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읍성 순례
일 시: 2016년 3월 26일
구 간: 동점문 - 남고문 - 나주관아 - 서성문 - 나주향교 -정열사 - 완사천 (8km)
나주읍성 순례
영신장에 여장을 풀고 보니 해는 아직 중천에 떠있고, 여관방에서 빈둥거리기도 어중간하여 거리로 나왔다. 먼저 찾아간 곳이 동쪽에 있는 東漸門(동점문)이다. 고려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읍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을 세우고, 둘레가 약 3.680m에 성벽의 높이 2.7m, 성안의 넓이가 974.390㎡로 우리나라 읍성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도 가장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위해 축조된 성이어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2층 누각에 옹성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남쪽에 있는 南顧門(남고문)이다. 서울의 남대문처럼 남고문교차로 가운데 버티고 있어서, 접근이 어렵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일제강점기에 4대문(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과 성벽을 모두 철거하여 기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93년 남고문을 시작으로 2006년에 동쪽의 동점문을, 2011년에는 영금문의 현판이 걸려있는 서성문을 복원하였지만, 아직까지 성벽과 북쪽의 북망문은 복원이 안 된 상태이다.
영산강의 터줏대감인 羅州(나주)는 백제 때 빌라군, 통일신라에서 금성군으로, 903년 羅州(나주)라는 이름으로 나주목이 되어 1896년 全南道廳(전남도청)이 光州(광주)로 이전할 때까지 千年(천년)동안 南道(남도)의 중심지였다. 全州(전주)와 羅州(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全羅道(전라도)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을 만큼 羅州(나주)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도시다.
나주객사의 정문인 望華樓(망화루)를 찾았다. 객사는 고려,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 한다. 안 마당으로 들어서면 重三門(중삼문)이 있고, 안쪽으로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錦城館(금성관)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금성관은 고려 초기부터 외국 사신이 방문하면 객사에서 묵으면서 연회도 갖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궁궐을 향하여 망궐례를 올리던 객관이다. 조선 성종 6년(1.475)에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이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금성관을 중심으로 동쪽의 동익헌(碧梧軒)은 정삼품이상의 관리가 묵던 객사이고, 서쪽의 서익헌(西梧軒)은 당하관(정3품 이하)이 묵던 객사이다. 금성관아에는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650년 된 은행나무가 오늘도 왕성하게 천수를 누리고 있다.
금성관을 나와 관아로 향한다. 관아는 목사가 집무도 보면서 살던 관사이다. 나주관아의 정문인 正綏樓(정수루)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6호로 지정된 건물로, 선조36년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정수루 2층에 있는 큰 북은 학봉 김성일 목사가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은 이북을 치라며” 설치한 신문고였는데, 지금은 서울의 보신각처럼 제야가 되면, 나주를 대표하는 산24곳과 하천 10곳을 합하여 정기를 모으는 행사로 정수루의 북을 34번 친다고 한다.
1892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관아는,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 담겨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한다. 지금은 옛 정취를 살릴 수 있는 민박집으로 개조하여 손님을 받고 있다. 또한 琴鶴軒(금학헌)담장에 있는 수령 오백년의 팽나무는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지는 고난을 당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지금도 목아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다음으로 찾은 곳이 나주목 文化館(문화관)이다. 錦城別曲(금성별곡) 제1장을 시작으로, 택리지 속의 나주 이야기와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 남도의 젓줄 영산강과, 행정구역상으로 상징되는 전국의 목을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나주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로서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이 이곳 나주를 접수하면서 견훤의 배후에 거점을 확보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날 아침 7시 30분 숙소를 나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서성문이다. 이곳도 2층 누각에 옹성으로 건축된 조선시대의 양식이다. 구한말(1894년) 동학농민군이 나주읍성을 공격할 때, 전봉준 장군이 서성문 앞에서 당시 나주목사였던 민중렬과 협상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한다.
서성문 바로 옆에 있는 나주향교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웅장한 규모다. 지방의 향교 중에서 이렇게 큰 것은 본적이 없다. 공자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과 명륜당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고 보물 제 394호로 지정된 대성전은 규모도 크지만,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나주향교 입구의 많은 비석들 중에서도 충복사유허비가 눈길을 끈다. 신분이 미천한 노비 우두머리 김애남이 정유재란당시 대성전의 위폐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유림에서 세운비석이라 한다. 대성전에는 수령이 500년 된 비자나무가 눈길을 끈다.
다음으로 찾아가는 곳이 동신대학교 옆에 조성한 정렬사다. 김천일의병장의 충절을 기념하여 선조 39년 나주의 선비들이 관내 월정보에 사우를 세우자 나라에서 정렬사라 사액하였다. 이듬해 선생의 위패와, 함께 순절한 장자 상건(증 좌부승지) 종사 양산숙(증 좌부승지)의 위패를 모셨고, 뒤에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임회(광주부사)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김천일장군은 국가의 존망이 위기에 처할 때, 수도 한양을 수복하기위하여 최초로 북상 진군한 의병장이었고, 전라, 충청, 경상, 경기 4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2년 동안 변함없이 활동하였으며, 선조26년 진주성전투에서 10만 왜병을 맞아 9일 동안 100여회의 전투 끝에 장열하게 전사한 의병장이다.
다음은 시청 옆에 있는 완사천이다. 급히 말을 타고 달려온 왕건이 목이 말라 우물터에 있는 처녀에게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건넨다. 사연을 물어본즉, 빨리 마시다 체할까봐 버들잎을 띄웠다고 대답한다. 총명함과 미모에 이끌려 아내로 맞이하니 훗날 장화왕후다.
나주오씨 문중에서 세운 기념비가 있다. 오씨 처녀는 나주호족 나부순의 딸이었는데, 왕건과 결혼하여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왕후가 된 후 낳은 아들이 고려 2대 왕인 혜종인데 첫번째 부인 신헤왕후가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므로 장자원칙에 의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유서 깊은 나주 읍성을 둘러보고 삼남길 11구간을 이어간다.
나주라씨 유허비
남고문
나주관아
나주관아 배치도
금성관 전경
나주의 상징 600년 된 소나무
아름다운 문패
서성문
나주 향교
북암문 조성공사
정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