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8일 발행
유럽 여행기
1 . 프랑스
旅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즐겁다. 하물며 유럽여행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아닌가. 일 년 중에서도 여행을 하기에 좋은 계절을 가려 날 자를 정하고 보니, 2013년 4월 17일 네델란드 국적기(KLM 866)로 14시30분에 출발하기로 예약이 되어있다.
전국이 벚꽃 축제로 술렁이는 화창한 봄 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마음은 벌써 애드벌룬처럼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출국장 집결장소에는 모두투어 여행사를 통해 구성된 19명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9박 10일간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 김 영미 씨가 친절한 미소로 여행 수속을 도와 준다.
이번에 여행하게 될 나라는 유럽에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네델란드를 돌아오는 황금노선이다. 지금이야 지구촌구석까지 시시각각으로 전달되는 뉴스의 홍수속에 살고 있지만, 2천 년 전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물을 직접 볼 수 있다는데서 여행의 참뜻이 있다 하겠다.
대지를 박차고 오른 비행기는 중국의 천진과 러시아 상공을 거쳐 11시간의 비행 끝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1시간 45분간 공항에서 체류하다 20시 30분 공항을 출발하여 21시 45분 프랑스 파리 샤를드 공항에 도착하여 4성급 매리어트(MARRIOTT) 호텔에서 첫날의 여장을 푼다.
한국시간으로 새벽5시. 15시간의 강행군과 시차(7시간)까지 겹쳐 여행도 하기 전에 파김치가 되고 만다. 그래서 집나오면 고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짐 풀고,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선잠 속에 새벽4시부터 부산을 떨며, 아침7시 호텔 식당에 내려가니 모두들 부석부석한 얼굴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파리 시내관광이 시작된다. 40인승 리무진 버스에 오른 일행들은 아직도 서먹서먹한 분위기속에 김 영미 가이드의 멘트에 시선이 집중된다. 유럽에서는 공짜 물(식수)이 없다. 식당을 비롯하여 호텔에서도 돈을 주고 사 마셔야 한다. 물 한 병에 4유로(6천원). 또 한 공짜 화장실이 없다.
우리가 식당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서비스하는 것이 물이고, 고속도로와 공공장소의 화장실에서 귀빈대접을 받는 것이 현실인데, 우리보다 몇 배나 잘 사는 부자나라에서 이렇게 인색해서야... 모든 것이 공짜인 세상에서 돈 내는 번거로움에 불평들이 대단하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이곳의 관습과 환경에 따라야만 한다.
시내로 들어서며 고풍스런 옛 건물과 장난감처럼 작아 보이는 차량들이 홍수를 이룬다. 2,000여 년 전 세느강에 있는 섬(시테 섬)에 세워진 파리는 영국 해협에서 세느강을 따라 내륙 쪽으로 약 375km 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파리는 아주 큰 도시가 아니다. 동서12km 남북9km의 작은 면적에 인구 250만이 세느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다.
400여년을 자랑하는 르네상스시대의 건물들을 중심으로 1853년 나폴레옹3세에 의해 파리 개조사업이 구상되고, 오스만의 구체적인 도시설계에 의해 20세기 초까지 진행되어 오늘날 파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세느강 변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에펠탑을 보게 된다. 그림으로는 수없이 보아왔지만, 실물을 보는 감동으로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때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세워진 높이 300m의 노출격자형 철 구조물이다. 에펠탑의 높이는 정확하게 1063피트 약 324m이다. 57m에 2층 전망대, 112m에 3층 전망대, 관광객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전망대가 300m에 있다.
청명한 날씨임에도 세느강 변의 강바람이 몹시 차갑다. 가이드의 설명을 귓전으로 흘리며 주변의 경치에 매료된 가운데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관광을 위해 주차장에 도착한다. 개장시간 이전부터 길게 늘어선 관광객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줄서기가 생활화된 유럽인들의 질서정연한 모습을 바라보며, 가이드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우리는 곧바로 승강기에 오르는 행운을 얻는다.
에펠탑을 오르는 데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승강기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데, 우리의 목적지가 110m 전망대이므로 승강기를 이용하게 된다. 초고속 승강기는 순식간에 우리를 에펠탑의 중간층에 내려놓고,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마르뜨 언덕이 120여m에 불과하니 파리 시내가 손바닥 안에 들어온 셈이다.
프랑스에 유학 와서 활동하는 현지가이드의 속사포 같은 설명에 눈과 귀를 모으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파르나스 타워(검은 건물), 상드마르스 공원 뒤로 사이요 궁전, 금빛돔형의 엘리제궁, 멀리 고층빌딩들이 있는 파리 신시가지 라데팡스, 몽마르뜨 언덕의 샤끄레 쉐리성당, 도심지 중앙의 개선문과 세느강의 유람선, 모든 시설물들이 에펠탑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에펠탑 관광으로 오전을 보내고, 프랑스의 특별요리인 에스까르고(달팽이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점심대접을 받는다. 프랑스식 버터형의 소스와 더불어 고소하고 향긋한 맛이 일품인 달팽이 요리는 프랑스식 요리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집게로 달팽이를 잡고 포크로 돌려서 꺼내먹는 방법이 서툴러서 미끄러지기 일쑤이니 서양 사람들이 젓가락질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 아닌가. 달팽이 소스를 식빵에 찍어 먹는 맛 또한 일미다.
점심식사 후 찾아간 곳은 르브르박물관이다. 연간방문객수가 850만 명. 하루 2만5천명 이상이 찾아오는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이곳은 BC4,000년 전부터 AD19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만점의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다. 제대로 관람을 하려면 일주일이상 돌아야 한다고 한다. 그 양이 너무도 방대하고 구분하기조차 힘이 들어, 가이드의 설명이 아니면 꿈속을 지나온 듯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곳은 12세기 필립2세 시절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자 만든 궁전이었으며,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프랑스아1세가 16세기에 이 건물을 부수고, 레스코에게 명하여 새로 짓게 하였고, 구종이란 조각가가 벽면 장식을 하였다고 한다. 왕궁용으로 사용되던 이곳이 1682년 루이14세가 거처를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기면서 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내부에 왕이 이용했던 만찬 장소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1820년 그리스 에게해의 밀로섬 아프로디테 신전 부근에서 한 농부가 밭갈이를 하던 중 발굴한 높이 2m의 비너스 상이다. 미술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던 조각품이라 카메라 후래쉬의 집중세례를 받는다. 관람객들에게 둘러싸인 조각품은 양팔이 떨어져 나가 관능적인 자태와 포즈에 대한 상상력을 동원하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함무라비 법전(눈에는 눈 이에는 이)을 비롯하여 대부분 성경내용과 연관이 있는 유럽 중세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대영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함께 세계3대 박물관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은 루이14세 초상화, 보석으로 치장된 왕관을 비롯하여 어마어마하게 큰 대작이라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나폴래옹의 대관식 그림에서 절정을 이룬다.
모나리자는 관람객의 접근을 방지하기위해 4m앞에 접근금지 표지선이 있고, 방탄유리로 보호막을 치고 있다. 모나리자의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와 눈썹이 없는 그림으로, 피부와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레오나르도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표현했다는 대작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신의 재능을 훔친 화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가, 발명가, 지도 제작자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천재라고 한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베르사유궁전이다. 파리시에서 남서쪽으로 22km 떨어진 이 도시는 17세기 루이14세가 건립한 이래 100년 이상 프랑스 왕들이 거처하면서 국사를 처리한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프랑스혁명 최초의 중심무대이기도 했던 이 궁전의 정원은 앙드레 르노트르의 걸작품으로 프랑스 유형문화재의 일부이자 유럽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사적지의 하나가 되었다.
이 웅장한 궁전은 원래 연회장으로 건립되었지만, 국사를 처리하는 정청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어 왕실에 딸린 인원이 약 2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루이 15세는 재위기간 동안 선왕이 시작한 건축 사업을 계속했으며, 사치스런 왕실생활의 상징물이 되었다. 1837년에 궁전을 복원한 루이필리프는 “프랑스의 모든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으로서 개조했다.
1870년 파리를 침공한 독일군이 베르사유를 그들의 본부로 사용했으며, 1871년에는 독일 황제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프랑스-독일의 평화조약 체결 후 8년 동안 프랑스 의회의사당 건물로 사용했으며, 1875년 제3공화국의 헌법이 이곳에서 반포되었다. 또한 제3공화정과 제4공화정의 대통령들이 이곳 베르사유에서 선출되었고, 연합국과 독일간의 베르사유 조약(1919)이 체결 되었으며, 샤를 드골 대통령 시절 다시 복구되어 현대화되었다.
그 당시 세계최고의 건축물인 베르사유궁전은 금빛 찬란한 정문의 왕관부터 우리를 압도하고, 건물외벽과 내부시설을 황금으로 장식하여 호화스러움에 놀라고 만다. 황제들이 사용하던 집기와 의상을 비롯하여 우리가 그림으로 보아오던 진품들이 방마다 진열되어 있고, 르네상스의 정교한 건축물과 영롱한 상드리에와 천장에 그려진 벽화의 화려함이 극치를 이룬다.
수많은 관광객과 휘황찬란한 시설물에 압도되어 일행들과 떨어져 출구를 찾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리저리 찾아보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당황한 나머지 가이드에게서 귀동냥한 “쇼띠(출구)”를 외치며 안내원의 도움으로 궁지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베르샤유궁전의 하이라이트는 야외 정원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원의 면적이 너무도 방대하여 걸어서 관람하는 데는 3일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순환열차로 돌아도 되지만 짧은 일정이라, 궁전 앞뜰에 마련된 정원에서 30분간 시간이 주어진다. 독일병정처럼 질서정연한 디자인으로 섬세하게 꾸며놓은 정원은 충무앞바다의 외도에 조성한 정원이 이곳을 모방한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파리 시내로 돌아와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그 유명한 세느강의 유람선 여행이 시작된다. 세느강은 프랑스 중북부를 흐르는 길이 776km의 강이다. 철도가 건설되기 전에는 중요한 내륙수로(內陸水路)로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세느강 유람선 바토무슈는 파리의 야경과 에펠탑의 조명을 보는 것이 최고의 관광이라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써머타임이 시작되는 4월이라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가 없었다.
우리가 상상하던 세느강은 한강처럼 넓은 곳이 아니다. 중랑천이나 안양천처럼 100여 미터 남짓한 강폭에 수심이 깊은 운하로 개발하여 관광객을 비롯한 운송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강변을 이어주는 30여개의 다리들 중에서 퐁데자르다리가 인상적이다. “예술의 다리”라는 별칭답게 세느강의 교각 중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 다리 위에는 거리의 화가와 음악가들이 몰려들고,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구애 장소이다.
“연인의 다리”로 알려진 퐁네프다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400년 역사를 지닌 다리로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노숙하는 남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의 운명적 사랑을 담고 있다.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세느강 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에펠탑이다. 석양에 비추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유람선 관광도 끝이 난다.
단체관광이 미리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것이라 가이드의 뒤를 따라 다니다 보면, 어디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사진 찍다 하루를 다 보내고 만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정 속에 걷는 관광, 보는 관광, 듣는 관광,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유럽관광의 특징이라 한다. 유럽처럼 먼 거리에 있는 관광은 체력이 왕성한 젊은 시절에, 동남아는 중년시절, 노년에는 편안하게 국내여행을 다니는 것이 순리라고 가이드가 귀띔을 한다.
첫날밤을 보냈던 매리어트(MARRIOTT) 호텔로 돌아와 2일째 밤을 보낸다. 피로한 속에서도 같은 배를 탄 동료들과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정년퇴직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온 3쌍의 부부와 어울려 소주잔으로 통성명을 하며 인사를 나눈다.
3일째 날이 밝았다. 호텔식으로 차려내온 아침식사는 다양한 메뉴와 정갈한 식단으로 마음에 흡족하다. 든든하게 배를 불리고,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세느강 변에서 인증 샷으로 관광을 시작하여 개선문을 찾아간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설계했다고 한다.
개선문은 제작기간이 무려 30년이나 걸렸으며, 높이 약 50m, 너비 약 45m에,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도가 부조로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고문서들이 보관된 박물관이 있다. 엘리베이터로 개선문위로 올라갈 수가 있고, 지하통로를 이용해 개선문에 접근한다. 개선문 아래 한가운데는 세계1, 2차 대전 때 사망한 군인들의 무덤이 있고, 꺼지지 않는 횃불을 위해 매일 저녁에 불을 간다고 한다.
개선문이 있는 에투알 광장을 중심으로 12개의大路가 방사형으로 뻗어있고,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 방향으로 콩코르드 광장과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넓은광장이다. 1755년 앙제 자끄 가브리엘에 의해 설계된 이 광장은 원래 루이15세의 기마상이 있었기 때문에 “루이15세 광장”으로 불렀다.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기마상은 철거되고, 이름도 “혁명광장”으로 바뀌었으며. 프랑스혁명 중에는 루이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곳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1795년 이후 “콩코드 광장”으로 부르는 광장의 중심부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 오벨리스크(클레오파트라의 바늘)가 놓여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는 230톤의 무게에 23미터의 높이로 1831년 이집트 고관 무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헌납한 것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쁘랭땅 백화점이다. 남성관, 패션관, 뷰티생활관으로 구성된 9층 건물은 황금빛 돔으로 치장하여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긴다. 유명브랜드의 총 집합 장으로 진열된 매장은, 세련된 인테리어로 고객을 유도하고 한국어 안내 자료까지 준비하는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이상으로 프랑스 관광을 마치고, 파리동역에 도착하여 독일에서 건설한 이체(ICE)고속철도편으로 독일 프랑크 프르트로 향한다.
2. 독일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고속열차를 건설할 때, 독일의 ICE와 프랑스의 TGV가 치열한 경쟁 끝에 차량선정에서 테제베(TGV)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와 프랑스가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며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공식으로 방한하게 된다. 그만큼 고속철도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미래 동력성장의 필수품인 것이다.
선진국인 독일의 이체(ICE)는 객차 내에 대형여행용가방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편리한 점 외에는 경부고속열차와 큰 차이가 없고, 안락함과 편안함에서는 우리의 KTX가 나은 것 같다. 고속 열차가 출발하며 프랑스의 대평원이 펼쳐지고, 여행사 측에서 마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한국식당에서 특별히 주문한 도시락은 하얀 쌀밥에 야채까지 곁들인 성찬이다. 든든하게 포식을 하고 소주로 입가심을 하고나니 포만감속에 스르르 잠이 몰려온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녹색평원에 그림 같은 마을이 차창 너머로 스쳐간다. 70%가 산악지역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이나 서유럽에서 대평원을 바라보면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유럽의 풍속도를 경험하는 것도 참된 추억이라. 장거리 이동의 피곤함도 잊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1시간 반 만에 프랑스국경에 도착하여 기차표검사로 국경선을 넘어 2시간을 달린 끝에 프랑크 프르트 중앙역에 도착한다.
서울역과 흡사한 고풍스런 역을 빠져나오면 가장먼저 반겨주는 것이 기아 모터스 간판이다. 외국에 나오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유럽의 경제도시 프랑크프르트 한복판에서 우리의 위상을 높여주는 간판하나에도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인원점검과 함께 리므진 버스에 올라 시내관광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뢰머광장이다. 뢰머란 로마인이라는 뜻으로, 프랑크프르트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뢰머광장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뢰머광장에 있는 시청사는 15세기 초 프랑크프르트 시의회가 로마귀족의 저택 3채를 사들여 개조한 후 시청사로 사용하였으며, 그중 가운데 건물을 뢰머라 부르며 현재도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계단식으로 된 붉은 지붕의 세 개 동이 연결되어 있는데, 신성로마시대에는 황제대관식후 화려한 축하연을 하던 곳이고, 뢰머라 부르는 2층의 테라스는 중요 행사가 있을 때, 각료들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연설하며 환호를 받던 곳이다. 분대스리가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하던 차범근씨가 85-86년 시즌 그의 팀이 우승하였고, MVP로 선정된 그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발코니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뢰머광장 중앙에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동상은 오른손에 검을 왼손에 천정(저울)을 들고 있는데, 유스티티아는 정의와 법을 담당하는 로마의 여신이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양날의 검은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뢰머광장 뒤편으로 로마시대 공중목욕탕 유적과 우뚝 솟은 성 바돌로메성당의 첨탑(95m)이 주는 위압감에 매료된다.
고딕양식의 성 바돌로메성당은 1152년 이래 1792년까지 600여 년 간 황제나 국왕을 선출하고 역대 황제들의 대관식이 치러지던 유서 깊은 장소로서 카이저 돔이라고도 부른다. 852년 카롤린 왕조시대에 성 바돌로메와 카를대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유서 깊은 성당이다.
프랑크 프르트는 인구 65만의 독일에서 5번째 도시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 경제인들이 유럽시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라 한다. 경제, 금융, 상업도시로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유로 금융센터가 자리 잡고 세계 각국의 은행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수 만 명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는 금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중앙역과 뢰머광장 중간지점에 유태인 학살모습의 석상을 만날 수가 있다. 세계2차 대전의 주범인 독일에서는 유태인을 학살한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사죄의 뜻으로, 거리 곳곳에 잔인한 학살행위를 묘사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태도는 어떠한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저들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를 느끼며, 독도를 저들의 땅이라고 우겨대는 야만성이 여실히 대조되는 현장이다.
저녁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며 맥주의 본고장, 독일맥주 시음회를 갖는다. 500L에 3유로(4,500원). 독일에서 맥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라고 한다. 독일 전역에서 각 지역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양조장이 1,300개가 넘는다고 하니 다양한 맛에 놀라고 만다. 그만큼 독일 사람들에게는 생활화된 음료수로서, 독일맥주는 김이 빠져도 맛이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4성급 머큐리(Mercure)호텔에 여장을 풀고 프랑크프르트에서의 밤을 보낸다. 호텔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곧바로 하이델베르크 고성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도 현지가이드가 합승한다. 성우 송도순씨의 미모와 목소리를 닮은 가이드의 안내로 시작된다. 하이델베르크는 네카어강(江)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 1225년 라인 백작령(領)이 되었고,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해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된 곳이다. 시내 인구의 약1/4 이 대학생과 학교관계자들이라고 한다. 30년 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하이델베르크는 1952년 이후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어 17세기말 프랑스에 의해 파괴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여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산 교육장이다. 이 성의 지하에는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10만 명분)의 거대한 술통이 있다.
하이델베르크성 광장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이 너무도 아름답다. 유럽 중세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황갈색 지붕으로 고풍스럽고,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강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철학자의 길로 명명된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선다.
옛날부터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하이델 베르그에 위치한 고성은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마음의 평온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곳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알려진 괴테가 젊은 애인과 사랑에 빠진 곳이다.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있고, 1701∼1703년 건립된 시청사와 거대한 성당을 중심으로 쇼핑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점심메뉴로 독일 전통 돼지족발 슈바인학세를 기대하며 식당에 들어선다. 한국족발에 길들여진 입맛에, 생소한 슈바인학세는 생각보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도 여행길에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포기해서는 안 되겠기에 천천히 음미하며 생맥주와 곁들이는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남한의 4배나 되는 357,022㎢의 면적을 자랑하는 독일에서 만 하루도 못되는 시간을 체류하는 것은 “장님 문고리 잡는 것보다도 못하지 않은가”. 1883년(고종 20) 11월 조선전권대사 민영목(閔泳穆)과 주일(駐日) 요코하마[橫濱] 독일총영사 자페 간에 한·독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처음으로 독일과 공식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됨에 따라 한·독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반세기가 지난 1957년 대한민국과 서독정부가 상호승인을 교환함으로써 공식교류가 시작된다. 이후 한국의 간호사와 광산근로자들이 서독으로 진출하고, 1964년 12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하여 경제선진국인 독일의 도움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원동력이 된다. 독일에서의 짧은 여정을 맥가이버 칼을 사는 것으로 대신하고, 빗방울이 흩날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 속에 스위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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