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품세계/시산 반년간지

제 83호 - 시산지교를 꿈꾸며...

김완묵 2016. 3. 1. 05:04

출간일시: 2016년 2월 28일

              정기총회 를 맞이하여


국토순례


                                                 삼남길 중에서

                                         

경기 제6(화성효행길)

수도권에서는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한 대중교통이다. 수원역에서 마을버스(6-1)로 환승하여 가안동 입구에서 내리면 6구간이 시작되는 배양교는 그리 멀지가 않다. 우선 황구지천을 찾아간다. 잠시 후 서호천과 합류하여 더욱 큰 물줄기를 이루는 황구지천에 배양교가 걸려있다.


 

도심을 가로지르며 수원의 허파구실을 하는 황구지천은 상류지역의 대단위 택지지구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인해, 농업용수로도 사용하기 어려운 시궁창으로 변하고 말았다. 의왕시 왕송저수지에서 시작하여 평택시 서탄동에서 진위천(振威川)과 합류하는 길이가 32.5km에 이르는 하천이다.


 

배양교를 삼남길 6.7구간으로 정한 것은 수원과 화성의 경계지점이기 때문이다. 수원시 평리동과 화성시 봉담면이 경계를 이루는 배양교는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교량이지만, 새로운 도로가 확장되고 대규모 교량이 건설되면서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배양마을 돌담길에는 봉숭아와 채송화, 백일홍까지 우리 할머니들의 사랑을 받아온 화초들이 삼남길의 정서와 어쩌면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어린 시절의 향수 속으로 흠뻑 빠져든다.

 

 

화성효행길은 정조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지나는 구간이다. 정조의 효심이 꽃을 피우는 융건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렀다.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니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격해진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낭자하게 피가 흘러내린다. 살려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단호하게 명을 내리고 만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강등하여 뒤주에 가두어라.”

 

 

어려서부터 서예와 무예에 뛰어난 세자는 영조를 대신하여 정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였고, 나경연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영조는 자식을 죽인 비정한 아비로서, 간장이 끊어지는 슬픔 속에서도 사도(思道)라는 시호를 내린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899(광무3)장조로 추존하였다.

 

 

문무를 겸비한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에 힘썼으며 장용영을 설치하여 수원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를 타파하다가 뜻을 펴지도 못하고 49세의 나이로 비운을 맞고 만다.

 

 

건릉은 조선22대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6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하였다가, 21년 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김조순의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정조의 능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건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융건릉은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왕릉이다. 효종 이후 사라졌던 병풍석, 봉분의 인석에 만개하지 않은 연꽃봉우리는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한을 달래주는 모습을 연상하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의 곤신지(연못)는 아버지를 사모했던 정조의 마음이라고 한다.

 

 

경내를 빠져나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용주사다. 경기문화재자료 제35호인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854)에 세운 갈양사(葛陽寺)였다.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된 것을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서 시주 8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 공사 끝에 완공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난 뒤,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화산 저수지를 지나며 정조와의 인연도 끝이 나고,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를 거치는 삼남길이 열린다. 이 길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귀양가는 옛 선조들의 애환이 묻어나는 길이요, 삭탈관직을 당한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을 위해 남하하던 길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을 찾아오던 백면서생들이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수 백리를 걸어왔던 바로 이 길이다.

 

 

경기 제7(독산성길)

황구지천을 가로지르는 세마교에서 화성효행길도 끝이 나고 독산성길로 이어진다. 독산성길은 세마교를 건너 오산화성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서오산 요금소를 지나게 된다.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화성이야말로 고속도로천국이다. 오산화성고속도로 또한 서오산 분기점에서 평택화성고속도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봉당동탄고속도로와 교차한다.

 

 

황구지천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봉우리가 독산성이다. 2백여m 남짓한 높이지만, 광활한 오산평야를 굽어보는 독산성은 사방 어디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평지돌출 형이다. 고속도로 밑을 지나 독산성길을 따라 진행하면 화성과 오산의 경계 표지판이 보이고, 왼쪽의 솔밭 길로 접어든다. 하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속으로 삼림욕장이 이어진다.

 

 

걷기와 건강이 함수관계라면 숲속에서 쏟아지는 피톤치드는 우리혈관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청소도구라 할 수 있다. 울창한 숲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걸어보면 심폐기능이 강화되어 오장육부가 튼튼해진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다.

 

 

완만한 숲길에 깔끔하게 조성한 산책길, 휴일을 맞아 인근 주민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웃음꽃을 피워낸다. 이름도 아름다운 보적사는 담쟁이 넝쿨이 늘어진 암문을 들어서면서 경내가 펼쳐진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면면이 이어오는 보적사는 규모가 작은 아담한 사찰 이다.

 

 

보적사(寶積寺)는 백제의 아신왕이 독산성을 축성할 때 전승(戰勝)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보적사(寶積寺)란 이름은, 보릿고개로 끼니를 연명하기 어려운 노부부가 남아있는 한 줌의 쌀을 바라보며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곡간에 쌀이 가득 쌓여있는지라, 공양으로 보화가 쌓인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寶積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천년고찰을 자랑하는 보적사가 고풍스러움보다는 화려함이 돋보이는 사찰이다. 대웅전에 있는 삼존불을 2006년에 개금불사(改金佛事)하면서 새로 단청을 하였다고한다. 개금이란 불상에 금칠을 입히는 것을 말하며, 개금이 끝난 뒤에는 엄숙하고 장엄한 법회를 거행하게 되는데, 수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부처님의 은덕을 찬양하고 소원을 비는 것을 개금불사(改金佛事)라 한다.

 

 

보적사를 뒤로하고 산등성이로 올라서면 세마대 정자가 반겨준다. 때마침 이곳을 찾은 중학생들을 상대로 역사탐방 해설사의 진지한 설명이 이어진다. 왜군 수 만 명이 독산성을 지나다가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물 한 지개를 성안으로 올려 보내어 조롱하였다.

 

 

이에 권율장군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위로 끌고 올라가 하얀 쌀을 말에 끼얹으며 목욕시키는 시늉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말에 목욕을 시킬 정도로 물이 풍부한 것으로 착각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곳을 세마대(洗馬臺)라 부른다는 것이다.

 

 

세마대를 뒤로하고 독산성에 올라선다. 가슴이 탁 트이는 독산성. 사방 백리길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전망대라. 북쪽으로 동탄신도시가 사막의 신기루처럼 빌딩숲을 이루고,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시가지의 조형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방향을 바꾸어보면 질주하는 고속도로와 오산시가지, 그 너머로 송탄, 평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수도권지역의 팽창이 천안까지 이어진다.

 

 

독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도성을 지키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각광을 받게 된다. 15937월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장군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독산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치면서 기선을 제압하고, 이듬해 911일 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 만에 군. . 민이 합심하여 성을 새롭게 수축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독산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정에서는 선조35(1602)에 보강하고, 정조20(1796)에 수원성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문(山門)에는 禿山城洗馬臺山門(독산성세마대산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산문(山門)이란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출입문을 말하며,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들어서기 위해 통과하는 문의 순서를 일컫는다.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文), 해탈문(解脫門)등을 일컬어 산문(山門)이라 한다.

 

 

산문을 뒤로하고 세마동 마을길로 접어들면, “동탄어린이천문대를 만난다. 어린이에게 우주의 무한한 꿈을 심어주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는 천문대는 우리에게 생소한 세계이면서도,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신비의 대상이다. 봉당동탄고속도로를 건너기 위해 토끼 굴을 찾아 활등처럼 휘어진 마을길을 돌아가야 한다.

 

 

여계산 자락을 파고들면 또다시 울창한 숲속이다. 3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태양을 피해 그늘 속으로 들어서면 숲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솔바람 속에서도 등줄기에서 땀이 흥건하도록 가쁜 숨을 몰아쉬면 여계산(150m) 정상이다.

 

 

정상에는 산불 감시초소가 있고 각종운동시설과 벤치가 놓여있다. 한일월드컵을 개최하고 10년 만에 우리는 놀랄만한 성장을 하였다. 선진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화장실문화에서부터 강변의 둔치를 이어주는 자전거도로, 전국의 산야마다 둘레 길을 조성하고 도시는 물론이요, 농촌까지도 삼림욕장을 개설하여 심신을 달래주는 수련장이 펼쳐지는 꿈의 동산이 아닌가.

 

 

여계산을 내려서면 숲속의 궁전이 펼쳐진다. 오산시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세교신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금암휴먼시아 동산이다. 10단지까지 조성된 아파트 숲속에는 이색적인 고인돌공원이 반겨준다. 우리조상들이 삶의 터전을 이룬 고인돌문화는 움막 속에서 생활하던 선사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강화도와 고창의 지석묘가 유명하다. 우리나라는 한 장소에서 수십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되는 집단생활을 했던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라 한다. 혈연으로 형성된 집단은 조상을 숭배하고, 이는 생명력과 불멸의 의미를 지닌 고인돌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경기 제8(오나리길)

오산대역을 나오면 정면으로 보이는 울창한 숲이 경기도립 물향기수목원이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지만, 개장시간전이라 입장이 불가하다. 오늘 일정이 20km가 넘는 구간이라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뜨고 만다.

 

 

맑은 물이 흐르는 수청동(水淸洞)의 이미지에 맞추어 물을 좋아하는 식물을 위주로 습지생태원, 수생식물원, 호습성식물원 등의 주제와 한국의 소나무원, 미로원, 유실수원, 중부지역자생원 등 다양한 19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1,600 여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는 경기도립수목원을 200654일 개장하였다고 한다.

 

 

다음 행선지인 궐리사에 도착하니 사당을 관리하는 노인 한분이 열심히 청소를 하고 계신다. 공손하게 인사를 나누고 관리인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본다. 논산의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공자를 모시는 궐리사는 경기도 기념물 147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조선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선생이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세운 향교였으나,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공서린선생은 중종2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 대제학을 지내고,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칠 때 북을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독려했는데, 선생이 죽고 나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에서 바라보니 새들이 울면서 은행나무로 모여드는지라, 괴이하게 여겨 가까이 가서 보니 말라죽은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났다고 한다. 정조 17년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산동성 곡부라는 마을이름을 따서 궐리라 하고, 사당이름을 궐리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원군 시절 철폐령으로 없어진 사당을 1900년에 다시 세우고,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시고 있다. 5백년의 역사를 지켜온 은행나무와 3백년 된 향나무를 중심으로 하마비(下馬碑)옆으로 5기의 공덕비가 있고, 삼도를 따라 성묘를 들어서면 영정을 모신 사당 있다. 좌측으로 돌아서면 산동성에서 모셔온 공자석상을 만나게 된다.

 

 

궐리사를 돌아 나와 청학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서면 오산천과 만난다. 오산천(烏山川)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석성산에서 발원하여 신갈저수지와 오산시를 지나 평택시 서탄면 적봉리에서 진위천과 합류하는 길이가 22km에 이르는 하천이다.

 

 

오산천을 중심으로 20여만 명이 살아가는 오산시는 평택시와 화성시를 경계로 하고 있다. 고구려시대는 매홀군, 신라 때는 수성군, 고려에서 수원군으로 부르다가 1941년 수원군 오산면으로 등장하여 1989년 오산시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산천 고수부지에 자리 잡은 오산시환경사업소를 찾아간다. 주민들이 기피하는 시설 중에서도 가장 꺼려하는 곳이 쓰레기소각장과 하수종말처리장이다.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생활필수품이면서도 필요 없다 싶으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우리네 야박한 인심이다. 하지만 오산시에서는 시민들이 버리는 오폐수를 깨끗이 정화하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었으니 그 이름도 아름다운 맑음터공원이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이 공원의 상징인 전망타워다. 3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원형전망대는 4층으로 높이가 무려76m에 이른다. 1층은 수중세계, 2층은 지상, 3층은 숲속, 4층을 하늘세계로 조성하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너무도 시원하다. 악취 풍기던 오수처리장은 땅속의 구조물속으로 숨어들고, 싱그러운 숲과 아름다운 꽃길로 조성한 지상에는 구름다리와 산책로를 조성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물향기수목원, 고인돌공원, 궐리사, 독산성에 이어 오산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소가 탄생했으니 맑음터공원이야 말로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삼남길 제8구간 5.3km를 마감하고, 9구간 진위고을길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