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함께 하는길
일 시: 2016년 11월 27일
구 간 : 강진 터미널 - 다산 문학관(13km)
강진과 함께하는 길
강진산내들길을 답사한지 6개월 만에 다시 강진 땅을 찾는다. 턴이 길어진 것은 무더운 날씨에 설사까지 나는 바람에 중도에서 포기하고 돌아간 뒤로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남터미널에서 375km나 되는 천리 길에다, 고속버스로 5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이라, 여러 번에 나누어서 답사할 수가 없어 고심한 탓도 있다.
내 체력으로는 1박2일이 가장 적당한데, 무리인줄 알면서도 3박4일로 일정을 잡고 보니,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신경이 많이 쓰인다. 다행히 4시간 30분 만에 터미널에 도착하여 12시부터 진행하게 된다. 강진천을 건너면, 정면으로 보이는 신학산(150m)경사면에 청자조형물이 바라보인다. 강진의 상징물이기도 한 청자를 홍보하기위한 광고판인 셈이다.
천년비색을 자랑하는 고려청자가 강진의 상징물이 된 데는, 500여 년 간 도자기를 집단적으로 생산하여, 왕실과 귀족, 사찰등지에서 사용된 진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고려청자의 80%가 강진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고려청자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고려의 상징물이다. 9~10세기 경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도자기제작기술에 영향을 받아 생산하기 시작한 고려자기는, 우리 선조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예술 혼이 담겨 있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청자의 상징인 푸른색은 비취옥의 색과 비슷하여 비색(翡色)이라 불렀으며, 청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생산이 어려웠던, 천하제일(天下第一)의 귀중품이다. 12세기부터 제작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고려 중기에 들어와 일상생활 용기를 비롯하여 향로, 제기, 기와, 타일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청자가 만들어졌다.
음각(陰刻), 양각(陽刻), 압출양각(壓出陽刻), 상감(象嵌), 철백화(鐵白畵), 동화(銅畵), 철채상감(鐵彩象嵌), 투각(透刻), 화금청자(畵金靑瓷) 등 다양한 종류의 장식기법이 완성되었고, 동물이나 식물의 모습을 본 뜬 상형청자(象形靑瓷)도 만들어져 고려청자의 절정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천여 년(千年) 전, 선조들의 숭고한 장인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청자재현사업을 시작한지 40년이 되는 1997년 9월 3일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강진청자박물관을 개관하였다. - 강진군 홈페이지 인용 -
호산교차로에서 18번 국도를 횡단하여 초동마을, 기룡마을, 춘곡마을 을 지나 탱자나무와 돌담길이 정겨운 덕동마을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임천저수지에서 시작하는 만덕산(409m)기슭을 따라, 시인묵객들이 칭송하였던, 동백 숲과 대나무 숲이 펼쳐지는 다산초당까지 걷게 된다.
이정표도 뚜렷한 삼남 길은, 대나무 숲을 시작으로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고요한 숲속에서 인기척에 놀란 장기가 날아오른다. 야생 동물들의 보금자리를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한가롭고 호사스러운 생각은 잠시 후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참나무 숲이 울창한 오솔길을 걸어가던 중, 엽총을 겨눈 사냥꾼과 마주친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 속에서 오금이 저려온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사람들이 다니는 숲속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駭怪罔測)한 행동이냐고 항의를 해보지만, 별수가 없다. 자기들도 수렵허가를 받고 사냥 중이니, 죄송하지만 큰길로 돌아가라는 하소연이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얼마나 그려 왔던가. 백련사의 동백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수백 년 된 동백나무 1만5천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엔돌피가 넘쳐났는데,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목적지를 잃은 철새처럼,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걸음이다.
되돌아온 덕동마을에서, 다산로를 따라가면서도 만덕산 오솔길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사람마다 취미생활이 다르다보니, 사냥꾼만을 질타할 수가 없는 일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추수가 끝난 11월 21일부터 다음해 2월말까지 수렵허가기간으로 설정하여 사냥을 허가 하고 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5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의 산들이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연료를 나무에 의존하던 그 시절,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마저도 뿌리째 뽑아오고, 낙엽까지도 박박 긁어다 아궁이불소시게 감이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한심스런 일이던가.
연료정책이 연탄으로 바뀌고 꾸준하게 산림녹화가 지속되어, 지금은 사람이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 하지만 멧돼지를 비롯하여 고라니의 개최수가 늘어나면서, 농작물 피해가 늘어나고 농민들 보호차원에서 농한기를 이용하여 수렵금지기간을 해제하고 있다.
어느덧 해창에 도착한다. 마침 썰물이 되어 강진만의 검은 갯벌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곳부터 그 유명한 강진만이 시작된다. 강진천과 탐진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 어귀여서,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도암면 신평마을을 중심으로 참고막과 굴이 마을 아낙들의 짭짤한 소득원이 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강진과 영암에서 거두어들인 세곡미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세곡창고가 기룡마을에 있었으며, 칠량면 구로마을 국사봉에서 세곡선이 떠날 때 무사항해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서해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오가던 청자뱃길이 있었고, 이조에 들어와서 조운선 뱃길이 이어졌다고 전한다.
백련사 입구교차로를 지난다. 백련사까지는 1.5km 여서 빠듯한 스케즐 때문에 들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친다.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1년(839년) 개창하여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말 민중불교 정화운동당시에는 승려가 1000명이 상주하는 대 가람이었으나, 청자를 약탈하는 왜구와 숭유억불정책으로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다산 문학관에 도착하며 전남6구간 “함께하는 길” 13km를 마감한다.
호산삼거리 토끼굴
만덕산(409m)
임천 저수지
숨바꼭질하는 표지기
만덕산 줄기
탱자나무와 돌담길
덕동 마을회관
포수들의 방해로 되돌아선 덕동마을
강진만 갯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