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와 개암사
일 시: 2016년 10월 18일
장 소: 부안군 내소사. 개암사
내소사와 개암사
국립공원 문주를 벗어나면 그 유명한 내소사 전나무 숲이 시작된다. 수령이 110년으로 추정되는 수백그루의 전나무가 사열 받는 의장대처럼 빼곡히 들어찬 모습은 세파에 찌든 사람들에게 달콤한 솜사탕을 물려주는 선경(仙境)의 관문(關門)이다.
천년고목(千年古木) 당산나무를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관음봉 아래 곰소만의 푸른바다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내소사, 해질 무렵 어둠이 내려앉으면, 고즈넉한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에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곳,
소사모종(蘇寺暮鐘)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내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내소사는 633년(백제무왕34) 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소래사라 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연유는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천년사찰(千年寺刹),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단청이 모두 벗겨지고 백골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바라보며 경건한 마음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조선 인조 11년(1633) 청민대사가 절을 고쳐지은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대웅보전은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은 건축물로 유명하며, 앞쪽 문살에 새겨진 연꽃무늬, 국화꽃무늬, 모란꽃무늬 등, 수 백 개에 이르는 꽃들이 창살위에 피어나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장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진 후불벽화가 걸려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요사채, 설선당(說禪堂)·보종각(寶鐘閣)· 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내소사 관람을 마치고 산문을 나선시간이 오후 2시. 다음 행선지인 개암사를 찾아가는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망설이는 중에, 시내버스가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기사에게 물어보니 줄포를 경유하여 개암사 입구를 지난다고 한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다음번에 답사할 곰소만과 줄포의 지형을 관찰하며 봉은삼거리까지 편하게 이동한다.
개암사는 버스정류장에서 2.5km나 떨어진 우금산성아래 있는 사찰이다. 30여 분간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간 뒤에야 능가산개암사 산문에 도착한다.『개암사지』에 의하면 개암사 자리는 변한 시절 왕궁터 였다고 한다. 기원전 282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고, 왕궁의 전각을 지어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 하였다.
백제무왕 35년(634년)에 묘련대사가 궁전에 절을 지으며 동쪽의 궁전을 묘암사, 서쪽의 궁전을 개암사로 부른 것이 절의 기원이 되었다.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수하고, 고려 충숙왕 1년(1313년)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중창하여 건물이 30여 채에 이르는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개암사 대웅보전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용마루위로 불끈 솟은 암봉이 그 유명한 울금바위이다. 바위를 멀리서 바라보면 “두 쌍의 바위가 문을 열고 있는 형상이라” 절의 이름을 개암사 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울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지어 원효방으로 불렀고, 조선후기까지 시인묵객들이 단골메뉴로 인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울금바위는 백제부흥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복신굴이다. 개암사에서 바라보았을 때 복신굴은 왼쪽 바위아래 있고, 원효방은 오른쪽 바위아래 있다. 봉우리 뒤편으로 돌아가면 조그만 공터와 협소한 동굴이 원효방이다.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백제 유민들의 슬픔을 달랬다고 한다.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개암사 저수지까지 능선을 따라 산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남쪽으로 563m, 서쪽으로 675m, 동쪽과 북쪽을 합하여 총 3960m 길이에 달한다. 남쪽으로 통하는 계곡 입구에 남문을 설치하고,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적절히 섞어가며, 양쪽 능선을 따라 동서로 연결하였다.
의자왕 20년(660)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자 복신 장군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백성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 곳은 복신 장군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며 백제 부흥을 줄기차게 벌였던 백제 최후의 보루이다.
부안지방에는 백제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백산성이 또 있다.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성터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09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47m로 낮은 언덕에 불과한 백산의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길이 120m, 너비 50-60m의 타원형으로 쌓은 토축산성이다.
서울 가는 버스시간이 촉박하여 울금바위를 오르지 못하고, 봉은삼거리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개암사에 다녀오는 택시가 크락션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멈추어 선다. 부안읍으로 가는 길이면 태워주겠다고 한다. 생각지도 않은 선심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예정시간보다 빠른 16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에 오를 수가 있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부안, 인심 좋은 부안』을 가슴깊이 간직할 것이다.
능가산 내소사
승녀들이 먹던 밥솥
당간지주
내소사의 창살 무늬
내소사와 관음봉
개암제
울금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