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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금북정맥

한남금북정맥 9 부: 국망지맥

 

 

                           국망 지맥

 

한남금북정맥 상의 보현산(483m)에서 분기한 부용지맥이 사정고개와 부용산 중간지점인 493봉에서 가섭지맥을 가지 친 다음, 북쪽으로 달려가던 중 수례의산을 지난 지맥이 병풍바위 삼거리에서 동쪽은 부용지맥이요. 북쪽으로 뻗은 능선이 행덕산(447m)-원통산(655.6m)-오갑산(609.4m)-마골산(250m)-봉우재를 지나 남한강으로 합수하는 도상거리 30.2km의 능선을 편의상 원통지맥이라 한다.

 

원통산(655.6m)을 지난 질마재에서 다시 동쪽으로 분기한 능선은 승대산(567m) - 국망산(769.5m) - 보련산(764.4m) - 쇠바위봉(593.5m) - 국사봉(480m) - 무쇠봉(370.8m)을 일으킨 후 한포천이 남한강으로 합수하며 그 맥을 다하는 비교적 큰 산들로 이루어진 이 능선을 국망지맥이라 한다. 해서 일반산행으로 다녀온 국망지맥을 정리해 본다.(들머리는 승대산 동쪽의 둔터 고개였다)

 

오래 만에 찾아가는 고향 길. 마음이 답답하거나 심기가 불편 할 때면 고향을 그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말없이 반겨주는 고향이 그리워 충주 지맥으로 발길을 돌린다. 둘째딸 미숙이가 신랑감으로 소개한 청년은 준수한 용모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5년 동안 연애로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 상견례 자리에서 결혼이 성사되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니 집안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하지만 딸자식은 애물단지라고 말했던가? 가정 형편은 생각지도 않고 무리한 요구로 신경전이 벌어진다. 2년 동안 3번의 결혼식(큰딸 명숙, 아들 재형)으로 기둥뿌리가 뽑혀 나가는 중압감에, 밤잠을 설치며 신접살림에 필요한 물건들과 예단까지 보냈으니 이제야 숨통이 트이며 그동안 잊고 지내던 산길로 시선을 돌린다.

 

승대산에서 수레의산을 거쳐 못재까지의 구간이 오늘의 일정으로 하루해가 빠듯한 구간이라 새벽부터 서둘러 감곡에 도착한다. 들머리인 둔터 고개는 대중교통이 없기에 감곡에서 택시를 이용하게 되지만, 왕복 요금에 할증료까지 12,000원을 요구하는 택시기사. 음성 택시 조합에서 결정된 사항이라니 전국의 어느 곳에 이런 횡포가 또 있단 말인가? 인심 좋은 충청도 고향 땅에서 당하는 봉변에 어이없는 너털웃음으로 흙탕물 일으키는 미꾸라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둔터고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는 중원터널 위가 된다. 서쪽은 오늘 진행할 승대산(567m)이요, 동쪽은 5년 전에 답사한 국망봉(769m)이라. 양쪽으로 높은 산이 옹립한 잘록한 허리에 해당하는 들머리에서 어느 쪽을 보아도 가파른 비알길이다. 국망봉 쪽으로는 일반등산로가 잘 나있지만 승대산 쪽으로는 지맥을 이어가는 종주꾼들의 발자취만이 어렴풋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앙성면 지당리와 노은면의 가신리를 잇는 둔터 고개는 2차선으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오가는 차량도 없이 시원한 바람만이 고개 마루를 넘어간다. 승대산 쪽으로 가시덤불 헤치면, 깊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엄나무의 앙살 맞은 가시가 앞길을 가로막고, 겨우내 오간 흔적이 없는 등산로는 낙엽만 풀풀 날리고 가파른 비알 길에서 비지땀을 흘린다.

 

30여 분간 고된 신고식으로 올라선 정상(567m)에는 별 특징이 없지만, 비닐 코팅으로 표시를 달아맨 산객이 고맙기도 하다. 건너편으로 인근에서 가장 높은 국망봉(769m)이 명성황후의 전설을 간직 한 채 장호원 뜰을 굽어보고 시원스레 달려가는 중부 내륙고속 도로가 내 고향 충주의 번영을 기약하는 듯 가슴이 뿌듯하다.

 

앙성면과 노은면의 경계를 이루는 지맥은 서쪽으로 원통산(645m)을 바라보며 진행한다. 무명봉 2개를 넘으면, 장호원 CC가 자리 잡은 북사면의 너른 분지의 누런 잔디에도 푸른 기운이 감돌고 골퍼들의 발걸음도 경쾌하게 보인다. 지금이야 대중 스포츠로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십 여 년 전만해도 귀족스포츠로 부를 상징하는 스포츠가 아니었던가?

 

참고로 골프의 기원을 살펴보면, 영국에서 시작된 스포츠로 최초의 골프장은 18세기경(1754년) 영국의 "세인트 앤드류스"라는 골프장이고, 1860년 제1회 전영오픈 골프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부터 80여 년 전, 원산의 세관 안에 있던 영국인들이 6홀을 만들어 경기한 것이 처음이며, 일제시대 에 일인 관리와 사업가들을 통하여 한국인들에게 전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우리나라 골프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인물은 영친왕이다. 영친왕 부처는 1924년 조선 철도국에 의해 서울 효창공원 안에 9홀의 코스가 세워졌는데, 이때에 우리나라 골프 사상 처음으로 [경성 구락부]라는 골프 클럽이 탄생하고, 그 후 청량리를 비롯한 대구, 평양, 부산, 원산 등지에 골프 코스가 잇달아 생겨 보급되었다고 한다. -백과사전-

 

그림 같은 그린을 바라보며 무명봉 3개를 넘으면 노은면과 앙성면, 감곡면의 꼭지 점으로 충주와 음성의 경계선을 밟아가는 주능선이 오갑산(609m)으로 연결된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암릉 길을 내려서면, 고압 전신주 55번이 자리 잡고 감곡면 사곡리와 노은면 원통골을 이어주는 질마재에 도착한다. 지금은 오가는 인적도 없는지 오솔길도 무성한 잡초 속에 가리고 당산나무와 허물어진 돌무더기만이 그 옛날의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원통골 - 동쪽으로 산자락을 타고 내려가면 아늑한 분지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산골마을이다.

 

택호란 주로 여자의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의 출신지 이름에‘댁’을 얹어 부르는 호칭을 말하는데. 먼 친척 아저씨의 택호가 원통골 아저씨가 된 것은, 아주머니가 원통골에서 시집을 온 까닭에, 지명이 어딘지 알지도 못하면서 친근하게 불러오던 원통골을 지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유순한 산행 길에 옹골찬 원통산(645m). 암팡진 암릉 길에 해묵은 동아줄이 걸려있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로프에 힘이 실리고 원통해서 못 살겠네, 한 이 많은 정수리엔 표시 없는 삼각점에 검은 오석의 표지석이 자리 잡고, 사방팔방 막힘없는 조망 터에 가슴속이 후련하다. 지나온 길 따라 국망봉(769m)이 맡 형으로 보련산, 무쇠점 그 너머 하늘 끝에 월악 영봉 걸려있다. 노은면 너머로 주덕이 지척인데 수레의산 가는 길에 행덕산이 정겹고 서쪽으로 복숭아 산지로 유명한 감곡과 장호원의 너른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원통산에서 남쪽방향으로 행덕산을 조망하며 진행된다. “오늘도 걷는 다 마는 충주 지맥 길 따라” 구절터 지나면 곧 바로 갈림길, 왼쪽으로 접어들어 462봉 지나치면 부드러운 봉우리가 덕을 쌓은 산이라고, 아무런 표시가 없어도 행덕산(447m)임을 금방 알아보겠다. 참나무 등걸에 피어난 신비한 버섯, 차마 손을 못 대고 사진으로 담는다.

 

520번 도로가 없던 시절 감곡의 월정리와 노은의 안락리가 정답게 넘나들던 길. 지금도 오가는 길손으로 고개 길이 선명하고, 367봉을 넘어서면 솔 고개가 지척이다. 고개말과 다리골이 산모랭이를 사이에두고 이웃하는 솔고개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520번 지방도로다. 노은면에서 감곡면 원당리로 이어지는 한적한 시골동네 고개 마루에 이방인을 경계하는 개들의 울부짖음에 주늑이 든다. 서둘러 임도 따라 계곡으로 숨어드니 산길은 간데없고 울창한 활엽수림이 하늘을 가리는 가시덤불 헤치며 사서하는 고행의길 남이 볼까 두렵다.

 

가까스로 올라선 주능선은 간벌로 찍어 내린 나무 등걸이 앞길을 가로막고 산초나무, 딸기나무 온몸을 훌치는데, 된비알 오름길에 경련이 인다. 이길 따라 가는 줄기 음성과 충주가 경계를 이루고, 606봉에서 서쪽으로 수리산(463m)이 갈라지고 남쪽으로 수레의산(678m)이 지척이다.

 

완만한 비알 길을 내려서면, 수천 평의 분지위에 노송이 자리 잡고, 그 아래 아담 한 연못이 반겨준다. 깊은 산중에 연못이 있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안동 권씨 권문가의 얽힌 전설이 전해 오는 곳, 여기소라 부르는 2개의 연못에는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변태 어인 벽송어가 살고 있다고 한다.

 

수레울과 수리산에서 동쪽에 있는 못으로, 생극면 방축리 능안에 있는 권근 三代묘와 관련이 있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조선 태종때 권근선생의 묘를 쓸때 광중에서 물이 솟아나와 걱정을 하던 중, 그곳을 지나던 승려의 가르침으로 이곳에 못을 파니, 물이 솟아나오고 광중에 물이 잦아들어 무사히 장례를 치렀다는 전설에 따라 권씨의 연못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레울 마을 청소년 수련원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외로운 산객에게 힘을 실어주며,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찾아 가는 풍운아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한 치도 어김없이, 이곳 까지 찾아 왔기에 안면이 있는 산악회의 리본이 반갑기 그지없다. 가파른 비알 길에 무거운 발걸음, 힘겨운 산행 길에 불꽃같은 바위 암봉, 한 눈에 보아도 상여바위가 확실하다. 날렵하게 올라선 바위에는 선경의 세계가 가까운 듯, 서쪽으로 주천 저수지 너머로 백족산(402m)이 선명하고 능안고개로 이어지는 주능선의 동쪽 끝자락에는 내 고향 마을의 병풍산(395.6m)이 자리 잡고 있다.

 

큰 특징이 없는 오늘의 산행 길에서 여기소와 상여바위를 보고나면 무엇을 더 바라 리 요. 단숨에 올라선 병풍바위는 노은면과 신니면 생극면의 분수령이다. 부용지맥과 어깨동무를 하고 서쪽으로 무명봉 3개를 넘어서면 일망무제의 조망 터인 수레의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부지런한 음성사람 정수리마다 영역 표시로 검은 오석에 이름석자 정성껏 모시고, 표시 없는 삼각점이 반겨준다. 군웅이 활거 하는 산과들을 굽어보는 부용산과 가엽산이 群鷄一鶴(군계일학)이요. 포근하게 안겨있는 신덕저수지가 정겹기만 하다.

 

남쪽으로 뻗어 내린 못 고개 길이 하산 지점이지만, 차편이 마땅치 않아 생극면 소재지로 하산 길을 잡았더니, 동부 골프장에서도 6km나 되는 거리가 막막 하기만한데, 인심 좋은 공사 덤프트럭으로 생2리 마을까지 나오며 17km의 산행도 마감을 한다.

 

명성황후의 눈물로 명명된 국망산(770m)에서 보련산(764m)과 무쇠봉(370m)을 지나 한포천까지 일반산행으로 종주길에 오른다. 고향 가는 길옆으로 우뚝 솟아있는 정겨운 산. 내 어릴 때 꿈을 키워온 곳으로 언젠가는 찾아보리라 다짐을 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다가 이제야 찾아 나선다. 모처럼 동 서울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고향 길. 아련히 떠오르는 옛 추억을 더듬어가며 추수가 끝난 들녘에는 밤사이 내린 무서리로 을씨년스러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장호원에 도착하여 용포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한적한 시골이라 교통편이 마땅치를 않아 택시를 이용한다. 앙성면 소재지인 용포에서 노은으로 넘어가는 매남고개 초입인 양지(학 바위)마을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이라고 해야 봐야 드문드문 집이 한 채씩 자리를 잡고, 그나마 한 겨울이라 빈 집이 많아 물어볼 곳이 마땅치를 않다.

 

한 참을 망설인 끝에 오른쪽으로 은사시나무가 무성한 계곡의 잘록한 안부를 겨냥하여 진입을 시도한다. 주능선으로 향하는 안부에서 색 바랜 리본을 발견하고 들머리를 제대로 찾았다는 안도감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정상으로 향하는 주능선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모든 잎 새 떨 군 갈참나무와 상수리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수북이 쌓인 낙엽이 발길에 채 이는데, 가파른 비알 길에는 가시덤불속을 헤치는 발걸음에 거친 숨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린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심심찮게 암봉도 나타나고, 금년 들어 가장 추운(체감온도 영하10도)날씨에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오니 목덜미를 파고드는 한기에 자라목이 되고 만다. 지난밤에 내린 눈이 낙엽을 쓸어 덮고, 낙엽 속에는 얼음까지 깔려있어 신경을 곤두세우며 전위 봉 안부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복성 저수지와 승대산 쪽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난다. 이곳부터는 등산로도 널찍하고 리본도 많이 붙어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지척에 있는 정상으로 줄달음친다.

 

수 십 길 벼랑위에 우뚝 솟은 정상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가슴속이 후련하다. 북으로는 38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오갑산(609m)이 마주 보이고, 서쪽으로 금년 말 완공을 앞둔 중부 내륙고속도로가 남북을 관통하며, 동으로는 오늘 걸어가야 할 능선을 따라 보련산(764m)이 지척에서 손짓을 한다. 국망산(769.5m)의 옛 이름은 금방산인데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명성황후가 산마루에 올라 한양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눈물짓던 곳으로 7개월 동안 은거하던 집은 국망산 남쪽 가신리 515번지로 대궐 터라는 지명으로 전해온다.

 

정상에서 하남고개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비알 길로 수 백 년 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룬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탄성을 질러대는 것도 잠시뿐, 지난번 내린 잔설이 빙판을 이루어 엉금엉금 게걸음으로 내려오다 보니 간담이 서늘하다. 599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하남고개는 앙성면과 노은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옛날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표교 320m의 고개 마루에는 S K 중계소의 철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보련산의 들머리는 011 송신탑 옆으로 이어지는데 수 백 년 된 소나무들이 만고풍상의 시련을 이겨낸 흔적으로 온몸이 비비꼬이는 용트림으로 군락을 이룬다.  용포리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에 온 몸이 오그라들고 빙판의 오르막길에서 안간힘을 쓰며 사투를 벌인다. 20여 분간의 시련을 뒤로하고 안부에 올라서니 완만한 능 선길에는 솔 갈피들이 겹겹이 쌓인 비단길로 발길에 채 이는 감촉이 너무나도 좋다.

 

조금 전 깔딱 고개에서의 시련도 봄눈 녹듯 사라지고 새롭게 전개되는 주위의 경관에 매료되어 콧노래 부르며 전위 봉에 올라서니 수 십 길 단애를 이룬 절벽위에 전망 좋은 쉼터가 676봉이다. 산행의 길잡이가 되는 안내판이 땅 바닥에 나뒹굴고 심하게 훼손 되어있다.

 

산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해야할 인간들이 기본 양심마저 저버리는 현장이다. 우리의 착한 심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난폭해졌는지 즐겁게 마시고 난 뒤 귀찮은 쓰레기들을 바위틈에 쑤셔 박는 행위들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전문산악인들이 찾는 히말라야의 고봉들조차도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니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사람人자와 나무木을 합하면 쉴休자가 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삭막하고 거친 심성을 가진 인간도 자연 속으로 들어오면, 착하고 온순한 심성으로 변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휴식처가 된다는 뜻인데, 우리가 보존하고 가꾸어야할 휴식공간을 파괴하는 행위만은 근절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자성이 필요하다.

 

로프가 매여 있는 벼랑길을 조심조심 내려서면 왼쪽으로 큰 바위가 얹혀있는 동굴이 나타나는데 그 밑으로 수 십 길의 절벽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석굴을 지나 685봉에 올라서면 지나온 국망산과 승대산(567m)이 스카이라인을 이루며 원통산(645m)으로 이어지고, 599번 도로가 산기슭을 따라 연하리로 내려선다.

 

올망졸망한 4개의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다 마지막으로 깔딱 고개를 치고 오르면 가슴이 확 트이는 보련산(764m) 정상이다 열두 폭 치마를 펼쳐 놓은 듯, 높고 낮은 산줄기들이 사방으로 흘러내리고, 골골마다 아름다운 폭포와 시냇물이 모여들어 강을 이루고, 너른 들판 사이로 우리의 젖줄인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700m의 산 중에서 이렇게 전망이 좋은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빗자루로 쓸어내린 듯, 티끌하나 없이 푸른 하늘이 수 백리 산하를 가슴에 안겨준다. 동북쪽으로 치악산 국립공원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손짓하고, 시계방향으로 백운산(1.087m), 구학산, 박달산, 천등산(807m), 지등산(535m)이 충주호로 내 달리는 와중에 월악산 국립공원의 영봉들이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린다. 또 아늑한 분지위에 자리 잡은 충주 시내를 중심으로 가엽산, 수리산을 지나 오늘 걸어온 국망산과 장호원, 이천, 여주, 원주까지 기름진 평야가 펼쳐지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211번지로 어릴 때부터 보련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워 왔고 50여년 만에 이곳에 올라서니 감회가 새롭다. 남쪽 수룡리 천룡에 사시는 큰 고모 댁으로 세배를 다닐 때 무쇠 점 고개에서 바라보는 보련산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생각하던 순진한 시절이 있었는데...

 

아!!!

아름다운 내 고향. 내 어릴 때 뛰어놀던 뒷동산이 아련히 내려다보이고 화개산 모퉁이를 돌아 논둑길을 질러가며 요도천의 징검다리에서 무서움에 울음보를 터트리고, 4km가 넘는 초등학교 등하교 길도 선명하고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이 낭만과 꿈이 서려있는 주덕읍내도 바라보인다.

 

사랑하는 내 고향 충주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로,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상류의 여러 성들을 공략한 후 나라의 남방 한계선을 표시한 중원고구려비가 보련산 아래 입석마을에서 발견된바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나라의 중앙을 상징하는 탑평리 7층 석탑이 국보 제6호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역사 유물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 옛날 영남지방에서 생산한 특산물을 이화령과 죽령을 통하여 가흥 창으로 모아 뗏목으로 한양까지 실어 나른 교통의 중심지로 오원경의 하나인 중원경으로 불리었으며, 장미와 보련의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 돌과 흙으로 쌓은 성을 확인은 못하지만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삼국시대 때 이곳 보련산 서쪽 가마골 마을에 장미와 보련이 남매가 살았는데 명산의 정기를 받은 이은 둘 다 장수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허나 한 집안에 두 장수가 태어나면 그 중 하나는 희생되어야 하는지라 두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다 결국 성 쌓기를 하였다. 아들인 장미보다 보련이의 성 쌓는 솜씨가 더 능숙하여 고심하던 끝에 손수 떡을 해가지고 간 어머니는 보련이 에게 시장할 터이니 떡이나 먹고 성을 쌓으라고 하며 떡을 내놓는다. 

 

어머니가 싸온 떡을 맛있게 먹고 다시 성을 쌓기 시작하여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막 올라가는 도중에 장미 쪽에서 성을 다 쌓았다는 북소리와 함께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제 서야 보련이는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려는 의도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집을 떠난다. 다음날 보련이의 본집을 향하여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고 하며 그 후로 보련산-보련산성, 장미산-장미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에서 남쪽의 계곡에는 보련폭포가 있어, 한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충주시에서 세운 이정표를 따라 성안고개에 도착하면 북쪽으로 동암골을 따라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어 그 유명한 돈산 온천으로 내려 설수가 있다. 일명 까치봉으로 부르는 쇠바위봉에 도착하며, 국사봉까지의 종주길이 연결되지만, 겨울의 짧은 해가 서산위로 올라서고 추운 날씨에 장시간 산행으로 그곳까지는 무리라는 생각이 앞선다.

 

눈앞에서 손짓하는 용암온천의 유혹에 이끌려 낙엽 쌓인 비알 길을 내려와 피로 회복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는 만병통치의 게르마늄 온천에 몸을 담그니 이 세상 부러울 것이 또 있겠는가? 목로 주막에 걸터앉아 마시는 막걸리는 국망산과 보련산을 걸어오며 느끼는 고향사랑의 징표이며 목울대를 넘어가는 짜릿한 감칠맛이 내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