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30일 발행
역사의 현장 서안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가며 길러낼 때 무슨 사심이 있으랴. 바람 불면 꺼질 새라 애지중지 보듬어 안고 튼실하게 자라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시름을 덜어 내지 않았던가? 철부지로만 보이던 아이들이 (명숙, 미숙, 재형)부모 생각하는 마음으로 효도관광을 마련하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보다도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길에 나선다.
예정대로 인천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항공 OZ 319기. 강화도 마니산의 상공을 선회하며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서해안을 따라 고도를 높이고, 목포를 지나 서해바다를 건너 내륙지방으로 향한다. 목적지인 서안이 가까워오며 광활한 대지위에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서안의 시가지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장 닭 모양의 중국지도를 보면 서안은 그 중심부인 배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하는 중심지로 주나라부터 당나라까지 5대 왕조가 도읍지로 정한 유서 깊은 도시다. 천년의 영화를 누렸던 서안은 섬서성의 성도이고 면적이 9,886㎢에 650만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8번째로 큰 도시다.
어머니의 강 황하의 지류인 위수가 도심지를 흐르고 있지만 강우량이 500mm에 불과해 논농사는 거의 없고 보리, 밀, 옥수수, 면화 등 주로 밭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건조한 황하의 유역에서 일어나는 황사가 도시 전체를 뒤덮는 악조건 속에서도 수 천 년 간 중국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역사 관광은 가이드의 설명이 아니면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려우므로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처음 방문한 碑林에는 명필들의 친필서각 1,095점이 한자리에 전시되어 숲을 이루고, 천년이상 된 문화재급 보물들만 선정하여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보물들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전시실에 배치하였는데 제1전시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문인들의 필독도서로 四書三經을 비롯하여 12부 경서 65만 250자가 비석에 빼곡히 쓰여 있다.
당의 현종이 쓴“석대효경”은 예서체로 되어있고 비석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며 제2전시실에 들어서면 문물이 가장 성행했던 당 나라 때의“대진경교 류행중국비”가 자리 잡고 625년 기독교가 들어와 활동했다는 흔적이 아라비아 글자로 새겨져있다. 또한 당나라를 대표하는 안진경의“다보탑 감청비”와 “안씨가묘비”는 자신의 행적을 적은 글로 72세에 썼다고 전해진다.
제3전시실에는 서성 왕 휘지의 비문이 자리 잡고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이 현장법사의 공헌을 치하하여 지은“삼장성 교서비”를 왕 휘지의 필체로 비석에 새겨 넣었는데 해서, 횡서, 초서의 세 가지 글씨체를 순서도 없이 섞어서 쓰고 글자의 크기도 제 각각이어서 그 뜻도 모른 채 스쳐 지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서예가들이 온종일 자리를 지키며 탐독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세상에 둘도 없는 귀중한 보물을 자기혼자 독점하겠다는 욕심에서 탁본을 한 다음 글씨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지워버렸다고 하니 이런 황당한 일이 있는가? 제4전시실 문턱을 넘어서면 그윽한 묵향과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탁본 뜨는 손놀림이 민첩한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탁본의 기술도 보여주고 복사본을 판매하는 곳이다. 이마저도 몇 년 후에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금한다고 하니 귀중한 장면들을 견학하며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다.
두번째로 도착한 진시황 릉은 여산(1,307m)의 줄기가 동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가며 구릉지에 과수원이 즐비하게 이어지는 사이로 무성한 숲에 둘려 쌓인 야산(높이115m)에 이르지만, 지금은 87m로 낮아 졌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계단으로 이어지고 봉분위에는 타일을 깔아 공원처럼 벤치도 있고 간이상점과 사진사까지 진을 친다.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에는 많은 관광객이 붐빈다.
무덤의 규모는 넓이 25만평에 직경이 6km인데, 봉분만도 동서로 485m, 남북으로 515m의 거대한 동산을 이루고 있다. 전설 속에 전해오던 진시황 능은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양 지발-현재 75세 로 생존해 있음)에 의해 발견되어 투시경으로 사마천의 기록을 대조한 결과 확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덤을 내려와 진시황의 병사들이 열병식 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지하궁전으로 안내한다. 350분의 일로 축소된 지하궁전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먼저 돌비석에 “ 前 言 „ 이라는 글자가 우리를 반겨준다.
능원풍광 지하황궁
상구천문 하구지형
시황관침 사내여생
일람오비 사미우궁
이라 적혀있다.(사진 촬영이 금지되고 시간상 한문으로 쓰지 못하고 한글로 표기함)
좁은 계단을 따라 지하 8.7m의 지하궁전에 도착하면 어두운 조명 속에 하늘에는“일 월 성신”의 천체가 신비감을 더 한다. 해가 떠있는 낮에는 조명이 밝게 빛나고,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면 어둠 속에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재현된다. 천상에는 가위를 든“여”와 낫을 든“복 희”가 마주보며 하늘을 나는데 하반신이 뱀의 형상을 하고, 바닥의 정중앙에 누어있는 진시황을 호위하는 수호천사로 표현되고 있다.
동쪽 벽에는 “시황동기”라는 진시황제의 행차와 남쪽 벽으로“시황출순”으로 지방순시, 서쪽 벽에는“육국가무 ”로 각국의 무희들이 악기와 가무를 하는 모습, 다음으로 북쪽 벽에는“육국궁전”으로 함양궁을 중심으로 36개 군주들의 궁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실제로 지하궁전의 규모가 내성이 4km, 외성이 6km에 달하며 일월성신을 진주와 보석으로 만들고 산과 대륙은 금과 은으로 강과 바다는 수은으로 채웠으며 물고기 기름으로 장명등을 밝혔다고 하니 그 화려함의 극치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겠다. 진시황이 즉위하며 시작된 공사는 38년간 72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는데, 진시황이 죽고 그의 아들이 2년 동안 공사를 한 후에야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다.
무덤에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접근하는 물체를 향해 화살이 날도록 장치를 하였으며, 무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인부를 모조리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진시황의 시체도 처음에는 다른 곳에 매장하였다가 2년 후에 아무도 모르게 이장을 하고 마지막 인부들까지 생매장하여 비밀이 지속될 수 있었다. 항우가 함양궁을 점령하고 30만 대군으로 30일간 약탈과 방화로 파괴를 하였지만 지하궁전만은 찾지를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지하 궁전뿐만 아니라 천하를 통일한 후 변방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수축하고 어마어마한 아방궁을 건설하며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살상을 일삼으니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폭군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성문법을 완성하고, 도량형의 표준을 정하고, 화폐를 통일한 것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지방 순시를 즐겨하여 나이 50세에 하남성 사구를 순시 중 병으로 사망(둘째 아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음)하고 만다. 진시황이 죽고 4년 만에 진나라도 망하게 되니 천하를 통일하고 불로장생 하겠다고 욕심을 부리지만 부질없는 인간사가 허망할 뿐이다. 지하궁전을 나서며 10분 거리에 있는 병마용총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세계8대 불가사의 중 하나.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병마용총은 진시황 능에서 1,5km떨어진 곳에 있다. 발굴현장을 건물로 지어 전시실로 보존하고, 제1전시실로 들어가면 동서로 230m, 남북으로 62m에 갱의 깊이가 5m나 된다. 책이나 T V 로 보아온 터라 낮 설지는 않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 4열종대로 도열해있는 진품 앞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흥분과 벅찬 감동 속에 가이드의 설명이 귓전에서 맴돌고 모두들 시선을 거둘 줄 모른다.
무덤 안에는 병사가 8,000여명에 말이 500여필, 전차가 130량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병사 1,000여명과 적은수의 말과 차량만이 발굴된 상태에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기술로는 완전한 복원이 불가능 하므로 앞으로의 일은 후세들에게 숙제로 물려주고, 발굴된 부장품들을 복원하는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10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俑이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만든 부장품으로 속이 비어있는 도자기를 말한다. 1호 갱에는 보병부대들이 주축을 이루고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칸막이를 통로로 이용하고 맨 뒤편에는 부서진 토용들을 복원하는 작업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2호 갱으로 들어서면 1호 갱의 절반정도가 된다. 토기 굽는 가마터가 있고 중장비를 갖춘 실전부대가 배치돼 활 쏘는 기마병 ,전차병, 긴 창을 든 보병들이 도열해있다. 3호 갱은 지휘부로 활용한 곳이다. 남쪽 방은 작전회의실이고 북쪽 방은 제사를 지내던 방으로 제사에 사용했던 사슴뿔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3호 갱 옆으로 긴 회랑에는 출토품 중에서 가장 완벽한 토용을 전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활 쏘는 병사와 늠름하게 서있는 병사다. 말을 끌고 가는 마부의 상은 2,000년의 긴 세월을 뛰어넘은 현재에도 감탄이 절러나는 예술품으로 주목 받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고고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진시황의 청동마차가 전시되어 있다.
1980년 발굴된 동 마차가 2대인데 앞에서 황제의 길을 열어가는 마차를 고차라 하고, 황제가 타는 마차를 안차라한다. 고차는 말 네 필이 끄는 수레에 마부가 한사람 앉아있는 둥근 지붕이 있는 단순한 것이고, 안차는 화려한 장식을 한 말 네 필이 끄는 뒤에 마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둥근 지붕아래 사각형으로 휘장을 치고 사방으로 미닫이문을 만들었는데 l,3kg의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하고 보석으로 치장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세계에서 개인의 무덤으로는 가장 큰 진시황의 무덤. 살아생전 백성들을 핍박하며 만든 거창한 유물이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입장객이 2-3만 명씩이나 된다고 하니 그 수입도 만만치를 않을 것이고, 가장 짧은 생애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진시황이야 말로 오천년 중국역사에 빛나는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저녁노을이 화려하게 불꽃을 피우는 서안. 공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2일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주, 진, 한, 수, 당나라까지 5대왕조의 도읍지로 천여 년 간 영화를 누리고 호경에서 함양으로 장안에서 서안으로 이름까지 바꿔가며 명맥을 유지한 유서 깊은 서안이 다시 한 번 명성을 떨칠 그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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