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호 ( 시 와 산 )
제 34 회
2002년 2월 23일 발행
얼굴 없는 요리사
새벽 4시
도시락 싸는 아내의 손길
달그락 달그락
배낭 꾸리는 나의 손길
부스럭 부스럭
배웅하는 함박웃음
깃털보다 가벼운 발걸음
꾸역꾸역 모여드는 산 친구들
효선, 효범, 도현 .......
왁자지껄 시끌벅적
하늘과 가까운 양지바른 쉼터에
난전을 펼치고
김밥에 삼색꼬지 경단에 오징어 말이
동동주 까지
얼굴 없는 요리사의 푸짐한 잔칫상
옹기종기 둘러 앉아
주거니 받거니
얼굴 없는 요리사
간지러운 귀청을 어이 할거나
회암 능선
소 재 지 : 설악산 미시령
미시령 고개 마루에는
칼바람이 불어오고
석화꽃 만발한 능선에
벌 나비들이
얼어버린 향기 찾아
꽃밭을 넘나들며
오감을 활짝 열어본다.
상봉에 걸려있는
눈이 시린 하늘 끝
쪽빛바다와 손을 맞잡고
수반위의 울산바위
가슴속으로 보듬고
구절양장 미시령이
발걸음에 묻어오는데
일주문 현판에는
금강산 화엄사라
일만 이천 형제를 어디에 두고
향로봉, 신선봉, 마산
너희 삼형제만 우리를 반기느냐?
어깨를 맞대고도
오가지 못하는
오 ! 그리운 금강산아
오르지 못한 중왕산
소 재 지 : 강원도 정선군
천당골에서 벽파령까지 달려 보자고
품속으로 뛰어 드는데
뒷덜미를 잡아채는
거대한 손길
사정해도 애원해도 소용이 없고
초점 잃은 눈으로
너의 자태 바라보며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인심 좋은 강원도 골골마다 떠밀려
무덤 속같이 침묵만 흐르는
버스 안에서
도로 위를 방황하는 처량한 신세
이천의 조용한 송어횟집에서
얼었던 가슴 녹여가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지만
비리가 판을 치는 이 풍진세상
그들의 사명감에 고개 숙이며
오르지 못한 중왕산을
가슴속에 묻어둔다.
경방기간에 산불 감시원의 단속에 산을 오르지 못함
산행 수필 - 향일암(금오산 323m) 신년맞이
소 재 지 : 전라남도 여천군 돌산읍
쉴 사이 없이 달려온 시간들이 또 한해를 떠나보내고 지는 해가 아쉬워 동동거리며 밝아오는 새 아침에 희망을 안고 밤새도록 달려가는 남쪽으로의 여행 ....... 불편한 자리에 새우잠을 자고 있는 아내의 행복한 표정 -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동대문 시장의 화려한 불빛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심을 벗어나니 함박눈이 쏟아지는 도로에는 정체현상으로 태백산으로, 설악산으로, 정동진으로, 스키장으로 저마다 미래의 희망을 간직하고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전 부근을 지나면서 눈은 비로 변하고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으니 해돋이는 고사하고 산에도 오르지 못할까봐 조바심으로 밤잠을 설치는데 지리산 부근을 지나면서 비도 그치고 우리의 마음도 한결 밝아진다.
동지섣달의 긴긴밤이라 산행 들머리인 율림치에 도착을 했지만( 6시 30분) 동이 트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아내를 앞세우고 임오년의 새 아침에 우리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작은 소망을 가슴에 안고 금오산을 향해 오르고 있다.
간간이 구름사이로 달빛도 얼굴을 내밀고 일출을 볼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지난해 태백산에서의 일출 사진을 재현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지만 지나친 욕심일까?
큰 어려움 없이 정상에는 올랐지만 아직도 어두운 그림자는 우리의 주위에서 맴돌고 출출한 시장 끼에는 간식이 제일 인지라 ........
그동안 얼굴 없는 요리사로 산 친구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더니 푸짐하게 장만한 먹거리들, 아내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그 모습에 환호성이 일고 즐거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둠도 파도에 밀려 서서히 꼬리를 감추고 다도해의 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수반위에 빗어 놓은 수석과도 같이 산수화를 그려내고 그 사이를 가로 지르는 유람선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한해를 여는 전령사로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는다.
비록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지는 못했지만 구름사이로 태양이 밝은 미소를 지을 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합창을 하고 그 함성은 멀리멀리 한려수도의 섬들 사이를 파고들며 울려 퍼진다.
사량도 지리산을 연상하듯 바다와 암릉이 어우러진 산행의 묘미를 만끽하며 시원하게 불어오는 해풍에 구름도 걷히고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한 몸이 되어 청정해역의 싱그러움을 듬뿍 안겨주니 가벼운 마음에 어깨춤이 절로난다.
불자들의 성지 순례로 전국의3대 기도 처 ꡒ향 일암 ꡓ
깍 아 지른 벼랑위에 자리를 잡은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절경은 가히 천하제일의 경관을 자랑하며 불로장생의 돌 거북들이 순례자들의 정성으로 가지런히 놓여있고 한 겨울임에도 탐스럽게 피어있는 동백꽃과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대나무 숲은 향일암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서울에서의 불안했던 마음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멀고도 먼 남쪽의 끝자락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끽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오년의 설계도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