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서산
1. 공세리 성당
공세리 성당을 찾아가는 길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용산역과 온양온천역에서 기차와 버스를 환승해야 하는데, 10여분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도권을 지나 지방에 내려가면, 버스가 하루에 서너 번 씩 운행하다 보니, 정규교통을 활용하지 못하면 거금의 택시비를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6시23분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장항선)편으로 온양온천역에 도착하니 7시52분이다. 하루에 4번 운행하는 600번 버스를 타기위해서는 역전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이용해야 한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40여 분간 온양시내를 돌아 공세리 파출소 앞에 도착하며 하루 일정이 시작된다.
공세리 성당은 120년(1890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충청남도 문화재144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2005년에는 한국관광공사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되었고, 350년이 넘은 보호수를 중심으로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성당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공세리 성지는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한반도에서 아홉 번째로 오래된 성당으로 대전교구의 첫 번째 성당이며, 두 번째로 유신병인박해 때 32분의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이고, 세 번째로 연3만 명이상의 피정객들이 숙식과 교육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받고, 네 번째로 조운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조세창고가 있던 교통의 요지로서, 다른 지역보다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면서,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늘어난 곳이다.
1895년 이곳에 부임한 에밀드비즈 신부님이 프랑스에서 배우고 익힌 방법으로 종기치료에 특효인 고약을 무료로 제공했는데, 신부님에게서 비법을 전수받은 이명래(요한)가 “이명래 고약”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보급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월요일 아침의 공세리 성당은 너무도 조용하다. 무성한 나무숲에 둘러싸인 성당곳곳을 둘러보며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몸가짐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조용히 경내를 빠져나온다. 마을을 벗어나면, 지도를 바꾼 간척사업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공세리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버스정류장 옆으로 34번국도가 지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자전거도로를 따라 삽교천 방조제 방향으로 진행한다. 인주공단을 오가는 대형트럭의 굉음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올라선 곳이 삽교천방조제 남쪽지점이다. 삽교천방조제(揷橋川防潮堤])는 충남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와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 사이에 축조된 길이 3,360m의 방조제다.
충남 당진·아산·예산·홍성의 4개 시 군 22개 면을 전천후 농토로 개발하기 위하여 삽교천방조제를 축조했다. 이 지역은 넓은 평야와 간석지(干潟地) 등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농업용수를 확보하지 못하여 한수해(旱水害)를 자주 겪어왔으며, 하구에서 흘러드는 바닷물로 유역 일대가 염해(鹽害)와 해식(海蝕)에 시달려왔다.
이와 같은 재해의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위해 저수량 8,400만t의 삽교호를 1976년 12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완공하였다. 79년 10월 26일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이 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다. -백과사전에서 인용 -
밀물 때라 제방까지 물이 차올라 어느 쪽이 바다이고, 어느 쪽이 저수지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서해바다가 보이는 오른쪽이 바다이고, 왼쪽이 삽교호다. 길이 3,360m의 방조제와 저수량 8,400만t 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없는 현장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40여 분간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간 다음에야 삽교호 함상공원에 도착한다. 삽교호천수공원에 조성한 조형물을 둘러보고, 해변가로 조성한 "바다사랑길"을 따라 2km를 진행하면 맷돌포구에 도착한다. 매산해안공원에서 왼쪽으로 매산로를 따라 음섬포구로 진행한다. 38번 국도를 횡단하여 도로 옆의 농로를 따라 서해고속도로 밑까지 3km를 걸어가는 길은 너무도 따분하고 지루한 길이다.
심훈선생 기념관이 있는 필경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부곡교차로에서 왼쪽으로 50여 m 떨어진 부곡2교를 건넌다. 마을길로 1.5km를 진행하면, 심훈선생이 그리던 소설속의 풍경이 펼쳐진다. 붉은 황토밭에서 감자 수확이 한창이다. 수 만평은 됨직한 너른 밭에서 트랙터를 동원한 수십 명의 농부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현장이다.
이곳에서 필경사가 빤히 내려다보인다. 부곡1리 경로당을 지나 찾아간 곳은 심훈 기념관이다. 휴일이라 기념관을 둘러보지 못하고 옥상에 있는 선생의 등신상과 “그날이 오면” 시비를 상면한다. 지대가 높은 언덕 빼기라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마을이었겠지만, 지금은 당진제철소의 우람한 건물들이 앞을 가리고 있다.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로 시작되는 그의 대표 시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소중함을 호소하고 있다. 서울에서 기자와 시인, 소설가, 영화인 등으로 활동하다 출판금지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시골로 내려온 선생은 붓으로 땅을 일군다는 뜻의 "필경사"를 짓고,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친지를 모델로 "상록수"를 탄생시킨다.
소설속의 주인공 박동혁은 심훈선생의 조카 심재영이다.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이었던 최영신은 경기도 반월 샘골에서 농촌운동을 하던 여인이다.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소설속의 연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최영신의 고향에는 수도권전철 상록수역이 있고, 이곳 심재영의 고향에는 상록초등학교와 상록수교회가 있어 현재까지도 주인공들의 무대로 전해 오고 있다.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필경사, 심훈의 집”이란 문패가 달려있는 초가집 한 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필경사는 1932년 부친이 살던 집에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연재소설 고료를 받아 지은 20평이 안 되는 일자형 초가집이다.
현재시간이 오후1시 30분. 오늘은 이곳에서 서해안답사를 종료하기로 한다. 한진 포구까지도 갈수 있지만, 당진에서 출발하는 25번 버스를 기다리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등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 속에 천국이 따로 없다. 땀에 젓은 옷을 등나무에 걸어놓고 도시락을 펼쳐든다.
망중한을 즐기는 중에 마을 할머니와 상면(相面)한다. 심훈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귀동냥하면서 보내는 한 시간이 흥미롭기만 하다. 제시간에 도착한 버스에 오르면서 삼복더위가 지나고 선들매가 치는 가을에 다시 찾아 올 것을 다짐한다.
2. 솔뫼 성지
지난번 가마솥열기를 받아가며 걸어간 20여 km에서 어찌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삼복더위를 피하려고 했었는데, 솔뫼성지를 보고 싶다는 아내의 간청을 받아들여 석문방조제와 왜목마을, 삼길포까지 자동차 답사로 다녀오게 되었다.
서해대교를 건너 도착한 "솔뫼성지"는 1821년 8월 21일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하였고, 할아버지 김택현선생을 따라 용인 한덕동(현 골배마실)으로 이사 갈 때까지 7년간 살았던 고향마을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1846년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이다.
광활한 분지에 조성한 "솔뫼성지"는 수 백 년 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우리나라 천주교최고의 성지이다. 2014년 8월 17일 대한민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찾아온 것도 솔뫼성지의 영광이요, 대한민국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는 게기가 되었고, 이로서 솔뫼성지는 한국의 "베들레헴"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성지로 들어가는 3개의 문이 있다. 의미는 모르지만 문의 크기가 다르고, 모든 이들을 포근하게 보듬어주는 예수님 상을 지나면, 열두제자의 조각상이 원형공연장(솔뫼 아레나)을 중심으로 도열해 있다.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 앞뜰에는 인자하신 교황님과 교감을 나누는 소녀기도상이 있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면 솔뫼성당의 상징인 솔밭과 형극의 길을 걷는 신도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각인되어있다.
성지의 중심이 되는 김대건 신부님 상 앞에서 모든 이들이 두 손을 모은다. 박해받던 사람들이 단지 천주교 신자뿐이던가. 외국문물을 거부하며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말엽, 선구자들의 핍박이 순교로 이어지고,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굳게 잠겼던 빗장도 풀어지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간 뒤, 1845년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을 받고, 그 해 10월 귀국한다. 귀국 후 용인 일대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846년 9월 국문 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솔뫼성지"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석문방조제로 향한다. 오늘의 일정을 감안하여 한진포구와 안섬포구를 생략하고, 당진이 자랑하는 동부제철과 현대제철을 돌아 석문방조제를 통과한다.
석문방조제(石門防潮堤)는 충남 당진시 송산면 가곡리에서 석문면 장고항리의 바닷길을 연결하는 방조제이다. 석문지구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7월부터 8년 5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95년 12월 완공하였다. 석문방조제가 축조되면서 거대한 담수호인 석문호(石門湖)가 생겨났고, 건설당시에는 국내에서 가장 긴 방조제였다.
한 여름의 폭염아래 10.6km나 되는 시멘트 위를 걸어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턱턱 막힌다. 승용차로 한참을 달린 끝에 장고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노적봉과 촛대바위다. 왜목항에서 바라볼 때 일출명소로 소개하고 있는 바로 이곳이다.
포구모양이 장구(장고)를 닮았다고 하여 부르는 장고항은, 3월~5월이면 실치 축제로 경향각지의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배'란 물위에 떠있어야 제격인데, 썰물이라 검은 속살을 드러낸 갯벌위로 벌러덩 누워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세상의 이치란 공평하여 썰물이 되어야만 볼 수 있는 해안의 절경을 찾아간다.
노적봉과 촛대바위사이로 해안길이 열리고, 억겁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갈고 다듬어진 조물주의 걸작 품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수 십 미터의 벼랑 끝에 물을 마시는 코끼리처럼 아름다운 아치가 펼쳐진다. 이 바위로 인해 마을이름도 석문으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3. 왜목 마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왜목 마을이다. 일출과 일몰을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서해안 제일의 해돋이 명소에다, 당진에서 가장 큰 어항이다. 관광객을 위해 조성한 펜션과 먹 거리 촌이 형성되고, 부둣가를 중심으로 왜목마을을 상징하는 시설물과 산책로를 찾아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입자고운모래가 500여 m 이어지는 해수욕장과 썰물 때면 속살을 드러내는 갯벌에서 조개와 작은 고동(다슬기)을 잡는 재미가 쏠쏠하고, 앞바다에서는 낙지, 가자미, 우럭, 자연산 장어 등이 많이 잡혀 봄부터 가을까지 바다 낚시꾼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일출과 일몰을 보기위해서는 석문산이 제일이고, 일출의 포인트로는 선착장과 오작교, 일몰장소로는 석문각을 꼽는다. 시기별로 위치를 옮겨가며 떠오르는 일출은 10월 중순에서 2월 중순까지 태양이 노적봉과 촛대바위로 떠오를 때가 가장 아름답다.
당진 제1경인 왜목마을은 대호방조제를 축조하기 전에는 마을의 지형이 왜가리 목처럼 가늘고 길게 바다로 뻗어나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당진시의 최북단 서해바다로 가늘고 길게 뻗어나간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해 뜰 무렵 마을의 바닷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일출을 보게 된다.
왜목마을을 조망하기위해 석문산을 오른다. 파출소 옆으로 나무계단을 따라가는 등산로는 매우 가파르다. 해발 70m에 불과한 산이지만, 주변을 조망하기 좋게 시설물도 없이 나무를 베어내고 잔디를 심어 일출과 일몰을 보기위한 캠핑족들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다.
왜목에서 이어지는 해안을 따라 용무치와 장고항, 서해바다에 떠있는 국화도가 수반위에 빗어놓은 조각품처럼 아름답다. 화성시 우정읍에 소속된 국화도는 조선시대 유배지였고, 배로 20여분 거리다.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대호방조제가 고속도로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서쪽으로 당진화력발전소가 장관이다.
대호방조제(大湖防潮)는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와 서산시 대산읍 삼길포리의 바닷길을 잇는 방조제로 1984년 준공되었다. 간척지를 개발하여 농경지와 용수원을 확보하여 식량을 증산하는 농업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축조되었다. 석문방조제와 함께 당진군의 지도를 바꾼 대호방조제를 달려가는 중간에 도비도 전망대를 오른다.
돌층계를 올라가면, 도비도 언덕위에 3층 전망대가 나타난다. 승강기도 없이 원형계단을 올라가는 옛날방식으로 보아 대호방조제를 축조하기 전에는 등대로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커피전문점으로 영업 중인 전망대에 올라서면, 당진과 서산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호수 같이 잔잔한 바다에 징검다리처럼 떠있는 섬들, 대조도와 소조도, 우무도와 분도, 소난지도와 난지도가 푸른 바다위로 아름다운풍광을 그려내고,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하늘가에는 대호방조제와 석문방조제로 태어난 푸른 들판이 펼쳐지는 정경도, 도비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망이다.
7,807m의 대호방조제를 지나오면 서산시 삼길포 항이다. 삼길포 항은 배에서 직접 활어 회를 떠주는 ‘선상횟집’이 특징이다. 30여 척의 선상횟집이 주기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리다툼을 하지 않고, 건전한 상행위로 친목을 도모하고 그만큼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도 선상횟집을 찾아 우럭과 놀래미로 회를 떠서 우리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싱싱한 횟감으로 배를 불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도보로 이틀 일정을 하루에 소화하고, 충무공 정충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진충사를 방문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률 장군휘하에서 활약하다가, 17세의 나이로 의주에 계신 선조임금에게 전황을 보고하여 조정의 만주 망명을 막았다고 한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조정의 녹을 받다가,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팔도부원수로 활약하여 진충보국한 장군이다. 1966년 후손과 지방유지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70년 진충사를 건립하고, 매년4월25일 향제를 올리고 있다.
4. 아라메길 - 3구간
9월로 접어들면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면,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모양이다. 가을은 하늘의 뭉게구름을 타고 오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온다고 하지 않던가. 지난번 석문방조제와 대호방조제를 승용차로 쉽게 통과하고, 오늘부터 5회에 걸쳐 서산 땅을 밟을 예정이다.
처음 답사할 곳은 서산7경으로 소문난 황금산과 삼길포항까지 18km를 이어가는 아라메길 답사 코스다. 서산터미널에서 900번 좌석버스로 40분 만에 도착한 곳이 독곶리 종점이다. 종점에서도 황금산 입구는 2.5km가 넘는 거리다. 난감하던 차에 "미란네가리비" 주인아주머니(박미란)의 호의(승용차)로 시간도 절약하고, 커피까지 대접을 받고 보니, 충청도 아줌마의 정이 넘치는 행복한 순간이다.
코끼리바위로 유명한 황금산을 찾아간다. 울창한 수림 속으로 들어서면 가파른 비알길이 시작되고, 높이가 150여 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바닷가에서 시작하는 곳이라 만만하게 볼일이 아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능선으로 올라서면, 소나무 그늘 속으로 가로림만의 비경이 펼쳐진다.
정상이 울창한 수림속이라 조망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황금산 돌탑과 임경업장군을 모신사당(黃金山祠)이 있다. 전설속의 황룡이 연평도로 올라간 조기떼를 몰고 내려와 조기가 많이 잡히는 바다라 하여 황금바다로 부르고, 황금산 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어 안전운항을 위해 매년 4월1일 山神과 임경업장군에게 제를 올린다고 한다.
사거리안부에서 해안가로 내려서면, 몽돌해수욕장과 코끼리 바위가 나타난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오며 갈고 다듬어진 몽돌이 해변을 뒤 덮고, 서해바다를 향해 코를 길게 뻗고 있는 코끼리 형상이 장관이다. 밀물 때라 접근이 어렵지만, 철사다리 너머로 펼쳐지는 절경은 동해안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해안선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황금산은, 대산석유화학단지가 들어오기 전에는 황금빛 모래가 가득하여, 황금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능선을 타고 뻗은 해안 절개지가 너무도 아름답고, 서해안에서 보기 드문 주상절리 해안으로도 유명하다.
황금산 해안을 일주하는 데는 3시간이 족히 걸리지만, 삼길포까지 답사해야하는 관계로 1시간 만에 황금산 탐방을 마치고 서산아라메길 3구간을 시작한다. 건너다보이는 육지가 태안군 원북면 만대항이다. 가로림만의 입구 폭이 3.2㎞로 좁고, 만의 내부가 넓은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다.
가로림만의 해안선길이가 161.84㎞에 면적이 112.57㎢여서 웬만한 군보다도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대산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며, 축조된 방조제를 따라가는 아라메길은 서산이 자랑하는 갯벌이라지만, 물때를 만나 거대한 호수로 변한 가로림만을 바라보며, 터질목방조제와 흥진방조제를 지나 독곶2리 교차로가 있는 29번 국도로 올라선다.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1km를 진행하면, 독곶1리 교차로가 나오고 남쪽으로 38번 도로를 따라가는 중에 해안과 염전을 지나온 아라메길과 다시 만난다. 대진초등학교 입구가 황금산에서 6.1km지점이다. 이곳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숲길이 시작된다. 직사광선이 내려 쪼이는 국도변은 30도를 넘는 열기이지만, 숲속으로 들어서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아라메길은 고압전신주를 가설하며 만든 임도를 따르게 되고, 한 여름 웃자란 풀을 벌초하여 진행하는데, 너무도 편안하다. 시간이 갈수록 숲은 깊어지고, 오가는 인적도 없이 적막하여 사색의 길이 아니라, 등골이 오싹하도록 후미진 산길이다.
하늘이 빼 꼼이 트이며, 대죽리에서 올라오는 죽엽로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이정표는 없지만,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숲속으로 들어선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30여 분간 산등성이를 타고 넘으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아라메길 이정표가 나타난다.
대진초등학교 4.9km, 화곡교차로1.5km. 1시간 반 동안 보이지 않아서 포기했었는데, 그래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어려울 때는 보이지 않던 리본과 이정표가 정작 찾아가기 쉬운 곳에서는 생뚱맞게도 총총히 걸려있다.
서산이 자랑하는 아라메길 이라면 좀 더 성의 있게, 갈림길이나 외진 곳에 리본이나 이정표를 해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화곡교차로를 건너 화곡보신탕이 있는 마을까지는 깃발까지 꽂아 놓았지만, 과수원 길에서 또 다시 종적이 묘연하다.
삼길포까지 4.5km를 남겨둔 지점에서 생각지도 못하던 알바가 시작된다. 층층계단을 내려선 곳은 엉뚱하게도 대산공단 공원이다. 공단이 들어서기 전에는 아름다운해안과 조개 잡는 갯벌이 끝없이 펼쳐졌다고 했는데, 지금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말았다.
봉화산이 머리위에서 손짓하지만 다시 오를 수는 없는 일이고, 3km가 넘는 해변을 돌아 삼길포에 도착하니 관광안내소가 있다. 버스 시간표도 알아볼 겸, 아라메길 이정표가 부실하다고 항의를 하니, 순순히 시인을 한다. 알면서도 시정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삼길포가 자랑하는 어선갑판에서 놀래미회를 떠다 방파제에서 느긋하게 포식을 하고, 5시에 출발하는 910번 좌석버스 편으로 서산 터미널에 도착하여 5시 50분발 직행버스에 오른다.
5. 가로림만의 숨은 진주 웅도(熊島)
서산터미널에 도착하니 8시20분이다. 벌천포 해수욕장이 있는 벌말 가는 231번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이 40여분 남았다. 다음 행선지 버스시간을 체크하다보니 지루하지 않게 버스에 오를 수가 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웅도를 다녀오는 코스다.
웅도 또한 제부도처럼 물때를 맞추어야 섬을 다녀올 수가 있다. 벌말종점에 있는 파출소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만조시간까지는 4시간 밖에 여유가 없다고 한다. 벌천포 해수욕장을 다녀오는 거리가 왕복으로 2km에 웅도까지10km, 웅도선착장까지 돌아보고 육지로 나오는 거리가 왕복으로 5km, 합하여 17km를 4시간에 다녀와야 하는 것이 너무도 타이트하다.
중간에 예기치 않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섬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할 형편이다. 종점이라 10여 분간 대기하고 있는 버스시간에 맞추어 주변을 돌아보고 웅도입구정류장까지 7km를 버스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아쉬움 속에서도 차창으로 비치는 풍경을 스케치하며, 예정에도 없는 고창포구도 구경하고 웅도입구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30분이다.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이다. 주변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3km를 걸어가면 웅도리 버스종점이다. 건너다보이는 모개섬까지는 교량(유두교)으로 60m, 모개섬에서 웅도까지 200여 m의 앉은뱅이 다리가 바로, 만조시간이면 통행이 두절되는 곳이다.
그나마 새로 공사를 하여 물이 최고로 높아지는 1시간동안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예산 탓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완전한 다리로 건설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썰물시간이라 드넓은 가로림만이 모두 갯벌이다. 직접보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 비경이 펼쳐진다.
지난번 황금산을 다녀갈 때는 만조시간이라 드넓은 호수였는데, 오늘은 숨겨둔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는 여인의 나체를 보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곰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웅도라 부른다. 지리산의 웅석봉과 연관시켜보면 어떨까. 그만큼 신성한 곳에 붙여주는 별호가 아닌가 싶다.
다리를 건 너 섬으로 들어가면 남쪽 해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고, 노송의 그늘아래 민박집이 반겨준다. 대산초등학교 웅도분교를 지나 마을의 구심점이 되는 경로당 앞에는 마을택시 승강장이 있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곳이라 어르신들의 나들이 길을 위해 택시 승강장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웅도제일경은 바다 앞에 떠있는 매섬이다. 호숫가에 떠있는 연꽃처럼 아담한 바위섬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해안가 어디서나 시선을 끌고 있다. 매섬을 중심으로 썰물 때면 바지락 캐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소달구지로 바지락을 실고 나오는 모습이 사진작가들의 호기심을 유발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소달구지 끌던 분들이 고령이 되어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집집마다 봉고트럭으로 바지락을 실어 나르고, 남쪽 선착장에서 이루어지는 경매를 위해 꼬리를 물고 모여드는 봉고트럭의 모습도 장관이다. 만조 때에는 방파제마저 물에 잠기고, 간조 때에는 방파제에서 바지락 선별작업도 이루어진다.
웅도는 가로림만에서 가장 큰 섬이다. 웅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자점(1588-1651)이 이곳으로 귀향을 오면서 부터라고 한다. 면적이 1.58㎢에 해안선의 길이가 5km인 웅도는 장골, 큰골, 동촌으로 형성된 마을에 150명의 주민이 어업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천혜의 조건을 갖춘 서해안 최대의 갯벌 가로림만. 심한 풍랑도 비껴갈 아늑한 가로림만에서 전국제일의 바지락이 통통하게 살을 찌우고 있다. 바지락은 철분이 많아 빈혈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바지락은 칼국수로 인기가 있고, 된장찌개나 속살을 발라내어 양념에 버무려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
풍요로운 어촌마을에서 소달구지와 경운기는 보지 못했어도,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봉고트럭 뒤를 따라 바지락 경매현장도 참관하고, 서둘러 섬을 빠져 나온다. 웅도리 입구 정류장에서 대산읍내까지는 3km다. 급할 것도 없이 여유자적(旅遊自適)하며 대산읍내로 들어온다.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고, 벌천포에서 버스로 이동하면서 남아도는 시간을 보충하기위해 망일산 중턱에 있는 망일사를 찾아간다. 왕복3km의 망일사는 주민들이 산책로로 즐겨 찾는 호젓한 길이다. 울창한 수림 속으로 이어지는 진입로는 생각보다 가파른 길이다.
망일사는 고려현종(1010-1031) 때 지성선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망일사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서해안에 터를 잡은 대산마을에는 오랑캐의 노략질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 사는 홍안소년이 망일사에 올라 오랑캐의 노략질을 멈출 수 있는 비법을 알려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한다.
이때 마당에 누어있던 철마가 부스스 일어나 소년에게 쇠도리깨를 만들라는 말을 전한다. 한편 오랑캐의 분탕질로 마을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데, 소년이 오랑캐들 앞에 나타나 고함을 지르자, 절 마당에 누워있던 철마가 점점커지면서 소년장사를 등에 태운 뒤, 오랑캐들에게 달려들고 장사는 쇠도리깨를 휘두르며 오랑캐를 물리친 후 마을에 평화가 찾아 왔다고 한다.
아름다운 미담을 뒤로하고 대산6리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와 서산터미널 가는 버스에 올라, 서산 두 번째 코스 벌천포와 웅도를 돌아보는 18km 여정을 간단하게 마무리한다.
6. 해미읍성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어찌 인간에게만 해당되겠는가. 무쇠강철도 무상한 세월 앞에서 녹이 슬고, 무성하던 나무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삭정이로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지난 7월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 위(胃)에 관상선종이라는 혹이 발견되었다. 큰 병원에 가서 재심을 받아보라는 담당의사의 소견을 듣고서도, 아들 재형이의 초청으로 추석에 베트남 여행을 다녀오느라 차일피일 미루다, 둘째사위(서연아빠)의 주선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건강만큼은 자신하며 전국을 주름잡던 나였는데, 내 몸속에도 심상치 않은 病이 자리를 잡고 말았다. 10월23일 호흡기내과(이용찬 박사)에서 조직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지루하여 머리도 식힐 겸, 서해안 답사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서산을 대표하는 해미읍성과 천주교성지를 시작으로 뻘 낙지로 유명한 중왕리 해변을 답사할 계획이다. 남부터미널에서 6시 30분에 출발하는 직행버스가 한서대학교를 경유하여 해미터미널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곳이 해미면사무소 건물이다. 현대식구조물위에 한국전통의 기와지붕을 얹어 고풍스런 모습이다.
1407년(태종7) 정해현과 여미현 등 두개의 현을 합하여 정해에서 “해”자를 따고 여미에서 “미”자를 따서 해미 현이라 칭한 것이 해미면의 효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그 유명한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은 왜구의 출몰을 막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된 수성(守成)이다.
1414년(태종 14)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이설되면서, 충청도지역의 군사중심지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조12년(1578)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10개월간 근무하였고, 효종 때 병마절도사를 청주로 이전한 뒤로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을 두어 호서지방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해미읍성은 길이가 1,800m, 높이가 5m에 성안의 넓이가 5만 9천 평에 이르고, 성 밖으로 2m 깊이의 해자를 파서 외부의 적을 방어하는 철옹성이었다.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모양성과 함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역사와 함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해미읍성의 관아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모진고문과 처형을 감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순교성지(殉敎聖地)로 추앙을 받고 있는 곳이다. 해미순교성지는 최근 교황이 다녀가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서산의 시골동네에 교황이 방문한다는 것이 이례적이었는데, 천주교인들의 박해와 순교에 대한 탐방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
일명 여숫골로 알려진 조산리 생매장 터는 1935년 범바로 신부가 주도한 유해 발굴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80여 년간, 천주교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처형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내포지방의 천주교신자들을 잡아들여 모진고문을 감행 하였다.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에 이어,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고, 여러 명을 눕혀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다는데, 너무도 가혹했던 참상을 지울 수가 없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등, 해미순교자 3명이 시복되었고, 다음 날 17일에는 이 곳 성지를 방문하여 시복기념비를 제막하였다.
7. 중왕리의 뻘 낙지
해미에서 서산터미널까지는 직행 버스로 20분 거리다. 서산터미널에서 다음 행선지를 찾아가는 대요리는 대산방면의 버스가 지나는 길목이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가 있다. 대요리 정류장에서 시작하는 발걸음이 진충사(振忠柌)를 지난다.
지난번 아내와 함께 왔을 때는 공사 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했는데,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정충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진충사길' 에 이어 '대요한우물길'을 따라가면, 지곡저수지에서 흐르는 개천을 만나, 저수지 둑으로 올라선다.
어제 뉴스에서 중부지방의 가뭄소식을 들었다. 기상관측소가 생긴 이래 42년 만에 가장 심한 가뭄으로 충남 8개 시·군에서 제한 급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간척지로 조성하여 만든 천수만에서는 염분의 피해를 입은 벼들이 쭉정이만 남아 수확을 포기했다고 했는데, 이곳 지곡저수지도 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말았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도성3리로 들어서면, 천여 년 전 백제의 발자취를 만나게 된다. 철이 많이 생산되는 이곳에서, 철을 이용한 각종도구와 정교한 무늬를 삽입하는 상감기술이 발달했는데, 그 유명한 칠지도(七支刀)가 이곳 도성리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칼이란 뜻으로, 칼 앞면에 새겨진 ‘七支刀(칠지도)’란 글자로 부르고 있다. 백제 왕세자가 왜왕(일본)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 칠지도는, 하늘과의 교감을 나타내는 ‘칠성’(七星) 혹은 불교적인 의미의 ‘칠각지’(七覺支)로 해석되기도 한다.
19세기 말에 발견된 칠지도는, 3세기 중엽 일본에서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고, 헌상 받았다는 일본 측 주장과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하사설(下賜說)을 비롯하여, 5세기 제작설이 제기되고 있다.
도성리를 빠져나와 중리포구로 가는 중에 동쪽으로 아담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부성산성이 있는 부성산(118m)이다. 성 둘레가 529m인 부성산성은 6세기 초 백제시대 때 축조된 성곽이다. 서남쪽과 서북쪽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지역에 축조하여, 중국과의 교역로를 확보하고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운산면으로 통하는 옛 도로와 연결돼 있다.
6세기 중엽 백제작품으로,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 보살입상의 웃는 모습이 제각기 달라 “백제의 미소”로 부르는 마애여래삼존불상은 국보 제84호로 지정된 서산에서 가장 뛰어난 불상이다.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다.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조성된 삼존불상은《법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형상화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망미산 기슭의 임도를 따라가면, 중리 포구에 도착한다. 웅도가 바지락마을이라면, 대산면 중리는 낙지마을이다. 일주일 전 열렸던 뻘 낙지축제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가로림만의 ⅔를 차지하는 서산에서, 절반 가까운 22.8㎢가 지곡면에 분포하고 그 중심에 중왕리가 있다.
중왕1리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왕산포구를 찾아가는 길은 호젓한 산책코스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가로림만의 속살이 드러나고, 에덴빌라 앞마당으로 내려서면, 건너다보이는 안도(安島)가 수반위에 피어나는 분재처럼 마음을 사로잡는다.
언덕 빼기에 올 라 앉은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왕산포구는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조용한 어촌이다. 때맞추어 간조시간이라 가로림만의 너른 갯벌이 끝없이 펼쳐진다. 지난번에 다녀온 웅도와 고파도가 심한 풍랑을 막아주는 빗장이라면, 왕산포구는 갯마을 처녀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텃밭이다.
굴을 따랴 전복을 따랴/ 서산갯마을… 가수 조미미가 불러 공전의 희트를 한 “서산갯마을” 노래비의 주 무대가 바로 중왕리포구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안도. 밀물이면 배로 왕래해야 하는 섬이라 물때를 맞추어 건너가 본다. 경운기가 다닐 수 있도록 포장까지 하여 안도를 중심으로 너른 갯벌이 펼쳐진다.
발에 닿는 촉감이 너무도 부드럽다. 명개흙이 자갈과 어우러져 바지락과 낙지가 서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만들고,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꾸며주는 해산물의 보고가 바로 왕산포구다. 해변을 따라 저수지 방향으로 간다. 만조 때는 어렵겠지만, 안심하고 해안가 비경을 돌아본다.
해안가 절벽으로 검은색과 붉은색 단층으로 형성된 비경이 펼쳐진다. 마치 거대한 용이 해안가를 휘돌아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터키여행에서 보았던 카파토키아의 구렁이가 산줄기를 타고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썰물 때만 볼 수 있는 진기한 보물이다.
가두리 양식장이 있는 저수지제방으로 올라선다. 저수지중간지점이 지곡면 중왕리와 팔봉면 흑석리가 경계를 이룬다. 이제부터 바다와 멀어지고, 간척사업으로 형성된 흑석리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흑석리 반월마을에는 서산이 자랑하는 생강과 양배추가 산자락을 덮고 있다.
가로림만에서 실려 온 갯바람과 비옥한 토질에서 생산되는 품질이 우수한 마늘과 생강, 양배추가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꾸며 주고 있다. 버스가 다니는 2차선 포장도로(문현로)를 따른다. 흑석리 삼거리에서 양길3리 정류장까지는 3km가 넘는 거리다.
남쪽으로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팔봉산이 반겨준다. 가로림만을 굽어보며 솟아있는 팔봉산은 제3봉(362m)을 정점으로 8개의 봉우리가 올망졸망 모여 있어 수려한 암릉미가 일품이다.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그림같이 펼쳐지는 아름다움으로 서산 5경에 선정된 명산이다.
양길교에서 아라메길 4구간 표지목을 만난다. 아라메길이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친 말로, 바다와 산이 만나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울려 대화와 소통의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서산에서는 산과바다, 계곡을 이어주는 아라메길 100여 km를 9구간에 나누어 조성하고 있다. 이번에 걷게 되는 4구간은 팔봉산 주차장이 있는 양길리에서 시작하여 호리반도를 돌아 양길리까지 돌아오는 22km 구간이다. 호안을 따라 진행되는 아라메길은 비포장에 돌 자갈이 깔려있어 걷는데 불편함이 많다.
지난번 황금산 구간에서도 보았듯이, 이곳 아라메길도 이정표에 리본, 노란깃발까지 길 안내가 잘 돼 있다. 오늘은 덕송리 버스정류장까지만 진행하기로 한다. 미리예상은 했지만, 막상 정류장에 도착하니 아무런 안내문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없으니 막막하기 그지없다.
궁여지책이라. 십여 년 전, 남부터미널 근처에 있는 21세기병원에서 아내들의 허리 수술로 알게 된 이은범씨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만다. 이은범씨는 팔봉면 어송리에서 현대조경을 하고 있는 이 지방 토박이이다. 한달음에 달려온 이사장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서산터미널까지 편하게 이동하여 4시25분발 직행버스로 무사히 상경하였다.
8. 호리반도
초조하게 기다리던 11월 2일. 담당 의사를 만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입안에 침이 마른다. 수술 없이 그대로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형을 집행하는 법관처럼 담당과장(이용찬박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거역할 수 없는 불문율이 되고 말았다.
양성으로 판정된 관상선종의 직경이 1cm 로 생각보다 넓고,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니, 이번기회에 제거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래도 개복수술이 아닌 내시경으로 시술하게 되니, 그리 염려는 하지 말라고 위로를 한다.
12월 9일로 수술 날 자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마음이 착잡하다. 70평생을 건강하게 지탱해 왔으니, 그나마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마음을 추 수르기 위해 복지관도 다녀오고, 친구도 만나보지만, 남의 말처럼 어디 간단하게 넘길 일인가?
마음이 울적할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이 도보여행이다. 나의 전유물처럼 여겨오던 분신이었는데, 이마져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서산터미널에서 700번 좌석버스를 타고 도착한곳은, 지난 번 여행을 마쳤던 팔봉면 덕송리 정류장이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곳이라 낮 설지가 않다. 싱그러운 해풍이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답답하던 가슴이 활짝 열리고, 고향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는 안식처가 바로 이곳이다.
물 빠진 갯벌을 배경으로 키 낮은 토담집에, 새빨간 홍시가 주저리 열리고, 낙엽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겨운 곳. 가로림만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곳이 호리반도다. 양길리에서 솔감저수지까지 개의 혓바닥처럼 길게 내민 호리반도는 해안선을 따라 20km에 이른다.
삼면이 바다인 호리반도에서 유난히도 많이 볼 수 있는 작물이 산등성이를 온통 뒤덮고 있는 생강과 양배추 밭이다. 추수가 한창인 생강 밭 모서리에서 ‘생강저장토굴’을 발견한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비좁은 토굴이 수직으로 10여 m이고, 수평으로 저장 토굴이 연결된다고 한다.
깊숙한 땅 속이라, 토굴속의 온도가 14~15도에 70~80%의 습도를 유지하고 있어 일 년 동안 저장해도 신선한 품질을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생강에서 발생하는 가스에 중독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생강은 몸의 냉증을 없애고 소화를 도와주며, 구토를 없앤다고 동의보감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생강이 위를 자극해 소화를 촉진시키고, 몸에서 열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기운이 있어 생강차로 달여 먹거나, 조청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면, 감기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산등성이를 내려서면 ‘마지골방조제로’ 이어지고, 아라메길 쉼터가 조성돼 있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마을길을 따라간다. 산 모랑이 돌아설 때마다 새로운 비경이 펼쳐지는 갯벌. 이제부터 해안 길 답사가 시작된다. ‘썰물 때만 지나가라’는 문구가 친근감을 더하고, 호리항 앞바다에 떠있는 '쌍도'사이로 지난번에 다녀온 '안도'가 손에 잡힐 듯이 건너다보인다.
호리항을 지나 서쪽 해안가로 내려선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아담한 백사장이 나타난다.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수도권과는 다르게, 비닐조각하나, 망가진 어구하나 없이 드넓은 갯벌 속에서 발견한 청정지역의 숨겨진 보물단지다.
그만큼 외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주민들 역시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해안이다. 갯벌 체험장이 있는 범머리 해안으로 올라선다. 갯벌에서는 보지 못하던 주민들이 양파심기에 분주하다. 갯벌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지역특성에 맞는 농산물을 생산하여 부농의 꿈을 실현하는 마을이다.
해안을 따라 도착한 노루목은 점점이 떠있는 무인도와 해안의 절경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물 빠진 갯벌이 모두 굴 밭이다. 바위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굴 딱지들, 붉은색 염초들이 무리지어 자라는 이곳이야말로 가로림만을 살찌우는 문전옥답이다.
축조된 제방으로 육지가 되어 버린 장구섬, 건너편이 태안군 율도와 가제산(185m)이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팔각정과 호리종점 버스시간표까지 “해 뜨는 서산 행복한 서산”의 표어만큼이나 살기 좋은 서산이다. 제방을 따라 산길로 올라서면, 공사가 한창인 전망대로 이어진다.
갈림길에서 해안으로 600m를 다녀와야 한다. 울창한 숲길에서 시원한 공기로 폐활량을 늘리며 찾아간 전망대는, 땀 흘린 보상을 받고도 남을 만큼 멋진 경관이 펼쳐진다. 전망대가 완성되어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청정지역이 오염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것은 괜한 기우(杞憂)일까.
후줄근하게 땀을 흘리며 올라선 쉼터에서 바라보는 구도항이 또한 절경이다. 급하게 내려서는 해안 길. 이곳에 또 하나의 보물이 숨겨있다. 일명 “옻샘”이라 부르는 바다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밀물 때는 바다 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면 맑고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오는 소중한 보물이다.
생강수확이 한창인 아주머니들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서면, “가로림만 범머리길”도 끝이 나고 구도항으로 내려선다. 고파도 여객선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슈퍼에서 막걸리로 요기를 하고 “방구지제방”으로 올라선다. 서산이 자랑하는 “대하양식장”과 “팔봉산”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볼수록 아름다운 팔봉산. 작은 덩치에도 옹골차게 생긴 팔봉산이 있어, 서산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634번 도로가 지나는 솔감저수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634번 도로를 따라가면 태안군이다. 시간상으로는 태안군으로 이어가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아라메길을 따라 팔봉면사무소까지 진행하고 시내로 들어가 서산의 문화재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서산답사”의 대미를 장식하기로 한다.
저수지를 따라 가는 농로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무성한 갈대숲 에서 담방구질 하던 철새들이 인기척에 놀라 하늘위로 날아오른다. 제방을 따라 1.3km를 거슬러 오르면, 아라메길은 면사무소가 있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팔봉면사무소에서 40여 분간 기다린 끝에, 버스에 오르며 4구간으로 나누어 답사한 서산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9. 서산의 문화유산
삼한시대 지곡면 일대에「치리국국」이란 부족국가로 시작되어 고려 충열왕 10년(1284)에 처음으로「서산」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옥녀 탄금형(선녀가 비파를 타는 형상)의 길지인 옥녀봉아래 터를 잡은 서산은, 1989년 시로 승격한 이래 서해안시대의 황금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17만 인구가 터전을 일구고 있다.
서령관아(瑞寧官衙)는 조선시대 서산군의 관청으로 객관(客館), 동헌(東軒), 누정(樓亭)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관아의 문루(門樓)와 외동헌(外東軒)만 남아있다.
관아문(官衙門)에는 '서령군문(瑞寧郡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867년(고종4)에 당시 서산 군수로 있던 오병선(吳秉善)이 건립하고, 1979년에 완전히 해체 복원하였다. 서령이란 이름은 서산시의 옛 지명인 '서령부(瑞寧府)'에서 연유하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외동헌(外東軒)에는 서령관(瑞寧館)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외동헌(外東軒)은 공적인 일을 처리하던 곳이고, 살림을 맡아하는 내동헌으로 나눈다. 유형문화재 제137호인 서산객사(瑞山客舍)는 시청 앞 광장에서 남쪽으로 한 불럭 떨어진 곳에 있다. 원래는 관아 안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객사는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객사의 건물 중앙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관원들이 궁궐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곳이다. 서산객사에는 조선 제3대 태종 대왕께서 충녕대군(4대 세종대왕)을 대동하고 지방 순행을 하면서 3일간 머문 것을 기념하는 유허비가 있다.
충혼탑과 위안부소녀상, 지명유래비를 돌아보고, 옥녀봉을 오르는 길가에 황금빛 단군 조각상이 있다. 신라시대 화가 솔거가 그렸다고 전하는 단군조선 제1대 한배검님의 영정을 조각가 이홍수씨가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단군신화를 백과사전을 인용하여 살펴본다.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계셔,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됐다.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비롯해 그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서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며, 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제도하고, 교화하였다고 한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환웅이 신령한 쑥과 마늘을 먹게 하였던바, 결국 참을성이 부족한 범은 사람 되기를 실패하였으나 곰은 마침내 여자로 변하였다.
하지만 여자가 된 곰은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어 결국 환웅이 임시로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시다.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고, 그 씨와 뿌리들이 번성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손만대를 이룬 것이다.
서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옥녀봉 전망대로 올라간다. 전망대의 높이가 14.7m. 원형지붕이 비행접시 모양으로 생긴 부춘산 전망대를 빙글빙글 돌아 84계단을 올라간다. 도심지를 중심으로 천수만과 간월도까지 서산의 전원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층층계단을 내려와 동문동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을 찾아간다. 고려 말, 큰 사찰 터에 있는 대사동탑(大寺洞塔)이라는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다. 석탑의 높이가 5m이다. 본래는 5층이었지만, 현재는 삼층에 상륜부(相輪部)가 남아 있지 않다. 같은 장소에 있는 당간지주는 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간지주의 높이가 달라 한쪽은 3.96m이고, 다른 한쪽은 3.81m이다.
이밖에도 1406년(태종6)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서산향교(瑞山鄕校)와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대의 문신인 유숙(柳淑, 1316~1368)과 조선중기 인조~효종 대의 문신인 김홍욱의 위패를 모셔놓은 성암서원이 있지만, 돌아보지 못하고 16시 25분 버스로 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