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중국

역사의 현장 서안 관광

김완묵 2006. 7. 16. 08:54
 

중국으로 향하는 풍운아의 발걸음

일 시 : 2005년 4월 23일 -28일 까지 5박 6일

 


제1부  역사의 현장  서안 관광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길러낼 때 무슨 사심이 있으랴 만 바람이 불면 꺼질 새라 애지중지 보듬어 안고 튼실하게 자라나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시름 덜어내며 철부지로만 보이던 아이들이 (명숙, 미숙, 재형)어느덧 성인이 되어 부모 생각하는 정성으로 효도관광을 마련하니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보다도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길에 나선다.

 

 


들뜬 마음으로 이른 새벽에 일어나 리무진버스에 몸을 싣고 행주대교를 건너 공항으로 달려가는 길목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더욱 눈이 부시고 예정시간보다 빠른 6시 25분 공항에 도착하여 대합실에 들어서니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8시가 가까워오며 하나투어의 안내 테이불에는 삼삼오오 짝을지어 모여드는 낮선 얼굴들,

하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한 배를 탄다는 반가움에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38명의 많은 인원을 인솔할 김 해순 가이드는 상냥한 미소로 우리의 설레이는 마음을 달래준다.

 

 


10시 45분 예정대로 인천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항공 OZ 319기는 강화도의 마니산의 상공을 선회하며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서해안을 따라 고도를 높이고 목포를 지나며 서해바다를 건너 내륙지방으로 향하는데 목적지인 서안이 가까워오며 광활한 대지위에 푸른 초원이 끝없이 이어지고 운무에 휩쌓인 서안의 시가지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울보다 한 시간이 늦은 서안은 2시간 45분간을 날고도 12시 30분으로 한 시간의 덤을 얻고 보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 좋고 간단한 입국 수속으로 마중 나온 정 성철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내의 식당에서 하는 부실한 식사는 조금 전 기내에서 먹은 포만감으로 더욱 실망감이 앞선다.

 

 

 


중국의 지도가 장 닭 모양으로 서안은 그 중심부인 배에 해당하는 곳인데 위도 상으로는 제주도와 비슷하고 섬서성의 성도로 면적이 9,886㎢이고 650만의 인구에 중국에서 8번째로 큰 도시로 내륙의 심장부에 위치한 지리적인 여건으로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하는 중심지로, 주나라부터 당나라까지 5대왕조의 도읍지로 천년의 영화를 누렸던 유서 깊은 도시로 경주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도시전체가 유물 전시장으로 땅속에 뭍인 문화재를 보호하기위해 당국의 감시가 철저하고 우리가 지나고 있는 서안대로는 당나라 때 만들어진 도로인데 천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하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지만 거리에 넘쳐나는 자동차와 자전거 행렬, 무단횡단으로 아수라장을 이루는데 머리를 맞대고 시위를 하면서도 경적소리 하나 없이 무질서속에 질서를 찾아가는 그들의 행동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머니의 강 황하의 지류인 위수가 도심지를 흐르고 있지만 강우량이 500mm에 불과해 논농사는 거의 없고  보리, 밀, 옥수수, 면화 등 밭농사에 의존하고 있는데 타클라마칸 사막과 건조한 황하의 유역에서 일어나는 황사는 도시 전체를 뒤덮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수 천 년 간 중국의 중심지로 발전될 수 있었다니 의아심이 든다.

 

 

 


우리가 지나는 거리 곳곳에는 천년 고도답게 문화재들이 즐비하게 나타나며 고색창연하던 유적들도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퇴색이 되고 우리의 6-70년대의 건축수준으로 20여 년간의 차이를 보이며 변두리 신시가지에는 새로운 물결속에 건축붐이 한창으로 고층건물들이 하늘높이 치 솟고 있다.

 

 


제일먼저 찾아간 곳은 도심지에 위치한 ❝서안성벽❞ 당나라의 장안성을 기초로 명나라 17-21년(1374-1378년)에 건설되어 600여년의 역사속에 중국에서 현존하는 성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이 되고 있는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도읍지를 북경으로 정하고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을 서쪽에 있는 편안한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안으로 개칭을 하고 둘레 14km의 성을 쌓아 도시전체를 방비하게 되는데 길이는 만리장성에 비할바가 못 되지만 동서남북으로 성문을 만들어 누각을 세우고 북문에 지휘부를 두었다.

 

 

 

 


참고로 성의 규모를 살펴보면 동서로 3,5km 남북으로 3km의 장방형으로 높이가 12m에 밑 부분의 넓이는18m, 성벽위의 넓이가 14m로 마차 2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규모로 만리장성(7m)보다 배가 넓으며 성벽위에는 활을 쏠 수 있는 적대가 98곳이 있고 성 둘레에 해자를 파서 물이 항상 흐르게 하였는데 해자의 폭이 20m, 깊이가 7m의 규모로 보아 처들어오는 적을 막아내기에 완벽함을 짐작 할 수 있겠다.

 

 


일제의 침략과 6,25사변으로 많은 문화재와 성벽들이 파손되어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대로변에 덩그러니 놓여 을씨년스러운데 반해 서안성벽이 6백여 년간 원형이 그대로 보존이되고 자동차길도 우회하여 통과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으니 부러움 속에 우리도 옛 조상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유물들을 보존하고 발굴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 안 탑❞ 현장법사(삼장법사)가 불교의 성지인 천축국에 들어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불경을 가지고와 보존하고 있다는 이곳은 멀리서도 황금색의 7층 석탑이 우뚝한데 60m의 탑이 천 사백년간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이곳에서 그 당시의 뛰어난 건축술로 기초를 할 때 힘을 분산하기위해 계란형으로 하였다는 설명과 함께 불심을 향한 정성이 기적을 낳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현장법사가 29세에 천축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예나 지금이나 국경을 넘는 일은 당국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 현장법사도 허락을 받지 못하고 홀홀 단신으로 왕복 5만km나 되는 머나먼 길을 떠돌며 갖은 고초를 겪게 되는데 그 과정에 서유기라는 불세출의 명작이 탄생되고 17년간 천 축국을 돌며 불경을 공부하고 많은 보물들을 가지고 당나라로 들어오는데 나갈 때는 몰래 갔지만 돌아올 때는 당의 고종이 친히 마중을 나가 환대를 하고 수나라 때의 무수사를 대자은사로 명명하고 1,890칸의 대사찰로 증축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629년- 641년까지 대당 서역기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대안탑은 7층의 석탑으로 각층마다 사방으로 창문을 만들고 그 뒤로 대웅보전에는 삼신불을 모시고 회랑을 돌아 아미타불전에 들어서면 삼장법사가 천축국에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 귀국하는 장면들이 목판에 음각이 되어 그 당시 생활상을 알기 쉽게 보여주는데 요 근래 만든 것으로 그 넓은 법당안의 삼면을 차지하고 있으니 신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다음으로 우리의 발길은 이곳의 특산품인 찻집을 거쳐 저녁에는 서 태후가 즐겨 먹었다는 ❝교자연의 특식❞ 만두를 기대하였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18가지의 갖가지 만두들이 선을 보이지만 호기심으로 맛을 보며 마지막으로 올라오는 새알보다도 작은 진주만두로 대미를 장식한다.

 

 

 

 


 

 

별 4개의 ❝업 금산반점❞808호실에 여장을 풀고 첫날밤을 보내게 되는데 예정에도 없는 일정이 하나 더 남아있으니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극화한 무용인데 처음으로 시작되는 옵션으로 일인당 30불씩 지불하고 당락궁에 도착하니 화려한 무대와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극장으로 9시 30분부터 시작된 쇼는 뮤지컬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영어로 극 중간 중간 해설을 하지만 눈요기로 만족 해야만 했다.

 

 


중국이 자랑하는 4대 가무극(경극, 소림사의 무술, 서커스, 양귀비 극)은 화려한 무대와 일사불란한 몸동작으로 시선을 압도하고 높은 음색으로 귀청을 파고드는데 같은 동양권의 문화 속에서 도 우리의 부드러운 음률과 자연스러운 몸동작이 훨씬 마음을 사로잡으니 우리 것이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