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 가는길에

구왕봉 너머 대간길의 마루금
희양산 에서는 무슨 일이?
희양산(999m), 이만봉(990m), 곰틀봉(960m)

산행일시:
2006년 9월 23일 9시 40분 - 16 산행시간 6시간 20분 (알바 30분 포함)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경북 문경시 날 씨: 쾌 청 참여인원: 45명 금수 산악회
산행거리 : 약 13.5km 요 금; 25,000원

은티 마을 - 09시 40분 벼락바위 - 10시 10분 성터 갈림길 - 10시 50분
희 양산 - 11시 10분 (휴식시간 15분) 성터 갈림길 되돌아옴 - 11시 35분
배넘이 평전 ( 시루봉 갈림길) 12시 15분 이 만 봉 - 12시 55분 (식사 15분)
곰 틀 봉 - 13시 22분 사다리재 - 13시 35분 뇌정산 갈림길 - 14시 10분
백화산 밑 상내리 갈림길 - 14시 40분 (10분간 알바) 되돌아온 평전치 - 15시 10분
분 지리 - 16시

오랜 숙원 풀어보는 희 양산 종주길
결연한 의지로 신발 끈을 졸라매고 은 티 마을 찾아가니

동구 밖 노송아래 마을 유래비와 장승이 외지인을 반기는데
마을의 터가 여자를 상징하는 오줌줄기를 닮아
큰비가 오면 물난리가 나기 때문에

그 기를 죽이기 위해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 나무아래
남근석을 세우고 치성 줄까지 매어 놓았지만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에 요즈음
고개 숙인 남자 들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 짝이 없다.

당산나무
아래 남근석
마을길을 돌아서면 묘지 1기와 과수원길
한 여름의 뙤약볕과 극심한 호우 속에서도
탐스럽게 영글어가는 사과가
농민들의 주름살을 펴 주는 것 같아
흐뭇한 마음으로 산굽이를 돌아가면
벼락바위 버티고 있는 삼거리길이 나타난다.




풍문에 들리는 희 양산 출입문의 금족령이 풀렸다는 사실을
당산 나무 아래 주모에게서 재차 확인을 하고서도
2일전 ♡♡산악회에서 망신을 당하고
행선지를 바꾸었다는 소식으로 설왕설래 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좌측의 성터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저승사자보다도
냉혈한 스님들의 횡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 삼으며
호연지기 기르려는 고운심성에 먹칠을 하고
마음을 비우려고 산에 왔다가 스트레스에 똥바가지 뒤집어쓰는
망신을 당하기 싫어 더러운 똥을 피해 돌아가며
이래저래 희 양산의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잘
다듬어진 성터로 가는길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한 듯 잘 다듬어진 등산로
가파른 계곡 길에는 우리들의 심정을 알고나 있는지
풀 벌래도 산새들도 숨을 죽이고
한낮의 열기 속에 등줄기에서 흥건하게 땀이 흘러내린다.

가파른
오솔길
지루하던 계곡 길도 허물어진 성터에 올라서며
시원한 바람 속에 한 고비를 넘긴다.
삼거리 갈림길인 이곳에서 좌측으로는 이화령,
우측으로는 희 양산 가 는 길.
정상을 향해 가파른 비알 길을 기어오른다.

허물어진
성터 갈림길

시원하게
터지는 너럭바위 조 망 터
천야만야 벼랑위에 오금이 저리지만 노송의 운치와 천수를 누리는 고사목 산객들의 순진무구한 모습과 천년사찰 봉암사가 한 폭의 그림으로 피어난다.


건너편의
장성봉과 대야산
문경새재와
속리산의 중간 지점에 솟아오른 영험한 산으로
봉황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에 반하여
신라 헌강왕 5년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하여
당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친 희양선문은 신라의 구산선문중의 하나로 현재는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곳이다.

마루금의
속리산의 연봉들
병 주고 약 준다는 식으로 알량한 자비심을 베풀어 부 처님 오신 날만
대간 길을 개방하고 사찰의 출입을 허용한다고 하니
그 은전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건지?


오르고 내리고 암 능길 돌고 돌아
민 대머리 희 양산 정수리에 올라서니 실소를 금하는 초라한 표 지석
멀고먼 대간 길에 유명세를 많이 타면서도 초라한 몰골은
스님들의 훼방으로 부셨다 쌓기를 반복한다니
이래저래 희 양산은 구설수의 대상이다.


기차바위 올라서면 일망무제
청명한 가을 하늘 옥빛으로 물들고
지나온 대 간길 장성봉과 악 휘 봉이 정삼각형 이루고
건너편의 이 만 봉까지 W의 꼭 지점의 희 양산
물길피해 달려가는 대간 길의 주능선이
이보다 굴곡심한 곳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신선되어
머물고 싶은 마음 접어두고 대간 길을 달려갈 때
은 티 재에서 올라오는 벼랑길이 허명이 아니고
스님들 덕분에 위험한 벼랑길 살짝 피해
성터로 되돌아오니 우리 일행들이 떠난 자리
공허 로 운 바람만 불고 있다.

은티재에서
올라오는 벼랑길
후미에서 지체된 시간을 벌기위해 속도를 내 보지만
앞을 가로막는 암 봉이 거꾸로 솟아오르고
무거운 발걸음에 거친 숨소리만 메아리친다.

되돌아온
성터 - 아무도 없네?
로프가 매여 있는 암 능 길을 내려서면 널찍한 안부에 배너미 평전
시루봉 갈림길이 10분 거리라지만 앞서간 이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이만봉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이만봉
오름길의 야생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막걸리 한 사발을 곁 드리니 세상에 무엇이 더 부러우랴.

좌측의
뇌정산 갈림길 - 우측의 뇌정산
백화산과 뇌정산 시원스레 뻗어나간 대간 길 따라
건너편으로 이화령 오르는 옛 길이 산굽이를 감아 돌고
나는 새도 쉬어 넘는 조령산 너머로
마루 금에는 월악산의 영봉과
조령관문의 부 봉, 주흘산이 기치창검을 곧추 세운다.

가을을
재촉하는 야생화
곰틀봉을 오르는 암능길에 편무암의 파편들이 비수가 되어
달아 오른 발바닥을 파고드는데 정수리에는 노송 한 그루
봉암사 주지들의 횡포에 하늘을 향하여 시위라도 하는 듯
모든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그 옛날 이곳에 곰들이 살았대서 곰틀봉이라 부른다지만
소나무 둥치에 비닐 코팅이 감겨있는 것이 전부로
조망만은 일품이어서 남녁으로 첩첩산중에도
원북리와 죽문리의 황금 들녘 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뇌정산
아래 원북리
건너다보이는 뇌정산 갈림길만 오르면 오늘의 고된 여정도
끝이라는 생각에 벼랑길을 내려서니 사다리재가 반겨준다.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단풍


충북 괴산의 분지리와 경상도 문경시 원북리를 오가는 길목으로
그 옛날 성시를 이루었겠지만 지금은 약초꾼들이나
대간을 넘나드는 산객들의 하산 로로
분지리 쪽으로만 이정표가 걸려있다

이제 마지막 고 빗길인 뇌정산 갈림길을 오르며 안간힘을 쏟는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앞장서 걸어가는 고 영복 선배님 67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 먼 길을 쉬는 법도 없이 짝을 맞춘 스틱을 벗을 삼아
무아지경 속에 안정된 속도를 조절하며 거뜬하게 비알 길 을 올라선 다 .

뇌정산
갈림길을 오르는 융단같은 지지미털
백화산과 뇌정산의 갈림길
이제 오늘의 여정에 힘든 구간도 끝이 난 듯
하산 지점인 상내리가 발치로 내려다보이고
널찍한 암반에 자리를 잡고 힘들여 걸머지고 온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며
산 꾼들의 격의 없는 대화 속에 우정을 싹 티 우고
하산 지점을 찾아 백화산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뇌정산
갈림길


상내리로
내려가는 백화산 밑의 하산로
대간 길 따라 올망졸망 무명봉을 넘으며 30여분 만에
백화산 턱밑에서 오른쪽으로 갈림길이 나타나고
진입로를 제대로 찾았다는 안도감에 리본까지 달아매고
여유를 부리며 앞서간 선두팀의 발자국 따라 10여분 간 진행을 하는데
앞서간 사람들이 되돌아오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길을
막은 쟝글 지대
처음에는 제법 뚜렷하던 등산로가 흔적조차 없어지고
쟝글 속에 포로가 되어 탈출로를 찾지 못하고 알바 아닌 알바를 하게 되었으니
아무리 개념도에 등산로 표시가 있다 하더라도
이삼년만 다니지 않으면 길이 없어지는 현실을 감안 하지 않고
탁상공론으로 산행계획을 세웠으니 이런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화령
오르는 구비길 뒷편의 조령산
되돌아 온 안부에서 박대장과 무전으로 현지 사정을 전하고
부득 불 하산 지점을 반대편인 분지리로 변경을 하고 말았다.

분지리로
내려오는 등산로
지금까지 후미인줄 알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줄기차게 따라오고 보니
40여명이 넘는 일행 중에 선두에는 십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
되짚어 보니 배너미 평전에서 모두들 시루봉을 오르는 사이에
이만봉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으니 못내 아쉬움만 남는다.

평전치
아래 이정표
우리 일행은 풀 죽은 모습으로 발길을 되돌리고 평천치에 도착하며
분지리로 티워진 하산 길을 따라 기진한 체력을 추 수리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화전민들의 터전이었던 돌담길
지금은 장 글 속에 형체만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밭둑길을 따라 산 비알을 안고 돌며 한없이 갈 짓 자로 돌고 돌아
50여분 만에 분지리에 도착을 하니 그 옛날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이만 이나 될 만큼 하늘아래 첫 동네로 공기 좋고 인심 좋은 산골마을 이지만



마을
입구의 밤나무
도회지로 나간 자식 따라 고향을 등진 이들로 이끼 낀 돌담장에 잡초만이 무성한 폐가가 을씨년스럽고 8가호의 집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구 밖의 밤나무에는 바람결에 쏟아지는 알밤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는
천하제일의 명당자리가 아닌가 싶다.


산골마을에서만
볼수있는 메밀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