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남금북정맥

한남금북정맥 1 부

                         

                          한남금북정맥

 

              1구간: 천왕봉(1058m) - 말티고개(430m) / 13.4km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이 속리산의 천황봉(1058m)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하는 정맥으로 북쪽으로는 한강수계를 경계하고, 남쪽으로는 금강수계를 경계한다. 이 맥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겹쳐진 산줄기로 속리산 천황봉(1.508m)에서 시작하여 말티고개(430m) - 수철령(535.9m) - 시루산(452.4m) - 선도산(547m) - 상당산성 - 좌구산(657m) - 보광산(531m) - 소속리산(431.7m) - 마이산(망이산 471.9m) - 칠장산(492.4m)까지 이어지는 총 도상거리 약 150km에 달하는 산줄기이다.

 

정맥의 시작을 알리는 들머리를 어느 곳으로 하든 만만한 곳이 없다. 아무리 주력이 좋은 건각이라도 시발점인 천황봉을 올라서는 데만 1시간 반이 족히 걸리니 시작도 하기 전부터 지치고 만다. 대부분의 先踏者들이 들머리로 잡고 있는 대목리(도화리)또한 교통편이 열악한 것이 흠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보은 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를 대절하여 윗대목리의 천황사까지 갈수가 있다. 대목리가 도화리로, 내속리면이 속리산면으로, 외속리면이 장안면으로, 천황봉도 천왕봉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천왕봉을 찾아가는 2.7km의 들머리는 천황사의 뒷켠으로 돌아서면 앙증맞은 부처님이 모셔진 제단이 있고 지하여장군의 표석과 돌탑을 뒤로하고 시작된다. 계곡을 서너 번 건너는 동안 단풍나무가 절정을 이루고 운치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 계곡의 상류로 오르면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호된 신고식을 치룬 후에야 천황사를 출발한지 1시간 여 만에 백두대간과 만나며 주능선에 올라선 다음에도 20여 분을 더 고생한끝에 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천왕봉은 지척으로 2-3분 거리다. 정수리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말이 필요 없는 천하절경이다. 큰 포부로 가슴을 활짝 열고 사자후를 토해내며 분기점으로 내려선다. 三破水(삼파수)의 정점인 이곳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요,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이요,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으로 우리의 국토를 살찌우는 어머니의 강이 된다.

 

오름길의 고단함도 대장정의 결의 앞에 봄눈 녹듯 사라지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정맥으로 접어들면 처음으로 맞아주는 老巨樹(노거수). 정맥의 관문을 지키며, 종주에 나서는 이들에게 힘찬 격려를 보내는 인자한 나무의 神 앞에서 無事縱走(무사종주)를 기원하는 예를 올린다. 얼마를 내려서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묘지 2기가 반겨준다. 이런 높은 곳에 조상을 모셔놓고 시시때때로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이 보기가 참 좋다.

 

우람한 소나무가 있는 전망대에서 다리쉼을 하며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울창한 숲속을 내려서는 길이지만 주위에 펼쳐지는 기암절벽은 속리산의 매력이 아닌가? 가을이 익어가는 산과 계곡이 滿山紅葉(만산홍엽)으로 물들고, 싱그러운 공기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에 취해 탄성이 절로 난다. 올려다보는 천왕봉. 내려다보는 법주사, 계곡에 담겨진 저수지는 가슴속의 노폐물을 시원하게 걸러낸다.

 

암릉길의 주능선을 자나노라면, 대목리 골짜기와 마루금의 구병산, 곱디고운 단풍 사이로 천년세월을 살아온 고사목의 늠름한 모습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자연의 조화 속에 아름다운 절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이 다리품을 팔며 인연을 맺은 산 꾼들의 특전이 아닌가? 635봉을 좌측으로 우회하면 특이한 소나무 앞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속리산의 주능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파노라마를 이룬다. 우측으로 천왕봉, 좌측으로 문장대 속리산의 두 거봉을 사이에 두고 千態萬象(천태만상)의 바위들이 조물주의 힘을 빌 어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다.

 

천왕봉을 출발한지 1시간 30분. 활엽수림이 터를 잡은 무명봉에는 허물어진 사각형의 돌무더기가 있고,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왼쪽계곡으로 대목리 골짜기에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30여분을 내려서면 무인감시 카메라가 있는 봉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오가는 인적도 없이 흔적뿐인 불목이재를 바람결에 스치고 헬기장을 지나간다.

 

내려오는 편안함이 있으면 올라가는 괴로움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580봉을 오르며 흘린 땀이 내려서는 발걸음에 즐거움을 안겨주며, 왼쪽으로 가파른 비알 길을 내려서면 은진송씨묘지가 반겨준다. 또 한번 진땀으로 588봉에 올라서면 좌측으로 비룡지가 우측으로 정이품송이 있는 속리산면의 아름다운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가운데 서 있는 정이품송은 수령이 약 600년으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갈목재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 초소가 있어 좌측으로 내려선다. 고개 마루에는 갈목재 390m의 이정표지판과“동식물의 서식지를 지켜주세요”출입금지 경고판이 눈길을 끈다. 경비원의 눈길을 피해 도로 좌측 편으로 돌 철망과 철조망사이로 넘어서 올라간다. 장안면 서원리에서 갈목리를 넘는 506번 지방도로인 이곳은 대전에서 오는 관광객이 법주사로 가는 길목이다.

 

이제 한고비를 넘기고 말티재로 향하는 정맥은 깊은 숲속으로 파고든다. 국립공원영역 표지석도 보이고, 정맥을 이어가는 山友님들의 표지기가 외로운 나그네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충북알프스의 시발점인 서원리의 들머리도 보이고, 웅장한 구병산 줄기가 힘차게 요동치는 모습이 한 마리의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 장쾌하다. 흔적뿐인 화엄이재. 흐르는 세월 따라 돌무더기도 낙엽 속에 뭍이고 찾아오는 길손도 발길을 끊어버린 외로운 고개 마루에 표지기만 바람결에 나부낀다. 바람결에 스치기 쉬운 이곳이 속리산 국립공원의 접경지역이라고 한다.

 

40여 분간 호젓한 오솔길을 지나오면 545.봉의 정수리에 도착한다. 잠시 쉬어갈수 있는 벤치가 있고 이정표에는 숲속의 집과 정상방향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이곳에서 우측의 정상쪽으로 진행하면 좌측으로 수직 단애를 이룬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시원한 조망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십 여 분간 진행하면, 이동통신 기지국 철탑을 지나 545봉에 올라서고, 이곳에서의 조망이 너무도 좋다. 이곳에서 말티재 방향으로 내려서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쌓인 피로를 풀어본다.

 

술이냐? 생명이냐? 안전벨트 생명벨트 -홍보간판이 반겨주는 말티고개. 진홍색의 단풍들이 추파를 던지는 고개 마루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2기의 돌장승이 버티고, 커다란 말티고개 표지석(430m)과 산길에 지친 길손들이 쉬어가는 정자까지 구색을 갖추었으니 淸風明月(청풍명월) 충청도의 인심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보은에서 법주사로 가는 길목인 말티고개에서 첫 구간도 마감을 한다.

 

법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로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 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조사각· 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 염화실· 응향각이 있다.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제 2 구간: 말티고개(430m) - 대안리고개(291m) / 21.8km

 

노산 이은상님의 글이 적혀있는 말티재의 유래비를 뒤로하고 2구간의 정맥이 시작된다. 이 고개 이름은 말재요. 처음 넘은 이는 누구였던지 다만 여기 생각나는 사람 신라 때 의신대사가 인도에서 돌아와 흰 노새 등에 불경을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법주사를 세울 적에 헐떡이며 이 재를 넘어가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다시 그 뒤에 고려 태조가 여기 이 길에 엷은 돌들을 깔았다 하니 길의 형국은 아마 그것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언제나 모두들 긴 탄식을 거듭하더니 천년이 지난 뒤1923년에 이르러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새 길을 열었고 1935년엔 자동차 길을 닦았으나 그 마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66년 6월에 정부의 예산아래 군민들이 동원되고 우리국군과 미군의 장비 지원을 얻어 여기 폭 넓고 평탄한 큰 길을 닦아내니 이로부터 수많은 사람과 수레들이 웃으며 넘어가고 웃으며 넘어 오리라.

 

아! 고마워라 쉽게 넘는 새 길이여        아! 미더워라 편히 가는 큰 길이여    1966년 11월1일>

말티고개라는 현재의 이름은 조선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에 타고 왔던 가마를 말로 갈아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말'의 어원은 '마루'로서 높다는 뜻이니 말티재는 '높은 고개'라는 뜻이 된다. -보은읍 홈페이지-

 

숨 가쁘게 오르는 비알 길은 울창한 숲속이다. 암벽지대를 넘어 올라선 580봉은 활엽수의 잡목이 무성한데, 속리산 산삼작목반에서 설치한 검은색 펜스가 주능선을 따라 지루하게 이어진다. 1시간여를 펜스와 동행하는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돼지몰이당하는 기분이라 씁쓸하기 그지없다. 잡목이 무성한 정맥의 주능선은 높낮이의 기복도 별로 없이 임도수준의 지루함속에 능선을 내려가면 전주이씨 묘를 만난다.

 

검은 펜스와의 동행은 계속되고 592봉을 겨냥하여 진행하면 정수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이 바뀐다. 계속 따라오는 철책펜스로 마음이 답답하던 차에 서슬 퍼런 경고문을 바라보며 울화가 치민다. 수km에 걸쳐 가는 길을 막아놓고 범법자로 몰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이 지역은 산림청 및 보은군 특수작물 지원생산 단지 이므로 무단출입 시 산림법에 의거 7년 이하, 벌금 5,000만 원 이하에 처벌되니 출입을 금지합니다.”

 

592봉에 올라서며 그림자같이 따라오던 검은 펜스가 약간 거리를 두고 숨통을 틔워 준다. 이제 호젓한 오솔길이 열리며 마음도 한결 편해진다. 비알 길을 내려서서 발걸음을 재촉하면 표시 없는 새목이재를 바람결에 스치고 이정표도 없는 525봉을 넘어 유순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른다. 조용하던 숲속에 차량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새로 개통된 속리터널 위를 지나는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진땀을 흘리며 591봉을 오르면, 그동안 동행하며 정들었던 펜스와도 아쉬운 작별을 하고, 능선은 왼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가을이 절정을 이루며 단풍잎 사이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거목들, 왼쪽의 계곡에는 종곡리 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는 하판리 마을이 언뜻언뜻 보이지만, 잡목 숲에 가려 제대로 된 조망한번 보여주지 않는다. 576봉 정수리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586봉, 560봉을 오르내리며 내려선 구룡치(490m)에도 이정표 하나 없기는 매한가지로 쓸쓸한 바람만 불어온다.

 

구룡치를 건너 505봉에서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554봉을 내려서면 수철령(460m)이다. 잡목이 무성한 고개 마루에는 낙엽 되어 떨어진 가랑잎들이 별천지를 이루지만, 인적이 끊긴지 오래인 듯 갈림길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536봉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안동장씨 묘소를 만나고 전방으로 오늘의 최고봉인 631봉이 조망된다.

 

530봉 정상을 오르기 전 왼쪽으로 사면 길을 따른다. 631봉 오르는 길은 사방을 가리는 답답함과 갈증이 심한 구간이다. 苦盡甘來(고진감래)의 희망을 안고 올라선 정수리에는 이름 없는 묘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표지석하나 없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무덤 옆의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십 여 분간을 내려서면 임도 옆으로 층층계단에 천수답으로 일구는 다랑이논과 백석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말티고개를 출발한지 2시간 반 만에 처음으로 주위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으로 가슴속이 시원하게 터진다. 백석리 마을을 내려서면 시멘트 삼거리에서 牛축사가 가로막아 진행을 못하고, 포장된 농로를 따라 농산물 간이집하장을 돌아서면 2차선으로 포장을 한 백석리 도로에는 이동통신 기지국안테나가 있다. 도로를 건너 고추밭과 인삼밭 사이 임도를 따라 가족묘지 뒤로 표지기를 따라 등로를 올라간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올라선 422봉에서 좌로, 우로 방향을 잡아가며 복숭아밭 옆으로 내려서면 전면으로 구티재와 탁주봉이 조망된다. 가을이 깊어가며 농촌의 들녘에는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물결로 출렁이고농부들의 손놀림이 바쁜 계절이 돌아왔다. 고향을 찾아온 평화로움으로 못골의 전경이 가슴속으로 포근히 안겨온다. 355봉을 넘어 TV공청안테나 기지국을 지나면 구티재(280m)에 도착한다. 보은군읍내 학림리와 산외면 장갑리를 오가는 지방도로인 구티재는 산의 모양이 거북이와 같다고 해서 구티 또는 거북티라 하였으며 또한 고개가 아홉 구비라 해서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비가 서 있다.

 

구티재의 이정표가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니(속리산 천황봉과 탁주봉), 작은 것 하나라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버스정류장( 장갑2리 ← 탁주리 앞 → 구티리 )이 있는 구티재에서 잠시 휴식을 한 다음, 10여 분간 진땀을 흘리며 비알길을 오르면 낙엽송 지대가 나타나고 탁주봉정상을 비껴가는 사면길이 열린다. 정맥에서 비껴있는 탁주봉이지만 그대로 스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위봉인 515봉을 넘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탁주봉에 올라간다. 산외면 들판과 그 위로 미남봉에서 묘봉으로 이어지는 속리산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사방으로 터지는 조망은 힘들여 올라온 보상을 하고도 남는다.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의 보은(報恩)땅. 내속리에 들어가면. 속세를 떠난다는 속리산이 있고, 속리(俗離)의 한 가운데에 불법이 머문다는 법주사(法住寺)가 있으니, 보은의 심산유곡을 돌아가며 능선 오른쪽에 남한강 상류인 달천이 흘러가고, 능선 왼쪽으론 금강의 상류인 보청천이 보은읍을 지나게 된다.

 

정상에서 내려와 정맥에 합류하여 잡목이 무성한 능선을 20여 분간 진행하면 잡초 속에 하얀 삼각점이 있는 456봉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435봉에서 급하게 왼쪽으로 틀어지며 작은 구티재로 향한다. 가파른 비알 길을 내려서면 평산신씨 묘에서 절개지 오른쪽의 배수로를 따라 작은 구티재(287m)에 도착한다. 2차선 포장도로인 작은 구티재는 산외면 구치리와 내북면 창리를 연결하는 지방도로가 된다.

 

465봉 오르는 길은 고된 신고식으로 진땀깨나 흘리는 구간이다. 작은 구티재는 지나온 456봉과 올라야할 465봉의 중간 협곡으로 어느 쪽으로 진행을 하더라도 180m의 고도차를 극복해야하는 곳이다. 정상을 남겨둔 갈림길에서 우측 사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구절양장의 굴곡심한 정맥은 이름 없는 봉우리들이 도토리 키 재기하듯이 좌우로 몸짓을 하며 492봉 - 475봉 - 445봉을 지나 안부에 내려서면 북상골 가는 길에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410봉과 414봉 사이에는 보은터널공사가 한창이고, 무명봉을 넘어가면 경주김씨 묘지를 만난다. 정맥과 새로 난 도로가 한동안 동행을 하며 능선 우측의 잡목사이로 길탕리 마을이 빗겨간다. 벌목 지대를 넘어가면 청주한씨 묘지를 지나 정면으로 시루산(485m)과 구봉산(506m)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조망된다. 흔적뿐인 중치고개(330m)를 지나 널찍한 임도를 따르면 이색적인 제단을 만난다. 노송의 밑둥치를 위패삼아 석편으로 쌓은 제단에는 시루단지를 엎어놓고 남녀동자 한 쌍을 배치하고 있다.

 

잡목이 무성한 오름길엔 바위들도 듬성듬성 나타나고, 430봉 정상엔 석편조각들을 가지런히 쌓아올린 돌탑이 반겨준다. 잠시 후에 밝혀지겠지만 이곳에는 예로부터 온돌방의 구들장을 캐던 광산이 있어 조금 전 제단의 석편과 같은 조각들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10분을 진행하면 잡목이 무성한 시루봉(482m)에 도착한다. 전망은 볼 것이 없지만 삼각점으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잠시 후 수직단애를 이룬 벼랑을 만난다. 이곳이 그 옛날 구들장을 캐던 광산으로 추측이 되며 복원공사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오늘의 구간이 속리산의 연봉들을 바라보며 진행하는 전망이 아름다운곳이지만 아쉽게도 잡목이 앞을 가려 숲의 포로가 되고 만다. 답답하게 진행하는 정맥도 이제는 점점 멀어만 가고 반더루스트님의 “우리산하 두발로 느끼기” 격려판을 뒤로하고 오르는 능선에는 편마암 바위들이 깔려있다. 탁주봉 이후로 모처럼 시원하게 조망이 터지는 산불감시초소에 도착한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탁주봉 뒤로 속리산의 주능선이 아스라이 하늘 금을 이루고, 쪽빛하늘가에는 산외면의 산과 계곡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초소를 지나면 정맥은 오른쪽으로 90도 선회를 하고,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곧바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구봉산(506m) 정상이다. 다시 정맥으로 돌아와 북쪽으로 서쪽으로 갈지자걸음을 하며 고도를 내려서면 십자로 갈림길인 도랑이 고개에 도착한다. 수북이 쌓인 낙엽사이로 석편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잡목이 무성하여 음산한 기운이 든다. 진사은진송씨묘를 지나 올라서면 435봉이고 비알 길을 내려서서 올라가는 385봉은 정상직전에서 왼쪽으로 사면 길을 돌아간다. 답답하던 시야가 터지며 공장부지로 조성중인 개활지의 좌측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을 하지만 정맥은 이미 훼손된 상태다.

 

전면으로 보이는424봉과 왼쪽의 봉우리를 하나 더 넘어야 대안리 고개가 된다. 2차선으로 포장된 벼제고개(290m)는 왼쪽으로 창리와 연결되고, 우측으로 가면 벼제마을과 길탕리를 지나 작은 구티재로 이어진다. 벼제고개에서 인삼밭 옆으로 올라 경주이씨 가족묘 뒤로 정맥을 따르면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424봉이 앞길을 가로 막는다. 또 한 구간을 마무리하기위해서는 가파른 비알 길도 비껴 갈수는 없다. 암벽지대를 넘어 왼쪽으로 사면길을 따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지친 몸에는 단 한발작의 오름길도 무리가 되어 아쉽지만 정상을 포기하고 사면 길을 내려선다.

 

할아버지, 아버지로 대를 이어 모셔진 평산신씨가족묘지를 지나 대안리 마을을 바라보며 19번 국도인 대안리 고개에 안착한다. 대안1리 버스정류장은 대안리고개에서 오른쪽으로 10여분이 족히 걸린다. “”청주- 대안1리 - 보은” 그 옆에는 주유소도 있다

 

'한남금북정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남금북정맥 6 부: 팔봉지맥  (0) 2009.10.27
한남금북정맥 5 부: 금적지맥  (0) 2009.10.27
한남금북정맥 4 부  (0) 2009.10.27
한남금북정맥 3 부  (0) 2009.10.27
한남금북정맥 2 부  (0) 2009.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