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碑 林 관광 - 華 淸 池 관광
서안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맑게 개어있다.
호텔에서 하는 아침식사는 부폐식 으로 종류도 다양하고 정갈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짐을챙겨 차에싣고(저녁에 장 가게로 이동을 한다) 제일먼저 비림 박물관으로 향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역사 관광은 가이드의 해설이 아니면 장님 문고리 잡는 식으로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가이드의 설명에 일 거수 일 투족을 주시해야만 한다.
시내에 있는 관계로 버스로 잠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진입로부터 양옆으로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누각 속에 고이 모셔놓은 비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길옆에 덩그러니 서있는 비석과 100m전방의 정문 현판에 걸려있는 비림의 글자에 관한 설명이 계속된다.
길옆의 비석에는 碑 林이라 써 있고 정문의 현판에는 비석비자 위의 점하나가 없는데 청나라 말기 부정부패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외국의 8개국이 연합하여 청나라를 침략하니 그 유명한 아편전쟁으로 임 측서 장군이 부하 장군들에게 현판을 써주며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린 뒤에 돌아와서 점을 찍겠다고 약속을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전쟁은 패하고 장군마저 전사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점을 찍지 못한채 그대로 걸려있다고 하니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글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碑林에는 명필들의 친필서각 1,095점이 한자리에 전시되어 숲을 이루고 천년이상 된 문화재급 보물들만 선정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집을 하였다는데 그 많은 보물들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전시실에 배치하였는데 제 1전시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문인들의 필독도서로 四書三經을 비롯하여 12부 경서 65만 250자가 비석에 빼곡히 쓰여 있고 오랜 세월 비바람과 탁본으로 글자가 마모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당의 현종이 쓴“석대효경”은 예서체로 되어있고 비석 중에 가장 크며
제 2전시실에 들어서면 문물이 가장 성행했던 당 나라 때의“대진경교 류행중국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625년 기독교가 들어와 활동했다는 흔적이 비석에도 아라비아 글자로 새겨져있고 또한 당나라를 대표하는 안진경의“다보탑 감청비”와 “안씨가묘비”는 자신의 행적을 적은 글로 72세에 썼다고 한다.
제 3전시실에는 서성 왕 휘지의 비문이 있는데 당 태종 이세민이 현장법사의 공헌을 치하하여 지은“삼장성 교서비”로 왕 휘지의 필체로 비석에 새겨 넣었는데 해서, 횡서, 초서의 세 가지 글씨체를 순서도 없이 섞어서 쓰고 글자도 크기가 제 각각이어서 그 뜻을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한국에서 온 서예가들이 온종일 자리를 뜰 줄 모르며 한자 한자 탐독을 했다니 우리 같은 문외한이야 가이드의 설명에도 이해를 못하고 있으니 이일을 어찌하랴.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인간들의 속물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귀중한 보물을 자기혼자 독점하겠다는 욕심에서 탁본을 한 다음 글씨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훼손을 하였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
제 4전시실 문턱을 넘어서면 그윽한 묵향과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탁본 뜨는 손놀림이 민첩한데 유독 이곳에서만 탁본이 허락되지만 이마져도 몇 년 후에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금한다고 하니 귀중한 장면들을 견학하며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
기라성 같은 서예가들의 친필이 숲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도 가장 추억에 남을 작품으로는 관 우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포로로 있을 때 관우를 향한 조조의 정성이 지극하지만 도원결의 유비에게 향하는 마음을 그 누가 꺽을 수 있단 말인가?
한 폭의 대나무 그림 속에 임 향한 일편단심을 적은 글씨는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며 이 천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닐까?
關 帝 詩 竹 (관 제 시 죽)
不 謝 東 君 意 불 사 동 군 의
丹 靑 獨 立 名 단 청 독 립 명
莫 嫌 孤 葉 淡 막 겸 고 엽 담
終 久 不 凋 零 종 구 불 조 령
얼핏 보면 대나무 그림이지만 대나무 잎을 유심히 보면 그 속에 위의 시가 들어있는데 대나무처럼 영원히 변치 않을것을 맹세하는 글로 청나라의 문인들이 관우를 흠모하는 뜻에서 지은시 라고 한다.
일사천리로 쏟아내는 가이드의 설명과 주마간산으로 스치는 관광길에 그 깊고 심오한 뜻을 어찌
다 되새길 수 있으며 어찌 다 소화할 수 있단 말인가?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린다.
⁌ 華 淸 池 ⁍
짙은 향과 느끼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인지 수저를 드는둥 마는둥 화청지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낮의 뙤약볕 아래 (32도) 비실비실,
당의 현종과 양귀비의 로멘스가 서려있는 화청지는 3,000 여년전 주 나라 때부터 황제들의 온천휴양지로 산세가 수려한 진맹산맥의 지맥인 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당의 현종이 제국보다도 사랑한 양귀비를 위해 궁전을 짓고(비 상전) 목욕탕을 만들어 천년의 세월속에도 아름다운 정원으로 보존되고 있으니 그 시절 화려함이야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제일먼저 비상전을 돌아가면 연못이 나타나고 휘늘어진 버드나무와 수련이 만발한 못가에는 백옥같은 양귀비의 상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풍만한 허리와 허벅지는 양귀비가 70kg의 뚱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대에 따라 미인의 척도가 달라지니 양귀비(본래이름은 양 옥환)가 현재 다시 태어난다면 미인은 커녕 뭍 남성들에게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지 않을까?
양귀비는 원래 당 현종의 며느리였지만 뛰어난 미모에 반한 현종이 부인으로 삼아 방탕한 생활 로 酒池肉林속에 해가 뜨고 졌다고 하니 앞에 보이는 연못이 바로 그 현장이 아닐까?
왼편으로 해당탕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면 해당화 모양의 양귀비 온천탕이 있고 옆으로 연화탕이 있는데 하루에 112톤의 온천수가 솟아 나오고 43도의 목욕하기에 알맞은 온천수는 밖으로 돌려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명소가 되었다.
연화탕을 지나면 황제가 목욕하던 성지탕이 나타나는데 휴게실에는 바닥에 물길을 만들어 온천수가 흐르도록 하여 온도조절을 할 수 있는 중국 최초의 난방시설이 되어있고 상시탕 이라는 대중탕에는 문무백관들이 목욕을 하는 곳인데 물길이 흘러내리는 상석에는 고관들이 하석에는 하급관리들이 위에서 앃은 물에 목욕을 해야 하니 계급사회의 위계질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인가
건물을 나와 북쪽으로 날아갈듯 높은 누대에 아담한 건물이 시선을 끄는데 양귀비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는 곳으로 아마도 지금의 미용실의 효시가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화청지를 돌아 나오며 중국역사를 되돌아보면 은나라의 주 왕은 달기라는 요부에 의해 멸망을 하고, 후주의 포사는 손의 미모에 반해 망하고, 당의 현종도 양귀비로 인해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으니 미인박명 이라는 말대로 양귀비도 38세의 나이에 안록산의 난으로 자결을 해야만 하는 운명으로 끝맺음을 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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