명이 방문하는 성과를 올리며 세계적인 꽃 전시회장으로 발전하였다. 클린턴 전 미대통령,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같은 수많은 세계의 저명인사들이 방문을 하면서, 이제 큐켄호프는 네덜란드 뿐 아니라 세계제일의 꽃 박람회로 명성을 얻고 있다.
네델란드의 수도는 암스테르담이고,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이다. 북에서 남으로 282km, 동에서 서로 176km 뻗어 있는 이 나라는 북쪽과 서쪽으로는 북해, 동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벨기에와 접하고 있으며, 면적 41,528㎢에 인구는 16,522,000명이다.
독일과 벨기에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남부와 동부지역은 평원과 기복이 심한 산악지역이고, 서부와 북부지역은 저지대이다. 이들 지역은 바다보다 육지의 표고가 낮아 제방을 사이에 두고, 그 유명한 풍차를 이용하여 수위를 조절하는 간척지가 발달되고, 라인강, 뫼즈강, 스헬데강을 아우르는 삼각주로 이루어진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이지만 GNP가 4만 6천불에 이르는 경제대국이다.
하멜표류기로 우리와 친숙한 하멜이 네델란드 사람이다. 1653년 선원 37명과 함께 스페르 베르호를 타고 일본의 나가사끼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 제주도에 이르게 된다. 얼마 뒤 통역을 만난 하멜일행은 깜짝 놀라게 된다. 조선의복을 입었지만, 생김새는 틀림없이 자기나라 사람인 것이다.
하멜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 오기 22년 전, 그도 역시 네델란드를 출발해 일본의 동인도 회사로 향하던 도중 그들과 마찬가지로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로 표류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조국 네델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 남아 조선인으로 귀화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박연(벨테브레) 이란 사람이다.
조정으로 돌아온 박연은 왕(효종)에게 사실을 말하고 효종은 이내 이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이제 하멜일행은 한양으로 가는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한양까지 가면서 거치게 되는 여수, 순천 등 지명을 비교적 정확한 네델란드식 음가로 적는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가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가 탄생한 것이다.
1980년 허정무감독이 PSV 에인트호번에 축구선수로 입단하여 활약하면서 우리나라의 존재가 부각되었고. 2002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렸을 때, 네델란드는 본선에 오르지 못하면서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이 4강에 오르는 신화를 이룩하여 한국과 더욱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운하의 나라 암스텔담은 베네치아와 함께 수상도시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수로를 따라 도심지가 이어진다. 지표면이 해수면 보다 낮아 간척지가 많고 운하가 발달한 나라. 수도 암스텔담은 유럽물류의 중심지이다. 동쪽으로 조이테르해를 매립하여 신시가지를 조성하면서, 암스텔담시의 면적이 3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영빈관이 있는 담 광장으로 이동한다. 타운홀로 세워진 이 건물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시청사로 건립되었으나, 왕궁으로 지정되어 당시의 황제 보나파츠트에 의해 실내가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일곱 개의 출입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결정한 일곱 주를 상징하며 돔에는 지구를 등에 짊어진 아틀라스 신상이 올려있다.
자전거의 천국 네델란드는 전체교통수단의 46%를 차지한다. 네델란드 자전거도로의 특징은 자전거용 신호등이 따로 있어,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자전거에 우선권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자전거를 보호해 주무로서 어디든지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있는 것이다.
8박10일의 짧은 여정에 6개국을 돌아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으나,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 지나면서도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것이 있으니, 우리보다 GNP도 높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도, 화장실을 허투루 쓰지 않고, 물 한 병이라도 아껴 쓰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문화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근검절약하는 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아닌가 싶다.
국토순례
강 릉
대관령을 넘어온 버스가 강릉IC를 빠져나오면, 가장먼저 보이는 건물이 강릉시 청사다. 푸른 숲속에 우뚝 솟은 하얀 건물. 높이가 18층에 연면적이 5만2,000여㎡로 맘모스 빌딩이다. 백년대계를 생각하여 인구50만에 걸 맞는 설계라고 하지만, 강릉의 인구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2만 명이라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강릉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임영관이다. 임영관은 강릉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와서 머물던 건물터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로, 강원도에 산재한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51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정문에는 공민왕이 쓴 ‘臨瀛館(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중앙시장을 거쳐 남대천 고수부지에 도착한다. 강릉시의 중심부를 흐르는 남대천은 대관령과 삽당령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성산면 오봉에서 모여,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가 32㎞에 이르는 하천이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날 등에서 모아진 빗물이 동쪽으로 흘러내리며 남대천상류에 무성한 소나무 숲을 만들고, 강릉시민의 상수원과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생명수로서, 매년 열리는 강릉 단오제도 남대천이 있어서 더욱 돋보인다.
남대천에 걸려있는 강릉교를 건너면서 해파랑 길은 병산마을(4.7km)로 인도하지만, 남대천의 매력에 이끌려 고수부지로 발걸음을 이어간다. 남대천도 한때는 각종 오염물질이 넘쳐나는 시궁창이었지만, 1992년 남대천 정화사업이 시행되면서, 주민들의 노력으로 연어도 돌아오고, 은어와 칠성뱀장어까지 서식하는 깨끗한 하천으로 변했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강릉 중앙고등학교를 바라보며 강변길을 걸어가면, 고수부지에는 자전거와 산책길이 조성되고, 각종체육시설이 정비되어 체력단련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남대천 하류에는 철새들을 탐사할 수 있는 탐조대와 망원경까지 설치하여, 인간과 생물이 공존할 수 있는 친환경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공항대교를 건너 하류로 내려가면, 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두 물머리에 걸려있는 솔바람다리가 환상적이다. 길이192m의 솔바람 다리는 자전거와 보도전용으로 설계되고, 가운데 아치형은 물고기 몸통을 형상화하어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다리 중심부에 올라서면 바닷물의 거친 물결이 도도하게 강물을 밀어 올리며, 두 물이 한데 어울려 멋지게 보듬어 안는다.
해파랑길(39구간)을 이어가는 안내간판을 확인하기 위해 솔바람다리를 건넌다. 바우길 안내도 옆으로 “아름다운 바다 위를 나비처럼 훨훨 날아간다.”는 아라나비체험장이 있다. 발동하는 호기심으로 달려가지만, 휴업중이라 솔바람다리를 다시 건너 강릉여객터미널로 향한다.
강릉항은 울릉도를 오가는 뱃길이 가장 가까운 항구다. 울릉도 저동항까지 2시간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는 선전문구가 관광객을 유혹한다. 관광객도 찾지 않던 강릉항 여객터미널에 솔바람다리와 죽도봉 공원, 커피거리가 있는 안목 항까지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조성하여 강릉의 새로운 관광코스로 부상하고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커피거리를 조성한 안목항. 서양에서 들어온 식품이고 보니, 거리 또한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커피를 마셔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습관이다.
우리 조상들도 예로부터 차를 즐겨 마셨다. 고구려시대부터 전해온 차 문화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귀족과 승려 층에서 즐겨 마셨고, 이조시대에 들어와 양반들의 전유물이 되어 예술의 한 부분으로 승화되었다. 차를 우려내는 다기를 정갈하게 차려놓고,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코로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차 문화가 우리의 전통예절이었다. 곡우 이전에 따는 차를 우전이라 하여 으뜸으로 치고, 녹차와 발효차로 가공하여 마시던 차 문화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1890년 이후라고 한다. 서양외교관들이 왕실과 귀족들에게 환심을 사기위해 진상하면서 보급이 시작되고, 1920년대부터 명동, 충무로를 중심으로 커피전문점(다방)이 등장하면서, 6.25전쟁이후 본격적으로 커피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커피 전문점이 즐비한 안목해변에서 강문해변까지 5km에 이르는 소나무숲길이 시작된다. 동양최대를 자랑하는 소나무 숲. 솔바람이 불어오는 그늘 속을 걸어가노라면, 심신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동해안을 답사하며 수많은 솔밭을 걸어왔지만, 강릉의 솔밭이 으뜸이다. 나무테크 대신 마대를 깔아 반영구적으로 친환경에도 좋고, 발바닥에 전해오는 감촉이 부드러워 피곤한 줄을 모른다.
강문해변에 도착하면, 손님을 부르는 횟집들이 즐비하다. 군침 도는 회집들을 지나가는 중에 ‘회막국수집’이 눈에 들어온다. 붙임성 있는 주인아주머니에 이끌려 회덮밥으로 정하고, 반주까지 걸치고 보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강문해변과 경포해변을 사이에 두고 경포천이 흐르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강문솟대다리가 걸려있다. 송강정철의 ‘관동별곡’중에서 강릉을 노래한 구절을 인용하여 만든 명소다. 또한 푸른 숲속을 배경으로 공사가 한창인 ‘호텔현대경포대’ 가 완공되고 나면, 경포해수욕장과 경포호수를 바라보는 명소로 탄생할 것이다.
경포호수 순례가 시작된다. 강릉에서 대표적인 명소라고 하면, 단연 경포호수를 꼽는다. 경포호수는 모래톱에 바닷물이 가로막혀 형성된 자연석호다. 예전에는 호수의 둘레가 12km이었지만, 토사의 유입으로 지금은 4,3km로 작아졌다고 한다. 호수의 평균수심이 2~3m정도로 얕고, 호수 한 가운데 월파정과 새 바위가 있어 풍치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경포호수는 수면이 거울과 같이 맑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호수 동쪽은 경포대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소나무 숲과 벚나무가 어우러진 도립공원이다. 4~5월이면 벚꽃이 만발하여 관광지로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허균과 허난설헌’ 기념관이다.
울창한 소나무숲속에 자리 잡은 허균생가. 홍길동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은 1569(선조 2)년에 태어나서 1618(광해군10)에 참수형을 당한 조선중기의 학자·문인·정치가이다. 대대로 학문에 뛰어나서 아버지 엽(曄), 두 형인 성(筬)과 봉(篈), 그리고 누이인 난설헌(본명: 초희) 등이 모두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집안이다.
정시(庭試)합격으로 벼슬길에 오른 그는, 반대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당한다. 그 후 사신으로 뽑혀 중국에 가서 문장대가로 명성을 날리는 한편, 당대의 실력자였던 이이첨과 결탁하여 폐모 론을 주장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예조참의· 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나,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한 인물이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홍길동전”은 그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했다. 사당에 봉안된 허균의 초상화는 정갈한 옷차림에 날카로운 눈매가 범상치 않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난 초희는, 오빠와 동생사이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글로,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냈으니, 천재의 기질을 타고난 신동이 아닌가.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 ‘난설헌집’에 담겨있다.
난설헌은 1563(명종1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엽(曄)의 딸이고, 봉(篈)의 여동생이며, 균(筠)의 누나이다. 15세에 혼인했으나, 관직에 나간 남편은 기방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의 시기와 질투로 학대를 당한다. 더구나 어린 남매를 잃고,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어, 동생 허균도 귀양을 가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에 요절을 하고 만다.
美人薄命(미인박명)이라 했던가. 허난설헌의 동상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哭 子’ 의 시 구절은 자식 잃은 어미의 애끊는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수 백 년 세월을 지나온 배롱나무는 알고 있겠지, 허난설헌의 심정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시인 허난설헌은 모진풍파 속에서 꽃망울도 터트리지 못하고, 가녀린 꽃대가 꺾이고 말았으니 허망한 일이다.
다시 경포호수로 올라선다. 시비와 조각상을 조성한 호숫가에는 벚나무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우고, 연잎이 만발한 늪지로 산책길이 이어진다. 삼복더위의 열기 속에서 수줍은 꽃잎을 피워 올리더니, 어느새 구멍이 숭숭 뚤 린 연밥이 탐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의 시 구절을 읍 조리며 도착한곳이 강릉지역 三一獨立萬歲運動紀念塔 앞이다.
이곳에서 경포대쪽은 다음 행선지로 미루고, 매월당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기념관의 문이 굳게 잠기고, 건물수리가 한창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본관이 강릉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1435년 한양에서 출생한 김시습은 어려서 신동의 이름을 떨쳐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삼각산 중흥사에서 단종의 폐위소식을 듣고 세상을 비관하여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21세의 나이에 머리를 깎고, 유리걸식하며 방랑의 길을 걷는다.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을 시작으로, 해상(海上)의 설악(雪岳)을 거쳐, 31세의 나이에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를 저술하고, 노년엔 부여 무량사에서 보내다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선교장이다. 선교장(船橋莊)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한 99칸의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국가지정 중요민속 문화재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이다.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이 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며, 예전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장이라 명명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인 오죽헌으로 향한다. 경포동주민센타를 지나 난곡교를 건너면, 곧바로 양지바른 언덕을 배경으로 오죽헌이 자리 잡고 있다.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이란 이름은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율곡이이선생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얻은 것을 보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見得思義(견득사의)는 공직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어머니는 오만원, 아들은 오천원 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모신 신사임당과 율곡이이선생은 우리의 사표로서 영원히 추앙받는 모자상이다. 보물로 지정된 몽룡실이 있는 오죽헌, 용이 문머리에 서려있는 태몽을 꾸고 신사임당이 조선최고의 학자 율곡 이이선생을 낳았다고 한다.
율곡이이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는 인조임금이 율곡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이 막힘없이 통달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의 신화를 지켜보았을, 600년이 넘는 배롱나무가 오죽헌 앞마당에서 오늘도 변함없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박물관 앞뜰에 조성된 신사임당의 인자한 모습을 바라보며, 강릉이 낳은 두 집안이 너무도 대조되는 삶을 실감한다. 두 집안 모두 명문가에서 천재적 기질을 타고난 신동이었다. 율곡의 집안은 천추만대에 추앙을 받는 명문가의 길을 걸어왔지만, 허균의 집안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참수형을 당하는 비극의 종말을 맞고 말았으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의미심장하게 새겨야할 사표라고 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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