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총회 보고서
시산 17차 정기총회
일 시: 2010년 2월 28일
장 소: 의정부시 슈퍼농원 (곽정탁 시인 자택)
푸른 희망을 안고 항해를 시작한지 17년.
영욕의 세월 속에 더 이상 내려앉을 수 없는 바닥에서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며 또 한해를 맞는다. 경주의 열기를 이어가자는 취지아래 무박2일의 행사로 추진하고, 숙소로 제공된 집 단장에 들뜬 분위기가 고조된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방회원들이 대거 불참한다는 소식에 바람 빠지는 고무풍선처럼 허탈감속에 부랴부랴 당일행사로 일정이 축소되지만, 집결장소인 회룡역으로 모여드는 회원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동부간선 굴다리를 빠져 나오면 곽 정탁 시인의 보금자리인 슈퍼농원이 반겨준다. 채마밭을 지나 향나무 울타리를 들어서면 본채와 원두막이 자리를 잡고, 수락산 자락의 수천 평 분지에는 밤나무와 참나무, 잣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피톤치트가 흘러넘치는 이곳이 笑心山房(소심산방)의 현판이 아니라도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길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붉은 벼슬의 토종닭들이 무리지어 노닐고, 꼬리치는 강아지들이 낮선 손님들을 반겨주는 별천지는 곽 정탁 시인이 삼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명소로, 남은여생을 자연과 더불어 詩心을 일구어낼 産室이다.
승용차가 도착할 때마다 경향각지의 회원들이 속속 도착하며 분위기를 고조 시키고, 멀리 부산에서 정해임 시인이 도착하며 절정을 이루지만, 태백의 전 재옥 시인이 회의 참석차 상경하던 중 고속도로에서 차량고장으로 애를 먹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다.
지방회원들이 대거 불참하고 서울에서 김은남, 김천수, 김지원, 양재우 회원들까지 불참하고 보니 회원 9명과 가족까지 20명이 참석하여 회의가 진행된다.
거친 風浪속에서도 알토란같은 작품들이 계절마다 결실을 맺는 詩山文學會.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출간되는 詩와山이 우리의 자존심이요. 詩山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회의장 한쪽 벽을 장식하는 시화전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笑心山房의 벽면을 장식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아닌가 싶다.
순조로운 회의 진행과 이수화 고문님의 축사로 和氣靄靄(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제8회 시산 문학상 시상(수상자 김 완묵)으로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다. 잔을 높이 들어 축배를 하고 본격적인 시 낭송회가 시작된다. 낭랑하게 울리는 시편들이 수락산 자락을 타고 넘어 멀리멀리 메아리 치고, 배경으로 흐르는 음률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히 녹여준다.
시낭송회 1부와 2부 사이의 여흥 시간이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가 있다. 회원 모두가 기다리는 시간으로 삼 년 전부터 시산의 중요한 행사 때마다 자리를 빛내주는 경기명창의 대가 최 순자 여사의 순서가 시작된다. 낭랑한 음색으로 구성지게 넘어가는 노래 가락은 인간사 喜怒哀樂이 절절이 묻어나오고 얼근한 술기운에 어깨춤이 절로난다.
회원들 모두 한가락씩 회포를 풀며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고, 2부로 이어지는 낭송회는 문영호 시인의 자작시를 편곡한 도봉산연가로 대미를 장식한다. 작은 선물들. 모두가 하나씩 나누어가지며 흐뭇하고 정겨운 모습은 우리 시산만이 누릴 수 있는 자랑이 아닌가. 양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질적으로 배가되는 시산.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보고 싶은 그런 벗들이 있기에 온 누리를 비추는 정월 대보름달도 우리 詩山이 가는 길을 밝혀주며 영원히 빛날 것이다.
참석회원
전 호영 부부와 자녀 5명 나 용준 부부와 자녀, 장모 5명 김완묵 부부 2명
정 헤임 모녀 2명 고 양규 , 문 영호, 주 진하, 전 산우, 곽 정탁
이 수화 고문
유명산 시산제를 다녀오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린다.
3월 18일 유명산 시산제에 참석해달라는 의야 산악회 유 양순 총무의 전갈이다. 언제 들어도 정겨운 그 목소리. 지난해 백두산에서 실족하며 당한 부상으로 참석하지 못하는 줄 알면서도 매달 산행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전화 벨소리.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잊지 않고 챙겨주는 고마움에 그저 감사하며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전날 그렇게도 가슴을 졸이던 변덕스러운 날씨. 봄이 오는 시샘추위에 폭설까지 쏟아지는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밤새 내리던 눈도 잦아들고 동녘 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온 누리를 밝게 비춘다. 일 년 만에 만나는 얼굴들. 즐거운 일들이 그리도 많은지 모두들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신나게 질주하는 경춘가도. 더러운 것, 지저분한 것, 혐오스러운 것까지 밤새 내린 눈 속으로 보듬어 안고 밝은 태양아래 순백색으로 별천지를 빚어내니 의야 산악회가 가는 길에 어찌 영광이 없으리요. 회원들의 품에 안겨주는 선물보따리, 임원진들의 정성이 담겨있기에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가 행복이 가득하다.
유명산 휴양림. 주위의 경관이 빼어나고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휴양림으로 조성된 잣나무 숲. 가평의 상징이기도 한 잣나무의 울창한 숲속으로 등산로가 열리고. 밤새내린 눈 속에 발 도장을 찍으며 피톤치드의 진한 향기 속에 구슬땀을 흘린다.
고도가 높아지며 경사도 급해지고, 얼었다 녹았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반복되며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비알 길에 눈까지 살짝 덮여 있으니,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다가 코방아와 엉덩방아 찧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그렇다고 물러설 우리가 아니다. 山戰水戰으로 전국의 산하를 누벼 온지 13년. 험한 바위를 타고 넘으며 정상을 향하는 열정이 넘쳐난다.
주능선에 올라서며 남쪽으로 용문산(1.157m)이 고개를 살짝 내민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한강기맥의 주봉으로 주위에 거느린 산들이 일당백의 용맹을 자랑하는 중원산(799m)과 도일봉(863m), 봉미산(855m), 문례봉(992m), 용문봉(947m), 용조봉(635m), 윤필봉(947m), 함왕봉(887m)을 지나 백운봉(940m)에서 양평읍 내를 굽어보고, 주봉을 향하여 머리 조아리는 칠읍산(583m)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리요.
옛날 이 지방에서 날개 달린 동자가 태어 난지 하루 만에 다락에 올라가는 괴변이 생겨 부부가 인두로 죽였더니 산에서 백마가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유명산(864m). 동국여지승람에는 말이 노니는 산이라 하여 마유 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세가 부드럽고 토질이 기름져서 수 만평의 고랭지 채소밭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행그라이더의 활공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청천하늘에 티끌하나 없이 수 백리 산과계곡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여주의 넓은 뜰을 휘돌아 내려온 남한강이 천 리길 머나먼 여정 속에서도 두 물 머리를 향하여 널찍한 가슴을 활짝 열어 제친다. 우리 몸의 실핏줄처럼 뻗어나가는 도로와 물길이 산기슭을 파고들며 정다운 이웃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자연의 품에 안겨 천만년을 지켜온 터전이 아니던가.
몸 안의 노폐물도, 머릿속의 잡념도 머나먼 창공으로 날려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려선 휴양림 안마당. 양지바른 둔덕에 자리를 잡고 제상을 마련한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냥을 나갈 때나 집을 다스릴 때, 신령님께 예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을 하며 심지어 약초 캐는 심메마니들에게도 소박한 꿈을 바라는 정성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산기슭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주인인 산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허락을 얻어야 짐승을 잡으며, 그가 보호해 주어야 아무 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른 새벽에 닭, 새, 개 따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손이 없는 방향에 제물을 차리고 정성스런 고사를 지낸 후에야 사냥도하고 약초도 캐는 것이다.
또 한 장거리 여행을 하는 날이면 집안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도리이고, 동구 밖의 서낭당에 이르러 원행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정성으로 돌 맹이 하나를 올려놓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에 이르러 우주선이 달나라를 오가는 대명천지라도 옛 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인간들의 습성이 아닌가.
산을 인연으로 모인 산악회의 가장 큰 행사는 한 해를 여는 시산제가 으뜸이다. 이날만은 바쁜 일과도 접어두고 모두 모여 신성한 장소에 제단을 마련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산신령님께 제사를 올리며 無事無頉한 산행을 기원하는 것이다. 회장의 강신으로 시작된 제사는 하늘에 고하는 고갑성 감사의 축문 낭독으로 이어진다.
維 歲次 2010 庚寅年 3월 18 丁卯日 午時에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소재한 이름도 아름다운 “유명산”자락에서 의야 산악회장 신용복이 산신령님께 엎드려 엄숙히 고합니다. 우리 의야산악회는 전국의 유명한 산을 찾아 즐거운 산행을 시작 한지도 어언 13년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산신령님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에 큰 탈 없이 산행을 잘한 그 은혜에 보답 하고자 주과포 등 제물을 정성껏 마련하여 진설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산신령님께 제례를 올리오니 강림하셔서 즐겁게 흠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회원들은 산신령님께서 품고계신 대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자연보호를 겸한 산행을 약속드리겠사오니 금년도 산행 시 조그마한 안전사고도 발생하지 않도록 도와주심과 아울러 회원 모든 가정에도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도록 굽어 살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옵니다.
서기 2010년 3월 18일 의야 산악회원 일동 드림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산신제를 올리며 든든한 부적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금년에도 대자연의 품에 안겨 건강한 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을 다짐해본다.
연재
백두대간에 부는 바람 .7
제2부. 중부지역 3
15. 하늘재(525m) - 문경새재(650m) - 이화령(580m) / 17.5km
하늘재(525m)는 본디 한훤령으로 불리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조령관문이 뚫리기 전까지는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이 고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음세계에서 미륵세계로 넘어가는 유서 깊은 고개다.
하늘재 밑의 미륵사지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약 4천여 평 규모의 큰 사찰이다. 주흘산을 진산으로 하여 좌우로는 신선봉과 포암산을 끼고 멀리 월악산을 조산으로 하는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옛날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인 관계로 덕주골에 있는 유적들은 마의태자와 덕주 공주의 한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경 쪽에서는 포장도로가 완공되었지만, 충주 쪽의 공사가 미진하여 하늘 재에서 중단이 되었으니 하루 빨리 개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탄항산(일명 월항삼봉 855m)까지는 1.8km, 굴바위 까지 7시(서남)방향으로 완만하게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9시 방향(서쪽)으로 선회하여 지그재그로 정상석이 있는 탄항산에 이른다. 옛날에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인근 마을 사람들은 봉화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상에는 노송과 절벽에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남쪽으로 너른 골을 사이에 두고 주흘산과 마주보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문경의 평천리와 충주의 미륵리를 이어주는 평천재에서 6시 방향(남쪽)으로 이어지는 대간 길은 큰 무리 없이 주흘산 갈림길(959m)에 이른다. 산 꾼들의 부적과도 같은 표지기 들이 만국기처럼 빨래 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장관을 이루고, 하늘재 3.2km 제3관문 4,7km 주흘산 2,6km의 이정표가 산 꾼들의 나침판이 되어 불을 밝혀주고 있다.
이곳이 월악산 국립공원의 남쪽 끝 지점으로, 한반도의 지도를 연상한다면 부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삼거리에서 남쪽으로는 문경시의 진산인 주흘산(1,106m)에 이르고 조곡관(제2관문)과 주흘관(제1관문)으로 내려가게 된다. 대간 길은 서쪽(9시 방향)으로 방향을 잡게 되는데 908봉을 지나 대간 길에서 빗겨있는 부봉 갈림길에 이른다. 이곳을 목포쯤으로 접어두고 제1봉(917m)에 오르면 주위에 펼쳐지는 조망이 장관을 이루는데, 6개의 암 봉으로 이루어진 부봉에서 제3봉(935m)이 가장 높다.
부봉 갈림길에서 대간 길은 12시(북쪽)방향으로 선회하여 월악산 국립공원의 서쪽 경계선을 따라 진행하면 동암문(730m)에 이른다. 동암문은 지형 상으로 볼 때 영남지방에서 충주로 넘어오는 길목의 요충지다. 천혜의 요새인 부봉과 마패봉의 사이에 있는 이곳은 제2관문을 지나 제3관문으로 오르는 길목의 동화원에서 우측의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게 되는데, 북암문과 함께 중요한 길목을 지키고 있는 곳이다. 허물어진 성터를 따라 50여 분 걸어가노라면 콧노래도 절로 나고 북암문에 이르러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마역봉 오름길에서 성벽을 지나오며 비축한 체력을 소진하며 안간힘을 쏟은 후에야 정상(일명 마패봉 927m)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월악산 국립공원의 경계선을 따라가면 2km지점에 신선봉(968m)이 있지만, 대간 길은 국립공원과 이별을 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곤두박질을 치며 내려서면 문경새재 도립공원 제3관문 조령관(650m)에 도착한다. 새로 축성한 성벽과 관문이 위엄을 갖추고 있는데, 나는 새도 넘지 못할 천혜의 요새지를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친 신립장군의 한이 서려 있는 곳, 우리 역사의 숨결이 거칠고 고단할 때 마다 주 무대로 등장하는 요충지가 아닌가?
옛 고개 문경새재는 산들이 높고 험준하여 새들도 날아 넘기 어려운 곳으로, 억새가 많아서, 또는 새로 닦은 길이라 해서 새(新)재라고 불렸다고 한다. 조선 초부터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가장 큰 대로였던 새재길 중턱에는 경상감사가 교체 될 때 마다 서로 만나 업무와 직인을 인계인수했던 교구장터가 있다. 또한 새재는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한양을 오르던 과거 길로 유서 깊은 고개이며, 현재는 이화령이 그 모든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 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 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 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경새재 물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짓에 잘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넘어 갈 제 구비야구비야 눈물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주흘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다.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하는데, 도립공원으로 지정을 한 이후 관광객을 유치하기위한 방편으로 문경시에서 왕건의 세트장을 유치하여 약 2만 여평의 대지위에 후삼국, 고려시대의 왕궁들과 양반, 서민들의 가옥을 재현한 셋트장을 지어 관광객들에게 개방을 하면서 구름같이 몰려드는 인파로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 실물보다 약간 작은 규모로 가볍게 지어진 건축물들이긴 하지만, 주변의 웅장하고 수려한 산의 모습과 잘 어울려 지금은 세종대왕의 세트장으로 보강하여 마치 역사 속에 들어선 듯 신비로움까지 든다.
조곡관: 영남 제2관으로 부르는 이곳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 이라고도 한다. 숙종 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 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 또는 주서문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조령관: 영남 제3관으로 부르며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에 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135m 와 누각을 복원했다.
이진 터: 임진년(1592)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쳤다. 그가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 장군이 농민 모병 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이곳 조령산 능선에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하고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치게 된다. 왜군 초병이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한편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 장군의 조선 농민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문경시 자료 인용)
문경새재에서 조령산까지는 용아장성에 버금가는 스릴 넘치는 암릉으로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은 피로에 지친 대간꾼들의 가슴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새재의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직진하면 우측으로 낙엽송이 무성한 그늘에는 그림 같은 조령산 자연 휴양림이 있다. 심신이 피로한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자연과 벗하며 문경새재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더 없이 좋은 안식처이기도 하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선 곳이 깃대봉(일명 치마바위봉812m), 정상에 올라서면 건너편의 부봉과 주흘산이 지척에서 손짓하고 그 뒤로 월악의 영봉과 만수봉이 고개를 내민다.
이제부터 잠시도 방심을 할 수 없는 암릉 지대. 아슬아슬한 벼랑길에는 생명줄인 로프도 잡아야하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발걸음이 마냥 느려진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795봉에 오르면, 서쪽으로 선바위 능선이 분기하며 왼쪽의 계곡으로 문경새재 오르는 길이 내려다보인다. 연속되는 암릉 에는 빼 놓을 수 없는 로프가 기다리고 바위틈에 둥지를 튼 낙락장송이 고고한 자태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923봉에서 신선암봉(937m)까지는 조령산 구간에서도 가장 험한 곳으로 나는 새도 떨어질 아슬아슬한 구간이다. 저 높고 험한 정상을 오르는 고통이 따를 지라도 숭고한 사명감과 보람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있기에 직벽의 로프와 씨름을 하고, 올라선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석이 반겨주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쉬어가기 좋은 암반이 기다리고 있다.
한눈 팔 겨를도 없이 오금이 저리는 구간에서 정체현상이 일어나기 다반사다. 앞사람의 느린 행보에 조급증을 내지 말고 인내력을 기르는 것도 산객들이 수양해야할 덕목이 아닌가? 연속되는 암릉 구간에서 밀어주고 당겨주는 아량으로 무사히 정상에 오르면 조령산 정상석(1,025m)이 자리 잡고 정상 한 켠 에는 서원대학교에서 세운 지현옥 산악인의 추모목이 서있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苦盡甘來란 말이 꼭 필요한 이곳은 사방팔방 둘러봐도 막힘없이 터지는 조망으로 그동안 고생고생하며 지나온 암릉 구간이 더욱 정감이 가고, 험준한 대간 길도 거뜬하게 밟아가는 내 자신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이제 7시 방향(서남)으로 진행하며 지금까지 사투를 벌이던 암릉 구간도 자취를 감춘다. 1,005봉에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억새들이 한 무더기 머리를 조아리는 조령 샘에 도착하면 갈증으로 애를 태우는 산객들의 생명수가 흐르고 있다. 아기 오줌줄기 처럼 작은 양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물의 귀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헬기장을 지나 사면 길을 내려서면 이화령에 도착하지만 터널이 관통된 이후로는 공허로운 바람결에 인적마저 끊긴지 오래된다.
16. 이화령(529m) - 지름티재(658m) - 버리미기재(490m) / 31.43km
이화령(548m)은 조령산(1,017m)과 갈미봉(777m) 사이에 있는 3번국도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7km거리에 있는 조령(643m)관문이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옛길이지만, 높고 험한 지세로 어려움이 많던 차에 일제 강점기에 통행의 불편함과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을 말살 하고자 신작로를 만들어 내륙진출의 교두보로 활용 하던 곳이다.
수많은 물동량을 실은 차량들로 성시를 이루었지만, 이화령에 터널이 뚫리고 중부 내륙고속도로가 개통된 뒤로는 아흔아홉 구비를 감아 도는 이화령 고갯길도 옛말이 되고 이따금 대간 길을 밟는 산 꾼들이 구간을 이어가는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남쪽의 계단으로 대간길이 열리는 곳에 군부대가 있어 때로는 통행이 금지되기도 한다. 다행히 통제를 하지 않아 낙엽송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산줄기를 가늠해가며 조봉을 지나 봉우리하나를 넘어서면 안부에 헬기장이 나타난다. 좌측으로 수천 평 분지위에 펼쳐지는 억새들이 아침햇살에 은빛날개로 춤사위를 펼치고, 영주 영림서에서 백두대간 생태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조림지를 조성하고 있다. 울창한 낙엽송이 하늘을 가리는 수림 속에는 아담한 연못이 하나있다. 갈증 난 짐승들과 대간 길에 지친 산 꾼들에게 반가운 휴식처로 영주 영림서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잠시 후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 무명 봉에 올라서면 주흘산(1,106m)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바위를 지나고 곧이어 황학산(915m) 오름길이 시작된다. 밋밋한 경사각으로 큰 어려움 없이 황악산 정상에 올라서지만, 나무 기둥에 걸려있는 비닐 코팅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게 되는 특징 없는 정상이다.
영림서에서 새로운 수종을 심기위해 벌채한 남쪽의 사면 길을 지난다. 오르내림의 기복이 별로 없이 완만하게 고도를 높이는 대간 길은 산행하기에 수월하고 서쪽으로 이만봉(990m), 곰틀봉의 주능선이 분지마을을 경계삼아 옆으로 어깨동무를 하는데, 시루봉(914m)에서 이화령이 직선거리로는 3km에 불과하지만 대간 길로는 18km가 된다고 하니 물길피해 가는 대간길이 멀기만 하다.
전위 봉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백화산의 정수리가 손에 잡힐 듯 지척으로 다가온다. 괴산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기라성 같은 명산들의 그늘에 가려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백화산. 한 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나무에 피어나는 설화가 장관이라 그 이름도 아름다운 白華山(1,063m)이 아닌가? 1,000m가 넘는 산인데 호락호락하게 정수리를 내어줄 수야 있는가?
전형적인 육산을 걸어가며 낙엽 밟히는 소리에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노라면 앞을 가로막는 암릉 구간이 빗돌처럼 날카로운 마각을 드러낸다. 편안하던 마음에 긴장감이 감돌고 벼랑 끝에 올라서면 오금이 저려온다. 밧줄 잡고 내려서서 힘겹게 올라 선 정수리에는 하얀 대리석에 이름도 선명한 백화산. 삼각점의 소중함을 알리는 안내문과 판독하기 어려운 삼각점까지 구색을 갖추고 10여 평의 휴식공간이 산객들을 반겨준다.
키 작은 잡목들이 시야를 가리고 북녘으로 우리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능선들이 꼬리를 물고 조령산(1025m)까지 힘차게 달려가는데, 그 뒤로 하늘 금에는 월악의 영봉(1093m)이 다소곳이 고개를 내민다. 동쪽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주흘산(1,106m)의 용모와 운달산(1,097m), 성주산 너머로 문경 시가지와 황금벌판이 내려다보인다. 이화령에서 줄곧 동남쪽으로 달려온 대간 길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급사면을 치고 내려서면 아담한 전망대바위에 올라선다. 앞으로 진행할 민 대머리 희양산(983m)과 이만봉(990m), 뇌정산(991m)이 웅장한 자태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산맥을 이루고 있다.
잘생긴 암봉과 전위봉을 내려서면 상내리로 내려서는 갈림길을 만난다. 상내리 한실마을은 천주교 성지로 백화산일대의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선교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허기진 몸을 숨겼던 첩첩산중의 은신처라고 한다. 로프 걸친 암 능을 넘어서면 분지리로 내려서는 평전치에 도착 한다. 백화산 50분, 분지리60분, 이만봉과 희양산의 이정표를 바라보며 무 명봉을 몇 차례 넘은 후에 뇌정산 갈림길(981m)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대간 길은 서북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는 뇌정산(991m)이 있다. 지금까지 등지고 걸어온 대간 길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급경사를 내려서면 사다리재가 반겨준다. 충북 괴산의 분지리와 경상도 문경시 원북리를 오가는 길목으로 그 옛날 보부상들의 발길로 성시를 이루었겠지만 지금은 약초꾼들이나, 대간을 종주하는 산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한가로운 고개 마루에는 분지리 쪽으로만 이정표가 걸려있다.
당일 산행 팀들이 하산지점으로 이용하는 사다리재를 지나면 곰틀봉 오름길에서 또 한 번 비지땀을 흘리는 천신만고의 고통을 겪어야한다. 그 옛날 이곳에 곰들이 살았대서 곰틀 봉이라 부른다지만 소나무 둥치에 비닐 코팅이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망만은 일품이어서 남녁으로 첩첩산중에도 원북리와 죽문리의 황금 들녘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곰틀 봉에서 이만봉까지는 30여분거리로 지척에 있고,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장관을 이룬다. 백화산(1,063m)과 뇌정산(991m)을 따라 힘차게 뻗어 내리는 산줄기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또한 시원스레 뻗어나간 대간 길 따라 건너편으로 이화령 오르는 옛 길이 산굽이를 감아 돌고, 나는 새도 쉬어 넘는 조령산(1025m) 너머로, 월악산의 영봉과 조령관문의 부 봉, 주흘산이 기치창검을 곧추 세운다.
검은 오석의 정상석이 있는 이만봉(990m)은 그 옛날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이만 명이나 될 만큼 하늘아래 첫 동네. 십승지지에 버금가는 숨어살기 좋고, 인심 좋은 분지리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전망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고 가파른 비알 길에 울창한 수림 속을 헤쳐 가노라면 산짐승이라도 덤비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20여 분만에 시루봉(914m)갈림길인 배넘이 평전에 이른다.
대간길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선회하고 하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길을 벗어나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 속에 암릉 길이 이어진다. 잠시 후 성벽을 따라 가면 은티 마을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만나고 희양산(983m) 오름길이 시작된다. 비지땀 흘리며 15분간 성벽을 오르면 아찔한 벼랑 아래로 로프가 걸려있어 대간 길로 연결된다. 하지만 민 대머리 희양산이 남쪽으로 빗겨 있는데, 어찌 그대로 지나칠 수 있으랴?
시원하게 터지는 너럭바위 조 망 터에 올라서면 천야만야 벼랑위에 오금이 저린다. 노송의 운치와 천수를 누리는 고사목이 천년사찰 봉암사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으로 피어난다. 문경새재와 속리산의 중간 지점에 솟아오른 영험한 희양산. 봉황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에 반하여 신라 헌강왕 5년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친 희양 선문은 신라의 구산선문중의 하나로 현재는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곳이다.
부처님 오신 날만 대간 길과 사찰의 출입을 허용한다고 하니 세상인심이 이래서야 쓰나. 삼천리 방방곡곡 수많은 산과 계곡을 다녀 보아도 길을 가로막는 곳이 이곳 말고 또 있단 말인가? 오르고 내리고 암 능을 돌고 돌아 민 대머리 희양산 정수리에 올라서면 초라한 표 지석에 또 한 번 실망을 한다. 멀고먼 대간 길에 유명세를 많이 타면서도 초라한 돌탑의 모습, 스님들의 훼방으로 부셨다 쌓기를 반복한다니 이래저래 희 양산은 구설수의 대상이다.
기차바위 올라서면 거침없는 조망으로 지나온 대간 길과 장성봉(915m), 악 휘봉(845m)이 삼각형을 이룬다. 건너편의 이 만 봉까지 W의 꼭 지점의 희 양산, 물길피해 달려가는 대간 길의 주능선이 이보다 더 심한 굴곡이 또 어디에 있는가?
신선되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고 대간 길을 달려가면, 은 티 재에서 올라오는 벼랑에 걸린 생명줄에 목슴을 건다. 어차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쳐야할 스님들을 피할 길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안부에 내려서니 하늘의 도우심인가?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공허 로 운 바람만 불고 있다.
지름 티 재 안부에는 삼국시대 사극의 현장인가? 육중한 목책으로 대간 길을 가로막고, 산을 찾는 이들이 무슨 범법자라도 되는 양, 일일이 검문을 하며 가는 길을 가로막는 험상궂은 스님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우측의 하산 로는 일촉즉발의 험악한 상황을 피해 은 티 마을로 내려가는 탈출로가 된다. 범의 아가리를 빠져나온 안도감으로 가파른 벼랑길을 한달음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 터가 반겨준다. 낙락장송 그늘아래 자리를 잡고 바라보는 희양산이 지척이라. 민 대머리 희양산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봉암사 스님들의 경계구역이라 마음을 놓을 처지가 아니다.
긴장이 풀리면 나른한 법이라. 노곤한 육신을 이끌고 구왕봉(877m)과 주치봉(683m)을 지나면 은 티 재에 이른다. 서슬 퍼런 경고문에 주눅이 들고 목책으로 막은 대간을 어디로 가야하나. 스님들의 선 수련장에 방해가 된다고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지만, 다닐 사람 모두 다니는 길에 볼 성 사나운 짓거리를 집어치우는 것이 어떠한지. 서로 타협을 한다면 우리도 조용히 지나갈 것인데, 지나친 행동이 아닌지 뒤돌아보며 푸념을 하고 만다.
로프를 3군데 통과하며 암릉 구간을 지나면 장성봉과 희양산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철 계단이 나타나고 20여분 후에는 악휘봉(845m) 갈림길에 이른다. 이정표에는 지나온 희양산이 8.2km이고 탈출로인 은 티 마을이 2.8km 악휘봉이 400여 m로 지척에 있다. 잠시잠깐 짬을 내어 층암절벽 사이로 조심조심 올라선 곳은 천하절경 전망대라. 사방을 둘러봐도 막힘이 없고 경상도와 충청도의 수 백리 산하를 한눈에 굽어보는 명당자리로 1,000m도 안 되는 정수리에 이런 곳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남쪽으로 장성봉(915m)이 지척에서 손짓하고 그길 따라 구불구불 사행천을 이룬다. 서쪽으로 대야산(930m), 조항산(951m), 청화산(984m), 군웅이 할거하는 괴산의 명산들, 그 옆으로 불꽃같은 속리산의 암봉 들이 명함을 내민다. 화양구곡, 쌍계구곡, 선유구곡 품에 안은 군자산(948m)과 칠보산(778m), 덕가산(858m)이 오곡백과 무르익는 연풍의 분지를 품에 안고 산수화의 병풍을 그려낸다. 북쪽으로 구왕봉과 희양산이 길잡이가 되어 손짓하고, 이화령 너머로 대간 길의 태산준령이 끝 간 줄을 모르겠다.
대간은 남서쪽으로 선회하여 급경사를 내려서면 헬기장 공터가 있는 쌍곡리 갈림길이다. 이 고개는 충청도 칠성면의 살구나무 골과 경상도 가은읍의 오봉정 마을을 오가는 곳으로 별 특징 없다. 이어지는 대간 길은 1시간동안 지속되고 막장봉(887m) 갈림길에서 남동쪽으로 선회를 하면 장성봉(915m)에 이른다. 하지만 서쪽으로 막장봉(887m)과 투구봉(795m)을 지나 제수리치를 넘는 산줄기는 남군자산(827m), 군자산(947m), 갈모봉(582m), 옥녀봉(604m)으로 이어지고 속리산국립공원 동쪽의 절경인 쌍계구곡과 선유동구곡이 펼쳐진다. 장성봉 정상에서 남쪽으로 급경사를 내려와 1시간 남짓 진행을 하면 버리미기재에 도착한다.
'나의 작품세계 > 시와산 계간지.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68 호 - 산꾼의 기도 (0) | 2011.03.01 |
---|---|
제 67 호 - 올레는 설레임일까 그리움일까 (0) | 2010.09.29 |
제 65 회- 바다를 향하는 등대처럼 (0) | 2010.02.16 |
시와산 목록 (0) | 2009.12.11 |
제 64 호 - 가을빛 추억속으로 (0) | 2009.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