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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히 빛나던 그 계절 - 한국수필가 연대 제24집

김완묵 2020. 4. 22. 13:19

일  시: 2020년 4월 2일

출판사: 한강 출판사.


                                                                               내변산 봉래구곡

태풍 차바의 위력 앞에 쫒기다 시피 서울로 돌아온 이후, 등산하기 좋은 날짜를 가려 찾아가는 날이 하필이면 안개 속으로 빠지고 만다. 주시거리가 백m에도 미치지 못하는 안개 속에서 233km의 먼 거리를 향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으니,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정상적이라면 고속버스로 2시간 50분 거리여서, 940분에 도착하게 되어있다. 30분이 지체된 1010분에 도착하여 시내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니 사자동가는 버스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운 좋게도 합승하여 40여분만인 11시에 내변산탐방지원센터 광장에 도착한다.

 

내변산 등산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계곡보다는 날 등을 넘다보니 그 유명한 직소폭포를 보지 못하여, 내변산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하여 직소폭포를 둘러보고 내소사로 하산할 계획이다. 거리가 6km에 불과하지만, 주변에 펼쳐지는 경치가 아름답고 관음봉 오르는 길목이 험난하여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출발지점이 봉래구곡과 연계되어 기대가 자못 크다. 망포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내변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따라 기암절벽을 파고드는 계류가, 중계교 아래서 백천과 합류하여 부안 댐을 빚어놓고, 묵정삼거리에서 서해로 빠지는 20km   물줄기를 봉래9곡이라 한다

 

내변산 탐방로를 지나 시원한 그늘 속을 올라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명소가 원불교 제법성지다. 전남 영광에서 원불교를 개창한 소태산 대종사께서 1919년 이곳 봉래산으로 들어와 새 회상의 교법을 반포하고 석두암을 지었다. 봉래정사에서는 초기교서를 초안하고 창립의 인연들을 만났으며, 1924년 익산총부로 거처를 옮기고, 일원대도비(一圓大道碑)를 건립하였다

 

천왕봉과 안장바위사이의 너른 분지에 터를 잡은 실상사는, 신라 신문왕 9(689)에 초의선사가 세운 내변산에 있는 4대사찰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에 제작한 불상과 대장경을 소장하였으나, 6.25때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일부만 복원된 상태이다.

 

봉래교를 건너며 본격적인 蓬萊九曲이 시작된다. 갈수기인데도 물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널찍한 암반위에 새겨진 蓬萊九曲乙丑年 閏四月에 음각된 것이고, 小金剛雲雄 高炳斗의 글씨이다. 참고로 제1 대소2 직소폭포3 분옥담4 선녀탕5 봉래곡, 6곡 영지, 7곡 금강소, 8곡 백천9 양지까지 아홉 곡의 명승지를 빚어 놓는다.

 

생뚱맞기는 하지만 미선나무다리를 건넌다. 미선나무 군락지는 변산반도에 속하는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와 변산면 중계리 일대에 자생하여천연기념물 370호로 지정된 물푸레과의 수종으로, 국립공원특별보호구로 보호하고 있다. 곧이어 남여치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자연보호 헌장탑을 지난다.

 

계곡이 깊어지며 심산구곡이 펼쳐진다. 의상봉(椅上峰, 509m)을 필두로 쌍선봉(雙仙峰, 486m), 신선봉(491m), 관음봉(424m) 등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들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협곡을 가로막은 수중보가 내변산의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빗어낸다. 깎아지른 절벽사이로 단풍들이 노랗게 물들고, 잔잔한 수면위로 내려앉는 관음봉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선녀탕과 분옥담을 지나 직소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계곡으로 울려 퍼지는 굉음소리와 함께 높이 22.5m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직소폭포는 변산 8경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명소이다. 나무데크로 만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직소폭포는 천하절경이다. 하지만 거리가 멀다는 것이 한 가지 흠이다.

 

폭포로 접근해 보려고 하지만, 등산로는 폭포 상단으로 향하고, 울창한 나무숲에 가로막혀 정면에서 바라볼 수가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가파른 너덜바위를 타고 계곡으로 내려선다. 실상용추로 부르는 폭포 아래 둥근 용소는 검푸른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지라 간담이 서늘하다. “예로부터 직소폭포와 중계계곡의 선경을 보지 않고서는 변산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그만큼 내변산이 자랑하는 명소이기 때문이다.

 

속이 후련하도록 폭포의 위용에 취해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다. 가파른 비알 길을 거슬러 폭포 상단에 올라서면, 천지를 진동하던 굉음소리도 자취를 감추고, 울창한 수림 속에 평평한 분지가 펼쳐진다. 폭포 상류가 다 그러하듯이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가 정겹게만 들린다. 폭포의 물줄기가 떨어지며 생긴 웅덩이를 소()라하고, 오랜 세월 바위가 패여 생긴 웅덩이를 탕(설악산 십이선녀탕)이라 부른다.

 

물길이 시작되는 발원지는 갈수기에도 마르지 않는 최상류에 있는 샘을 일컫는다. 또한 계곡물이 모여 개천이 되고, 개천이 모여 강을 이룬다. 7년 대한(大旱)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곳을 강이라 하고, 강이 모여 대하를 이루는데, 동양에서는 중국의 황하가 유일하다.

 

재백이 다리를 건너며 완만하던 분지도 서서히 경사를 이루고, 재백이 고개에서 원암통제소와 관음봉삼거리(내소사)로 갈라진다. 이제부터 관음봉 삼거리까지 1km 구간에 걸쳐 층층계단을 오르게 된다. 내변산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을 기반암으로 하고 있어서 낮은 산이면서도 옹골찬 암릉미를 자랑하고 있다.

 

다리가 뻐근하도록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부에 올라서면, 관음봉이 머리위에서 손짓하고, 남쪽으로 곰소만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노력의 대가로 얻은 보람은 자아실현(自我實現)의 긍지(矜持)로 몸속의 엔돌피가 살아나는 희열(喜悅)을 맛보게 된다. 자동차나 케불카를 타고 올라왔다면, 짜릿한 성취감(成就感)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망이 툭 트이는 암반위에 자리를 잡고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펼쳐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소박한 성찬이지만, 천하절경이 펼쳐지는 명소를 바라보며 걸치는 술 한 잔에도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는 젊음이 샘솟는다.

 

관음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15년 전 새봉과 관음봉을 경유하여 내소사로 내려간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그동안 많은 시설물을 설치하여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안개 걷힌 하늘은 맑게 개이고, 천년사찰 내소사가 내려다보이는 암릉에 올라서면, 곰소만을 중심으로 내변산국립공원이 한 폭의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국립공원 문주를 벗어나면 그 유명한 내소사 전나무 숲이 시작된다. 수령이 150년으로 추정되는 수백그루의 전나무가 사열 받는 의장대처럼 빼곡히 들어찬 모습은 세파에 찌든 사람들에게 달콤한 솜사탕을 물려주는 선경(仙境)의 관문(關門)이다.

 

천년고목(千年古木) 당산나무를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관음봉 아래 곰소만의 푸른바다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내소사, 해질 무렵 어둠이 내려앉으면, 고즈넉한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에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곳,

 

소사모종(蘇寺暮鐘)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내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전라북도 기념물 78호로 지정된 내소사는 633(백제무왕34) 혜구(惠丘) 창건하여 소래사라 하였다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연유는 중국의 소정방(蘇定方) 석포리에 상륙한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 시주하였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천년사찰(千年寺刹),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단청이 모두 벗겨지고 백골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바라보며 경건한 마음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조선 인조 11(1633) 청민대사가 절을 고쳐지은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대웅보전은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건축물로 유명하며, 앞쪽 문살에 새겨진 연꽃무늬, 국화꽃무늬, 모란꽃무늬 등, 수 백 개에 이르는 꽃들이 창살위에 피어나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장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진 후불벽화가 있다.

 

경내에는 보물 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25호로 지정된 요사채설선당(說禪堂), 보종각(寶鐘閣), 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내소사 관람을 마치고 산문을 나선시간이 오후 2. 다음 행선지인 개암사를 찾아가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망설이는 중에, 시내버스가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기사에게 물어보니 줄포를 경유하여 개암사 입구를 지난다고 한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다음번에 답사할 곰소만과 줄포의 지형을 관찰하며 봉은삼거리까지 편하게 이동한다.

 

개암사는 버스정류장에서 2.5km나 떨어진 우금산성아래 있는 사찰이다. 30여 분간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간 뒤에야 능가산개암사 산문에 도착한다.개암사지에 의하면 개암사 자리는 변한 시절 왕궁터 였다고 한다. 기원전 282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고, 왕궁의 전각을 지어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 하였다.

 

백제무왕 35(634)에 묘련대사가 궁전에 절을 지으며 동쪽의 궁전을 묘암사, 서쪽의 궁전을 개암사로 부른 것이 절의 기원이 되었다. 통일신라 문무왕 16(676)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수하고, 고려 충숙왕 1(1313)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중창하여 건물이 30여 채에 이르는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개암사 대웅보전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용마루위로 불끈 솟은 암봉이 그 유명한 울금바위이다. 바위를 멀리서 바라보면 두 쌍의 바위가 문을 열고 있는 형상이라절의 이름을 개암사 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울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지어 원효방으로 불렀고, 조선후기까지 시인묵객들이 단골메뉴로 인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울금바위는 백제부흥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복신굴이다. 개암사에서 바라보았을 때 복신굴은 왼쪽 바위아래 있고, 원효방은 오른쪽 바위아래 있다. 봉우리 뒤편으로 돌아가면 조그만 공터와 협소한 동굴이 원효방이다.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백제 유민들의 슬픔을 달랬다고 한다.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개암사 저수지까지 능선을 따라 산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남쪽으로 563m, 서쪽으로 675m, 동쪽과 북쪽을 합하여 총 3960m 길이에 달한다. 남쪽으로 통하는 계곡 입구에 남문을 설치하고,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적절히 섞어가며 양쪽 능선을 따라 동서로 연결하였다.

의자왕 20(660)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자 복신장군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백성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 곳은 복신 장군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며 백제 부흥을 줄기차게 벌였던 백제 최후의 보루이다.

 

부안지방에는 백제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백산성이 또 있다.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성터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409호로 지정되었다해발 47m로 낮은 언덕에 불과한 백산의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길이 120m, 너비 50-60m 타원형으로 쌓은 토축산성이다

 

서울 가는 버스시간이 촉박하여 울금바위를 오르지 못하고, 봉은삼거리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개암사에 다녀오는 택시가 크락션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멈추어 선다. 부안읍으로 가는 길이면 태워주겠다고 한다. 생각지도 않은 선심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예정보다 빠른 1610분에 출발하는 버스에 오를 수가 있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부안, 인심 좋은 부안을 가슴깊이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