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호 ( 시 와 산 )
제 37 호
2002년 11월 30일 발행
회 상 - 월출산에서
빛바랜 사진 속에
낯익은 얼굴
헐렁한 추리닝에
공삼 모자 눌러 쓰고
천황봉 정상에서
환호 하는 그 모습
구름다리 통천 문을
기어오르며
돌부리에 걷어차인
낡은 운동화
포기 하려는 마음
추 수르며 인내를 배우고
시작은 늦었지만
200산을 넘고 보니
자연의 소리에 귀가 열리고
정수리에 올라
마음이 열리니
모두가 내 벗이요
스승인 것을
공삼 모자: 김영삼 대통령이 산에 오를 때 즐겨 쓰던 모자
내연산의 비밀 - 경북 포항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달려온 곳
보경사 천년 노송
말없이 반겨주고
어두움도 산자락을 휘돌아 물러날 때
수줍은 산 색시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흙발로 마중 나오고
문지봉, 삼지봉, 향로봉
반갑구나 반가워
산색시의 발길 따라
청하골로 내려서니
삼단치마 슬며시 벗어 던지고
서울의 산 꾼을 유혹하는데
은밀한 자궁 속에 넘치는 물길 따라
천지를 진동하는 연산 폭에
울울 창창 학소대 하늘을 가리고
양 갈래 관음 폭이 용트림하며
이 십리 청하 골에
열두 폭을 빚어내니
황진이도 마다하는
풍운아의 허리끈을 푸는
그대는 누구 인고.
금오산의 정기 - 경북 구미시
금 까마귀 춤사위에
황금 들녁 출렁이고
고속 도로, 공업 단지
근대화의 초석
층층 단애 기암절벽
보금자리엔
팔십 척 명금폭포
실낱같은 물줄기
불심으로 다듬어진
약사 암 오름길엔
허물어진 금오산성
정장군의 혼이 서려
들국화 향기로
길손을 유혹 하네.
금오산 : 구미시 서쪽에 있는 도립공원으로 해발 976.6m
정 장군: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금오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정기룡 장군
테 마 시
설 봉 (雪 峰) - 남양주의 백봉에서
늘 상 바라보는 산이지만
눈 덮인 겨울 산이 좋은 것은
누런 흙먼지, 시꺼먼 매연가루
혐오스런 꼴불견들
그 모든 것 보듬어 감싸주는
너른 가슴이 있어 좋습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발피는 소리에
청솔무가 재빨리 숨어버리고
다북솔 눈 벼락에
티 없는 웃음소리
햇볕에 반사되는 설봉을 바라보면
가슴속의 탐욕도 녹아듭니다.
산행 수필
내장산의 향연
전국이 붉게 타 오르는 계절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국립공원 내장산이 아닐까?
불꽃의 향연을 찾아 오늘도 무박 산행을 위해 집결 장소인 동대문으로 직접 나가고 어김없이 아내는 간식을 준비하여 동대문으로 배웅을 나온다.
지극한 정성이 백만 원군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설치며 10시간 이상의 강행군에도 거뜬하게 완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복에 넘치는 산행길인가?
심야의 고속도로는 탄탄대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청해보지만 만산홍엽의 단풍길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잠은 저만치 멀어지고 내장 저수지에 도착한 우리는 야간산행에 필요한 도구들을 챙긴 뒤 산행을 시작한다.
주위를 분간할 수 없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가파른 비알 길을 기어올라 서래봉을 지나 불출봉으로 향한다.
상큼한 새벽공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흥건하게 흐르던 땀방울도 잦아들고 내장 저수지 주위를 밝히는 가로등을 벗 삼아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암능길을 넘나든다.
불출봉을 지나 망해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연 이어지는 철사다리가 어둠 속에 장애물이 되어 애간장을 태우는데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정주시내의 야경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망해봉은 가파른 암봉으로 맑은 날에는 서해가 보인다고 하지만 야심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내장사에서 신선봉으로 오르는 불빛만이 가물거리고 연지봉을 지나 까치봉 정상에 올라서도 어둠은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안타까움 속에 지칠 줄 모르는 발걸음은 계속 이어진다.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신선봉에 올라서니 어두운 그림자도 계곡으로 꼬리를 감추고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며 동산 저수지에서 피어오르는 운해가 밤새워 달려온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며 높고 낮은 산들이 다도해의 섬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가 토해내는 함성은 골골마다 울려 퍼지고 수없이 보아온 일출이지만 이 순간만은 영원히 잊지 못할 황홀한 정경으로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 인 하늘아래 밤새워 걸어온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 까치봉, 연지봉의 연봉들이 아침 햇살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장관을 이룬다.
건너편의 서래봉이 울산바위를 모셔온 듯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리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몽유병 환자처럼 자리를 뜰 줄 모르며 밤새워 걸머지고 온 정상 주를 나누어 마시며 십년지기가 되어 즐거움을 만끽한다.
문필봉을 지나 좌측으로 수 십 길 벼랑위에 있는 전망대는 자연과 인조물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내장산의 아름다움을 만끽 할 수 있도록 케불카를 연결한 곳이다.
연지봉을 지나 쉬엄쉬엄 장군봉을 오르며 주위에 펼쳐지는 고운 빛깔의 단풍잎들 노랑, 분홍, 빨간 색조를 이룬 화려함속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불타오르며 재가 되어 남으리라.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유군이재를 지나 동구리로 이르는 발길에는 급경사 내리막길에 인적도 드믄 호젓한 오솔길로 유유자적 이야기꽃을 피우며 단풍의 터널을 지나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에 머리를 감고 6시간의 야간 산행도 마감을 한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행락객들과 어우러져 내장사 대웅전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연도에 피어나는 화려한 단 단풍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전국 제일의 단풍놀이에 병풍처럼 둘러친 암봉들이 우리가 밤새워 걸어온 발자취로 무한한 행복감에 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