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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의주길

벽제관 길

일 시:  2014년 4월 9일

구 간:  제1길 벽제관길 (삼송역 - 벽제관지)  7.6km

 

                                           의주길 답사

 

만화방창 호시절을 맞아 모처럼 길을 나선 곳이 의주길이다. 의주길이란 조선시대 한양과 중국을 이어주던 대동맥(大動脈)으로 의주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말한다. ‘관서대로’ ‘경의대로’ 로 부르던 이 길은 근세조선의 문물이 의주로를 통해 들어오고 중국으로 오가던 사신(使臣)의 길이요, 보부상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던 유서 깊은 길이다.

 

 

남북의 대립과 근대사의 발전으로 통일로가 개설되고,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간선도로의 신설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선 의주로가 2년간의 복원작업으로 고양 삼송역에서 임진각까지 52.7km를 개통하게 되었다. 걷기운동의 열풍 속에 전국의 옛 길을 복원하여 조선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있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요. 큰 보람이다.

 

 

3호선 삼송역 8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삼송초등학교 앞을 지나면 1번 국도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오른 쪽으로 의주길이 시작된다. 길옆으로 흐드러진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완만한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오솔길이 펼쳐진다. 잘록한 고갯마루가 숫돌고개다. 삼송동과 오금동, 신원동의 경계인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전투(1593년)에서 크게 패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복수를 다짐하며 칼을 갈았다는 곳이다.

 

 

숫돌고개에서 참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우봉김씨(牛峰金氏) 계동공파 종중묘역이 펼쳐진다. 묘역 중앙에는 역관 김지남(金指南)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18세 때인 1672년 역과에 급제하여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외교관으로 활약하였고, 아들과 함께 외교의 역사를 정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편찬하고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외교관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북한산의 수려한 모습이 조망된다고 하지만, 황사와 미세먼지의 위세에 눌려 그 형체를 볼 수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오늘 답사하는 의주길이 중국을 오가던 길인만큼 정치, 경제, 문화,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상기할 때, 오늘아침의 황사와 미세먼지도 중국에서 날아온 것이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6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통일로를 따라가면 삼송택지지구로 개발 중인 신원마을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상전이 벽해라고 했던가. 눈부시게 발전하는 우리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공릉천을 따라 가던 중, 왼쪽으로 오래된 비석 한 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만 오면 범람하는 냇물 때문에 고생하던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덕명교비’라고 한다. 효종7년인 1656에 세운 교비에는 다리를 세우게 된 유래와 공사에 참여한 8백 여 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우리민족은 사소한 일이라도 기록을 중하게 여겨 후세에 남기는 슬기로운 민족이다. 북악성벽을 따라 가노라면 구간마다 부역에 참여한 부락과 책임자에 동원된 인원까지 바윗돌에 새겨 책임감과 명예심을 부여하는 효과를 갖게 하고 있다.

 

 

공릉천을 지나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인구의 절반이 활동하고 있는 수도권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차량들이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간선도로다. 총길이가 128.3㎞에 이르는 순환고속도로는 환경론자들의 극심한 반대로 중단되기를 수차례. 신나게 질주하는 차량들을 바라보며 21세기로 향하는 우리의 번영을 예감하고 있다.

 

 

예원추모관(벽제화장터)을 지나 벽제 천을 만난다. 제1대자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벽제 천을 따라 십리길이 이어진다. 차량의 홍수 속에 분진을 마셔가며 고통 받던 통일로를 버리고 훈풍이 불어오는 벽제 천에는 제철만난 개나리와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앙상한 물 억새가 조화를 이룬다. 밭갈이 둔덕에는 고추 심을 이랑을 만드는 농부님의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한창시절 황소도 때려누일 힘이었겠지만 세월 따라 굽은 등줄기와 괭이질도 버거워 보이니 보기에도 안쓰럽다.

 

 

십리제방 길도 끝이 나고 고양일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고양동 시가지가 펼쳐진다. 고양 제1교를 건너면서 이정표가 자취를 감춘다. 의주로 제1구간이 끝나는 벽제관지를 찾아야 하는데, 난감하기 그지없다.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 부동산아저씨의 안내로 벽제관지를 찾아 7.6km의 제1구간을 마감한다.

 

 

벽제관은 조선시대 고양군 객사이자 벽제역의 역관이다. 한양에서 중국으로 가는 중간에 10개역이 있었는데, 그 중에 처음으로 만나는 역이다.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이나 중국에서 오는 사절단을 영접하는 곳으로 한양의 관문으로 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이렇게 중요한 벽제관지에 안타까운 사실이 있었으니,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제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세미치가 과거 임진왜란당시에 일본군이 명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벽제관전투를 기념하여 벽제관 앞 연지에 있던 육각정을 반출하여 자신의 고향인 이와쿠시니 모이지다니 공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일제시기와 한국전쟁으로 유물들이 소실되고, 현재는 빈터만 남아 있는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이에 고양시에서는 고양600년을 맞아 고양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으로 반출된 육각정을 환수해 오기위한 시민들의 모임이 조성되고 있다니 환영할만한 일이다. 역사 이래 우리의 국토를 유린하고 노략질하는 일본. 그들에게 무슨 양심이 있겠는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독도를 저들의 것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에 대해 항시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2번째 길인 6.2km의 고양 관청 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곳이 중남미 문화원과 고양향교다. 건물 외관부터 붉은 벽돌의 고풍스런 모습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중남미 문화원은 중남미에서 30여 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이복형대사와 부인 홍갑표 이사장이 그 지역의 풍물을 모아 전시한곳이다.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중남미 지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건립했다는 취지에 따라 마야와 아즈텍, 잉카의 유물들이 진열되어있다는 내부는 둘러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아쉬움이 남는다.

 

 

중남미 문화원과 마주보고 있는 향교를 찾아간다. 향교란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중,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양민이상이면 입학이 허용되어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이 중요한 과목이며 고양향교는 숙종15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는 곳이라 의미가 색다르며 날을 잡아 다시 한 번 찾아 올 것을 다짐하며 돌담길을 들어서니 이곳 또한 감칠맛 나는 곳이다.

 

 

낮은 담장 좁은 골목길 이끼 낀 돌담길에서 백 년 전의 세월 속으로 들어선 듯 고즈넉한 분위기속에 산 비알을 올라서면 피톤치드가 넘쳐나는 울창한 숲속에 체험의 장이 펼쳐진다. 삭막하고 숨이 막히는 도심을 벗어나 신선한 공기가 쏟아지는 숲속에 들어서니 가슴 속이 뻥 뚫리며 날아갈듯 몸이 가벼워진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했던 그 옛날. 미세먼지와 황사의 피해를 알지 못하고 맑은 공기와 신선한 피톤치트로 건강을 챙기던 옛 선조들의 생활이 부러운 것은 어린 시절의 향수가 그리워서 일까? 밭두렁에 흐드러진 왕벚 꽃, 수즙은 미소로 붉게 물든 진달래를 벗 삼아 대자산 고갯마루를 넘는다.

 

 

동헌로를 따라 10여분을 진행하다 오른쪽으로 온령군 묘지 방향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 금표비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그 옛날 임금님들이 수렵하기 좋은 곳에 사냥터를 정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여 금표비를 세우게 되는데, 설명에 의하면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의 금표비라고 밝히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묘지와 사당이 나타난다. 이조 태종대왕 일곱 번째 아들 온령군의 사당이다.

 

 

온령군의 무덤은 성북구 미아리 버스종점 뒤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이장하게 되어 왕족의 무덤이라 특별한 소장품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주관하여 500여 년 만에 석관을 열었으나 특별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고, 후손들에 의해 벽제면 대자리 현 위치에 이장하고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숭모문 앞에 세워진 비석에 눈길이 간다. 조선국태종왕자 온령군 신도비는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가 선명하여 왕족의 神道碑로 손색이 없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 갈 협소한 서낭당 고갯길을 넘어서니, 심심산골에 고읍마을이 반겨주고 동리한바퀴 휘돌아 산길을 오른다. 이름하여 관청령. 의주길에서 처음만나는 험준한 산길이다. 그 옛날 의적들이 웅거하며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털어가는 간담이 서늘하던 곳이 아닌가 싶다. 헐떡이는 숨길을 고르며 비알 길을 오르면 용미리 공원묘지가 펼쳐진다.

 

 

수 십 만평의 너른 산자락에 빼곡이 들어찬 망자들의 안식처. 살아서 받던 푸대접이 저승길로 이어 지는가? 수 십 평의 터를 잡고 편안하게 누어있는 망자들과 한 평 남짓 좁은 터를 비집고 아슬아슬 비알 길에 자리 잡은 망자들이 어찌 공평하다 하겠는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도 옛말이고 보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부귀영화는 따로 있는가 싶다. 용미3리에 도착하며 6.2km의 의주2길도 끝이 나고 제3길 쌍미륵길 14km 가 시작된다.

 

 

쌍미륵길은 헤음로의 도로 폭이 좁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여 호젓한 마을길을 돌아간다. 마을로 들어서면 낮선 이방인을 향해 짖어대는 개들이 가장 위협적이다. 하긴 노인들만 살아가는 시골에 도적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개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며 집지킴으로 안성마춤이라 집집마다 개를 키우게 된다. 보초서는 개의 신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위협하는 합창소리가 동구 밖으로 사라질 때 까지 이어지니 모골이 송연하고 오금이 저려 등줄기에서 진땀이 난다.

 

 

마을길을 휘돌아 처음으로 만나는 곳이 용암사 마애불상이다. ‘장지산용암사’의 현판이 걸린 산문에는 사천왕대신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으로 참배객을 맞이한다. 900여 년 전인 고려13대 선종 때 창건한 용암사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발자취가 남아있지만, 쌍미륵으로 인해 더욱 유명한 사찰이다.

 

 

대웅전 뒤로 계단을 따라 가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쌍미륵을 만날 수가 있다. 높이가 17.4m에 이르는 미륵상은 고려중기 13대 선종이 자식이 없어 셋째부인인 원신궁주 이씨를 맞이했으나 후사가 없어 고심하던 중, 꿈속에 도승의 현몽으로 장지산 기슭에 큰 바위 두 개가 있는 지라,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린 후 원신궁주에게 태기가 있어 왕자인 한산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아름다운 전설을 뒤로 하고 마을길을 휘돌아 찾아간 곳이 윤관장군 묘소다. 왕릉에 견줄만한 규모에 놀라고 만다.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아름다운 조경과 품위 있는 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윤관 대원수는 파주시 파평면 금파리에서 태어난 파평윤씨 시조 윤달의 5세손이다.

 

 

파주의 3얼인 이이 율곡, 황희 정승과 함께 문무를 겸비한 윤관장군은 고려 문종 27년(107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 추밀원사를 거쳐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고 여진정벌의 대원수로 임명되어 17만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135개에 달하는 적의 거점을 점령하고 윤관9성을 설치하게 된다. 연천군에 있는 숭의전은 고려태조, 문종, 현종, 원종과 16충신을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고려 500년 역사에 길이 빛날 충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삼송역에서 출발한 의주길 21.8km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 조상들의 얼과 생활관습이며 역사적인 사실들을 반추해 보며, 윤관묘소에서 임진각까지 30여km를 다음구간으로 기약한다.

 

 

 

 

 

 

 

 

 

 

 

 

 

 

 

 

 

 

 

 

 

 

 

 

 

 

 

 

 

 

 

 

 

 

 

 

 

 

 

 

 

 

 

일   시:  2014년 4월 9일

제 2길:  고양 관청길 (벽제관지 - 용미3리)  6.2km

 

 

 

 

 

 

 

 

 

 

 

 

 

 

 

 

 

 

 

 

 

 

 

 

 

 

 

 

 

 

 

 

 

 

 

 

 

 

 

 

 

 

 

 

일  시  : 2014년 4월 9일

제 3길 : 쌍미륵 길( 용미3리 버스정류장 - 윤관장군묘)  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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