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호 - 詩山 20년 사화집
일 시: 2015년 12월 12일 발행
65호 출품작
칠갑산(七甲山-561m)에 올라서
장 소: 충남 청양군: 정산면, 장평면, 대치면
입동을 지나며 수은주도 영하로 내려가고 동장군이 기세를 떨치는 이른 새벽.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운 것은, 지난 7월 부상당한 이후로 4개월 만에 장거리 산행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청양의 칠갑산은 아주 편안하게 등산을 할 수 있는 부드러운 산세가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키지만, 큰 사고의 후유증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기에 아기 걸음마와 같이 두려움이 앞선다.
경기 칠장산(492m)에서 시작하는 금북정맥이 서산의 안흥진까지 이어가던 중, 국사봉(488m)과 금자봉(324m)사이의 410봉에서 분기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산줄기가 한치 재를 넘어서면서 우뚝 솟아오른 산이 칠갑산(561m)이다. 칠갑산은 “충남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높이에 비해 산세가 수려하고, 천년고찰 장곡사(長谷寺)가 자리 잡고 있어 197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대중가요‘칠갑산’으로 일반인에게 더욱 잘 알려진 산이다.
평일임에도 자연경관을 찾아드는 인파로 주차장이 떠들썩하고 서둘러 산행 길로 들어선다. 가지런히 정비된 계단길이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가슴깊이 간직하며 처음부터 고된 신고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지금이야 450여 m의 터널이 관통하고 있어 고개 정상에는 한가롭기 그지없지만, 청양과 공주를 왕래하자면 한치 재를 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기에 고개마루에는 사시사철 인파로 성시를 이루고, 이 고장의 상징물인 조형물을 한데 모아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고 있다.
칠갑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북쪽의 山 斜面에 자리 잡은 면암 최익현의 동상이다.
근세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면암선생의 고귀한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일행들의 뒤를 따른다. 한치 고개의 고도가 해발 310m. 정상이 560m로 3km 거리에 표고차가 고작 250m에 불과하고,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널찍한 임도는 평지수준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조금은 실망감이 앞선다.
길옆에 있는 칠갑산의 유래비를 살펴보면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地,水,火,風,空,見,識) 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七甲山이라 경칭하여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충청남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이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이다.
무성한 송림사이로 임도를 따라가면, 정면으로 하얀 탑이 나타난다. 이 고장 출신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기리는 취지로 세운 충혼탑이다. 주차장 입구에 있는 월남참전 기념탑과 함께, 충효의 고장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상징이다. 잠시 후, 왼쪽으로 칠갑산 천문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염이 심한 도시에선 밤하늘의 별이 실종 된지 오래지만, 시선한 공기가 흐르는 산정에서 바라보는 별자리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화속의 요정이 아닌가?
산이 수려하다는 것은 능선과 계곡, 기암과 수림이 자연적으로 조화롭게 형성된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칠갑산은 커다란 바위하나 없는 전형적인 육산으로, 부드러운 능선과 포근하게 안기는 행복감에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 충족되어 100대 명산으로 손색이 없다. 지금이야 모든 잎 새를 떨 군 앙상한 나무들이지만, 봄이면 대치터널 위의 옛 도로변을 따라 70 - 80년생의 벚나무가 벚꽃 터널을 이루고, 정상에 이르는 임도 변을 따라 화사한 벚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한다.
산 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임도는 주위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고, 2층 정자가 있는 자비정에 올라서면 조망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자비정을 지나며 아름드리 소나무와 굴참나무가 공존하는 숲길이 펼쳐진다. 전위 봉 몇 개를 넘고서야 정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곧 바로 정상진입이 시작된다. 없어도 될 로프를 따라가면 수백 계단이 하늘 끝까지 이어진다. 어느 곳이고 정상은 녹녹하게 볼일이 아니다. 다리가 뻣뻣하게 계단을 오르는 동안 심하게 토해내는 숨소리가 고막을 파고든다.
칠갑산 정상. 56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서해안의 지형이 낮은 평야지대라. 주위에 대덕봉(472m), 명덕봉(320m), 정혜산(355m)을 압도하는 전망대로 손색이 없어 칠갑산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 있다. 널찍한 정수리에는 대형헬기장을 중심으로 7척 장신의 표지석과 삼각점, 산불감시초소와 통신철탑이 있고 휴식공간에는 벤치들이 마련돼 있다.
사방팔방 막힘이 없는 정수리에서 바라보는 산세는 불가사리 형상으로, 5가닥의 산줄기가 방사선을 이루고 있다. 한치재에서 올라오는 산장로와 구름다리가 있는 천장로, 백운골에서 올라오는 도림로, 삼형제봉으로 내려서는 장곡로, 장곡사로 내려서는 사찰로가 균형을 이루어 동남쪽의 잉화달천(仍火達川), 동북쪽의 잉화천(仍火川), 서남쪽의 장곡천(長谷川)과 지천천(之川川), 서북쪽의 대치천(大峙川) 등의 물줄기가 금강으로 유입된다.
북쪽으로 대덕봉(472m)과 마루금에는 금북정맥의 국사봉(488m)이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동쪽으로 계룡산의 연봉들이 아스라이 하늘금을 이루는 가운데, 남쪽으로 정해산(355m), 망월산(355m), 축융봉(455m), 감봉산(465m)으로 돌아 서해안의 진산인 성주산(680m), 문봉산(600m), 성대산(624m), 오서산(790m)으로 충남의 알프스라는 명성에 걸맞게 겹겹이 포개진 산자락을 타고 계곡이 흐르고, 청정옥수의 맑은 물이 금강으로 모여든다.
한겨울임에도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칠갑산은 거대한 수림이 장관을 이룬다. 삼형제봉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내려선 안부에서 서쪽의 사찰 로를 따른다.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송림이 하늘을 뒤덮고, 경사진 비알에는 나무 등걸이 들어나 걸음걸음마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키 큰 소나무 아래로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이른 봄이면 화사한 꽃망울을 터트리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황홀해진다. 경치가 수려한 장곡천 골짜기의 절벽 위에는 청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장곡사가 자리 잡고 있다.
장곡사는 돌탑하나 없는 절이지만 2개의 대웅전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이다. 보물 제162호인 상대웅전과 보물 제181호로 지정된 하대웅전이다. 신라 문성왕 12년(850년) 보조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장곡사는 공주의 마곡사와 예산의 안곡사(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와 함께 충남의 삼곡사(三谷寺)라 한다. 일주문을 내려서면 칠갑산이 자랑하는 장승공원이 펼쳐진다.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은 콩밭 매는 아낙네의 황금동상이다. 콧날이 오뚝한 촌부의 미모가 너무 뛰어난 것도 흠이 아닐 런지 ㅎㅎㅎ.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신장이 10m요, 무게가 14톤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최대의 장승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고, 오방장승과 변강쇠의 남성 심볼이 하늘을 향해 용솟음치는 모습은 수 백 개의 장승중에 으뜸이라. 국태민안과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장승을 모시는 인근마을의 풍습을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의 산행이 6km의 짧은 거리에 유순한 길이지만, 무사히 완주를 하고 보니 여름 내내 부상의 고통 속에서 다시는 산을 찾지 못할까봐 노심초사를 했지만, 터널을 빠져나온 해방감으로 마음이 홀가분하다. 강경의 젓갈시장까지 순례하며 새로운 삶을 기약한다.
신작 수필
삼남길 중에서 경기 제3길(모락산길)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호수삼거리에서 문화예술로를 따라가는 중에, 뒷골삼거리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잘록한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임영대군의 사당이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1418년~1469)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근검하여, 아랫사람을 대하는데도 교만하지 않고 자상했다고 한다. 안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을 한 임영대군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사물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 1445년에는 총통을 제작하는데 직접 참여하여 화차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사당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계단에는 아담한 연못이 있고, 마을길을 돌아서면 사당에서 남쪽으로 200 여m 떨어진 곳에 임영대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돌계단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묘역은 3단으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임영대군의 둘째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페하고, 왕위에 오른 후 셋째형인 안평대군마저 죽임을 당하는 세상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모락산 자락의 토굴 속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능안 마을 가는 길엔 토속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차량도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 식당들 중에서 가야금식당이 눈길을 끈다. 심금을 울리는 가야금소리가 가는 발길을 부여잡는데, 무심하게 뿌리칠 수가 있는가. 한정식으로 배를 불리고, 산길로 접어드니 세상이 모두 내 것인 것을. 오호라 즐거운 인생이어라.
울창한 숲속에 잘록한 허리, 서낭당의 돌무더기까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는 10 여 년 전, 백운산에서 모락산으로 종주 길에 지나간 길이다. 옛 추억을 떠 올리며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던 리본을 찾아보지만,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가 있는가.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남쪽의 오매기 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사색의 길이다. 수양대군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오백년 전이나, 세월호의 참사로 온 나라가 초상집처럼 슬픔에 잠겼어도 울창한 숲에 가린 하늘이 보이지 않아 임영대군이 천수를 누린 곳이 예아닌가. 수 백 년을 지나온 고목나무가 겉껍질만 남긴 채 속이 텅 비어 있어도 사랑의 표시로 ♡를 그려내고 있으니, 마음이 끌리는 곳이 오매기 마을이다.
오매기 마을은 용머리, 목배미, 사나골, 백운동 등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조선시대에는 오막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화류씨를 비롯하여, 진씨, 노씨, 마씨, 문씨가 움막을 지어 정착하므로 오매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용하던 오매기 마을을 벗어나면 모락산 자락(터널)을 빠져나온 차량들이 과천과 의왕을 이어주는 도시고속도로위를 질주하고 있다.
이제는 김징의 묘를 찾아가는 길이다. 고속도로 굴다리를 빠져나가면 조용한 숲속 길이다. 시원한 그늘속이 좋아 무작정 걷다보니 김징의 묘를 지나치고 말았다. 애석한 일이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고,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만다. 김징(金澄, 1623~1676)이란 인물은 조선후기 문신이다.
그의 아들로부터 시작하여 100년간 6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인 청풍김씨 세거지라고 한다. 장남 김구-우의정, 손자 김재로(金在魯)-영의정, 증손 김치인(金致仁) -영의정, 차남 김유(金楺)-대제학, 손자 김약로(金若魯)-좌의정, 손자 김양로(金陽魯)-우의정, 손자 김상로(金尙魯)-영의정 등 영조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다.
의왕요금소에서 나오는 고소도로 밑을 통과하여 모락산 기슭에 있는 현충사로 향한다. 6.25전사에 빛나는 모락산 전투(慕洛山 戰鬪)는 1951년 1월 30일부터 2월 3일까지 한국군 1사단 15연대와 중공군1개 연대 간에 벌어진 전투다.
수원에서 북쪽으로 지지대고개를 넘어서면 좌전방에 수리산, 우전방에 백운산과 모락산이 우뚝 솟아있다. 안양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할 중요한 지역이다. 피아간에 격전지를 사이에 두고 4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중공군 663명을 사살하고, 90명의 포로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린다. 한편 한국군도 전사 70명에 2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 흥망성쇠(興亡盛衰)란 비일비재한 일이 아닌가. 숨 가쁘게 돌아본 6.25전사를 뒤로하고 사근행궁(肆覲行宮)으로 향한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성으로 옮기는 중에 경기감사에게 이르기를 이곳 노인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라하고, 행궁을 지으니 이곳을 사근행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근행궁 표지석이 고천동 주민센터 앞마당에 있다. 지금의 고천동 주민센터 자리는 옛날 사근행궁 터라고 한다. 의왕의 중심지이자 현릉원으로 능행하던 정조대왕이 쉬어가던 곳이기도 하다. 행궁 터였던 이 자리가 예전에는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8차선 경수대로를 건너 의왕시청방면으로 진입한다. 인구16만 명의 의왕시는 경기남부 교통 요충지이자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는 고장이다. 과거에는 의곡면과 왕륜면에 속하던 의왕시가 1914년 행정개편으로 의곡면과 왕륜면을 합하여 수원군 의왕면이 되면서 현재의 지명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지대고개 아래 삼태기처럼 오목한곳에 골사그네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산세가 험하고 맹수가 많아 사람들이 안주하기를 꺼려하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경주이씨, 경주배씨, 마씨들이 살기시작하며 마을을 형성하였다. 1970년 식목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서 직접 식목일 행사를 거행하고,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마을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서면, 수원시둘레길과 한남정맥, 삼남길이 함께 어울리는 의미 깊은 길을 만난다. 한남정맥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한남금북정맥으로 분기하여 내려오다 칠장산(492m)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한강남쪽과 경기서해안지역을 분계하는 마루금을 한남정맥이라 하며 구봉산(455m), 문수봉(404m), 함박산(349m), 석성산(471m), 광교산(582m), 백운산9564m), 수리산(395m), 소래산, 계양산(395m), 가현산(215m)으로 북서진하여 강화대교 전 우측의 문수산 보구곶리까지 173km의 여정을 일컫는다.
어제 내린 비로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와 미세먼지가 씻겨 내리고 싱그러운 아침공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지지대비와 만난다. 지(遲)자를 파자하면 가파른 언덕을 소 한 마리가 힘들게 올라간다는 뜻으로 “더디다”로 표현한다고 한다.
정조가 화성을 떠나 환궁할 때 이 고개를 넘으면 한동안 다시 어버이의 묘소를 볼 수가 없음을 한탄하며 얼마를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여 행차가 너무 지지하다하여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지지대고개의 옛말도 역사 속에서 아른거리고, 삼남길 3구간(모락산길)도 이곳에서 마감한다.
경기 제4길(서호천길)
정조대왕이 부왕인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가는 여정에서 가장 돋보이는 구간이 지지대 고개이다. 남태령을 넘어온 이후 가장 험준한 지지대고개는 헌릉원을 바라볼 수 있다는 기쁨과 돌아오는 길에서는 더 이상 어버이의 묘를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서려있는 곳이다. 해서 수원에서 하룻밤을 묵어 갈수 있는 행궁을 짓고, 수원화성을 쌓아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꽃피우게 된다.
정조는 조선시대 어느 임금보다도 궁궐 밖 나들이가 많았던 임금이다. 재위24년 간 66회에 걸쳐 행차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縣隆圓)참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1795년(정조19년)이 을묘년(乙卯年)이므로 흔히 "을묘원행"으로 불리는 이 행차는 어머니의 회갑과 아버지의 사갑을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참배를, 살아있는 어머니에게는 효도를 할 수 있는 길이었다.
조선개국 이래 최대의 국가적인 행사로 평가받는 정조대왕화성행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는 당대의 궁중화원인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 등이 정조의 어명에 따라 2년에 걸쳐 완성한 가로 15m, 세로 18m에 이르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청계천에 도자기 벽화로 되살아나 그 당시의 장엄한 행렬을 엿볼 수가 있다.
지지대비각에서 울창한 숲속을 빠져나오면 지지대 쉼터에 이른다. 1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효행공원에 있는 정조대왕의 동상을 참배하려고 했지만, 도로 중앙으로 육중한 펜스가 있어 포기하고 만다. 삼남길 4구간이 시작되는 쉼터에는 아침산책 나온 시민들로 주차장이 만원이다.
각종 오염물질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자연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틈만 나면 산을 찾아 시원한 그늘 속에서 심신을 단련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지지대 쉼터에서 시작하는 삼남길은 돌담을 휘 감고 있는 담쟁이 넝쿨을 지나면서 싱그러운 주말농장이 펼쳐진다. 상추에 옥수수, 고추까지 농부들의 정성으로 알알이 영글어가고 있다.
화선봉 입구를 빠져나오면 영동고속도로가 신나게 질주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거대한 장벽이 되어 단절의 아픔 속에 숨통 트이는 토끼 굴을 빠져나오면 이색적인 박물관을 만난다. 해우재(解愚齋). 근심을 푸는 거푸집이라는 뜻으로, 사찰에서 화장실을 말하는 해우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원 민선1. 2기 시장을 지내고,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고 심재덕선생의 피와 땀이 서린 결정체이다. 고인은 화장실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한국화장실협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1999년에는 어릴 적 자라온 고향집을 화장실 문화관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하는 열정을 보였다.
화장실은 양옥과 아파트 문화가 만들어낸 이름이고, 뒷간, 측간, 정랑, 통시, 변소, 매화간, 해우소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는 옛말과 같이 우리의 생리현상을 해결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장소가 아닌가. 하지만 고약한 냄새로 멀리하다가 화장실 문화가 시작되면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우재에 도착하면 가장먼저 시선을 끄는 것이 변기모양의 기념관이다. 순백색의 변기 안으로 들어가면 정갈하게 꾸며진 전시물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한 순간이라도 건너뛸 수없는 생리를 해결하는 장소임에도 무심코 지나친 우리에게 화장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곳이다.
정원으로 나오면 각종 화장실의 변천사들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의 통시변소를 비롯하여 남자들이 사용하던 호자, 귀족여인들이 사용하던 노둣돌, 궁중에서 사용하던 매화틀, 일반 서민들이 사용하던 뒷간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최초의 공중변소인 왕궁리 화장실은 백제무왕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시원하게 뒤를 보고난 후련함으로 해우재를 나와 이목사거리를 지나면 서호천을 만난다. 지지대고개에서 출발한 삼남길이 화성행궁으로 이어지는 것이 정설이겠지만, 도심의 복잡함과 해우재라는 이색적인 박물관을 참관하고 서호천의 물길을 따라 가는 코스로 변경한 것이다.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수원은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강을 끼고 있지 않은 도시다. 그러하기에 드넓은 수원평야를 살찌우기위해 많은 저수지를 막아 신대저수지와 원천저수지에서 발원한 원천리천, 광교저수지에서 발원한 수원천, 왕송저수지에서 발원한 황구지천과 지금 걷고 있는 파장저수지에서 발원한 서호천이 도심지의 각종오물을 걸러내는 허파 구실을 하고 있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서호천은 길이가 10여km에 이르는 작은 하천이지만, 하천 되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붉은 아스콘의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시원하게 소통하고, 수초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아닌가 싶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수량도 많아지고, 25개나 되는 다리가 서호천에 걸려있어 수원의 중심부를 통과한다. 1호선지하철이 지나는 풍림아파트를 지나면, 울창한 숲속의 여기산이 나타난다. 수원이 자랑하는 백로 서식지이다. 백로란 신비스런 동물이어서 아무 곳이나 함부로 둥지를 틀지 않는다.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수 백 년 된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깨끗한 2급수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로 새끼를 키워내는 영물이 아닌가. 울산대숲의 백로와 수원 소나무 숲의 백로는 주변 환경이 되살아나면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온 반가운 손님이다. 서호에 도착하며 4구간 서호천길을 마감하고 5구간 중복들길이 시작된다.
경기 제5길(중복들길)
화서역 서쪽으로 서호공원이 펼쳐진다. 서호는 18세기 정조가 수원축성과 함께 가뭄극복을 위해 축성한 인공호수라고 한다. 2km에 이르는 둘레 길을 조성하여 벚나무와 개나리, 연산홍으로 치장하여 수원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제5구간 중복들길도 호수 둘레 길을 따라 이어진다.
호수가운데 있는 섬 하나가 시선을 끈다. 서호낙조(西湖落潮)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다. 울창한 수림 속에 새들이 천국을 이루고, 제방으로 올라서면 “꼬리명주나비보존지역”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호랑나비과에 속하는 꼬리명주나비는 먹이식물인 쥐방울덩굴(멸종위기식물)이 자라는 진위천을 중심으로 서식하고 있다. 하지만 하천변 개발과 함께 제초제의 남용으로 쥐방울덩굴이 멸종위기에 있어 꼬리명주나비를 보존하기위해 영복여자고등학교에서 복원관리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 축만제(祝萬堤)라는 표지석이 반겨준다. 축만제는 화성의 동서남북에 설치하였던 4개의 인공호수중에 하나로 정조23년에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했다고 한다. 제방아래는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하여 조선후기 농업생산기반의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 받으며 지금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시험 답으로 사용하고 있다.
호수남쪽으로 돌아서면 항미정이 반겨준다. 중국 항주의 이름난 정자를 본받아 세운 항미정(杭眉亭)은 1831년 당시 화성 유수였던 박기수가 건립한 정자다. 송나라의 소식이 항주의 태수를 지낼 적에 서호가 서시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칭송한 것을 본받아 화성의 서호 남쪽에 정자를 짓고 항미정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호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천변으로 자전거도로가 조성되고 제방 길에는 노란 금계국이 천국을 이루고 있다. 수원의 서쪽을 지나는 하천을 따르면, SK그룹의 고향을 지나게 된다. 우리나라 5대재벌로 성장한 SK는 1953년에 창업주인 최종건회장이 선경직물을 인수하여 직기20여대로 시작한 것이 오늘날 수백조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수원의 근원은 파장동과 대야미동에서 구석기 유물인 곧은 날 긁개와 주먹 도끼 등이 발견되면서 수원지역에서 구석기(8,000년전)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다수의 고인돌과 서둔동 여기산에 집자리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3,000-5,000년 전)에서 철기시대(2,000 -3,000년 전)에 집단으로 거주하였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일찍이 수원은 백제영토였으나,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따라 한강유역과 그 주변인 수원지역을 확보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수원의 이름을 ‘매홀(買忽)’이라 하였다. 이후 수원지역은 백제와 신라가 번갈아 점령하면서, 신라가 통일한 뒤로 경덕왕16년에 수원을 ‘수성군(水城郡)’으로, 고려원종12년에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변경하면서 수원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 제일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수원역에서 굴다리를 빠져나와 화성으로 연결되는 43번 국도가 지나는 중보교를 지나면 그 옛날 수인선이 지나던 철교가 남아 있다. 높이가 10m남짓한 철교 위를 지나는 동안 아슬아슬한 스릴을 맛본다. 수인선은 선로의 폭(762mm)이 좁은 협궤 열차였다.
화성의 소금과 이천의 쌀을 수송하기위해 총연장 52km에 이르는 수인선을 1937년 개통하여 운행하다가 산업화와 교통의 발달로 1955년 폐선 되어 안산시 중앙역에서 고잔역까지 2km에 걸쳐 아련한 추억을 간직 한 채 남아있다.
수원비행장이 시작되며 기름진 중복들길이 이어진다. 삼남길을 답사하는 아가씨들이 말을 걸어온다. 심심하던 차에 말동무삼아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삼남길에 관심을 갖고 다음 달부터 땅 끝 마을 해남에서 시작하여 완주를 목표로 걷고 있다는 야심찬 포부를 전해준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백만대군(百萬大軍)이 따로 없다. 강과 산, 해안을 따라 옛길을 답사하는 나에게 새로운 동지가 나타난 셈이다. 그동안 경험담을 들려주며 가상한 용기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같은 직장에 다닌다는 김희승과 송길현이 그 주인공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끝없이 펼쳐지는 곡창지대,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도시의 팽창으로 수원산업단지가 야금야금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오늘의 목적지가 배양교지만, 교통편을 감안하여 수원시위생처리장이 있는 기안교에서 산업단지로 돌아와 중복들길을 마감한다.