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초당
일 시: 2016년 11월 27일
장 소: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다산 초당
강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명소가 다산초당과 문학관이다. 다산과 강진의 인연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시작된다. 다산을 총애하던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의 나이 40세.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다산은 다시 한양으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노란 국화로 장식한 기념관을 들어서면, 다산과 제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의 천장에 별자리가 인상적이다. 다산의 일대기를 적은 연대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공간을 돌아가며 다산의 손때 묻은 발자취가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다.
1762년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가 고향이다.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시작하여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에 능통하고, 고문(古文)을 즐겨 읽었으며, 시율(詩律)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다산은 1776년 풍산홍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하고 2남 1녀만이 살아남았다. 다산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선생이다. 다산이 두 살 때 작고하여 직접적인 가르침은 없었다. 개혁 군주인 정조 또 한 다산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다산을 아껴주는 보호자요, 학문적 스승이자 친구였다. 또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기투합하였던 정치적 동지였다. 다산은 자연과학과 기술, 특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기술 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에 능행(陵幸)을 할 때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고안하고, 화성(수원성)축조를 지시 받게 된다.
다산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인 화성(수원성)은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으로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 하였으며, 화포를 주 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 획기적인 공법을 선보였다.
후세 사가들이 다산을 실학의 대두라고 한다. 이익에서 유형원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탈주자학적 경학체계를 세워 19세기 초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확립한다. 다산은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실사구시”의 용광로 안에 녹였다가 “다산학”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한 인물이다.
촉망받던 다산에게서 정조의 서거는 혹독한 시련기로 이어지고, 그의 학문에 꽃을 피우게 된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다산은 47세 때(180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긴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경학 이외에 경세학(經世學)과 다방면의 실용적인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유배 초기에는 6경 4서에 관한 경학연구서 232권을 저술하고, 후반기에 경세유포,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마쳤다.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기념관을 나와 다산 초당을 찾아간다. 20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마을로 들어서면 돌담장으로 이어지는 고즈넉한 고샅길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한국의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는 다산로. 계단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길가에는 후박나무와 비자나무가 하늘을 뒤덮고, 초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에 길들여진 뿌리의 흙길이 나타난다.
초당 오르는 길옆으로 제자 윤종진의 묘가 있다. 다산이 초당에 자리를 잡은 뒤, 18명의 제자를 길러낸다. 윤종진을 비롯한 18제자들은 다산의 문집제작에 깊이 관여하며, 다산 사후에도 다산계를 조직하여 다산의 자손들과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다산초당이 있다. 마을에서 600여m 떨어진 숲속에 터를 잡은 초당은 속세의 온갖 번뇌를 날려버리는 선경이다. 하늘도 보이지 않을 작은 공간속에 새겨진 丁石은 다산의 성품을 표현하는 작품이고, 작은 연못 속에는 삼라만상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초당에서 진행하면 천일각이 나오고, 그 옛날 다산은 천일각에서 햇볕을 쪼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천일각에서 동백꽃과 죽림사이로 이어가는 백련사 길은 한양에서 귀양길에 오른 다산이 강진까지 가는 동안 갖은 고초를 겪었던 길을 “정약용 남도 유배길” 로 명명하고, 다산 초당에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만덕산(408m) 자락에서 10여 년 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달리 차를 사랑한 정약용(1762-1836)선생은 야생차 밭이 많아 그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정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다산 정약용선생의 발자취를 다산기념관에서 인용하여 정리해본다.
다산초당 가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