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피어난 이야기: 대표수필선 제21집
일 시: 2017년 6월 23일
전남 12길(평온길)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8월 30일 바람길을 다녀간 뒤로, 7개월 만에 삼남 길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감(自信感) 때문이다. 도로 원표에 의하면 나주시청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346km다.
천리 길을 찾아가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지만, 중간에서 허비하는 시간(時間)과, 경비(經費)가 만만치를 않아 최소한 2박3일의 일정이 필요한데, 그때마다 사정(事情)이 생기고, 날씨가 변수로 작용하면서 뒤로 미루다 보니, 이제야 삼남길에 오를 수가 있었다.
용산역에서 7시15분발 무궁화호에 올라 송정역에 도착한 시각이 11시27분이다. 19번 버스로 환승하여 송산유원지에 도착하니 12시 정각. 전남 12구간 평온길이 21km 거리다. 춘분(春分)이 지났으니 시간상으로도 충분하고, 날씨까지도 화창하여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따로 없다.
3일간 70여 km를 완주하겠다는 포부로, 마음을 가다듬고 영암 월출산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딛는다. 22번 국도를 토끼 굴로 빠져 나와 운평마을로 들어선다.
1600년대 나주정씨(羅州丁氏) 정강록(丁江綠)이 이곳에 안주하며 생겨난 운평마을은 남쪽의 복룡산(伏龍山)과 마을 앞을 흐르는 황룡강(黃龍江), 멀리 우뚝 솟은 용천산(龍泉山)을 합하여 삼룡(三龍)이 구름을 타고 놀았다 하여, 구름 운(雲)자와 평평할 평(坪)자를 합하여 운평(雲坪)마을로 부르는데, 85호가 마을에 터전을 잡고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다.
고샅길을 빠져나와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운평저수지를 만난다. 따사로운 봄볕아래 좌대를 펼치는 강태공들의 모습이 너무도 평화롭게 보인다. 뒤로 보이는 복룡산(伏龍山)은 정상에 봉화대를 겸한 성터가 있었는데, 왕건에게 쫓기던 견훤이 함적굴아래서 은신하다가 나주로 갔다는 전설과 오자치 장군이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다가 자신이 타던 용마의 머리를 베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산이다.
양지바른 산자락에 산수유와 매화가 고운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데, 굳게 잠긴 사립문에 인기척은 간곳없고, 앙살 맞은 견공들이 길길이 날뛴다. 아서라! 그만 두어라. 내 갈 곳이 따로 있으니 너에게는 미련이 없단다.
카셋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에 여유자적(餘裕自適)하며 갈대밭이 무성한 평동저수지를 돌아선다. 광주시에서 조성한 “빗고을 산들길”과도 작별한 뒤, 무안광주고속도로와 서광산 요금소를 통과하여 농촌 들녘을 지난다.
남녘에서 불어오는 훈풍을 타고, 싱그럽게 펼쳐지는 보리밭이 어느새 초록색 융단으로 갈아입고, 마을 주민들이 도라지 수확이 한창이다. 이제는 모든 작업이 기계의 힘을 빌린다. 십 여 년 전만해도 도라지나 더덕 캐는 데는 쇠 시랑이나 호구가 전부였는데, 경운기로 골을 깊게 파고 뒤에서 주워 담기만 하면 그만이니, 농사일에도 편한 세상이 되었다.
도라지는 우리 민요에도 구전되는 신토불이 약초다. 도라지 뿌리에는 풍부한 섬유질과 칼슘, 철분을 비롯하여 단백질, 비타민과 사포닌 등이 들어있는 우수한 알칼리성 식품이다. 길경은 폐를 맑게 하고, 뱃속의 찬 기운을 풀어주어 기침을 멈추고, 기관지 천식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좋다고 한다.
에콜리안 광주CC를 지나는 삼거리에서 나주시 감정마을로 들어선다. 평화롭게 보이는 농촌마을에서 가슴 아픈 현장을 목격한다. 지난 가을 김장용으로 심었던 무밭이 한해 겨울을 넘기고도 밭고랑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니, 바라보는 내 자신도 가슴이 먹먹하다.
농산물이란 공산품처럼 계획생산을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날씨의 변수에 따라 풍흉을 점칠 수가 없어서, 대단위로 경작하는 농가에서는 계약재배를 하게 된다. 풍년이 들어 생산량이 늘어나면 값이 폭락하게 되고 중간상인들이 수확을 포기하게 되면서, 애물단지로 변하여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것이다.
벼농사로 타산을 맞추기 어려운 나주지방에서 대체 작물로 선정한 것이 미나리 생산이다. 너른 들녘에는 비닐하우스가 장관을 이룬다. 연료비가 많이 드는 겨울철에도 따뜻한 날씨 탓에 연료비 걱정도 덜고, 사시사철 수확을 하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효자종목이다.
우리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미나리는 모든 음식의 재료로 활용되는데, 무침과 전골종류, 복어요리를 할 때에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몸속의 중금속을 해독하여 체외로 배출해 주기 때문에 “천연 해독제”로 부르는 미나리는 갈증을 풀어주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
호남고속철도 밑을 통과하여 감정천 둑방길을 가는 중에 지금은 폐세 된 노안역을 지난다. 잠시 후 장성천과 합류하여 구석현교에 도착하면, 승천보에서 내려오는 영산강 자전거도로와 만난다. 자전거도로는 이명박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4대강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담양댐에서 시작하여 목포 하구언까지 133km에 걸쳐 영산강치수사업을 완공하면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삼년 전(20113년 3월9일) 국토대행진을 하면서, 영산강을 찾아 이곳 구석현교를 지나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무모한 도전으로 생각했던 국토대행진, 1.300km의 멀고 먼 여정이 “물길따라 삼천리” 라는 수필집으로 세상에 선을 보일 때, 쏟아지는 찬사는 인간승리의 전주곡이었다.
그 뒤로 나의 야심찬 행진은 계속되어 동해안을 답사하는 해파랑길 770km와 휴전선을 걷는 평화누리길 450km, 영남길 경기도 편 140km, 진행 중인 서해안 도보기행 500km에 삼남길 350km를 완주했으니, 내 자신이 생각해도 대단한 성과를 남긴 셈이다.
영산강을 따라 나주대교가 있는 전망대 앞에 도착한다. 오늘의 일정이 나주시에서 일박을 하고 유서 깊은 나주읍성을 돌아보는 계획이라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영신장에 여장을 푼다.
나주읍성 순례
영신장에 여장을 풀고 보니 해는 아직 중천에 떠있고, 여관방에서 빈둥거리기도 어중간하여 거리로 나왔다. 먼저 찾아간 곳이 동쪽에 있는 東漸門(동점문)이다. 고려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읍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을 세우고, 둘레가 약 3.680m에 성벽의 높이 2.7m, 성안의 넓이가 974.390㎡로 우리나라 읍성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위해 축조된 성이어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2층 누각에 옹성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남쪽에 있는 南顧門(남고문)이다. 서울의 남대문처럼 남고문교차로 가운데 버티고 있어서, 접근이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4대문(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과 성벽을 모두 철거하여 기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93년 남고문을 시작으로 2006년에 동쪽의 동점문을, 2011년에는 영금문의 현판이 걸려있는 서성문을 복원하였지만, 아직까지 성벽과 북쪽의 북망문은 복원이 안 된 상태이다.
영산강의 터줏대감인 나주(羅州)는 백제 때 빌라군, 통일신라에서 금성군으로, 903년 나주(羅州)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1896년 전남도청(全南道廳)이 광주(光州)로 이전할 때까지 천년(千年)동안 남도(南道)의 중심지였다.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을 만큼, 나주(羅州)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도시다.
나주객사의 정문인 망화루(望華樓)를 찾았다.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건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 한다. 안 마당으로 들어서면 중삼문(重三門)이 있고,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금성관(錦城館)이 자리 잡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금성관은 고려 초기부터 외국 사신이 방문하여 객사에서 묵으면서 연회도 갖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궁궐을 향하여 망궐례를 올리던 객관이다. 조선 성종 6년(1.475)에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이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된 것을 1976년에 시작하여 1년 동안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금성관을 중심으로 동쪽의 동익헌(碧梧軒)은 정삼품이상의 관리가 묵던 객사이고, 서쪽의 서익헌(西梧軒)은 당하관(정3품 이하)이 묵던 객사이다. 금성관아에는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650년 된 은행나무가 오늘도 왕성하게 천수를 누리고 있다.
금성관을 나와 관아로 향한다. 관아는 목사가 집무를 보면서 살던 관사이다. 나주관아의 정문인 정수루(正綏樓)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6호로 지정된 건물로, 선조36년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정수루 2층에 있는 큰 북은 학봉 김성일 목사가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은 이북을 치라며” 설치한 신문고였는데, 지금은 서울의 보신각처럼 제야가 되면, 정수루의 북을 34번 친다고 한다.
1892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관아는,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 담겨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한다. 지금은 옛 정취를 살릴 수 있는 민박집으로 개조하여 손님을 받고 있다. 또한 금학헌(琴鶴軒)담장에 있는 수령 오백년의 팽나무는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지는 고난을 당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지금도 목아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나주목 문화관(文化館)이다. 금성별곡(錦城別曲) 제1장을 시작으로, 택리지 속의 나주 이야기와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 남도의 젓줄 영산강과, 행정구역상으로 상징되는 전국의 목을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나주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로서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이 이곳 나주를 접수하면서 견훤의 배후에 거점을 확보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날 아침 7시 30분 숙소를 나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서성문이다. 이곳도 2층 누각에 옹성으로 건축된 조선시대 양식이다. 구한말(1894년) 동학농민군이 나주읍성을 공격할 때, 전봉준 장군이 서성문 앞에서 당시 나주목사였던 민중렬과 협상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한다.
서성문 바로 옆에 있는 나주향교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웅장한 규모다. 지방의 향교 중에서 이렇게 큰 건물은 본적이 없다. 공자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과 명륜당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고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대성전은 규모도 크지만,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나주향교 입구의 많은 비석들 중에서도 충복사유허비가 눈길을 끈다. 신분이 미천한 노비 우두머리 김애남이 정유재란당시 대성전의 위폐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유림에서 세운비석이라고 한다. 대성전에는 수령이 500년 된 비자나무가 눈길을 끈다.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이 동신대학교 옆에 조성한 정렬사다. 김천일의병장의 충절을 기념하여 선조 39년 나주의 선비들이 관내 월정보에 사우를 세우자 나라에서 정렬사라 사액하였다. 이듬해 선생의 위패와, 함께 순절한 장자 상건(증 좌부승지) 종사 양산숙(증 좌부승지)의 위패를 모셨고, 뒤에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임회(광주부사)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김천일장군은 국가의 존망이 위기에 처할 때, 수도 한양을 수복하기위하여 최초로 북상 진군한 의병장이다. 전라, 충청, 경상, 경기 4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2년 동안 변함없이 활동한 김천일 의병장은, 선조26년 진주성전투에서 10만 왜병을 맞아 9일 동안 100여회의 전투 끝에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다음은 시청 옆에 있는 완사천이다. 급히 말을 타고 달려온 왕건이 목이 말라 우물터에 있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넨다. 사연을 물어본즉, 빨리 마시다 체할까봐 버들잎을 띄웠다고 대답한다. 총명함과 미모에 이끌려 아내로 맞이하니 훗날 장화왕후다.
나주오씨 문중에서 세운 기념비가 있다. 오씨 처녀는 나주호족 나부순의 딸이었는데, 왕건과 결혼하여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왕후가 된 후 낳은 아들이 고려 2대 왕인 혜종으로 첫 번째 부인 신헤왕후가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므로, 장자원칙에 의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유서 깊은 나주 읍성을 둘러보고 삼남길 11구간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