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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국

태산 가는길.2

 2011년 10월 1일

                                    제2부: 오악의 지존 태산

 

주차장에서 내려온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던 新貴大酒店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서둘러 차에 오른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내일 태산을 오르려면 오늘저녁 태안으로 가야하지만 500km가 넘는 거리를 간다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에 400여km 떨어진 박산시까지 가야한단다. 3일 동안 버스로 1500km를 이동한다는 설명에는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만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이기에 올 때마다 새로운 변화에 감탄하며 머지않아 우리를 추월하겠다는 생각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 신나게 달려가는 버스는 저녁 7시에 출발하여 11시 30분이 넘어서야 숙소인 망글주점에 도착한다. 노산에서의 환호도 버스에서의 시달림으로 파김치가 되어 방 배정 받기가 무섭게 골아떨어진다.

 

 

모닝콜 5시 30분. 허울 좋은 4성급 호텔은 난방시설도 없는지 사람의 덕을 보자고 덤벼드니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온몸이 찌뿌듯하다. 그래도 태산에 오른다는 희망으로 서둘러짐을 챙기고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7시에 출발한다. 고속도로주위로 보이는 풍경은 너른 평원에 옥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공터마다 농경지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포플라 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산동성의 중부지방에 있는 태안시는 인구 백만의 아담한 도시로 상해와 북경의 중간지점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오악의 지존인 태산이 있는 관계로 황제로부터 고관대작까지 자주 찾는 유서 깊은 도시로, 예를 숭상하여 國泰民安을 신봉하는 전통이 있고 도시 전체가 깨끗하여 전국 13대 위생도시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1시간 반 만에 시내로 들어오면 청도에 비해 발전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시원하게 뚫린 도로가 가장 인상적이다. 중국에서는 토지만큼은 개인 소유가 없어서 자유롭게 도시를 설계하고 백년대계를 생각하여 기간시설을 완비하게 된다고 하니 그저 부러울 뿐이다.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명절은 중화인민창건기념일인 10월1일이라고 한다. 국경절이 되면 태산을 찾는 인파가 절정을 이루어 기존 등산로를 택하면 정해진 시간에 정상을 오를 수 없으니 인적이 한가한 곳으로 안내를 하겠다는 설명이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정상을 오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이드의 말을 따른다. 생소한 곳인지 현지가이드 한명을 앞세워 출발하는 곳은 태산의 북쪽 대하마을이다. 등산로가 계곡의 너덜지대를 거슬러 오르는 길이라 주위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비라도 온다면 탈출로가 마당 치 않다는 단점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것 같다.

 

 

태산은 예로부터 동악, 태악, 대종, 대산이라 불렀고, 춘추시대부터 태산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태산은 오악독존(五岳獨尊), 오악독종(五岳獨宗), 오악지장(五岳之長) 등으로 불리며 중국 사람들의 정신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동악은 태산(1,545m), 서악은 화산(2,160m), 남악은 형산(1,265m), 북악은 항산(2,052m), 중악은 숭산(1,512m)을 말하며 중국의 동, 서, 남, 북,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산들이다.

 

 

산동성 중부의 태안, 제남, 역성, 창청 4개 시현에 걸쳐 있는 태산은 총면적이 426㎢에 이르며, 동서 30㎞, 남북 40여㎞로 우리나라 지리산(438.9㎢)과 크기가 비슷하다. 그러나 태산은 지리산과 달리 웅장한 봉우리가 첩첩으로 둘러싸여 훨씬 험하고 가파르다. 중국인에게 태산은 하나의 산으로서가 아니라 신앙과 믿음을 주는 영적인 산으로 존재했다.

 

 

중국의 제왕들도 태산에 올라 봉선제사를 지내야만 진정한 제왕으로 간주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봉(封)은 하늘에 근접한 태산의 꼭대기에 흙을 모아 둥근 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내는 곳이요. 선(禪)은 태산의 앞에 있는 작은 산에서 흙을 쌓아 사각형의 제단을 만들고 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제왕이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하고, 황제 자신은 명실상부하게 진룡천자(眞龍天子)가 되는 것으로 믿게 되었으니 태산 정상 옥황정에는 역대 제왕이 봉선하던 고등봉대(古登封臺)가 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제를 비롯해 한 무제, 후한 광무제, 당 고종, 당 현종, 송 진종, 송 휘종, 원 쿠빌라이, 청 강희제, 청 건륭제 등 72황제들이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지냈다고 한다.

 

 

계곡의 너덜지대를 1시간정도 거슬러 오르면 성황당 정자나무가 있다. 수령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무사귀환을 비는 마음으로 고목나무 밑에 돌 하나씩을 놓게 되고 험한 산길에서 맹수라도 만난다면 임시방편의 호신용으로 이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바위틈에 움막을 들어앉히고 기도에 몰두하는 도인은 어느 경지에서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있을까? 상류로 올라갈수록 산세는 점점 험해지고 태산의 진면목이 서서히 드러난다.

 

 

너덜지대가 편할지 계단길이 편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용케도 이곳에는 태산의 대명사인 계단이 없다. 어느 곳을 가든지 힘들기는 마찬가지라 거친 숨소리가 귀청을 파고든다. 왼쪽의 사면 길로 접어들면 계곡의 물소리도 멀어지고 2시간 만에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쉼터에 도착한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자리에 주저앉는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무겁게 걸머지고 온 막걸리를 펼쳐드니 모두들 환호성이다. 1.5리터 한 병이라 흡족하지는 않지만 산에서는 막걸 리가 최고 인기라. 조롱박에 나누어 마시는 막걸리 한잔에 원기를 회복하고 행복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솔밭이 끝나는 고갯마루. 苦盡甘來라. 힘들여 올라온 만큼 보람이 있고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건너편의 산등성이에 케이불카가 오르내리고 정상으로 가는 길이 완만한 계단 길로 연결된다. 예정보다 빠른 3시간 만에 남천문에 도착하니 가이드(현호)가 혀를 내두른다. 용마산악회 13명의 평균연령이 70세라면 믿겠는가. 노익장을 과시하는 13용사는 노산에서도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는가?

 

 

남천문 광장은 말 그대로 人山人海다. 케이불카로 실어 나르는 인파들이 모여들고 다른 등산로를 따라 올라온 인파로 발 들여 밀 틈이 없다. 이들을 유심히 보면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양장에 신사복을 입고 있으니 우리와는 너무도 이질감이 든다. 남천식당이 자랑하는 현지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황제들이 봉선제사를 올리던 옥황정을 오를 순서다. 지금처럼 등산로가 정비된 것도 아니고, 험한 산길을 마다않고 올라온, “지성이면 감천”이라 황제들의 염원이 옥황상제에게 전달되고도 남았으리라.

 

 

층층누각을 바라보며 올라가는 계단 길. 하늘로 오르는 天街를 지나 中升문을 들어서면 보기 좋은 바위마다 새겨진 친필서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붉은색이 악귀를 쫒는다는 속설대로 중국 사람들이 즐겨 쓰는 색상이라 글자도 붉은색으로 덧칠을 한다. 여러 시대에 걸친 경문, 시문 등이 다양한 서체로 새겨져 있는 암벽문화유적,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여주는 화려한 경관 등으로 유네스코로부터 1987년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가파른 계단은 다리가 뻐근하도록 높기만 하고 西神門을 들어서면 향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고 國泰民安을 비는 벽하사. 벽하사는 송나라때 만들어진 것으로 벽하운궁의 불상이 모셔진 중국도교의 유명한 궁관이다. 다시 계단을 따라가면 수십 길 절벽에 음각된 친필서각이 눈길을 끈다. 시인묵객들이 저마다의 시상을 발표한 전시장이다. 수 백 평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로 人山人海를 이루고 뜻도 모르면서 사진의 배경으로 추억을 만든다.

 

 

청제궁은 만들어진 연대는 모르지만 경내에 청제의 불상이 모셔져있다. 청제는 중국 동방의 신이며 사람의 생존을 주재한다. 송나라 진흥황제가 태산에 올라 청제를 광생제군으로 동봉했다고 한다. “孔子小天下慶”의 비석이 있는 만인석 광장에 올라선다. 이곳은 태산정상의 동쪽 끝이라 일출을 보는 장소로도 유명하고 국경절에는 많은 인파가 모여든다고 한다.

 

 

옥황정 오르는 계단에는 오르고 내리는 인파로 성시를 이룬다. 신선교를 지나 “오악독존”과 “앙두천외”라고 새긴 비석이 보인다. 옥황정은 사방이 절벽이요 유일한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는데 유럽의 어느 고성을 연상케 한다. 옥황정 바로 앞에 그 유명한 무자비가 있다.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하고 정상에 올라 남긴 비석이라는 설과 한 무제가 자신의 업적을 후대인들이 평가하라는 뜻에서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다는 설이다.

 

옥황묘는 예로부터 태청궁, 옥제관이라 하고 옥황대제의 불상이 모셔져있다. 고대 제왕들이 이곳에서 땔나무를 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는 향 사르는 화덕이 있고, 그 뒤로 “泰山極頂 1545米” 비석이 있다. 꿈에 그리던 옥황정이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에도 아랑곳없이 모두들 엄숙한 모습이다.

 

 

家和萬事成이라. 집안이 화목하고 현준, 송현, 가현이 無事無頉하게 자라줄 것을 빌며 합장을 한다. 주위에 있는 쇠사슬에는 무수히 많은 자물쇠가 걸려있다.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옥황상제님께 빈 다음 자물쇠를 걸어 잠근 뒤 열쇠를 벼랑으로 버린다고 한다.

 

 

명나라 때 세운 옥황정의 정 중앙에는 옥황대제의 상을 모시고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오른쪽에는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 모셔있다. 되돌아보면 중국의 수많은 산중에서 유독 태산을 오악독존으로 부르게 되었는지?높 이로만 본다면 기라성같은 산들이 부지기수이고, 산세로 본다면 황산이나 화산, 노산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높이나 산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산의 상징성이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중국고대의 신화를 보면, 천지만물의 조상인 반고 씨가 죽고 난 뒤 머리는 동악의 태산이 되고 눈은 일월이 기름은 강과 바다가 모발은 초목이 되었다고 한다. 또 진한시대의 전설에 따르면, 반고의 머리는 동악, 복부는 중악이, 왼쪽 팔은 남악이 오른쪽 팔은 북악이 발은 서악이 되었으니 오악의 우두머리는 태산이 당연하다.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깊이 내려온 신앙이 태산이요.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니 황제들의 발길이 자연히 태산으로 향하게 되었으리라 추측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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