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2017년 9월 10일
발행인: 지은경
심도역사 문화길
2년 반에 걸친 삼남길 답사를 완료하고 찾아 나선 곳이 강화 나들길이다.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시대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조성, 서양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 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 민족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강화군에서는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는 나들길 20구간을 조성하여 그 길이가 292.2km에 이른다. 강화도가 수도권에 있는 섬이라고 하지만, 의정부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면 3시간이 족히 걸리는 먼 거리이다. 환승역인 송정역까지는 지하철을 이용하고, 3000번 직행버스로 강화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먼저 찾아간 곳은 1구간이 시작되는 동문이다. 그동안 강화도를 여러 번 방문하였지만, 석모도를 중심으로 마니산과 고려산에 먹거리집을 순례하다보니, 강화산성이 있다는 생각마저 못하고 지내온것이 사실이다. 강화산성은 남산과 북산을 영결한 산성으로, 총 길이가 7천122m에 이른다.
강화산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소의 암문(暗門), 2개소의 수문(水門)이 있었는데, 동문을 망한루, 남문을 안파루, 북문을 진송루, 서문을 첨화루라 하며, 현재까지 총 4개의 대문과 수문 1개소, 암문 1개소가 복원되었다.
사적 제132호인 동문(東門)은, 1232년(고종 19) 6월 최우(崔瑀)가 몽골군 침입에 맞서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이후로 외세의 침입에 파괴된 것을, 2004년에 복원하였다. 남쪽에는 망한루(望漢樓), 북쪽에는 강도동문(江都東門)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동문에서 700m거리에 있는 성공회성당(聖公會江華聖堂)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이다. 초대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된 건물이다. 1889년 초대 한국주교로 서품을 받은 코프는, 7년 뒤인 1896년 강화에서 한국인에게 처음세례를 베풀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먼저 성당을 건립하게 되었는데, 교회내부의 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이고, 외관은 불교사찰의 모습이어서 이색적인 건물로 보인다. 경사지에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으로 배치하여,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본 건물에 천주성전(天主聖殿) 이라는 간판도 대웅전의 편액과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고, 서쪽에는 종각까지 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용흥궁(龍興宮)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강화도령)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다.
잠저란 법통을 이어받지 않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하는데, 용흥궁은 원래 3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 1853년(철종 4)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살림집을 본뜬 기와집으로 신축하였다고 한다.
철종의 본명은 원범으로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사도세자이다. 기구한 운명 속에 생사를 넘나들던 원범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며 농사일로 목숨을 부지했다.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서거하자, 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으니, 25대 철종 임금이다.
철종 임금은 탐관오리와 빈민구제에 적극성을 보였으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왕위에 오른 지 14년 6개월 만인 33세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는 용흥궁공원(龍興宮公園)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에 터를 잡고 있다.
사적 제133호로 지정된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송도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부터 환도(還都)하는 1270년까지 39년 동안 사용하던 고려궁궐 터이다. 1270년 고려가 송도로 환도(還都)할 때 몽골군의 요청에 의해 궁궐과 성곽이 모두 파괴되었다.
조선시대에서도 강화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631년 행궁(行宮)을 고려 옛 궁터에 건립하고,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조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다. 강화유수부 건물들과 규장외각(奎章外閣)을 건립해 많은 장서와 문서가 보관되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이 책과 서류들을 침탈해 가져가 버리고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강화향교 가는 길옆에 있는 북관제묘는, 도원결의로 유명한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의 요청으로 서울에 동관묘가 세워진 이래 관우의 신앙이 퍼져나갔으며, 숙종 때에는 관아에까지 진출했다. 고종 29년(1892) 강화산성(江華山城)의 수문장(守門將)이었던 윤의보(尹義普)가 북관제묘를 건립했다고 한다.
강화여자중학교 옆에 있는 강화향교는, 고려 1127년(인종 5)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세웠다. 그 후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이 소동문 밖의 송악산(지금의 북산) 옆에다 복원하였으며, 1629년에는 명륜당을 세워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1731년 강화유수 유척기(兪拓基)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명륜당은 교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혔던 강학공간으로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주어 교생들을 가르쳤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향교에서는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한다.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이 은빛을 띈다 해서 부르는 은수물은, 향교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할 정도로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은수물을 지나며 본격적으로 강화산성이 시작된다. 강화읍을 보듬어 안고 있는 북산은 울창한 수림 속으로 나들길이 연결되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다.
북문에 도착한다. 강화산성은 1232년(고종 19) 6월에 최우(崔瑀)가 몽골군 침입에 맞서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내성으로 쌓은 성곽이다. 1259년에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자, 몽고는 그 조건으로 주자(周者)와 도고(陶高) 등을 보내 내성을 헐고 외성까지도 모두 헐어야 했던,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화마로 석재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토성으로 축조되었으나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된 것을 효종 3년인 1652년 일부를 개축하였다고 한다. 북문은 고려궁지에서 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있다.
북 문(北門)
鎭松門下久徘徊(진송문하구배회) 진송루 성문아래서 한잠을 머물러보니
山自高麗屈曲來(산자고려굴곡래)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眼下一千茅瓦屋(안하일천모와옥)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烟火影裡半塵埃(인화영리반진애)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詩
강화산성(江華山城)을 따라 북장대(北將臺)로 향한다. 강화산성은 개성의 성곽과 비슷하게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중 내성에 해당하는 곳이 현재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숙종 3년(1677년)에 현재의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개성의 성곽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새로 복원된 강화산성이 능선 따라 장엄하게 이어진다.
진송루에서 400 여m 성곽을 따라 올라서면 북장대(北將臺) 정상이다. 가슴이 탁 트이는 조망 속에 북쪽으로 송해면의 너른 들판과 조강(祖江) 너머로 아스라이 개풍군이 바라보인다. 강화산성은 강화읍소재지를 둘러싸고 있는 남산과 북산을 연결한 산성으로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기위해 쌓은 성곽이다.
장대(將臺)란 지휘관이 상주하는 지휘소(指揮所)를 말한다. 강화산성에는 남산과 북산 2곳에 장대가 있었는데, 남장대는 2010년에 복원 되었고, 북장대는 복원을 위한 준비작업 중이다. 북장대에서 1구간과 15구간이 갈라진다. 1구간은 왼쪽 성 밖으로 내려선다. 강화 산성 북문을 지나 숲속 오솔길을 따라가면 오읍(五泣) 약수터가 나온다.
북문을 건축하던 중 날이 가물어 갈증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되자 고종은 북문 앞에 제단을 쌓고 기우제를 올렸는데, 바로 그때 벼락이 큰 바위에 떨어지며 물이 솟아오르니, 지금의 약수터라고 한다. 이에 제를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다섯 오’에‘울 읍’자를 써 오읍(五泣)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대월로를 횡단하여 대산 침례교회를 지난다. 잠시 마을길을 따르다 학무산(70m) 기슭으로 올라 포근한 오솔길을 30여 분간 진행하면 연미정이 있는 월곶돈대에 도착한다. 월곶돈대는 강화해변에 구축한 53개 돈대중의 한곳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연미정(燕尾亭)에 오른다.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빠지는 길목이라, 갑곶(甲串)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 염하의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고 부른다. 연미정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 양쪽에는 수령이 오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黃衡)에게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현재도 황씨 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곳은 민간인통제구역에 속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2008년 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관람하고 있다.
연미정에서 내려와 갑곶돈대까지 해안선을 따라 6.3km를 걷게 된다. 염하를 사이에 두고 적의 해상침투를 저지하기위한 철조망 사이로 군인들의 순찰로가 이어진다. 나들길은 도로 옆으로 진행하다 옥개방죽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제방을 따른다. 옥림리 옥개마을에는 간척지로 조성된 들녘이 펼쳐지고, 저어새와 황로 등 철새들의 서식지이고, 부근에는 옥창돈대가 있었다고 한다.
용정리에서 당산(75m)기슭으로 올라선다. 한 여름의 무성하던 참나무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발길에 차이는 낙엽들이 정겨운 리듬 속에 지루함을 달래준다. 양지바른 산기슭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펼쳐진다. 고려산의 진달래를 연상할 정도로, 춘삼월이면 불타는 진달래의 향연을 기대해 볼만하다.
철책선 옆으로 아담한 공원이 나타난다. 6.25 전쟁에 참여하여 조국수호에 몸 바친 선열들의 얼을 기리는 기념공원이다. 오늘도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2층 전망대에 올라서면 염하를 사이에 두고 문수산성이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김포반도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376m)은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향해 달려가던 중, 속리산 천왕봉에서 분기하여 한남금북정맥을 이루고, 안성의 칠장산에서 다시 분기하여 김포시 문수산에서 생을 마감하는 한남정맥의 마지막 지점이다.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강화도(江華島)와 김포반도(金浦半島)는 순망치한(脣亡齒寒)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한곳이라도 부실하면 한양이 위태로워지는 요충지 인지라, 고종시대를 맞이하여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드디어 강화대교(江華大橋)에 도착한다. 1969년에 완공된 구교(舊橋)가 노후 되어 1997년 새로운 교량을 완공하였다.
1969년 12월에 완공된 구교는 폭10m에 길이가 694m 이었지만, 재시공된 다리는 폭이 19.5m에 길이가 780m로 확대되었다. 다리가 없던 시절, 강화도에 가려면 김포 쪽 나루에서 만조(滿潮)가 되기를 기다려 간만의 조위차(潮位差)가 8m에 이르렀을 때, 버스를 나룻배에 실어 강화도로 건너갔다고 한다.
강화대교와 구교 사이에는 통제영학당지가 있다. 조선 고종 때인 1893년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자리이다. 개항과 더불어 해양방어의 일환으로 군함의 건조와 구입을 추진하였으나, 재정이 궁핍하고 청나라와 일본의 방해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인재육성책으로 이곳에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갑곶순교성지가 있다.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빌미로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렸는데, 미국 함대를 왕래했던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을 갑곶진에서 효수하였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갑곶돈대가 강화 나들길 1구간이 끝나는 지점이다. 갑곶돈대 관광안내소에서 강화나들길 스탬프 수첩을 교부받고, 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3000번 직행버스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